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영승 - 민영완2023-02-0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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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승(閔영승)일등병

"민영승 일등병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1년 1월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는데, 민영승 일등병은 제8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승 일등병의 소속부대인 제8사단은 소수로 판단했던 적이 중공군 대부대라는 사실을 미 제10군단장에게 보고했으나, 묵살되자 고립된 상태에서 주포리로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제8사단은 많은 피해를 입고 육군본부 직할로 전환하여 대구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후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민영승 일등병의 제8사단은 4월 3일 제11사단과 공비토벌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대구에서 전주로 이동했다. 4월 16일부터 19일까지 금산지구공비토벌작전을 종료하고 5월 4일부터 11일까지 국사봉지구와 부안지구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민영승 일등병과 제8사단 장병은 호남지구공비토벌작전을 완료하고, 5월 19일부터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평창-홍천-인제 등지에서 미 제10군단 예비로 지역경계 및 훈련을 실시하다가 7월 20일 강원도 원통리 북방 노전평지구의 제5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했다. 민영승 일등병은 8월 9일부터 9월 18일까지 인제군 서화 계곡의 노전평 부근에서 3차에 걸쳐 전개된 노전평전투에 투입되었다. 전선이 남쪽으로 굴절된 불리한 방어선을 개선하기 위해서 북한군 제2·제13·제15·제45사단과 세 차례 전투로 1031고지와 965고지 일대를 점령했다. 그러나 항상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영승 일등병은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8월 23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인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승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38-5-18352)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승(閔泳昇)일등병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민영승 일등병은 1928년 9월 4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2월 30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민영승 일등병은 제8사단 제16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승 일등병이 소속된 제8사단 제16연대는 11월 24일 유엔군과 같이 크리스마스공세에 참가하여 한∙중 국경선을 향해 반격했으나, 중공군의 제2·제3차 공세로 37도선으로 철수했다.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전략요충지인 홍천지역의 적을 격멸하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민영승 일등병의 제16연대 지휘부가 1951년 2월 12일 자정 무렵 중공군 대병력이 침입하자 전선 조정을 군단장에게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다.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분산 철수하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육본직할로 전환되어 대구에서 재편성하고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민영승 일등병의 제16연대와 제8사단 예하 연대는 4월 6일 호남지구공비토벌작전 임무를 부여받았다. 16일부터 5월 11일까지 제10·제21연대가 금산·국사봉·부안 등지에서 전개한 공비토벌작전을 지원했다. 그 후 제천-평창-홍천-현리-인제-원통리로 이동하면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민영승 일등병과 제16연대 장병은 8월 9일부터 제1차 노전평지구전투에 투입되었다. 새벽부터 지뢰지대와 박격포 사격을 극복하고 목표를 점령했다. 그러나 10일 공격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부대를 정비한 후 18일부터 전개된 제2차 전투에서 24일 비 내리는 새벽에 포복으로 접근하여 수류탄 공격으로 965고지를 탈환했다. 민영승 일등병은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다가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8월 23일 23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승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2-ㄱ-05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승(閔泳昇)하사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송포동
"민영승 하사는 1918년 6월 2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송포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1월 5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민영승 하사는 제8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승 하사의 소속부대인 제8사단은 소수로 판단했던 적이 중공군 대부대라는 사실을 미 제10군단장에게 보고했으나, 묵살되자 고립된 상태에서 주포리로 분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제8사단은 많은 피해를 입고 육군본부 직할로 전환하여 대구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후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민영승 하사의 제8사단은 4월 3일 제11사단과 공비토벌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대구에서 전주로 이동했다. 4월 16일부터 19일까지 금산지구공비토벌작전을 종료하고 5월 4일부터 11일까지 국사봉지구와 부안지구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민영승 하사는 제8사단 장병과 함께 호남지구공비토벌작전을 완료하고, 5월 19일부터 다시 전선에 투입되었다. 평창-홍천-인제 등지에서 미 제10군단 예비로 지역경계 및 훈련을 실시하다가 7월 20일 강원도 원통리 북방 노전평지구의 제5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했다. 민영승 하사는 8월 9일부터 9월 18일까지 인제군 서화 계곡의 노전평 부근에서 3차에 걸쳐 전개된 노전평전투에 투입되었다. 전선이 남쪽으로 굴절된 불리한 방어선을 개선하기 위해서 북한군 제2·제13·제15·제45사단과 세 차례 전투로 1031고지와 965고지 일대를 점령했다. 그러나 항상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영승 하사는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8월 25일 33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서화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승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5-3-22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2-ㄹ-056)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식(閔榮植)일등병

"민영식 일등병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2월 8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민영식 일등병은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간단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3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식 일등병이 소속되었던 제3사단은 1950년 겨울 중공군의 참전으로 해상 철수를 단행했다가 다시 북상하여 12월 20일 홍천에서 제9사단과 교대했다. 1951년 3월 1일부터 제23·제18연대가 공격을 감행했으나 689고지 등 주요거점을 점령하지 못했다. 26일부터는 38도선 일대의 북한군을 공격했다. 그 결과 4월 5일부터 캔자스선(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 이남)의 적을 격멸하고 10일 전후로 캔자스선을 점령하게 되었다. 민영식 일등병의 제3사단은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현리 지구 철수전을 전개했다. 사단의 우측 제22연대가 가리산과 1226고지를 선점하고, 제23연대는 제18연대에 진지를 인계한 후 사단 예비대로 전환하여 상답·하추리에 분산 주둔했다. 5월 17일부터 적 제32·제12사단의 강력한 공세로 인해 제18·제22연대는 현리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민영식 일등병은 제18·제22연대가 현리로 철수할 때 제23연대가 엄호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5월 18일 방대산을 선점하고 있던 제23연대는 제9사단 철수부대가 통과한 후 적의 추격을 견제하면서 철수했다. 22일 제3사단 연대 병력들이 정선군 임계로 남하했다. 사단은 7월 10일부터 제23연대를 투입하여 257고지와 626고지 일대를 수색하고 진지로 복귀했다. 이튿날 북한군의 침공에 대응하여 명파리·소작봉 등지로 추격하면서 타격을 가했다. 이 작전에 투입되어 앞장서서 추격하던 민영식 일등병은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치료하던 중 회복하지 못한 채 1951년 9월 18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36-3-2068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식(閔永植)하사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읍
"민영식 하사는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이 창설된 직후인 1948년 4월 3일 서빙고에 주둔하고 있던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훈련을 위한 장비는 물론 복장조차도 제각각이었다. 그 후 민영식 하사는 제3사단 제18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식 하사가 소속되었던 제3사단은 1950년 12월 20일 강원도 홍천에서 제9사단 진지를 인수했다. 제18연대는 앞서 12월 15일부로 제3사단에 예속되어 좌측을 담당하고, 21일 홍천을 떠나 자은리·황탄리·장남리에 도착했다. 12월 23일 714.1 고지의 적을 북쪽으로 물리치고, 25일 적 1개 중대를 격멸하자 31일 중공군의 지원 아래 북한군의 반격을 받았다. 이때 제18연대는 제22연대와 함께 평창으로 후퇴했다. 민영식 하사는 제18연대 장병과 함께 1951년 1월 4일까지 평창으로 이동하여 차기작전에 대비했다. 15일 제18연대는 물야면으로 집결했고, 선달산에서 적 1개 대대를 맞아 화력전과 백병전을 전개했다. 야간에 적의 선제공격을 물리치고 포병과 항공기 지원을 받으며 19일까지 남대리의 적 제31사단을 격파하고 의풍리로 진격했다. 20일 법전리로 이동하여 군단과 사단 사이의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민영식 하사와 제18연대 장병은 23일 강림리의 적을 공격하기 위해 1130고지, 1062고지를 점령하고 886고지를 확보했다. 24일에도 1087고지, 907고지를 경유하여 756고지를 점령했다. 25일 매화산 북방의 600고지와 681고지를 공격하여 26일에는 양지초에서 도로 북안을 따라 692고지-570고지-풍취산-387고지-574고지선을 점령했다. 3월 1일 598.9고지와 장자동 무명고지, 631고지, 547고지를 점령했다. 공격전에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영식 하사는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3월 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안흥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식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41-1-1593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26-ㄹ-06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식(閔瑛植)일등병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
"민영식 일등병은 1925년 11월 25일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 10일 대구에 설치된 제5교육대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구 등에 7개의 교육대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포기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민영식 일등병은 당시 상황에 따라 소총격발 요령 등 간단한 기초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2연대에 배치되었다. 민영식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부대의 건제가 붕괴된 국군이 재편성을 하면서 지연전을 계속해 낙동강까지 철수한 후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치고 있었다. 민영식 일등병은 제1사단에 소속되어 반격작전에 참가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9월 말에는 예전에 제1사단이 방어했던 38도선에 도달했다. 민영식 일등병과 제1사단은 10월 9일 유엔군과 함께 38도선을 돌파했다. 조국통일의 꿈을 안고 임진강-토산-신계-수안-상원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10월 19일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민영식 일등병이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민영식 일등병은 언제나 앞장서서 투혼을 발휘했다. 민영식 일등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38도선을 지켜내려 했다. 그러나 1950년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는 중과부적이었다. 파평산에서 철수한 민영식 일등병은 1951년 1월 25일 평택으로 철수하는 지연전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 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2-1683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3-ㅋ-02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언(閔泳言)경사
경상남도 산청군 차황면
"민영언 경사는 1924년 8월 25일 경상남도 산청군 차황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경상남도경찰국 전경 제3전투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언 경사가 경찰에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 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치안질서가 혼란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38도선이 붕괴되고,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국군은 북한군의 계속적인 공세로 후퇴를 거듭한 후 낙동강선에서 경찰과 합동작전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민영언 경사와 경상남도경찰국 전경대원들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였다. 이어서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반격작전을 개시하자 낙동강 전선에서 패퇴하여 미처 철수하지 못한 북한 정규군과 지방의 공비들이 합세하여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있었다. 1953년이 접어들자 공비들은 치안질서를 교란하고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출몰하여 민가약탈을 자행했다. 민영언 경사와 경상남도경찰국 전경대원들과 함께 상부의 명에 따라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산청군 지리산지역에 투입되었다. 민영언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공비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역에 배치되어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비 한 무리가 식량을 약탈할 목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공비무리가 유효사거리 내에 접근하자 민영언 경사와 경상남도경찰국 전경대원들은 일제히 기습사격을 했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대부분의 공비는 섬멸되고 소수는 도주했다. 그러나 1953년 1월 19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산청지구에서 공비와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언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6-ㅎ-08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옥(閔永玉)하사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민영옥 하사는 1927년 6월 15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0년 12월 30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영옥 하사의 입대 전후 상황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후퇴해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쳤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후퇴한 후 재반격을 시작했다. 민영옥 하사는 제7사단으로 배치되어 재반격에 가담했다. 민영옥 하사와 제7사단은 평창 일대에 도달한 후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인제군 남면으로 진출했다. 그때인 3월 15일 국군 제1사단이 서울을 되찾았다. 중공군은 4월 22일 서울을 목표로 제5차 공세를 감행했다. 민영옥 하사와 제7사단은 소양강 남쪽인 풍암리-음양리를 연하는 선을 점령했다. 1951년 5월 16일 중공군의 제6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작전 초기부터 제7사단은 통신이 두절되고 분산되면서 부대의 통제력을 잃었다. 인접에 위치한 제3군단(제9·3사단)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붕괴된 채 속사리까지 70㎞를 후퇴했다. 민영옥 하사와 제7사단은 철수와 지연전을 반복하며 부대를 수습한 후 반격에 나섰다. 민영옥 하사와 장병은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한 중공군의 공세는 치열했다. 중과부적이었다. 7월 10일에는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그 시기인 1951년 9월 20일 민영옥 하사는 양구의 백석산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옥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1-ㅎ-09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옥(閔泳玉)하사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공덕동
"민영옥 하사는 1930년 10월 26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공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2월 30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육군 직할부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옥 하사가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국군의 주력은 한강 북쪽에서 붕괴되었다. 소수의 국군은 참전한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지연전을 계속하며 7월 말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해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저지했다. 이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반격으로 돌입해 38도선을 회복한 후 10월 초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10월 말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과 두 차례의 기습공세로 인해 또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해야 했다. 민영옥 하사는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어 각종 지원임무와 함께 전투임무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민영옥 하사와 같이 입대한 신병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전사하는 사례도 허다했다. 민영옥 하사가 38도선 일대에 배치된 후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공세는 압도적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또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했다. 1951년 1·4후퇴였다. 민영옥 하사는 각종 지원임무가 주 임무였지만 전투임무에도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수행했다. 민영옥 하사와 국군은 1951년 2월 37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중공군이 다시 4-6차 공세를 감행했다. 중공군과 공방전을 거듭하며 용전분투하던 민영옥 하사는 1951년 6월 28일 중부전선에서 전투 중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옥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11-676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6-ㅇ-06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완(閔永完)하사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민영완 하사는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7월 2일 의정부에서 동두천-포천일대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7사단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훈련을 위한 장비는 물론 복장조차도 제각각이었다. 민영완 하사는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영완 하사가 소속된 제7사단은 적성에서 일동까지 47㎞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사단은 제1연대를 좌측 동두천축선에, 제9연대를 우측 포천축선에 배치하여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6월 15일 예비부대인 제3연대를 수경사로 전환했으나 6∙25전쟁 당일 제7사단으로 다시 예속되었다. 민영완 하사와 제7사단은 38도선 부근에서 진지공사에 매진했다. 이 시기 1949년부터 북한의 도발은 심상치 않았다.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지역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하는 송악산전투가 발생하는 등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면서 준전시와 같은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남침으로 연결되었다. 민영완 하사가 근무했던 의정부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북한군은 동두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4사단을 투입하고, 포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3사단을 투입해 의정부를 목표로 공격했다. 민영완 하사와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민영완 하사와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영완 하사는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동두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완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8-2-02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1-ㄴ-05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영웅 민영승 - 민영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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