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영만-민영부2023-02-05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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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만(閔永萬)하사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
"민영만 하사는 1927년 4월 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서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5월 17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민영만 하사는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3사단 제22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만 하사가 소속되었던 제3사단은 1952년 1월 7일 양구에서 교육훈련과 부대정비를 실시하던 중 제6사단과 교대하여 김화지구작전에 투입되었다. 이때부터 중공군과 고지 쟁탈전을 수차례 전개하여 주저항선을 고수하였다. 1953년에 접어들자 장병들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 민영만 하사의 제22연대는 6월 11일부터 제5사단에 배속되었는데, 당시 제5사단 전면에는 중공군 제538연대와 제539연대가 아군의 전초진지에 대한 제한된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일차적 목적은 아군 포로를 획득하거나 문서 및 군사 활동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아군은 진내에 침투한 적을 격퇴하거나 포획하여 포로를 획득하려고 하였다. 민영만 하사는 황병동에 집결하여 883고지탈환전투에 투입되었다. 11일 오전부터 치열한 교전에 전개되었는데, 가랑비로 인해 항공지원도 받지 못하여 실패하고, 12일 재역습에도 실패하자 남쪽으로 밀려났다. 이날 11시 경에 제22연대는 제3차 역습을 실시하던 중 공격중지 명령을 받았다. 민영만 하사의 제22연대는 14일 새벽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제6중대가 고립되었다가 날이 밝은 후에 구출되었다. 이날 저녁부터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받고 제22연대의 전선이 돌파되고 제9중대장이 전사했다.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영만 하사는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1953년 6월 16일 26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김화 원동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만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3-2-18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29-ㅈ-02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만(閔泳萬)하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민영만 하사는 1927년 12월 16일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9월 12일 충청남도 논산에 신설된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제38경장비 보충교육연대로 전속되어 포로수용소에서 경비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그는 11월 8일 새로 창설되는 제15사단 제39연대로 전속되어 강원도 간성으로 이동했다. 민영만 하사가 소속된 제15사단은 1953년 1월 28일 고성 일대의 요충지인 351고지와 554고지를 확보하는 것이 임무였다. 사단은 우측에 제38연대를 배치하여 351고지 일대를 방어케 하고, 좌측에 제39연대를 배치하여 554고지 일대를 방어케 했다. 그리고 제50연대는 사단예비로서 산정리 일대에 집결 보유했다. 민영만 하사와 함께 제38연대 장병들은 351고지 일대에 투입되어 진지강화 및 정찰활동을 계속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1953년 6월 휴전협상 타결이 확실해지자 상황은 긴박해졌다. 북한군은 7월 16일 자정 무렵부터 각종 포화의 맹렬한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해 왔다. 민영만 하사와 제39연대는 지체 없이 지원사격을 요청하면서 육박전을 전개했지만 554고지를 지탱할 수가 없어 뒤로 물러났다. 민영만 하사는 앞장서서 554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6차례 공격을 반복했다. 그러나 적은 집중 포화와 동굴진지를 역이용해 강력히 저항했다. 이때 연대 장병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민영만 하사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그는 아군이 351고지의 북한군 진지를 포격하는 상황에서 맹렬히 돌진하여 유개호에 있는 적 여러 명을 사살했다. 그는 선두에서 전진하던 중 북한군의 집중 사격을 받고 1950년 7월 17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고성지구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만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76-ㅎ-06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무(閔영무)일등병
충청북도 영동군
"민영무 일등병은 1927년 12월 23일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대구·부산·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는데, 민영무 일등병은 제8사단 제10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무 일등병이 소속된 제8사단 제10연대는 1951년 1월 2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었다. 북한군 제5군단이 횡성을 경유하여 원주로 공격할 것에 대비해 홍천을 주요 공격목표로 부여받고 2월 5일 횡성지구위력수색작전인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했다. 민영무 일등병의 제10연대는 사단의 목표인 횡성 북방의 적을 격파한 다음 홍천-용두리 선을 확보하도록 했다. 연대는 사단의 중앙에서 성지산을 확보한 후 상오안리-양덕원리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격 3일간은 미군의 화력지원으로 10여 km 전진했으나, 2월 8일부터 적의 완강한 저항과 험준한 지형으로 대삼고지와 오음산을 연하는 선상에서 저지당했다. 민영무 일등병의 제10연대 지휘부는 공격 정면에 중공군 대병력이 기동 중인 것으로 판단하고, 횡성군 공근면 이목동, 장봉리선에서 방어로 전환할 것을 건의했다. 군단장의 오판으로 공격을 강행하다가 2월 12일 중공군 제66군 3개 사단의 공세에 완전 포위되었다. 군단장은 차후 주포리로 철수하도록 명령했으나, 각 연대와 연락이 두절되고 적에게 고립되었다. 민영무 일등병과 제10연대 장병은 분산 철수하는 동안 많은 피해를 입고 대구로 이동해 부대를 재편성했다. 그 후 5월 4일부터 10일까지 전라북도 국사봉·백아산 지역의 공비들을 소탕하는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이때 민영무 일등병은 토벌작전에 용전분투하다가 적의 흉탄을 맞고 치료하던 중 1951년 5월 20일 24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무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5-1-148)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0-ㄲ-03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무(閔永武)일등병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민영무 일등병은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8월 30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민영무 일등병은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제8사단에 배치되었다. 민영무 일등병이 소속되었던 제8사단은 제21연대를 투입하여 북한군 제12사단과 8월 7일까지 안동 일대에서 혈전을 벌이고, 보현산 부근에서 제766부대와도 접전을 벌였다. 8월 13일부터 험준한 지세를 이용한 지연전술로 열세를 극복하며 적의 남진 속도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이때 증원된 북한군 제15사단이 9월 1일 새벽부터 제8사단 제16연대 정면의 봉화봉·602고지·수석봉과 수도사단 제18연대 정면의 구지동으로 쳐들어왔다. 민영무 일등병은 제8사단 장병과 함께 9월 4일부터 영천대회전에 투입되었다. 제21연대는 충효동으로 후퇴한 후 4일에는 보현산 방어선을 포기하고 영천 북방으로 물러나 북한군 제15사단의 남진에 대비했다. 제21연대는 제8사단의 좌일선 부대로서 매곡동 278고지 정상부에서 서측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민영무 일등병의 제8사단 중앙인 제16연대가 5일 후퇴했으나 제21연대는 218고지에서 적을 격퇴하고 257고지도 지켰다. 6일 영천을 빼앗기자 제21연대는 고립되어 고수방어로 진지를 확보했다. 이어 7일 적 제103연대, 8일 제73연대, 9일 제103연대와 제73연대의 공격을 물리쳤다. 10일부터는 총반격에 가담하여 13일까지 적을 몰아내고 영천대회전에 승리했다. 15일부터는 구산동 부근의 적을 공격하며 북진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영무 일등병은 적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1950년 9월 18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무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19-ㅇ-02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무(閔泳武)일등병
대구광역시
"민영무 일등병은 대구광역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강원도 춘천 북쪽에서 38도선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제7연대에 입대했다. 그 후 그는 제6사단 제7연대로 전속되었다. 민영무 일등병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영무 일등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6·25전쟁 발발 이후 당시 북한군 제8사단이 신령을 거쳐 영천을 점령하려는 악착스러운 공격을 동료장병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저지하였다. 당시 부대 장병들은 열악한 전투장비와 빈약한 보급지원하에서도 불타는 애국심으로 부여된 임무수행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이와 같은 국군의 감투정신으로 북한군의 공격은 좌절되었다. 민영무 일등병의 부대는 대구 외곽선인 신령지구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대구를 점령하려던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또한 이 전투는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민영무 일등병의 소속부대도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아군 제6사단 정면의 북한군도 급속도로 붕괴되어 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아군은 적에게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일일 40Km 이상 전진하며 적을 추격하였다. 민영무 일등병의 제6사단은 파죽지세로 전쟁초기 울분을 삭히며 철수했던 지역을 수복하며 쾌속으로 춘천을 향해 진격했다. 이 반격작전에서 민영무 일등병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자 생과 사를 넘나들며 숱한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영무 일등병은 1950년 10월 1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화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무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0-4-20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1-ㅍ-02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문(閔泳文)일등병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민영문 일등병은 1932년 2월 9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제1사단에 소속되어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1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제11연대는 경기도 고랑포-대원리 간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후 1950년 4월 25일 제11연대가 개성지역 38도선 경계임무를 제12연대에게 인계하고 예비로 전환되면서 민영문 일등병은 제13연대로 전환되었다. 민영문 일등병은 방어력 증강을 위한 진지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되었다. 민영문 일등병은 즉각 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그날 아침 개성과 고랑포 일대를 점령하고 문산과 임진강 방향으로 공격을 확대했다. 당시 북한군의 전투력은 아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히 우세했다. 민영문 일등병은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민영문 일등병과 제13연대가 구축했던 38도선 방어진지는 6월 25일 오전 중에 무너져 버렸다. 민영문 일등병은 소규모로 분산된 채 봉일천과 행주를 거쳐 한강을 건넜다. 다행히도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국군은 땅을 내어 주면서 유엔군의 증원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민영문 일등병과 제1사단은 7월 5일 평택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후 지연전으로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민영문 일등병은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는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누구보다 투철했다. 그러나 전투는 치열했다. 민영문 일등병의 진지에서는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반복되었다. 그 시기인 1950년 8월 9일 민영문 일등병은 구미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문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39-6-17309)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0-ㄹ-09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미(閔영미)일등병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민영미 일등병은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제7사단 제3연대에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민영미 일등병은 신생 조국을 구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영미 일등병이 소속된 제7사단은 적성에서 일동까지 47㎞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사단은 제1연대를 좌측 동두천축선에, 제9연대를 우측 포천축선에 배치했다. 그러나 6월 15일 제3연대를 수경사로 전환하면서 민영미 일등병은 서울 용산으로 이동했다. 민영미 일등병이 용산 및 의정부지역에서 근무하던 1949년부터 북한의 도발은 심상치 않았다.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지역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하는 송악산전투가 발생하는 등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면서 준전시와 같은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남침으로 연결되었다. 민영미 일등병이 근무했던 의정부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북한군은 동두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4사단을 투입하고, 포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3사단을 투입해 의정부를 목표로 공격했다. 민영미 일등병과 제3연대는 즉각 제7사단으로 예속 전환되었다. 민영미 일등병과 제3연대는 6월 25일 아침 북한군의 주공이 투입된 동두천 축선에 투입되었다. 민영미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민영미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영미 일등병은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동두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미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1-6-18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8-ㄴ-00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복(閔영복)근로대원

"민영복 근로대원은 6·25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53년 1월 근로대원으로 소집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이나 생업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해 전투를 수행했다. 근로대원으로 소집된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 전투요원으로 소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민영복 근로대원은 제11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복 근로대원의 소속부대인 제11사단의 일부는 제2군단에 배속되어 제6사단 좌일선 연대의 전투정면을 인수하여 작전을 전담했다. 이 무렵인 1953년 6월에 접어들면서 적이 대공세를 준비하는 징후를 보였는데, 당면한 휴전회담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7월 초부터 적의 공세가 교암산 정면의 전투전초 진지로 집중되었다. 민영복 근로대원이 소속된 제11사단의 일부 장병들은 매우 급박한 상황에서 전선을 인수했기 때문에 더욱 용전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적의 공세가 강화된 상황에서 부대를 교체했기 때문에 적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영복 근로대원이 투입된 교암산 작전지역은 숲이 울창하고 장마철에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짙게 끼어 관측과 시계가 매우 불량한 상황이었다. 또한 계속해서 비가 내려 화력지원 및 항공지원이 제약을 받았다. 반면에 적은 아군 진지에 은밀히 접근할 수 있는 유리한 작전환경이었다. 민영복 근로대원의 제11사단 장병은 제6사단의 전투정면 주진지와 전투전초진지 일부를 인수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이 확대되고 후방 퇴로가 위협받자 포위망을 뚫고 철수했다.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도 중공군 제67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하지 못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작전부대에 탄약과 보급품을 근접 지원하던 민영복 근로대원은 적의 흉탄을 맞고 1953년 7월 2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김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복 근로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수습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51-4-21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복(閔영복)군속

"민영복 군속은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1년 기술분야 군속으로 선발되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운용되는 자동차 등의 장비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 운전과 정비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고급기술자군에 속했다. 민영복 군속은 제7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복 군속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국가 위기상황이었다. 전선에서 일진일퇴하던 부대들은 가용한 모든 민간인 차량과 정비요원을 징발해 활용하고 있었다. 젊은 층의 경우는 현역으로 소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이가 많은 기술자들은 군속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민영복 군속이 소속된 제7사단은 강원도 양구 북쪽의 고지를 연하는 접촉선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장차 군사분계선 설정 시 유리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고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민영복 군속은 차량과 함께 군속으로 채용 되자마자 고지 쟁탈전에 투입될 병력과 필요한 보급품을 이동하기 위하여, 군용차량은 물론 민간인 차량들도 징발해 활용했다. 민영복 군속은 전투요원이 아닌 후방지역 지원요원으로 전방 전투부대에 비해 안전한 곳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전선의 상황에 따라 전방의 전투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현장지원을 계속했다. 후방지역도 언제나 안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북한군의 유격대가 곳곳에서 출몰해 후방교란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민영복 군속은 현역 군인이 아니었지만 현역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근무했다. 그는 모든 것이 불비한 여건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임무를 완수하는 애국심에 불타는 군속이었다. 그러나 민영복 군속은 1953년 6월 12일 양구지구 전투에서 사단의 작전을 지원하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복 군속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5-4-98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복(閔榮福)일등병
경기도 안성시 이죽면
"민영복 일등병은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1년 2월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제7사단 제5연대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영복 일등병의 입대를 전후한 전황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국군이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쳤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또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후퇴했다가 1951년 1월 말부터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민영복 일등병과 제7사단은 평창 일대에 도달한 후 반격작전을 계속해 인제군 남면으로 진출했다. 그때인 3월 15일 국군 제1사단이 서울을 되찾았다. 중공군은 4월 22일 서울을 목표로 제5차 공세를 감행했다. 민영복 일등병과 제7사단은 소양강 남쪽인 풍암리-음양리를 연하는 선을 점령했다. 1951년 5월 16일 중공군의 제6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작전 초기부터 제7사단은 통신이 두절되고 분산되었다. 인접에 제3군단도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붕괴된 채 속사리까지 70㎞를 후퇴했다. 민영복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한 중공군의 공세는 치열했다. 중과부적이었다. 민영복 일등병과 제7사단은 지연전을 반복하며 부대를 수습한 후 반격에 나섰다. 7월 10일에는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지만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그 시기인 1951년 8월 27일 양구의 백석산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복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5-4-12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3-ㅂ-03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부(閔英夫)일등상사
경기도 이천시
"민영부 일등상사는 경기도 이천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창설 초창기인 1949년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위치하고 있던 독립 제1공병대대에 입대했다. 민영부 일등상사는 공병관련 특기교육을 이수하고 제2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부 일등상사가 소속된 제2사단은 1950년 11월 7일 서울에서 재창설되었다. 그가 입대를 전후한 시기의 전황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은 참전한 유엔군과 함께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쳤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과 10월 25일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청천강으로 후퇴해 최종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민영부 일등상사와 제2사단은 경기도 북부의 포천-김화-평강 등의 지역에서 암약하고 있던 북한군 잔적소탕에 나섰다.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후방이 차단된 북한군의 일부가 산악지역에서 기존의 빨치산과 연결해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지역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영부 일등상사가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수행할 때인 1950년 11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이 최종공세(크리스마스공세)를 감행했다.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유인해 통렬한 타격을 가했다. 결정적인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지역을 포기하고 38도선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그 시기에 북한군 제10사단이 아군의 후방지역으로 침투해 산악지역의 북한군 패잔병과 연결하면서 후방지역의 무장공비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민영부 일등상사와 장병 모두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후방지역 무장공비의 위협이 정규군의 규모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1951년 7월 10일 민영부 일등상사는 삼천봉지구에서 꽃다운 나이에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부 일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7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9-ㅁ-03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영웅 민영만-민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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