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영근-민영록2023-02-05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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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근(閔永根)하사
강원도 춘천시 서면
"민영근 하사는 1929년 11월 1일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5월 3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안전하게 양성하기 위해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민영근 하사는 제2사단 제31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근 하사의 근무 당시 전황은 북한군에게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며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하였다가 반격하며 안동지구 공비토벌 작전을 완료하고 미 제9군단에 배속 중에 있을 때였다. 민영근 하사가 소속된 제2사단 제31연대는 1950년 11월 11일 서울 한성여자중학교에서 창설되었다. 연대는 창설 직후 제1차 중공군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가평지구 탈환작전을 수행했다. 민영근 하사가 소속된 제31연대는 북한군 제10사단에 대항하여 청평일대에서 접전을 이루며 대승을 거두었다. 민영근 하사 등 장병들은 급박한 상황에서 육탄전을 실시하며 적을 공격하여 가평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1,000여 명에 대항해 치열한 공방 끝에 적을 크게 섬멸하는 등 전승을 올렸다. 그가 소속된 제31연대는 안동지역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완료하고 영주, 제천을 경유 양평으로 이동하여 노네임 방어선을 인수하며 전선을 확대하며, 청계산(양평), 백운산(사창리)을 연하는 진격선으로 전개하며 734고지와 저격능선에서 적과의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다. 민영근 하사 등 장병들은 어려운 환경과 조건하에서도 사기가 충천하여 있었다. 일부 장병들은 적에 맞서 육탄전으로 공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선봉에 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그는 1952년 11월 6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강원 김화지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근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50-3-29959)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21-ㄱ-01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근(閔泳根)경사

"민영근 경사는 1932년 12월 10일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타 경찰서에서 복무하면서 전투를 수행한 후 1950년 12월 16일 창설된 전경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에 소속되었다. 민영근 경사가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영근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1950년 초 적 인민유격대가 침입하여 후방을 교란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후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불법 기습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국군은 낙동강방어선까지 후퇴하였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다. 퇴로가 차단되어 미처 철수하지 못한 북한군의 일부는 지방공비들과 합세하여 경찰파출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양민을 학살하며, 식량을 약탈하는 등 치안질서를 교란했다. 민영근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후방지역 공비들을 포획·섬멸하기 위해 남원지역에 투입되었다. 공비들이 지서 습격을 위해 이동한다는 주민신고를 접수하고 대원들과 함께 출동했다. 민영근 경사는 공비들이 반드시 통과할 지역에 대원들과 같이 배치되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민영근 경사는 공비들이 접근하자 기습사격을 했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민영근 경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민영근 경사는 1951년 10월 30일 남원지구 전투에서 공비와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근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3-ㅂ-068)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근(閔泳根)일등중사

"민영근 일등중사는 1927년 8월 27일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2월 부산, 경주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곧바로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영근 일등중사는 제2사단 제32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근 일등중사의 입대를 전후한 전황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국군이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또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해야 했다. 이어 반격을 시작한 후 7월 10일부터 개성 및 판문점 일대에서 휴전회담에 돌입했다. 민영근 일등중사와 제32연대는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와 적근산, 김화 일대에서무장공비 소탕작전과 함께 고지쟁탈전을 계속했다. 당시 양측은 휴전협상테이블에서 상대방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기 위한 목적과 장차 정전협정이 체결될 경우에 대비해 유리한 방어선을 차지할 목적으로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수행되었던 1952년의 대표적인 전투가 백마고지전투, 저격능선·삼각고지전투, 수도고지전투 등이다. 민영근 일등중사와 제2사단은 1952년 6월 29일 철원군 김화읍 북방에 위치한 미 제40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해 10월 14일부터 저격능선전투에 돌입했다. 저격능선은 표고 580m 내외의 능선으로 미 제7사단이 담당한 좌측의 삼각고지와 함께 중공군 제15군이 자존심을 걸고 방어하고 있었다. 저격능선 전투에서 제2사단은 집요한 공격을 계속해 저격능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민영근 일등중사는 1952년 11월 25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김화지구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근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6-4-08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21-ㅁ-04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기(閔泳基)하사
경기도 양주시
"민영기 하사는 1926년 10월 9일 경기도 양주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7월 2일 의정부에서 동두천-포천일대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7사단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훈련을 위한 장비는 물론 복장조차도 제각각이었다. 민영기 하사는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연식 하사가 소속된 제7사단은 적성에서 일동까지 47㎞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사단은 제1연대를 좌측 동두천축선에, 제9연대를 우측 포천축선에 배치하여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6월 15일 예비부대인 제3연대를 수경사로 전환했으나 6∙25전쟁 당일 제7사단으로 다시 예속되었다. 민연식 하사와 제7사단은 38도선 부근에서 진지공사에 매진했다. 이 시기 1949년부터 북한의 도발은 심상치 않았다.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지역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하는 송악산전투가 발생하는 등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면서 준전시와 같은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남침으로 연결되었다. 민연식 하사가 근무했던 의정부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북한군은 동두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4사단을 투입하고, 포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3사단을 투입해 의정부를 목표로 공격했다. 민성옥 하사와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민연식 하사와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연식 하사는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동두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기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8-2-019)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1-ㄲ-05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기(閔泳基)하사
경상남도 산청군
"민영기 하사는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1952년 5월 3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한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안전하게 양성하기 위해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민영기 하사는 수도사단 제26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기 하사가 입대 당시 사단의 상황은 3월 17일 화천으로 이동해 금성천 북안의 미주리 선에 배치되었다. 5월 연대는 진지 전방으로 정찰활동을 수행하다 적과 총알이 빗발치듯 오가는 교전에서 중공군의 여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민영기 하사와 장병은 1952년 7~10월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전투에 참여해 적과의 공방전에서 적을 격퇴했으며 10월 25일 경기도 양주로 이동해 11월 3일부터 9주간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그 후 사단은 강원도 사창리로 이동해 1953년 1월~7월 김화 동북지역의 금성전투에 참여했다. 민영기 하사와 연대는 1953년 5월 14~16일 금성 서남쪽 7㎞ 지점 직목동 일대에 있는 샛별고지(470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또 그와 연대는 5월 23~24 금성 서남쪽 4㎞지점에 있는 회고개전투에서 중공군을 물리쳐 금성 돌출부 일대의 주저항선을 고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결과 사단은 6월~7월 하소리에서 회고개까지 주저항선에 제1연대와 제26연대를 배치하고 제1기갑연대를 예비로 확보할 수 있었다. 민영기 하사와 연대는 중공군의 최후 공세가 1953년 7월 13일 야간에 사단방어지역으로 일제히 공격오자 연대전방진지가 유린되고 14일 새벽에는 전방대대 관측소가 적에게 공격을 받음으로써 주저항선이 붕괴되었다. 민영기 하사는 7월 16일 적의 파상공격을 저지했으나 적의 집중포화로 금성전선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기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8-ㄴ-01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기(閔泳基)하사

"민영기 하사는 1923년 11월 18일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5월 17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한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안전하게 양성하기 위해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민영기 하사는 수도사단 제26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기 하사가 입대 당시 사단의 상황은 3월 17일 화천으로 이동해 금성천 북안의 미주리 선에 배치되었다. 5월 연대는 진지 전방으로 정찰활동을 수행하다 적과 총알이 빗발치듯 오가는 교전에서 중공군의 여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민영기 하사와 장병은 1952년 7~10월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전투에 참여해 적과의 공방전에서 적을 격퇴했으며 10월 25일 경기도 양주로 이동해 11월 3일부터 9주간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했다. 그 후 사단은 강원도 사창리로 이동해 1953년 1월~7월 김화 동북지역의 금성전투에 참여했다. 민영기 하사와 연대는 1953년 5월 14~16일 금성 서남쪽 7㎞ 지점 직목동 일대에 있는 샛별고지(470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또 그와 연대는 5월 23~24 금성 서남쪽 4㎞지점에 있는 회고개전투에서 중공군을 물리쳐 금성 돌출부 일대의 주저항선을 고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결과 사단은 6월~7월 하소리에서 회고개까지 주저항선에 제1연대와 제26연대를 배치하고 제1기갑연대를 예비로 확보할 수 있었다. 민영기 하사와 연대는 중공군의 최후 공세가 1953년 7월 13일 야간에 사단방어지역으로 일제히 공격오자 연대전방진지가 유린되고 14일 새벽에는 전방대대 관측소가 적에게 공격을 받음으로써 주저항선이 붕괴되었다. 민영기 하사는 7월 16일 적의 파상공격을 저지했으나 적의 집중포화로 금성전선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기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7-2-144)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대(閔永大)일등병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민영대 일등병은 1923년 2월 2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의정부에서 동두천-포천일대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7사단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훈련을 위한 장비는 물론 복장조차도 제각각이었다. 민영대 일등병은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영대 일등병이 소속된 제7사단은 적성에서 일동까지 47㎞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사단은 제1연대를 좌측 동두천축선에, 제9연대를 우측 포천축선에 배치하여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6월 15일 예비부대인 제3연대를 수경사로 전환했으나 6∙25전쟁 당일 제7사단으로 다시 예속되었다. 민영대 일등병과 제7사단은 38도선 부근에서 진지공사에 매진했다. 이 시기 1949년부터 북한의 도발은 심상치 않았다.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지역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하는 송악산전투가 발생하는 등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면서 준전시와 같은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남침으로 연결되었다. 민영대 일등병이 근무했던 의정부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북한군은 동두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4사단을 투입하고, 포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3사단을 투입해 의정부를 목표로 공격했다. 민영대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민영대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영대 일등병은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동두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대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8-1-13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1-ㄱ-05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대(閔泳大)일등병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민영대 일등병은 1930년 8월 10일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2월 5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영대 일등병은 제5사단에 소속되었다. 당시 전황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당시 제5사단은 서울 북방의 문산과 미아리방어선에 투입되어 붕괴된 이후 7월 5일 해체되었다가 1950년 10월 8일 새롭게 재창설되었기 때문에 북진작전에 참여하지 않고 대구 근교 및 영남지역 일원에서 후방지역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이 차단된 북한군 주력의 패잔병들이 산악을 중심으로 무장 세력화하고 있어서 후방지역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영대 일등병이 소속된 제5사단은 영남지구인 포항과 영주, 그리고 지리산 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11월 5일부터 11월 25일까지 청평과 가평, 그리고 의정부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했다. 이어 서울 동북방의 가평, 춘천 일대에 규합되어 있는 적을 소탕하여 그 지역을 탈환하여 압록강까지 이르는 선두 공격부대의 후속연결 및 적의 퇴로 차단 작전을 수행했다. 민영대 일등병이 소속된 제5사단의 책임구역인 지암·춘천지역은 가평, 춘천지역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역시 험준한 산악지대였다. 민영대 일등병은 사단과 함께 지암·춘천지구에서 지형과 기상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전과를 올리며 춘천을 탈환했다. 민영대 일등병은 사단과 함께 춘천지역 내에 잔류하여 양구와 화천지역으로 이동하여 북상하려는 북한군을 차단·섬멸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영대 일등병은 1951년 1월 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대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4-2-09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31-ㄷ-056)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덕(閔영덕)근로대원

"민영덕 근로대원은 6·25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51년 6월 근로대원으로 소집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이나 생업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해 전투를 수행했다. 근로대원으로 소집된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 전투요원으로 소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민영덕 근로대원은 4863부대에 소속되었다. 민영덕 근로대원은 부대와 함께 이동하고 전투를 수행하면서 후방지원을 담당했다. 민영덕 근로대원이 주로 수행한 임무는 후방지역의 교량 및 도로보수, 탄약과 군 장비의 전선 운반, 기타 기술근무 등으로 전투부대들이 전투임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온갖 궂은 지원들을 전담했다. 민영덕 근로대원과 동료들이 안전한 후방지대에서 근무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노무부대’ 혹은 ‘지게부대’라고 불리며 탄약과 장비들을 등에 짊어지고 최일선 전투지대를 찾아가 탄약과 무기를 보급하는 것도 그들의 주 임무 중 하나였다. 민영덕 근로대원은 적의 포탄의 세례 속에 전투진지를 찾아가 탄약과 장비를 전달했다. 민영덕 근로대원과 노무요원들은 모든 것이 불비한 여건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탄약과 장비를 짊어지고 전투가 이루어지는 최일선을 방문했을 때 적의 포탄세례로 목숨을 잃은 노무요원들이 부지기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넘어진 병사의 소총을 대신 들고 전투에 임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민영덕 근로대원은 언제나 앞장서서 임무를 수행하던 대원이었다. 민영덕 근로대원은 어떠한 전투상황에도 변함없이 전투현장을 찾아 보급품을 나르며 전투수행을 지원했다. 그날도 민영덕 근로대원은 전투현장을 찾아가 임무수행에 매진하던 중 적의 포탄에 맞아 1952년 1월 6일 중부지역 전투현장에서 꿈 많은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덕 근로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51-4-21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덕(閔泳德)일등상사
경기도 양주시
"민영덕 일등상사는 1929년 7월 23일 경기도 양주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9년 4월 25일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9연대에 입대했다. 민영덕 일등상사와 제9연대는 그해 6월 9일 의정부로 이동해 제7사단에 소속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연대와 함께 포천 북쪽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했다. 민영덕 일등상사는 수도사단 제1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덕 일등상사는 전쟁 발발 이후 악조건 속에서 치열한 전투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왔으며 1953년 당시 상황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휴전협상 테이블에서는 포로송환 문제로 치열한 대치국면이 조성되어 있어 전투는 더욱 가열되었다. 공산군 측은 포로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유엔군은 포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유송환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담장의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과 협상이 타결될 경우 유리한 지역에 방어선을 설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양측은 고지쟁탈전에 매달리고 있었다. 민영덕 일등상사와 국군은 더욱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8월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고지쟁탈전은 1952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정교하여지고, 그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따라서 더욱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민영덕 일등상사가 소속된 수도사단을 포함해 모든 부대들이 공산군 측에 압력을 가하고 미래의 휴전선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더 많은 피를 흘리는 고지쟁탈전을 기꺼이 감수했다. 민영덕 일등상사 등 장병 모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민영덕 일등상사는 수도고지-지형능선전투 등 김화 및 금성지구의 고지쟁탈전에서 모범을 보이며 앞장서서 솔선수범했다. 그러나 민영덕 일등상사는 1953년 7월 16일 강원 김화지구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덕 일등상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52년 10월 31일 그에게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49454)을 추서했다. 그의 위패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43-2-17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7-ㅇ-057) 관리하고 있다."

민영동(閔永東)하사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민영동 하사는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입대했다. 민영동 하사가 입대할 당시부터 북한군의 국지도발은 계속되고 있었다. 38도선 곳곳에서 전투에 준하는 국지도발이 발생했다. 그중에서도 1949년 5월 4일 개성 북쪽의 송악산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한 송악산전투는 전쟁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후방지역의 상황도 비슷했다. 북한에서 침투한 무장공비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연결된 도발사건이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민영동 하사와 장병은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인해 긴장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경계태세 강화를 위한 비상경계령이 수시로 하달되었다. 민영동 하사와 장병은 휴가는커녕 외출·외박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4일 토요일을 기해 그동안 계속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었다. 많은 장병들이 농번기를 위한 휴가를 출발하고, 영내에 남아 있던 병력들도 외출·외박을 나갔다. 민영동 하사와 장병이 일요일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무렵인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그날 아침에 대부분의 38도선 방어진지를 유린했다. 민영동 하사는 부대와 함께 방어진지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당시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일부 장병은 대전차특공대를 조직해 육탄공격을 시도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민영동 하사와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용전분투했다. 민영동 하사와 장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영동 하사는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38도선 부근의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동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4-5-19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79-ㅍ-01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래(敏永來)하사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민영래 하사는 1923년 12월 12일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0년 8월 10일 대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긴급하게 소요되는 전투병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구 시내의 동촌 등 10여 곳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 후 민영래 하사는 제6사단 제2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영래 하사가 소속되어 있던 제6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신령지역까지 철수하여 북한군과 격돌하였다. 대구 외곽 신령지구에서의 제6사단 선전으로 북한군은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실패하였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민영래 하사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38도선을 넘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민영래 하사의 제6사단은 마침내 1950년 10월 26일, 한·중 접경지역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제6사단은 동두천 지역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한 중공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민영래 하사가 소속된 제6사단 장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한강을 넘어 충주로 철수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1951년 2월 초, 제6사단은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 선을 향해 진격하였다. 민영래 하사와 제6사단 전 장병은 다시 한 번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열악한 전장 환경을 극복하며 38도선으로 계속 북진하였다. 민영래 하사의 제6사단은 1952년 3월에는 강원도 김화지역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부대는 전투준비를 하면서 수시로 북진을 위한 공격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영래 하사는 1952년 10월 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김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래 하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1954년 10월 15일 그에게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32380)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39-3-1801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5-ㄹ-048) 관리하고 있다."

민영록(閔영록)일등병
부산광역시부산진구 부전동
"민영록 일등병은 1924년 1월 13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9월 8일 부산·경주 등에 설치되어 있던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민영록 일등병은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3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영록 일등병이 소속된 제3사단은 1950년 겨울 중공군의 참전으로 해상 철수를 단행했다가 다시 육로로 북상하여 12월 20일 홍천에서 제9사단 진지를 인수했다. 이어 제23연대로 하여금 1951년 1월 19일 골어구-와석 1리 간에서 적을 제압했다. 그 후 제23연대를 서북쪽으로 진출시키자 제3연대 제2대대도 연대 주력을 초월 공격하여 제23연대 제1대대와 호응하고, 골어구-거석-와석 1리 간의 적을 격멸한 후 우측 전방을 담당했다. 제1대대가 좌측 전방으로 옥동리를 확보했다. 민영록 일등병의 제3사단은 이동계획에 따라 2월 10일 평창에서 횡성군 우천리로 이동했다. 이때 사단이 마옥리 방면 공격작전을 전개하자 제23연대가 12일 마옥리의 적을 축출한 후 법주리로 이동했다. 이어 23일부터 강림-안흥-봉화산 진격전을 전개했다. 창리 부근의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해 25일 강림리에서 613고지를 점령하고 율목동 일대로 진출한 후 28일 금창리에 집결하여 미 해병과 임무를 교대했다. 민영록 일등병은 제3사단 제22연대와 원주로 이동하여 송문내-평창에 이르는 가도 동쪽 능선을 점령한 후 제23연대의 전진을 지원하게 되었다. 3월 1일부터 제3사단 주력이 689고지와 479 및 318고지 등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전선이 교착되자 제3사단은 3월 7일부로 제3군단에 배속되었다. 9일부터는 제1해병대가 제3사단에 편입되었다. 지원작전에 앞장서서 솔선수범하던 민영록 일등병은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치료하던 중 1951년 3월 14일 27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2-16829)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13-ㄱ-03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영웅 민영근-민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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