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영석 - 민영순2023-02-0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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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석(閔영석)경사
강원도
"민영석 경사는 강원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타 지역 경찰서에서 복무를 하면서 공비토벌에 참가한 후 강원도경찰국 본국 사찰과에 소속되었다. 민영석 경사가 경찰에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 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치안국 기구를 행정·정보·작전·통신 등 4개의 전투편제로 개편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영석 경사와 강원도경은 1950년에 들어서면서 적 인민유격대가 태백산 일대에 계속 침입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당시 경찰은 시흥 육군보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경찰간부들을 중심으로 제8·제9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영월과 춘천지역에 배치했다. 이후 적 유격대와 지방공비들을 제압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민영석 경사는 강원도경과 함께 1950년 6월 10일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에서 38도선 접경인 경기·강원 2개 도에 비상경비태세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고 춘천지역에서 북한군의 동태를 주시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38도선을 넘어 6·25전쟁을 일으켰다. 북한군 제2사단은 38도선의 국군 경계진지를 격파하고 춘천지역으로 진격을 계속해왔다. 민영석 경사는 당시 춘천경찰서 관내 경찰파출소장으로 근무했다. 북한군은 춘천으로 진격을 계속해왔다. 민영석 경사는 국군과 군경합동작전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작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운명의 1950년 6월 27일 민영석 경사는 춘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석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050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석(閔榮石)일등병
평안남도 양덕군 동양면
"민영석 일등병은 1933년 2월 21일 평안남도 양덕군 동양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하자 1951년 4월 1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항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제9사단 제30연대에 배속되어 매봉산전투, 현리지구 철수작전, 보개산 전투에서 다대한 전공을 세우고, 김화지구 계웅산전투에 긴급하게 투입되었다. 민영석 일등병이 투입된 당시 전황은 평강을 정점으로 하고 김화-철원의 철의삼각지를 국군과 유엔군이 제공·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전황에서 중공군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김화 북쪽 평강선에서 아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철의삼각지를 되찾으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사단은 민영석 일등병의 제30연대를 선발대로 김화지구로 이동시켜 학포리 북방 507고지를 중심으로 계웅산 좌측지역에 전진 배치한 후, 제28·29연대를 금화 남쪽으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민영석 일등병과 연대는 6월 24일 새벽에 고지를 향해 3개 방향에서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으나,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일단 철수하여 전력정비 후, 다시 맹공을 펼쳐 정상을 탈환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빼앗긴 고지를 되찾기 위해 6월 26일 인해전술로 기습적으로 공격해 옴으로써 아군은 중과부족으로 고지정상에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영석 일등병과 연대 장병들은 26일 오후 부대정비 후 또다시 고지를 향해 돌격전을 전개했다. 당시 민영석 일등병과 연대 장병들은 수류탄이 난무하고 피아를 가릴 수 없는 처절한 육박전과 돌격전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쓰러진 전우를 넘어 불굴의 투지를 불태운 끝에 7시간 만에 고지를 재탈환했다. 이날 민영석 일등병은 치열한 돌격전 중에 적의 총상을 입고 후방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하던 중, 7월 15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김화지구 계웅산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수습해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4-2-239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8-ㅇ-07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석(閔泳錫)일등병
경상남도
"민영석 일등병은 경상남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12월 23일 육군에 입대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대구·부산·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는데, 민영석 일등병은 제8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석 일등병이 소속된 제8사단은 춘천지구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강력한 협공에 밀려 황강리로 이동한 후 부대정비를 실시했다. 2월에 들어서자 제8사단이 소속된 미 제10군단장은 중공군 제19병단의 행동을 탐색하는 한편 홍천과 용두리를 연하는 선을 탈환하여 군단의 총반격작전에 필요한 교두보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민영석 일등병의 제8사단이 소속된 미 제10군단은 중동부전선에 당시 중공군 제19병단 10만 대군이 춘천까지 남침한 경로에 대해서는 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천 침입 이후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1개 사단이라도 희생시켜 새로운 적군의 상황과 능력을 탐지하려는 과감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제8사단은 임무를 부여받고 북진공격을 개시했다. 민영석 일등병과 제8사단은 적군의 상황과 능력을 탐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2월 4일부터 6일까지 강원도 원주시 주산리·풍수원·오음산 남쪽 십일천까지 진격하면서 북한군을 격퇴했다. 7일부터 8일까지 사단 및 제16연대 지휘소를 횡성에 설치하고 각 연대는 정면의 적을 맹렬한 공격으로 격퇴했다. 완강히 저항하는 적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11일까지 격전을 벌였다. 민영석 일등병의 제8사단은 12일에는 사단 예비대까지 투입하여 오음산에서 중안리까지 약 18㎞의 광정면에 병력을 전개했다. 전날 밤부터 병력을 증강한 중공군이 12일 공격을 개시하자 제10연대장 권태순 대령이 전사할 정도로 격전이 벌어졌다.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영석 일등병은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2월 12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3-4-14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0-ㅌ-08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선(閔泳善)하사
경상남도 산청군 오부면
"민영선 하사는 1930년 7월 20일 경상남도 산청군 오부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3월 29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안전하게 양성하기 위해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민영선 하사는 제5사단에 소속되었다. 당시 전황은 1951년 9월 4일부터 동년 10월14일까지 가칠봉에서 격전을 치렀다. 민영선 하사와 제5사단은 육본명령에 의해 1951년 10월 20일부로 미 제10군단에서 배속해제와 동시에 육본직할로서 강원도 양양에서 1952년 1월 13일까지 교육훈련에 들어갔다. 민영선 하사가 동부전선에 배치될 때는 판문점에서 휴전을 위한 협상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전선에서 고지쟁탈전은 더욱 격화되고 있었다. 양측은 회담장에서 상대방을 압박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한 장차 휴전협정 체결 시 유리한 방어선을 획득할 목적으로 고지쟁탈전에 열을 올렸다. 따라서 야전에서 긴장은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민영선 하사가 소속된 제5사단은 사단지휘소를 고성군 거진면 대대리에 배치했다. 동해안에서 554고지에 이르는 주저항선을 확보했다. 사단이 담당한 동부전선은 1951년도 초반에 2개 사단이 담당했었다. 한때 북한군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게 된 월비산과 351고지를 연하는 곳이다. 민영선 하사는 사단과 함께 351고지일대를 방어하다가 11월 10일 제15사단에 방어진지를 인계하고 간성 수동리로 이동하여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과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던 중 민영선 하사는 1952년 12월 29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고성지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선 하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54년 10월 15일 그에게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25644)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32-1-24212)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35-ㄴ-009) 관리하고 있다."

민영설(閔永雪)하사
경기도 이천시
"민영설 하사는 1930년 9월 4일 경기도 이천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7월 18일 충청남도 논산에 신설된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대규모로 양성하기 위해 제주도의 제1훈련소와 함께 1952년 5월 4일부로 논산에 제2훈련소를 개소했는데, 훈련소를 수료한 민영설 하사는 제8사단 제16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설 하사가 소속되었던 제8사단 제16연대는 강원도 인제군 서화리지역의 812∙854고지를 탈환한 후 미 제45사단에 인계했다. 이어 수도사단의 수도고지·지형능선지역을 인수하고 1952년 10월 중순부터 1953년 5월 말까지 수도고지·지형능선의 진지를 강화하면서 전초진지쟁탈전을 전개했다. 민영설 하사의 제16연대는 중공군의 6월 공세로 수도고지∙지형능선에서 약 1km 후방에 새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 연대정면에 적 2개 중대 규모가 출현하여 제2대대가 격퇴시켰다. 각 대대 정면에 적1개 대대가 내침하여 연대지휘소가 포위되었으나, 백병전으로 물리쳤다. 민영설 하사와 제16연대 장병은 7월 13일 금성돌출부 선단지역 612고지 주저항선으로 중공군 제67군 예하 4개 사단이 공격해 오자 격전을 치렀다. 퇴로마저 차단될 위기에 처하자 금성천 남안의 541-666-723고지로 철수하여 새 주저항선을 형성했다. 민영설 하사는 제16연대 장병과 함께 철수한 후 7월 15일 금성천을 목표로 총반격을 개시했다. 16일부터 17일까지 사단의 우측 전방에서 금성천 남안까지 진출하여 사단의 반격목표를 점령했다. 그 후 정찰전으로 전환하여 전선의 변동 없이 금성천을 경계로 중공군과 대치하며 휴전을 맞았다. 민영설 하사는 전초진지쟁탈전에서 항상 앞장서서 적을 물리치는 수훈을 세웠으나,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1953년 7월 21일 23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강원도 김화지구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설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11-676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6-ㄹ-06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성(閔永成)일등병
경기도
"민영성 일등병은 1929년 11월 10일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1년 3월 14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제7사단에 배치되었다. 민영성 일등병의 입대를 전후한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9월 말에는 3개월 만에 서울을 탈환하고 이어 38도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 외형상으로 전쟁 발발 이전 이전의 상태로 환원되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일제히 38도선을 돌파하여 반격에 돌입했다. 민영성 일등병의 소속부대인 제7사단은 10월 말 평안북도 개천까지 진격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청천강까지 후퇴해야 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통일의 꿈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11월 24일 다시 한 번의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또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했다가 1951년 1월 말부터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민영성 일등병은 2주간의 기초훈련을 마치고 제7사단에 배치를 받아 영월부근에서 반격작전에 참전했다. 민영성 일등병과 제7사단 장병은 평창 일대에 도달하여 반격작전을 계속하면서 유엔군사령부가 계획한 ‘라운드업(Round Up)작전’에 가담해 하진부리, 속사리 일대로 진격을 계속했다. 민영성 일등병과 장병은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민영성 일등병과 제7사단 장병은 선두에 서서 평창일대의 산악지역을 차근차근 점령해 나가며 인제군 기린면 방향으로 진출을 계속했다. 그 시기인 1951년 5월 5일 민영성 일등병은 인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성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2-1683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18-ㅊ-01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수(閔영수)일등병
경기도
"민영수 일등병은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9년 5월 17일 제18연대에 입대한 후 수도경비사령부에 소속되어 서울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민영수 일등병은 수도권 일원의 주요 시설경계와 무장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다가 1950년 12월 15일 제18연대 장병과 함께 제3사단에 예속되었다. 민영수 일등병이 소속되었던 제3사단은 1950년 12월 20일 홍천에 집결한 후 제9사단의 진지를 인수했다. 제18연대는 38도선상의 적을 격멸하기 위해 15일부로 제3사단에 예속되어 사단 좌측을 담당했다. 그러나 31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접 사단이 무너지자 제18연대는 후퇴하여 1951년 1월 4일까지 평창에 집결하여 차기작전을 준비했다. 그 후 19일까지 6일 동안 남대리의 적 제31사단을 격파하고 의풍리로 진격했다. 민영수 일등병과 제18연대 장병은 2월 23일부터 3월 4일까지 강림-안흥-봉화산 진격전에 참전했다. 제18연대는 1062고지·632고지·매화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 3월에는 봉화산을 목표로 진격했다. 3월 9일부터 12일까지 하진부 공략전을 전개하고, 17일부터 22일까지는 유천리부근 전투에 참전하여 적 제10사단을 38도선으로 축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민영수 일등병은 제18연대 장병과 함께 3월 26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30일 서림리를 확보했다. 4월 5일까지 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선상 이남의 적을 섬멸하기 위해 제18연대는 4월 1일부터 점봉산 등지로 북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4월 7일부터 10일까지 제18연대가 덕적리지구 공략전으로 북한군 제45사단 제1연대에 큰 타격을 가했다. 제18연대는 제22·제23연대와 함께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638고지·1226~1145고지·1044고지에서 적의 공세를 저지하다가 현리지구 철수전을 전개했다. 고지공방전에 용전분투하던 민영수 일등병은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치료하던 중 1951년 6월 28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수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2-16832)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13-ㅋ-05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수(閔泳洙)일등병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민영수 일등병은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영수 일등병은 제6사단 제2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수 일등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경상북도 군위·신령 지역까지 조직적으로 철수하여 또다시 북한군과 격돌하였다. 당시 제6사단은 운산동-화산간 15Km의 방어정면을, 좌측에는 제1사단이 가산-신원간 13Km의 방어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민영수 일등병은 이 당시 북한군 제8사단이 신령을 거쳐 영천을 점령하려는 악착스러운 공격을 동료장병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저지하였다. 결국 북한군의 공격은 좌절되었고 영천 점령을 위해 동시에 공격에 나셨던 북한군 제15사단은 고립되어 괴멸되었다. 민영수 일등병과 제6사단 장병들은 찌는 듯한 무더위와 열악한 보급지원하에서도 오로지 조국수호를 위한 투철한 애국심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들은 악귀처럼 덤비는 북한군을 근접전투와 처절한 백병전으로 물리쳤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심지어 고지에서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조국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장병들은 열악한 전장환경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민영수 일등병의 제6사단은 대구 외곽선인 신령지구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대구를 점령하려던 적의 기도를 결국 좌절시켰다. 또한 이 전투는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영수 일등병은 1950년 7월 25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신령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수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8-5-11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38-ㅁ-06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수(閔泳洙)하사

"민영수 하사는 1928년 2월 4일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9월 5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한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안전하게 양성하기 위해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민영수 하사는 수도사단 제1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수 하사가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휴전협상 테이블에서는 포로송환 문제로 치열한 대치국면이 조성되어 있어 전투는 더욱 가열되었다. 공산군 측은 포로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유엔군은 포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유송환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담장의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과 협상이 타결될 경우 유리한 지역에 방어선을 설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양측은 고지쟁탈전에 매달리고 있었다. 민영수 하사와 국군은 더욱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8월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고지쟁탈전은 1952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정교하여지고, 그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따라서 더욱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민영수 하사가 소속된 수도사단을 포함해 모든 부대들이 공산군 측에 압력을 가하고 미래의 휴전선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더 많은 피를 흘리는 고지쟁탈전을 기꺼이 감수했다. 민영수 하사 등 장병 모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민영수 하사는 수도고지-지형능선전투 등 김화 및 금성지구의 고지쟁탈전에서 모범을 보이며 앞장서서 솔선수범했다. 그러나 민영수 하사는 1953년 7월 14일 금성지구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11-676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숙(閔영숙)일등병

"민영숙 일등병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의정부에서 동두천-포천일대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1연대에 입대했다. 민영숙 일등병이 동두천 일대에 배치되어 근무하고 있던 의정부지역에서 1949년부터 북한의 도발은 심상치 않았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남침으로 연결되었다. 민영숙 일등병이 근무하고 있던 동두천 축선에서 북한군은 40여대의 전차와 제4사단을 투입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방어하는 국군부대는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민영숙 일등병과 제1연대의 방어선은 당일 오전 중으로 무너졌다. 이후 후방에서 긴급 증원된 부대들의 역습도 무위로 끝났다. 민영숙 일등병과 제1연대는 분산된 채 후방으로 철수해 한강을 건넜다. 한강 남쪽에서 혼성부대로 재편성된 민영숙 일등병은 한강방어선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7월 3일 북한군의 전차가 도하하자 다시 후퇴를 계속했다. 7월 5일에는 수도사단 제1연대로 재편성되었다. 민영숙 일등병과 연대는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해 안강·기계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을 격파하는 수훈을 세웠다.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은 집요했다. 민영숙 일등병은 신병들을 지휘해 북한군과 공방전이 반복했다. 9월 15일에는 9월 15일 국군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반격에 나섰다. 민영숙 일등병은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조국통일의 꿈을 안고 낙동강방어선을 박차고 청송-영월-평창방향으로 진격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하던 민영숙 일등병은 1950년 9월 24일 강원도 평창지구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숙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41-2-15492)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숙(閔永淑)일등병
인천광역시 옹진군
"민영숙 일등병은 인천광역시 옹진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해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1950년 8월 31일 부산시 북구 구포에 위치한 제3훈련소에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민영숙 일등병은 카투사(KATUSA, 한국에 파병된 미군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한국군) 요원으로 선발되어 연합군지원한국군 미 제8군에 배치되었다. 민영숙 일등병이 소속된 카투사는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탄생한 제도였다. 평시 상태였던 미군은 감소 편성,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부족했다. 반면 한국의 인적자원은 충분했지만 장비와 물자가 부족했다. 이런 요인들에 따라 한국에 파병되는 유엔군의 부족한 병력을 한국군 병력으로 보충시켜 유엔군의 전투력 발휘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민영숙 일등병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의 왜관으로부터 마산까지 120㎞구간에 배치되어 전투를 수행했다.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과 아군의 공방전은 치열했다. 북한군은 남한 영토의 90%를 점령한 후 나머지 10%를 점령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대구, 창녕, 마산을 목표로 총공세를 계속했다. 민영숙 일등병과 유엔군은 일본에서 지원되는 유엔군 해·공군과 미 본토에서 증원되는 병력의 지원을 받아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민영숙 일등병과 카투사 병사들은 미군과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지만 용맹을 발휘했다. 그들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을 대신해 수색 및 정찰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민영숙 일등병은 한국군의 용맹을 대표하기 위해 매 전투마다 앞장서며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낙동강에서 전투가 더욱 격화되고 있던 시기인 1950년 9월 10일, 민영숙 일등병은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숙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0-7-14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9-ㅁ-07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순(閔永淳)일등중사
경기도 평택시 지제동
"민영순 일등중사는 1932년 2월 29일 경기도 평택시 지제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9년 7월 20일 강원도 원주에서 창설된 제6사단에 입대했다. 당시 제6사단은 춘천 및 홍천 북쪽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민영순 일등중사는 제7연대로 전속되면서 1950년 7월 음성-괴산부근전투, 동락리전투에 투입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 민영순 일등중사는 이후 10월 25일 창설된 제9사단 제29연대로 전속되어 11월 경북 김천지구 공비토벌작전 이어 2월에 정선-창리전투, 3월에는 송계리지역에 침투한 적 소탕작전과 현리지구 철수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계웅산 전투 및 김화지구전투에 또다시 투입되었다. 민영순 일등중사가 참전한 당시 전황은 평강을 정점으로 하고 김화-철원의 철의삼각지를 국군과 유엔군이 제공·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함에 따라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공군은 김화 북쪽 평강선에 증원하여 투입하고 아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진지를 구축함과 동시에 철의삼각지를 되찾으려는 기도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영순 일등중사와 사단은 보개산 및 고대산 지구 전투에서 승전고를 올리고, 제30연대를 선발대로 김화지구로 이동시켜 학포리 북방 507고지를 중심으로 계웅산 좌측지역에 전진 배치했다. 민영순 일등중사의 연대와 제28연대를 금화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공군과의 일전에 대비하면서 전열을 정비했다. 민영순 일등중사와 연대 장병들은 6월 24일 새벽에 고지를 향해 3개 대대가 3개 방향에서 일제히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민영순 일등중사와 연대 장병들은 수차례에 걸쳐 정상을 향한 돌격전을 시도하였으나, 고지를 점하고 있던 중공군이 증강된 병력으로 완강하게 저항함에 따라 치열한 교전 끝에 일단 철수하여 전력을 정비했다. 다음 날인 25일 오후에 제2대대를 선두로 맹공을 감행하여 끝내 고지 정상을 탈환했다. 이날 전투에서 민영순 일등중사는 치열한 혈전에서 총상을 입고 수많은 전공을 뒤로한 채, 김화지구 계웅산전투에서 애석하게도 고귀한 목숨을 국가에 바쳤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순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902)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8-ㅇ-06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영웅 민영석 - 민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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