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姓)의 기원

  1. 창씨(創氏) 때 만든 인스턴트

성(姓)은 천민일수록 없었다. 융희(隆熙)2년, 처음으로 민적법(民籍法)의 시행을 보게 되었을 때의 조사에 의하면 성이 있는 사람보다 성이 없는 사람이 약 1.3배 꼴 가량이나 많았다 한다.

그렇다면 성도 없이 민적을 정리할 수는 처지였으므로 민적 사무를 보는 담당 관원이 제멋대로 성을 지어 붙여서 정리하였다.

이를테면 충남 청양군(靑陽郡)의 농민 가운데 가장 많은 오(吳), 양(梁), 주(朱), 송(宋)과 평북 자성군(慈城郡)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성씨인 강(姜), 양(梁), 현(玄)의 거개는 바로 이 민적 담당 관원의 인스턴트로 만들어 준 즉석성(卽席姓)들이다.

전북 진안군(鎭安郡) 같은 데선 같은 인스턴트라도 본인의 희망을 참작하여 그의 출생지를 본관(本貫)으로 하고 출생고을의 저명한 문벌(門閥)의 성을 따서 지어주기도 하였다. 전주(全州)태생이면 전주 이씨(全州李氏), 경주태생이면 경주 김씨(慶州金氏) 식으로 성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행정체제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때인 데다가, 몇 순사들에 의하여 민적처리가 되었기 때문에 제 것과는 다른 엉뚱한 성으로 둔갑한 예도 드물지 않다. 담당자 수도 적었지마는 그나마 너무도 무식하여 잘못 기록하는 수가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담당자가 마을에 나가 구두로 신고를 받았던 관계로 인한 誤記도 그 중에는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도 시정되지 않고 잘못 통용되고 있는 오기성(誤記姓)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알아보기로 하자

單干 = [長城 鳳山 – 鮮干의 잘못]

司公 = [高陽 – 司空의 잘못]

藩 = [密陽 – 潘씨의 잘못]

雍 = [昌原. 鎭海 – 邕씨의 잘못] 邕 -옹

慕 = [高陽. 咸平 – 牟씨의 잘못]

陳 = [龍仁. 驪陽 – 陳씨의 잘못]

穆 = [公州. 咸平 泗川 – 睦씨의 잘못]

葵 = [晋州. 平康 – 蔡씨의 잘못] 葵- 규

菜 = [永同. 晋州 – 蔡씨의 잘못]

謝 = [蓮川 – 史씨의 잘못]

泳 = [光陽 – 氷씨의 잘못] 신라 때 빙고(氷庫)에 관련했던 사람의 성으로 氷씨 가 있었고, 후손이 지금도 경주에 살고 있다.

▲ 융희(隆熙)

일본에 의해 강제로 고종이 황제를 양위하여 1907년 8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로 바꾸었다. 1910년 8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4년간 사용되었다

  1. <事大姓>과 <國粹姓>

성(姓)자를 둔 사대사상(事大思想)도 만만히 볼것이 못 되었다. 각 성의 선조를 곧장 중국에서 건너온 <귀화인>에다 결부시키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을 우리는 과거 기록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즉 <동래성(東來姓)>이라 하여 자손의 자료로 내세우기를 좋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동래성>과 대조되는 국산 성은 <동이성(東夷姓)>이라 하여 천대를 받았다. 그래서 천대 받는 <동이성>을 가진 가문은 임진란(壬辰亂), 병자란(丙子亂) 등 신분 질서가 무너진 틈을 타서 명문의 족보를 사들인 다던가, 살던 고장을 떠나 <동래성>으로 행세를 하거나 하였다.

이와 같이 국산성을 기피하는 풍조로 인하여 순수한 우리 나라 고유의 성은 거의 멸종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중 몇 개만이 전설처럼 희성(稀姓)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ヘ)씨 – <뼘>이라고 발음하는 이 성은 엄지손가락을 편 간격, 즉 한 뼘을 뜻하는 상형(象形)으로 한자(漢字)에도 없는 글자이다.

(㫆)씨 – <며>라고 발음하는데 이 역시 조자(造字)인 것이다.

(卵)씨 – <퉁>이라 읽으며 본은 문천(文川)이다. <퉁퉁하다>는 뜻의 조자(造字)인 듯하다.

(鴌) – <궉>이라고 읽으며 본은 순창(淳昌)으로 되어 있고 주로 충남 천안, 아산, 보령, 청양, 및 경기도 수원, 용인 등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아전이 호적을 정리할 때다. 자기의 성이 뭔지 모른다고 하는 자가 있었다. 성을 왜 모르느냐고 따지고 물으니까, 어머니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는데 난데없이 폭한이 나타나 겁탈을 해서 태어남 몸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그때 봉변을 당한 어머니가 정신을 차려 사방을 휘둘러보니, 폭한은 간데 고 다만 큰 새 한 마리가 <궉궉> 소리 내어 울면서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고, 어머니한테 들은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아전은, 하늘천(天)의 새조(鳥)라, 하고 한참 생각하다가 <궉>이란 성을 조자(造字)하여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セ) – <마> 또는 <먀>로 불리 우는 이 희성은 안동군 예안면(安東郡 禮安面)에 지금도 몇 집이 살고 있다.

평안도에서 징발되어 온 어느 성 없는 병졸이 남한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괄(李括)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仁祖)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인조를 업어다 피난시킨 사람이 바로 이 성 없는 병졸이었다. 이 병졸은 왕을 등에 업고 피난처로 모신 것을 영광을 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을 길이 후손에게까지 전하기 위하여, 사람을 업은 상형문자(象形文字)를 있음직한 전설이다.

그의 후손은 동이성이 아니라 동래성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중국의 남북조 때와 명종 때 <セ>성이 있었다고, 문헌까지 들어가면서 지적을 하고 있다.

遤 – <흥>이라 부르는 이 성자도 한문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글자이다. 말의 콧소리 같은 이 음은 이 성받이의 선조가 지녔던 습벽(習癖)에서 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闖 – <왁>이라 읽혀지는 이 성자는 말이 마구간 문을 갑자기 나올 때의 놀라운 모습을 의미하는 상형문자로 항상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용모에서 유래된 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𨶠 – 이 역시 <와>이라 읽혀지며, 광주(廣州)에 이 희성받이가 많지는 않으나 살고 있다한다.

㸴 – <쇼>라 읽혀지는 성주(星州)벽성이다. <石抹>이란 본성이 <石+牛>로 와전된 끝에 다시 단성으로 줄여진 것 같다.

(牆籬) – <담울>이라 읽는다 <牆>은 담이요, <籬>은 울을 뜻하는데, 남원(南原)에 이 담월씨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갇혀 사는 은사(隱士)가 아니면 위리형(圍籬刑)을 받던 연고로 창성(創姓)된 것이 아닌가 한다.

♣ 위리안치(圍籬安置)에 해당하는 죄인은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 연해의 섬에 보냈다. 그러나 안치 이외의 유배형은 대개 그곳의 주민과 어울려 사는 것을 묵인하기도 하고, 가족 또는 제자를 데려가게 해주기도 하였다.

  1. <賜家畜姓>이란 형벌

옛날에는 성을 바꾸는 일도 흔히 있었다. 우선 왕명으로 성을 맘대로 바치기도하고 빼앗기도 하고 바꾸어 받기도 한 예가 드물지 않다.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충선왕(忠宣王)은 그의 남색(男色) 애인 주충(鑄忠)에게, 고려의 왕성(王姓)이요 가장 영예로운 귀성(貴姓)인 왕(王)를 사성(賜姓)하였다가, 그 후 왕의 남색 요구에 잘 응하지 않게 되자, 전에 내렸던 왕성을 도로 빼앗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보면 중외의 영을 내려, 고려조에 왕씨로 사성되었던 왕씨는 모두 본성으로 되돌아가게 하였고 본래의 왕씨는 비록 고려 왕조와 본관이 다른 왕씨일지라도 통틀어 어머니 쪽을 따르도록 하였다고 기록 되어 있다.

또 고려 태조(太祖)때 목주(木州)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킨다 해서 왕건은 이에 대한 보복책으로 그 고을 사람들의 성을 모두 가축의 짐승 리름으로 바꿔 버렸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재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성은 그 후 기회를 보아 <牛>씨는 <干>시로, <象>씨는 <尙>씨로, <頓>씨는 <獐>씨는 <張>씨로 음만을 다른 그자로 바꾸어 버렸다고 한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도 우기성(牛起聖)이라는 참봉이 자기 가문에의 유래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고려 때, 왕실에서는 동성간의 근친결혼이 잦았었다. 이것은 유도(儒道)의 모델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풍습화 된 근친결혼을 일조에 막을 수는 없는지라, 왕은 하는 수 없이 다음과 같이 왕명을 내려 근친결혼을 우선 캄풀라지 하였다. 즉 왕씨끼리의 근친 혼인에서 태어난 아이는 할머니 성을 , 할머니 역시 왕씨일 때는 증조모의 성을 따르도록 하라고…….. .

고려 왕조의 외척(外戚)에는 황보(皇甫)씨가 많았다. 형매혼(兄妹婚)등 근친 결혼에서 태어난 왕씨를 모두 황보씨로 갈게 한 것이다.

  1. 僞造兩班의 姓 바꾸기

앞에 든 예는 타의에 의하여 성을 바꾸게 된 예이나 더러는 본인의 의사에 바꾸는 일도 적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갈래가 있다. 그 하나는 잘못된 성을 바로잡기 위하여 바꾸는 것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인이나 전과가 있는 사람이 벼슬을 하기 위하여 그전 성을 버리고 위성(僞姓)을 하는 그것이다.

[이해재(李海齋)는 소시 때 어느 눈 맞은 여자와 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여자는 이해재의 씨를 뱃속에 지닌 채 지사(知事) 조윤손(趙潤孫)의 첩으로 들어가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옥강(玉矼)이라 하였다. 하루는 해재가 조윤손에게 농을 걸어, 첩을 빼앗아 갈 수도 있으나, 아들이야 어찌 빼앗아 갈 수 있겠는가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조윤손이 무엇이라고 응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찬성 이해재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해재가 당해 가 있는 적소(謫所)를 찾아가 이름을 전인(全人)으로 고치는 한 편 성도 조씨가 아닌 이씨로 고쳤다.]

천인을 면하기 위한 개성(改姓)은 개화기에 이르기 까지 지속 되어 온 전통적인 폐단이었다.

만력(萬曆) 이 후의 호적을 뒤져 보면, 유학(幼學)이나 한량(閑良)등 양반으로 칭호 받는 신분이 상민(常民)수 보다 월등 많다. 이것은 하층 계급보다 상층 계급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래 사회구조를 볼 것 같으면, 상층 계급적이 적고 하층 계급이 많은 법이다. 우선 다른 면은 접어두고 이 성으로 보이는 계급분포를 본다면, 확실히 기형적인 사회구주라 아니할 수 없다. 천민이 양반으로 위장하려면 성을 바꾸어야 한다. 성이 같은 경우는 최소한도 본을 바꾸어야 한다.

목민심서(牧民心書)의 호적(戶籍)조에 보면, 유학(幼學)이라는 하찮은 신분을 얻기 위하여 아버지를 바꾸고, 조상을 갈아 치우기도 한다고, 당시의 사회 풍조를 지적하고 있다.

숙종(肅宗) 기해년(己亥年) 사마(司馬)의 시(試)와 영조(英祖) 을사(乙巳) 문과(文科)에 등과하여 연일(延日) 현감으로 부임 했던 엄택주(嚴宅周)는 원래 출신이 전의(全義)의 관노(官奴) 이만강(李萬江)이었던 것이 나들어 흑산도로 유배를 당했었다. 등과자 명부인 국조방목(國朝傍目)에서 삭제되었음은 물론 다시 노(奴)로 하천 됨과 동시에……. .

이같이 죄인이 그 죄를 은폐하려 하거나, 노비가 다른 지방으로 이사함으로써 신분을 은폐하려 할 때는 가난한 명문의 족보를 돈을 주고 사서 성을 바꾸는 일이 예사로 있었던 것이다.

성을 알 수 없는 기아(棄兒)는 주워 기른 사람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나 그렇다고 그 가문의 일원이 될 수는 없었다.

광무(光武) 9년 5월에 발포한 개화법인 형법대전(刑法大全)에도,

[유기한 세 살 이하의 소아는 비록 이성(異姓)이라도 수양(收養)하야 그 성을 따르게 하되 입사(立嗣)함은 부득이다]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창성(創成)하기도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보면 서(書)씨는 산중에 유기된 아이의 성씨이고, 연안천씨(延安天氏)는 해서의 땅에 유기된 아이에게 처음으로 붙여진 창씨라 하였다.

♣ 광무 [光武] – 1897년(고종 34) 제정된 대한제국의 연호.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개화당 내각은 갑오개혁 때의 내정개혁안(內政改革案)을 추진시켜 1895년 11월

부터 양력을 사용하기로 하여,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첫 연호로 건양(建陽)을 사용하도록 결정하였다.

이 첫 연호의 사용으로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탈피하고 새로이 자주적인 국가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침략을 위한 한 표현에 불과하였다. 일본인에 의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해(弑害)와 강제적인 단발(斷髮)의 시행은 배일감정을 격화시켜 1896년 1월부터 4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국내는 크게 혼란하였다.

이에 친러파 이범진(李範晋) 등이 K.웨베르와 밀의하여 명성황후의 피살 이후 그 신변마저 불안하던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새로운 친러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각종 이권이 러시아로 넘어가자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중심으로 한 사회여론은 국왕의 환궁을 요청하게 되었고, 1897년 2월 20일 드디어 국왕은 환궁하였다.

독립협회의 여론 환기에 따라 국민의 국가의식이 앙양되는 가운데, 국왕에 대한 황제의 칭호 사용과 새로운 연호의 제정을 기하고 국호를 개정함으로써 국운(國運)의 신기원(新紀元)을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大臣) 심순택(沈舜澤)의 주청(奏請)으로 1897년 8월 14일 광무라는 연호를 실시하도록 하여 8월 17일부터 사용하였다.

이로써 첫 번째 연호인 건양을 사용한 지 1년 7개월 만에 두 번째 연호인 광무로 고쳐 순종(純宗)이 등극할 때까지 10년간 사용하였으며, 광무 원년은 조선 개국기원 506년이 되었다.

♣ 융희 [隆熙 –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

일본에 의해 강제로 고종이 황제를 양위하여 1907년 8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로 바꾸었다. 1910년 8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4년간 사용되었다.

  1. 本貫論

씨(氏)의 증빙자료가 되는 본관(本貫)은 대개 그 선조가 살랐던 고을이나, 대를 두고 오래 살았던 고을 이름을 따다 썼다.

이조 중엽 요역기피(徭役忌避)막고자 호적정리를 강행한 바 있으나. 이때 서민, 천민을 막론하고 본관을 기재토록 하였다. 대개의 노비(奴婢)는 그가 소속하고 있는 상전(上典)의 호적에 편입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본관을 알 리 없는 대부분의 노비는 그 상전의 본관을 그대로 자기의 본관으로 삼았다. 한편 노비가 아닌 상민이나 천민도 본관을 모르는 경우엔 명문의 본관을 훔쳐다가 자기의 본관으로 기재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양반과 천민을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버린 본관으로 말미암아 가문이 손상되고 가문의 가치가 평준화하기에 이르자, 양반들은 제1의 본관, 제2의 본관으로 차별을 두었다. 제1의 본관은 <김해 김씨> <전주 이씨> <여흥 민씨>라고 하면 그것으로 통해졌다. 그러나 제2의 본관일 때는 이와 같이 달리 김해요, 본이 전주며 본이 여흥이라고 말했다.

만약 제2의 본관에 속한 자손이 <본>을 쓰지 않고 <씨>를 썼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야단이 난다. 사형(私刑)을 당해야 하였다.

사관(賜貫)이라 하여 왕이 내리는 본관이 있다.

공신에게 주는 훈장 같은 것으로서 일단 사관을 받으면 묵은 본관을 버리고 가문의 영예로 삼는다.

신숭겸(申崇謙)의 충열비문에 보면 곡성(谷城)이 고향인 그에게 본관을 평산으로 한다는 사관의 사실이 적혀 있다.

제주 고씨(濟州高氏)에게 장흥을 사관한 것도 그 일례라 하겠다.

또 이조 정종(正宗)은 공씨(孔氏)에게 공자(孔子)의 고향인 곡부(曲阜 – 중국 山東省)를 본관으로 사(賜)하였고, 구한말 고종(高宗)은 주씨(朱氏)에게 주희(朱熹)의 고향인 신안(新安)으로 본관을 사하였다.

이같이 사관(賜貫) 이외에도 채식(菜食)의 땅을 본관으로 한 덕수 이씨(德水李氏), 관의 임지였던 땅을 본관으로 한 인천 채씨(仁川蔡氏), 유배지(流配地)를 본관으로 한 연안 김씨(延安金氏)등 변례가 없지도 않다.

당시 본관을 어느 정도로 소중히 여겼는가는 앞에 든 예로서도 알 수 있으나, 본관의 소중성을 한층 더 맣해 주고 있는 것은 본관읍호승강제도(本貫邑號昇降制度)이다. 역죄(逆罪)를 지은 사람이 나면 그 본관 땅의 읍호(邑號)가 하강되는 대신, 공신이 나면 그 본관 땅의 읍호가 올라간다. 다시 말하면 한 두사람의 선악(善惡)행위로 그 고을 의 읍호가 부(府)에서 군(郡)으로 내려지기도 하고, 부(府)에서 목(牧)으로 올려 지기도 하였다.

때문에 한 고을을 두고서 그 행정적 구획이 몇 번이나 바뀐 실례가 허다하였다. 그것도 일 년을 못가 몇 번씩이나 바뀌었으니, 본관승강제도가 여간 엄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읍호가 바뀔 때마다 그 고을 수명도 자연 바뀌어지게 마련이었다. 인사이동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읍호승강제도의 폐단을 두고 유형원(柳馨遠), 남구만(南九萬), 정약용(丁若鏞) 등 선각자들은 신랄히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관습은 구한말 갑오경장(甲午更張) 때까지 끄덕도 않고 그대로 시행을 보아 왔다.

  1. 姓種論

차별을 유달리 좋아했던 옛 사람들의 생리는 성을 묻고, 본관을 묻고, 종파를 묻고, 항렬을 묻고, 그러고도 시원치 않아 성종(姓種)까지도 따지는 버릇이 있었다. 본관도 소중했지만 성종 또한 중요했던 것이다.

관에 고직(告直)을 할 때, 사관(仕官)을 할 때, 대감 앞에 나가게 될 때는 반드시 성종을 아뢰어 바치도록 되어 있었다.

성종은 대개 다음의 20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토성(土姓). 가속성(加屬姓). 속성(屬姓). 망성(亡姓). 차성(次姓). 차리성(次吏姓). 속성(續姓). 입속성(入續姓). 입성(入姓). 내성(來姓). 경래성(京來姓). 내접성(來接姓). 투화성(投化姓). 향국성(向國姓). 사성(賜姓). 천강성(天降姓). 백성(百姓). 입진성(入鎭姓). 계술성(戒戌姓).

토성은 그 지방 토착 상류계급(土着 上流階級)의 성을 가리키고, 가속성은 문적(文籍)에 오른 토착성(土着姓)이긴 하나 토성보다 약간 낮았다.

망성은 그 지방의 예전 문적에는 올라 있으나 현재는 유실 되어 그 지방에 없는 성을 가리키고, 차성 또는 차리성은 아전 계급의 성을 가리켰다.

속성(續姓), 입속성은 그 지방에 새로 이주해온 새 성으로, 이 성은 주로 향리(鄕吏)중에 많았다.

입성, 내성, 내접성, 경래성, 속성(屬姓)과 같았으나 그들이 그 지방에 와서 산 기간과 이사온 지방에 따라서 구별이 지어진 것 같다.

투화성 향국입성, 향국성은 모두 귀화인(歸化人)을 뜻하였다.

사성(賜姓)은 임금이 내린 성으로 그런 의미에서 옛날엔 그지없이 영예로운 성으로 알려지기도 하고, 존대를 받아 왔으나 사성은 대개 귀화인에게 내려졌으므로 나중에 가서는 외국인의 씨라 하여 천인시 당했다.

천강성은 주로 경주의 박(朴), 석(昔), 김(金)씨를 가리켰다. 전설을 지닌 귀성(貴姓)으로 고래로부터 존대 받아왔다.

백성은 <세종실록> <지리지(地理誌)>에 의하면 경산의 김(金). 전(全), 백(白), 이렇게 3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토성(土姓)의 오자로 보는 학자도 있다.

임진성, 계술성은 입성(入姓)과 같은 것이나 곳이 진(鎭)이나 영(營)같은 무영지(武營地)일 때는 이같이 별(別)을 지어 불렀다.

이성은 여느 입성(入姓) 보다 천대를 받았다.

  1. 冠一兩 童五分 主義

우리나라에서 족보(族譜)를 처음 만든 것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이조 명조(明朝)17년(1567년)의 일이었다. [연여당기술별책(燃藜堂記述別冊)]

벌족(閥族)의 관념이 그토록 억세었던 데에 비하여 족보가 없었던 것은 사가(私家)출판이 금지되어 있었던 데에 큰 원인이 있었다.

족보의 절실한 필요성은 잇달아 사화(士禍)의 와중에 끼어든 가문들에게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더욱더 절실하였던 것이다.

왕실에서는 현종(顯宗) 때[열성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의 간행이 있었고,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는 [선원보기략(璿源譜記略)]이라 일컫는 전주 이씨(全州 李氏) 족보가 간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족보 붐이 일어나 英祖, 正祖, 順潮, 憲宗 때에는 우선 명문(名門) 가문의 족보간행이 붐을 이루었다. 철종(哲宗),고종(高宗)조에 들어와서는 명문 가문에 이어 무명가문의 족보 간행이 또한 성행하였다.

가계(家系)를 찾고 정리하려는 이 족보의 붐은 개화기의 신풍조도 아랑곳없이 꾸준히 성행을 보아 왔는데, 지금도 단자(單子) 받이 하는 할아버지들이 적지 않게 전국을 누비며 돌아다니고 있음을 본다.

족보는 한 혈족의 시조를 비롯하여 그의 자손들을 총망라한 대동보(大同譜) 와 한 분파만을 수록한 파보(派保)로 가름된다. 족보를 만드는 절차를 소개할 것 같으면, 종회(宗會)에서 발의, 결의를 하여 각파(各派)에 통문(通文)이라는 일종의 통지서를 띄운다. 통문을 받은 각파에서는 다시 각 가가호호에 통문을 전달한다.

통문을 받은 집에서는 단자라 하여 각파 자손의 족계(族系)와 족원(族員)의 생년, 사망 연월일, 관직, 자손, 외손 등을 자세히 적어 문서를 만든다. 이것은 단위서표(單位書票)라고도 한다.

작보소(作譜所)는 종가(宗家)집에 두는 것이 보통이고, 가문에서 활동적인 사람을 뽑아서 작보사무를 분장, 담당케 한다.

담당 명칭 및 사무는 다음과 같다.

△ 수단유사(收單有司) – 단자를 거두려 다니는 사람

△ 교정유사(校正有司) – 단자 편집 때 정오(正誤)를 바로 잡는 사람

△ 수전유사(收錢유사(有司)) – 단자 단위로 일정한 금액을 할당하여 거두러다니는 사람

△ 장재유사(掌財有司) – 회계 사무를 보는 사람

작보(作譜)에 드는 경비는 현재 살고 있는 가문의 자손이 빠짐없이 두루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 때 이 돈을 명하전(名下전錢)이라 하는데,[관한량동오분(冠一兩 童五分)이 그 준칙으로 통용되어 있었다. 어른은 한 냥씩이요, 아이들은 닷 돈씩을 내야 한다는 뜻이다. ‘닷 돈짜리가…..’하는 은어는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새끼가……‘하는 말과 같은 뜻이다. 즉 닷 돈짜리가 운운하는 욕지거리가 유행되었을 정도로 이 명하전의 원칙은 철저하였다.

명하전 말고도 잘 사는 자손이 희사금이나 종중 재산으로 보충하는 일도 없지 않았는데 이런 돈은 따로 별구전(別鳩錢)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구한말 관리들의 부정수입을 별구전이라 하였음은 바로 이 작보전(作譜錢)에서 연유된 말이다.

족보의 체재는 한편에 네 간 내지 일곱 간의 횡선(橫線)을 긋고 일대(一代)에서 시작하여 차례로 써내려간다. 면수는 <天地玄黃….. >의 천자문으로 표시하는데, 이것은 색인(索引)의 편리를 겸하기도 한다.

  1. 엉망인 上代系譜

가장 일찍이 만들어진 족보라 해야 겨우 4백 년 전의 것이 고작이다. 그동안의 대(代)교체를 본다면 대개 15~14대이다. 한데 족보의 거개는 30대, 40대로 치솟아 올라가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치솟아 오른 계보는 대개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이나 전설, 성화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 지기 때문에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전거(典據)가 부실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 새로 간행한 행주 기씨(幸州奇氏)의 족보에는 시조인 기자(箕子)이후의 세대를 41대까지 기록하였다. 대개 주(周)나라 무왕(武王)기묘(己卯)년에 기자가 처음으로 건국하였고, 한나라 혜제(惠帝) 정미(丁未)년에 기준(箕準)이 마한(馬韓)이라고 하였으니, 합하여 9백29년이 되는데 지금의 족보에는 41대 1천36년이 되니 의심스러운 것의 첫째이고 41대 중에 동사(東史)에 있는 기부(箕否)가 없음은 의심스러운 것의 둘째요, 또 삼국시대(三國時代) 중엽 이후에 비로소 시호(諡號)를 내리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 여기에 기록 된 것은 그 이전 사람에게도 시호가 적혀 있으니 의심스러운 것의 셋째라. 이것은 반드시호사가(好事家)가 전거(典據)도 확실치 못한 것을 적어서 세상을 속인 것인데, 간행하는 보첩(譜牒)에 적었음은 괴이하다.] <기년아람(紀年兒覽)>

또 <연려실기술>에도 창원공씨(昌源孔氏)의 족보를 두고 황당한 모순을 신랄하게 파헤쳐 놓고 있음을 본다.

<주영편(晝永編)에도 ‘사부(士夫)’의 계(系)는 십대(十代)밖에 믿지 못하며, 그 밖에는 허황하다.>하였다.

이처럼 부실한데다가 위조 족보가 적지 않았다.

첫째 공신(功臣)이나 명문의 후손은 병역이나 요역이 면제 되었으므로, 이 국역 기피를 위해 족보를 위조하였다. 있음직한 일이다.

[숙종(肅宗) 을축(乙丑)년에 지평(持平) 최규서(崔奎瑞)가 소를 올려, 간사한 사람이 족보를 위조하고 종파(宗派)를 옮겨 바꾼 것에 관란 죄를 논하였더니 윤허를 받아 법대로 다스렸다. 그때에 모리배(謀利輩)들이 남의 집 족보를 많이 모아두고 만약 선대의 공음(功蔭)이 있으면 그 끝에다가 이름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활자로 박아 내어서 군역(軍役)을 모면할 계제로 하는 것이다.

의금부(義禁府)의 하리(下吏)를 시켜서 수탈하여 들이니 몇몇 집의 족보가 모여졌데 해주 최씨(海州崔氏)의 족보도 그 중에 있었으며, 당대 사람인 최규서의 여러 종파의 이름 아래에도 역시 6~7 대나 더 기록되어 있었다.] <간제만록(艮齊謾錄)

  1. 家系를 파는 族譜商

또 천민이나 상민의 신분을 면하는 동시에 등과(登科)의 기회를 얻으려는 신분 탈피의 성향이 족보위조를 가지고 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때로는 가난한 양반이 상민에게 족보 위조를 허락함으로써 금전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예가 당시에는 드물지 않아서 위조족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이른바, 위조족보 상인까지 생기게 되었다.

[근래에 간사한자가 금성임씨(錦城林氏)라 사칭하면서 위조족보를 영남에서 박아 내었다. 금성 임씨와 평택 임씨(平澤林氏)의 족보를 합쳐 놓고, 본래 같은 선조였는데 형제가 분봉(分封)이 되어 마침내 본관이 다르게 되었다고 하며, 서울에 있는 현족(顯族) 몇 집을 족보에 끌어넣어 파종(派宗)을 옮겨 바꾸고, 대수(代數)를 바꿔 고쳐서 선조ㅡ이 세계(世系)를 어긋나게 하여 인륜의 서차(序次)를 문란케 한 것이 매우 많았다. 여러 도에 두루 다니면서 임(林) 성을 가진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족보책을 팔아 생계를 삼는 것이었다.

서울에 있던 여러 임씨들이 이를 발각하고서 관에 고발하였으므로 그 사람을 가두었다가 귀양 보냈고,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서 거짓 족보를 거두어 모아 불살랐는데, 근래의 족보폐단이 매우 크다.

사람들이 모두 족보가 없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며 시골의 천한 사람으로서 균역을 면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뇌물을 주고 거짓 들게 되니 보첩(譜牒)이 잡되고 어지러움이 갈수록 더욱 심하였다.

근간에 들으니 항간에 어떤 사람이 만성보(萬姓譜)를 모아서 집에 비장하였다가 자기 조상의 계보를 잊어버리고 어떤 명문 집에 붙으려 하는 자가 있어서 중한 뇌물을 주면 그 만성보 중에서 자손이 없거나 자손이 잘 알려지지 않은 자를 골라서 이름자를 바꾸고, 계보를 꾸며 넣어 주었으니 만성보 중에서 구보(舊譜)에는 후손이 없다고 되었는데 자손이 아무 지방에 산다면서 단자(單子)를 만들어 왔다고 하는 것은 모두 이런 류이다.

이 때문에 본관(本貫)이 벽성(僻姓)이었던 자가 점차로 높은 문벌과 영예로운 관향(貫鄕)으로 옮겨 붙게 되니 이것이 어찌 세상 도의에 하나의 큰 변고가 아니랴.

인륜을 문란하게하고 세상을 속임은 왕법으로 반드시 죽여야 사람들이 엄벌하지 않아도 괴상하게 여기지 않음은 무엇 때문일까? <연려실기술보(燃藜室記述補)>

뿐만 아니라 독립신문에도 이 족보 매매에 관한 기사가 자주 나 있는 것을 본다. 1900년대에 들어서는 이 족보를 둔 범죄자가 차차 다른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족보 간행의 목적을 영리(營利)에 둔 범죄가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몇 발기자들이 종약소(宗約所)를 만들고 일족에게 통문(通文)을 발행하여 <관한량 동닷돈(冠一兩童五分)의 원칙을 <관일원 동오십전(冠一圓 童五十錢)으로 명하전(名下錢)을 대폭 인상하여 사복을 채웠다.

이때 수전유사(收錢有司)들은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상민이건 천민이건 족보가 없어 제대로 행세를 못 하는 것 같은 성의 사람들을 샅샅이 뒤지듯 찾아가, 별구전(別鳩錢)만 내면 얼마든지 입보(入譜)를 시켜 주겠다고 권유를 하는 것이다.

한편 명하전을 못 내는 가난한 동족에게는 족보에서 제적을 하고 그 제적된 보계(譜系)에 별구전을 낸 이족의 사람을 입보시켜 주곤 했던 것이다.

이 보폐 (譜弊)는 여간 심한 것이 아니었다. 구한말에서 일제 초기에 이르는 동안 이 보폐로 말미암은 형사, 민사 사건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단자(單子)【명사】

  1. 부조하는 물건의 품목과 수량을 적은 종이.
  1. 혼인할 사람의 사주를 적은 문서.
  1. 姓의 小史

옛날에는 성(姓)이 없었다. 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뚜fut한 계급사회의 형성과 때를 같이 해서였다.

하층 계급에서 상층 계급을 구분할 필요가 생기고, 상층 계급 세습이 필요화 됨과 동시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구별이 생겨난 것이다.

고려(高麗)초기에 기록인 고려고도징(高麗古都徵)에 보면, 사인망족(士人望族)으로, 유•최•김•이(柳•崔•金•李) 4 성(姓)을 들고 있으며, 그 후의 기록인 <해동운옥(海東韻玉)에는 명성(名姓)으로서 이•김•박•심•윤•한•정•최•유•임•허•신•조•조•성•안•노•남•송(李•金•朴•沈•尹•韓•鄭•崔•柳•任•許•申•趙•曺•成•安•盧•南•宋)씨를 들고 있다.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명성으로 12성, 이•김•박•정•윤•최•유•홍•신•권•조•한(李•金•朴•鄭•尹•崔•柳•洪•申•權•趙•韓)씨를 그리고 그 다음가는 명성으로 16성, 즉 오•강•심•안•허•장•민•임•남•서•구•성•유•원•황(吳•姜•沈•安•許•張•閔•任•南•徐•具•成•兪•元•黃)씨를 들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성이 자꾸 늘어나게 되면서부터는 성의 유무(有無)만을 가지고는 계급구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계급을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姓)과 씨(氏)를 다시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즉 김•이•유(金•李•柳)하는 것은 단지 성(姓)을 표시하는 것일 뿐 귀천사서(貴賤士庶)의 구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안동김씨(安東金氏), 연안이씨(延安李氏), 문화유씨(文化柳氏)할 때는 <성(姓)>이 아니라 <성씨(姓氏)>가 되는데, 이 성씨를 가지고 이를테면 계급을 구분하는 척도로 삼자는 것이다. 이것이 씨족(氏族)의 형성을 보게 된 연유이다.

이를 바꾸어 다시 되풀이하자면 본관별로 성을 분류하여 씨족을 형성케 함으로써 양반계급의 혈통을 상민으로부터 구분, 보호하자는 것이다.

  1. 兩班氏와 賤民姓

1484년(成宗 17년)에 만들어져 정조(正祖)에 이르기까지 증보(增補)를 거듭해온 <동국여지승람>에는 각 고을 별로 그 고을에 사는 사람의 성씨(姓氏)를 기록한 난이 있다. 한데 이 난에서는 서민이나 천민의 성을 뜻하는 <성(姓)>과, 양반의 성을 뜻하는 <씨(氏)>를 고루 조사하여 적은 것이 아니라 <씨(氏)>만이 기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동국여지승람>에 있어서의 <성씨>라 함은 <성>과 <씨>의 복합어(複合語)로서의 뜻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씨>만을 뜻하는 단의어(單義語)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즉 한성부(漢城府)에 겨우 11개 성이 적혀 있을 뿐이요, 개성(開城)에는 6 성, 평양에는 1 성, 그리고 여진족으로부터 탈환한 은성(檼城), 부령(富寧), 경흥(慶興),경원(慶源), 경성(鏡城) 등지에는 한 성도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없다. 이로써도 <동국여지승람>에는 양반만이 기록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이조(李朝) 중엽까지만 해도 상민이나 천민의 성은 성씨로 인정받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종 초기의 호적을 보면 양반의 처에게는 김씨(金氏), 이씨(李氏), 등 <씨>로 기재되어 있는데 반해 서민 이하의 처에게는 민성(閔姓), 안성(安姓), 등 <성(姓)>으로 차별 기재되어 있다.

유학(幼學 – 文科의 가문으로 아직 등과하지 않은 선비)이나, 한량(閑良 – 武科의 가문으로 아직 등과하지 않은 선비)의 처도 역시 씨(氏)로 기재 되어 있으나 업유(業儒 – 서자로서 유학과 같은 신분)나 업무(業武 – 서자로서 한량과 같은 신분)의 처는 마찬가지 <성(姓)>으로 차별 기재 되어 있다.

<한수재집(寒水齋集)> 과 <백사집(白沙集)>에 보면, 양반의 서녀(庶女)에게 <씨>를 쓴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론을 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씨>가 뜻하는 계급관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첩(妾)에 대해서도 <씨>를 쓴 문헌이 종종 발견되는데, 이는 첩이라도 양반사가(兩班士家)의 출신일 수 있고, 또 제 2의 처로서 우대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안다.

이같이 씨, 성의 차별은 죽은 후 신주(神主)에서도 엿볼 수 있다.

顯祖妣淑夫人 麗興閔氏之神位

顯妣孺人 淸風金氏之神位

顯妣孺人 水京白姓之神位

이 구분은 엄격했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는 시위에게만은 상민일지라도 <씨>로 해도 무방하다는 관례가 되어 있다.

♣ 創氏 제 1호 宋秉畯.

양복을 입을 때 이외에는 일본 옷인 두 겹 하오리에 센다이 히라를 입고 다니던 내부대신 송병준은 우리나라 최초로 창씨개명을 한 사람이었다.

이미 북해도에서 인삼 장사를 할 때부터 창씨를 했으니까 말이다.

<노다헤이지로(野田平次郞)>, 그것이 일본이름이었다. 그래서 기생방에 가면 모두 모두 노다(野田)대감이라 불렀다.

“송 대감 조선 옷 풍채 좀 보고 싶다.”고 기생이 익살을 부리면,

“나는 조선 풍속 습관이 어울리지 않고 나의 조선 이름은 촌티가 난다.”

고 억지 변명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창씨(創氏) 풍조는 외세(外勢)를 업으려는 사대파(事大派)에서부터 일어났다. 일본은 통감정치 때 창씨 명으로 가장 많았던 가장 많았던 것은 이등(伊藤), 장곡천(長谷川)이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나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의 위세를 빌리려는 속셈에서였음을 말할 여지도 없었다.

1890년에 노국 세력이 득세했을 때 당시 노국 공사였던 웨베르의 한국명 위패(韋貝)의 <위(韋)>성을 명함에 찍어 갖고 다니며, 위패의 양자라고 사칭하는 사람이 어찌나 많았던지 노국공사 측에서도 그 단속을 내부(內部)에 의뢰하기까지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 河馬가 河氏 가 된 두부장수

1940년 일제는 사법상(司法上)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고 창씨제도를 공포하여 일본이름으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름과 성을 어떤 수로든지 보존하여 갖은 애를 다 썼다.

김씨는 김촌(金村), 김전(金田), 등, 안(安)씨는 안천(安川), 안전(安田), 등으로 이(李)씨 글씨를 헐어 목자(木子), 최(崔)씨는 산가(山佳), 박(朴)씨는 목호(木戶)로 하는 식으로, 어디까지나 본성을 보존하려고 하는 이들이 많았다.

남양 홍씨(南陽洪氏)가운데, 본관 고장인 남양의 명산 비봉산(飛鳳山)의 이름을 따서 비산(飛山)이라는 이가 있는가 하면, 경주 이씨(慶州李氏) 가운데는 신라의 음을 따 백목(白木)이라는 창씨한 이도 있다.

성(姓)뿐만 아니라 이름 역시 보존하려 무척 애를 썼다. 탁원(鐸源), 탁호(鐸浩)형제는 원일(源一), 호이(浩二)로 바꾸었고, 은정(銀貞), 은수(銀秀) 자매는 정자(貞자) 수자(秀子)로 고쳐 될 수 있는 대로 본 이름을 버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세게 제 2차 대전이 절정에 달하자 일본은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이나 이른바 <황국신민선서(皇國臣民宣誓)>를 외지 못하는 사람은 자동차도 타지 못하게 하였다.

장수에서 두부 장사를 하는 하씨(河氏)란 분이 아버지 대상(大祥)을 앞두고 이 두 가지 조건 때문에 차를 탈 수 없어 울상을 짓고 서성대던 기억이 난다. 차 문 앞에 지켜 서 있던 일본 순사가, 그리 길지 않은<황국신민선서(皇國臣民宣誓)>를 외지 못하자,

“하마(河馬)같은 놈, 하마라고 이름 짓는 것이 어때”

하면서 밀어 냈던 것이다. 일본 순사가 나오는 대로 욕으로 한 말인데 고지식한 하씨는 하마란 글자를 써달라고 해 가지고 그길로 갖고 가서 <하마>란 창씨를 하였다. 물론 그 이튿날에는 차를 탈 수 있었다. 그 뒤 그 아들이 성장하자 <하마(河馬)> <하마하씨(河馬河氏)>로 놀림 받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름을 가지고 있던 계급사상, 사대사상 그리고 무저항사상 등, 한국사상의 고유한 정수(精髓)를 역력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진짜 개화 백년사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