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영운 - 민영진2023-02-05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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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운(閔영운)경사
경상남도
"민영운 경사는 1924년 8월 25일 경상남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경상남도경찰서 전경 제3전두대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운 경사가 경찰에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 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치안질서가 혼란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38도선이 붕괴되고,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국군은 북한군의 계속적인 공세로 후퇴를 거듭한 후 낙동강선에서 경찰과 합동작전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민영운 경사와 경상남도경찰국 전경대원들은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총공세를 저지하였다. 이어서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반격작전을 개시하자 낙동강 전선에서 패퇴하여 미처 철수하지 못한 북한 정규군과 지방의 공비들이 합세하여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있었다. 1953년이 접어들자 공비들은 치안질서를 교란하고 식량을 획득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출몰하여 민가약탈을 자행했다. 민영운 경사와 경상남도경찰국 전경대원들과 함께 상부의 명에 따라 공비를 토벌하기 위하여 산청군 지리산지역에 투입되었다. 민영운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공비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역에 배치되어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공비 한 무리가 식량을 약탈할 목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공비무리가 유효사거리 내에 접근하자 민영운 경사와 경상남도경찰국 전경대원들은 일제히 기습사격을 했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대부분의 공비는 섬멸되고 소수는 도주했다. 그러나 1953년 1월 19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산청지구에서 공비와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운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고(경찰2-508-112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21-063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운(閔永云)하사
강원도 춘천시 남면
"민영운 하사는 1925년 4월 23일 강원도 춘천시 남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4월 26일 제주도 모슬포에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기초훈련을 수료한 민영운 하사는 제8사단 제10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운 하사가 소속된 제8사단은 호남지구일대의 공비토벌작전을 2차에 걸쳐 성공적으로 마치고 3차 공비토벌작전을 전북 순창군 백련산·운장산·팔공산·성수산·장안산 등에서 수행했다. 그 결과 병참선을 확보하고 후방지역의 치안을 확립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민영운 하사의 제8사단은 1952년 2월 초에 육군본부 직할로 배속 전환하여 전주-퇴계원-부평리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동 후 3월 15일까지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한 후 3월 하순부터 미 제10군단에 배속 전환되어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로 이동하여 미 제1해병사단의 노전평 북방 854고지, 812고지 작전지역을 인수했다. 민영운 하사와 제10연대 장병은 작전지역을 인수한 후 5월 1일까지 북한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미 제5공군의 근접 항공지원과 미 제7함대의 함포지원하에 하루 평균 1천여 발의 포격을 가하는 포격전을 전개했다. 또한 적정파악을 위한 소규모 수색 정찰전을 반복했다. 민영운 하사의 제10연대는 노전평 지역에서 수색정찰, 야간기습 및 매복 및 소부대전투를 수행하면서 방어진지를 고수했다. 북한군 제45사단은 9월 21일 저녁 6시부터 812고지와 854고지에 대한 공격준비포격을 실시했다. 제10연대는 854고지를 빼앗겼다가 야간 공격을 개시하여 새벽에 다시 탈환했다. 어둠을 헤치며 공격에 앞장섰던 민영운 하사는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1952년 9월 23일 27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운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3-ㅁ-08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윤(閔영윤)근로대원

"민영윤 근로대원은 6·25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7월 근로대원으로 소집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이나 생업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해 전투를 수행했다. 근로대원으로 소집된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 전투요원으로 소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민영윤 근로대원은 제200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윤 근로대원은 부대와 함께 이동하고 전투를 수행하면서 후방지원을 담당했다. 민영윤 근로대원이 주로 수행한 임무는 후방지역의 교량 및 도로보수, 탄약과 군 장비의 전선 운반, 기타 기술근무 등으로 전투부대들이 전투임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온갖 궂은 지원들을 전담했다. 민영윤 근로대원과 동료들이 안전한 후방지대에서 근무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노무부대’ 혹은 ‘지게부대’라고 불리며 탄약과 장비들을 등에 짊어지고 최일선 전투지대를 찾아가 탄약과 무기를 보급하는 것도 그들의 주 임무 중 하나였다. 민영윤 근로대원은 적의 포탄의 세례 속에 전투진지를 찾아가 탄약과 장비를 전달했다. 민영윤 근로대원과 노무요원들은 모든 것이 불비한 여건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탄약과 장비를 짊어지고 전투가 이루어지는 최일선을 방문했을 때 적의 포탄세례로 목숨을 잃은 노무요원들이 부지기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넘어진 병사의 소총을 대신 들고 전투에 임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민영윤 근로대원은 언제나 앞장서서 임무를 수행하던 대원이었다. 민영윤 근로대원은 어떠한 전투상황에도 변함없이 전투현장을 찾아 보급품을 나르며 전투수행을 지원했다. 그날도 민영윤 근로대원은 전투현장을 찾아가 임무수행에 매진하던 중 적의 포탄에 맞아 1953년 5월 4일 중부전선 전투현장에서 꿈 많은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윤 근로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36-53-196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윤(閔영윤)근로대원

"민영윤 근로대원은 6·25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50년 10월 근로대원으로 소집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이나 생업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해 전투를 수행했다. 근로대원으로 소집된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 전투요원으로 소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민영윤 근로대원은 제200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윤 근로대원은 부대와 함께 이동하고 전투를 수행하면서 후방지원을 담당했다. 민영윤 근로대원이 주로 수행한 임무는 후방지역의 교량 및 도로보수, 탄약과 군 장비의 전선 운반, 기타 기술근무 등으로 전투부대들이 전투임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온갖 궂은 지원들을 전담했다. 민영윤 근로대원과 동료들이 안전한 후방지대에서 근무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노무부대’ 혹은 ‘지게부대’라고 불리며 탄약과 장비들을 등에 짊어지고 최일선 전투지대를 찾아가 탄약과 무기를 보급하는 것도 그들의 주 임무 중 하나였다. 민영윤 근로대원은 적의 포탄의 세례 속에 전투진지를 찾아가 탄약과 장비를 전달했다. 민영윤 근로대원과 노무요원들은 모든 것이 불비한 여건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탄약과 장비를 짊어지고 전투가 이루어지는 최일선을 방문했을 때 적의 포탄세례로 목숨을 잃은 노무요원들이 부지기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넘어진 병사의 소총을 대신 들고 전투에 임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민영윤 근로대원은 언제나 앞장서서 임무를 수행하던 대원이었다. 민영윤 근로대원은 어떠한 전투상황에도 변함없이 전투현장을 찾아 보급품을 나르며 전투수행을 지원했다. 그날도 민영윤 근로대원은 전투현장을 찾아가 임무수행에 매진하던 중 적의 포탄에 맞아 1953년 5월 4일 김화지구 전투현장에서 꿈 많은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윤 근로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25-2-68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은(閔永殷)일등병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민영은 일등병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2일 분연히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제7사단에 배치되었다. 민영은 일등병이 소속된 제7사단은 영천지구 전투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치며 낙동강방어선을 지켜냈다. 이어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반격으로 전환했다. 제7사단은 충주를 거쳐 포천으로 진출해 38도선을 회복했다. 제7사단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두 차례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해야 했다. 중공군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새로운 양상의 전쟁이었다. 민영은 일등병과 제7사단 장병은 평창-하진부리-속사리-인제 등에서 중공군의 제3차, 제4차, 제5차, 제6차 공세를 차례로 저지하며 임무를 완수했다. 특히 제6차 공세에서 중공군은 민영은 일등병이 소속된 제7사단과 제3사단 및 제9사단을 격파하고 속사리까지 70㎞를 돌파했으나 국군과 유엔군에게 퇴로가 차단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민영은 일등병이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일대로 진출할 무렵인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담은 초반부터 벽에 부딪쳤다. “군사분계선을 어디로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38도선으로 원복을 주장한 공산군 측과 현재의 접촉선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유엔군 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협상이 지연되면서 고지쟁탈전이 격화되었고, 한 고지를 두고 하루에도 수차례 주인이 바뀌면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그 시기인 1952년 1월 4일 민영은 일등병은 양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은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9-6-062)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3-ㄹ-09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은(閔泳慇)일등병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민영은 일등병은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 8월 2일 광주광역시 극락동(당시 전남)에서 창설된 제19연대에 입대했다. 민영은 일등병과 제19연대는 후방지역 작전을 수행하다가 1949년 6월 20일 원주로 이동해 제6사단의 예비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 후 민영은 일등병은 전속되어 제7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은 일등병이 38도선 방어전투를 수행하던 중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민영은 일등병이 소속된 7사단은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당시 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무기인 2.36인치 로켓포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관통할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38도선의 대부분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당장 서울이 위태로워졌다. 육군본부는 서울방어를 위해 철수하던 부대와 수도권 부대 그리고 후방지역의 부대까지 모조리 서울 북방 창동 및 미아리 방어선을 사수하도록 명령했다. 민병은 일등병과 장병은 미아리 방어선에서 용전분투했지만 역시 북한군 전차를 격파하지 못했다. 북한군은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남침 3일 만인 6월 28일 서울을 점령했다. 민병은 일등병과 장병들은 미아리 방어선에서 철수하여 한강방어선을 점령했다.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방어하기 위하여 강력한 저항을 했으나 북한군 전차가 7월3일 한강을 도하하게 되자 중과부적이었다. 민병은 일등병과 제7사단 소속 장병들은 한강 방어선에서 건제를 유지하지 못한 채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끈질기게 공격해왔다. 민병은 일등병과 장병들은 북한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철수하던 중 1950년 7월 4일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수원지구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은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3-8-154)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8-ㅌ-01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은(閔영은,閔영근)경사

"민영은(영근) 경사는 1928년 12월 10일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타 경찰서에서 복무하면서 전투를 수행한 후 전경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 제207부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은 경사가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영은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1950년 초 적 인민유격대가 침입하여 후방을 교란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후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불법 기습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국군은 낙동강방어선까지 후퇴하였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다. 퇴로가 차단되어 미처 철수하지 못한 북한군의 일부는 지방공비들과 합세하여 경찰파출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양민을 학살하며, 식량을 약탈하는 등 치안질서를 교란했다. 민영은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후방지역 공비들을 포획·섬멸하기 위해 남원지역에 투입되었다. 공비들이 지서 습격을 위해 이동한다는 주민신고를 접수하고 대원들과 함께 출동했다. 민영은 경사는 공비들이 반드시 통과할 지역에 대원들과 같이 배치되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민영은 경사는 공비들이 접근하자 기습사격을 했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민영은 경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민영은 경사는 1951년 10월 30일 남원군 운봉지구 전투에서 공비와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은(영근)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3-ㅂ-068)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주(閔永珠)일등병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민영주 일등병은 1928년 8월 7일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해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1950년 8월 16일 부산시 북구 구포에 위치한 제3훈련소에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민영주 일등병은 카투사(KATUSA, 한국에 파병된 미군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한국군) 요원으로 선발되어 연합군지원한국군 미 제8군에 배치되었다. 민영주 일등병이 소속된 카투사는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탄생한 제도였다. 평시 상태였던 미군은 감소 편성,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부족했다. 반면 한국의 인적자원은 충분했지만 장비와 물자가 부족했다. 이런 요인들에 따라 한국에 파병되는 유엔군의 부족한 병력을 한국군 병력으로 보충시켜 유엔군의 전투력 발휘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민영주 일등병은 미 제8군사령부 예하부대에 소속되어 북진작전에 참가했다.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한 유엔군은 황해도 금천일대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하고 10월 19일 평양에 입성했다. 10월 말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나 계속된 기습공세로 인해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하였다. 민영주 일등병과 카투사 병사들은 미군과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지만 용맹을 발휘했다. 그들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을 대신해 수색 및 정찰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민영주 일등병은 38도선으로의 진격작전과 북진작전에 참가하여 한국군의 용맹을 대표하기 위해 매 전투마다 앞장서며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예상치 못한 개입으로 북한지역에서 38도선으로 철수작전 중에 있던 1950년 12월 6일, 민영주 일등병은 사리원 지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주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7-ㅁ-08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준(閔永俊)하사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
"민영준 하사는 1927년 3월 9일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1월 7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안전하게 양성하기 위해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민영준 하사는 제2사단 제17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준 하사가 소속된 제17연대는 그에 앞서 1950년 11월 7일 서울에서 제2사단이 창설되면서 서울로 귀환한 대통령실 및 정부 청사를 경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경기도 북부지역의 무장공비를 소탕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당시 무장공비는 단순한 게릴라 수준을 넘어 정규군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이 차단된 북한군 주력과 추가로 침투한 북한군 병력이 아군의 후방 산악지역에서 도발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영준 하사가 소속된 제17연대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인해 충청북도 제천까지 철수해 충북 및 경북 일원의 무장공비소탕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경상북도 안동 일대, 영천과 청송의 보현산일대, 영주의 풍기일대, 충청북도 보은의 속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는 무장공비의 공세는 집요했다. 민영준 하사가 소속된 제2사단 장병은 정규전에 임하는 각오로 용전분투했다. 제2사단은 1951년 4월 말까지 경북 및 충북 일원에서 암약하는 무장공비의 주력을 소탕한 후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와 적근산 일대로 진출해 전·후방 작전을 계속했다. 1952년 3월 30일 작전지역을 미 제40사단에 인계하고 사창리로 이동하였다. 민영준 하사는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 작전을 실시하다가 침투한 적의 공격을 받고 1952년 4월 22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김화지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준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6-8-06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21-ㄹ-01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진(閔영진)하사

"민영진 하사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1년 2월 부산, 경주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육군 직할부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진 하사가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국군의 주력은 한강 북쪽에서 붕괴되었다. 소수의 국군은 참전한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지연전을 계속하며 7월 말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해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저지했다. 이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반격으로 돌입해 38도선을 회복한 후 10월 초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10월 말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기습공세로 인해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철수해야 했다. 민영진 하사는 그 시기에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어 각종 지원임무와 함께 전투임무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민영진 하사가 부대에 도착했을 때 국군은 중공군 및 북한군과 공방전을 거듭하며 38도선을 향해 반격작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민영진 하사와 같이 입대한 신병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전사하는 사례도 허다했다. 군번은 고사하고 부대원 명부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민영진 하사는 각종 지원임무가 주 임무였지만 전투임무에도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수행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38도선 일대의 전투는 가열되었다. 휴전에 앞서 보다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 더욱 가열되었다. 중공군과 공방전을 거듭하며 용전분투하던 민영진 하사는 1952년 11월 19일 중부전선에서 전투 중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진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7-ㅎ-00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진(閔泳珍)경사
충청남도 금산군
"민영진 경사는 1917년 8월 26일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타 지역 경찰서에서 복무를 하면서 공비토벌작전에 수차례 참가한 후 전라북도경찰국 무주경찰서에 소속되었다. 민영진 경사가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영진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적 인민유격대가 침입하여 지방공비와 합류한 후 후방지역을 교란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6월 25일 북한군이 불법 기습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북한군 제6사단이 서부지역으로 우회하여 목포, 나주 방향 각각 진격하자 산악지역에서 거점을 편성하고 있던 공비들이 북한군의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경찰서 습격, 양민학살 등 치안을 교란했다. 민영진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공비들의 치안교란 행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민영진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무주 적상산 일대에서 공비들을 포획·섬멸하는 작전에 투입했다. 수시로 출몰하는 공비들의 은거지역을 수색하여 섬멸하고, 오열을 색출하여 치안질서를 확립했다. 한편 공비들이 양민을 학살한다는 주민신고를 받고 출동하였다. 양민들을 위협하던 공비들과 마주쳤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화기와 소총으로 무장한 공비들의 저항은 강력했다. 민영진 경사는 대원들을 지휘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1950년 7월 20일 무주 적상면 북창리에서 공비와 교전 중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진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7-ㄲ-00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영웅 민영운 - 민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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