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연식-민영국2023-02-05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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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연식(閔연식)일등병

"민연식 일등병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경기도 노해면(현 서울시 노원구)에서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에 입대했다. 민연식 일등병은 기초군사훈련을 이수한 후 사관후보생 양성을 위한 교육과 후방지역 작전에 투입되었다. 당시는 군 창설 초창기였기 때문에 보급 상태와 장비의 상태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였다. 민연식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부터 북한군의 국지도발은 계속되고 있었다. 38도선 곳곳에서 전투에 준하는 국지도발이 발생했다. 민연식 일등병과 장병은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인해 긴장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4일 토요일을 기해 그동안 계속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었다. 많은 장병들이 농번기를 위한 휴가를 출발하고, 영내에 남아 있던 병력들도 외출·외박을 나갔다. 민연식 일등병과 장병이 일요일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무렵인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그날 아침에 대부분의 38도선 방어진지를 유린했다. 당장 서울이 위태롭게 되었다. 특히 문제가 된 곳은 문산-의정부축선과 김포반도였다. 민연식 일등병과 보병학교 교도대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대가 서울특별연대로 편성되어 문산축선에 투입되었다. 서울특별연대장에는 보병학교 학생연대장 유해준 중령이 임명되었다. 민연식 일등병은 25일 오후 용산초등학교에 집결해 용산역에서 열차에 탑승해 문산역으로 이동했다. 문산역에서 하차한 민연식 일등병은 임진강변의 파평산 자락에 배치되었다. 민연식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용전분투했다. 민연식 일등병과 장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연식 일등병은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밤 임진강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연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7-2-21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연식(閔연식)하사

"민연식 하사는 1949년 1월 7일 국군의 창설을 전후해 태릉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대에 입대했다. 국방경비대 시절 남조선경비사관학교를 모체로 창설된 육군사관학교는 국군의 간부를 양성하는 요람이었다. 그가 사관후보생 양성을 위한 지원을 담당하던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했다. 민연식 하사는 포천전투에 투입되었다. 6월 28일 서울에서 철수한 민연식 하사는 철수과정에서 제1사단에 편입되었다. 민연식 하사와 제1사단은 철수와 지연전을 반복하며 7월 말 낙동강방어선을 점령했다. 그때부터 9월 중순까지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방어선을 지켜냈다. 9월 15일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민연식 하사와 제1사단은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28일 서울탈환에 기여하고,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중공군의 공세가 두 차례나 계속되면서 민연식 하사와 국군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민연식 하사와 장병 모두는 혼연일체가 되어 투혼을 발휘했다. 민연식 하사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서울을 향해 시작되면서 민연식 하사는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평택까지 철수했다. 민연식 하사와 제1사단은 1951년 1월 말 반격으로 전환했다. 수원을 향해 진격한 후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계속했다. 민연식 하사는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한 후 38도선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던 1951년 4월 24일 민연식 하사는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임진강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연식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16-10-337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연식(閔延植)일등중사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민연식 일등중사는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의 창설을 전후한 시기인 1948년 강원도 강릉에서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10연대에 입대했다. 당시는 정부수립 초창기였으며, 군 창설 초창기였기 때문에 많은 부대들이 증·창설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민연식 일등중사는 제1사단 제13연대에 편입되었다. 민연식 일등중사가 임진강 일대의 방어력 증강을 위해 매진하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민연식 일등중사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상대할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대전차특공대를 편성하여 육탄공격을 시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민연식 일등중사는 소규모로 분산된 채 봉일천과 행주를 거쳐 한강을 건넜다. 일단 김포에서 집결한 후 수원으로 철수했다. 다행히도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국군은 땅을 내어 주면서 유엔군의 증원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민연식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13연대는 7월 5일 평택에서 부대를 재편성하면서 제5사단 제15연대를 흡수 통합했다. 제13연대는 지연전으로 병행하며 7월 말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낙동강에서 북한군의 공세는 집요했다. 그러나 민연식 일등중사와 제13연대는 치열한 공세를 저지하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나섰다. 그때 부대명칭이 제15연대로 변경되었다. 민연식 일등중사는 9월 말 38도선을 회복하고 북진에 돌입했다. 10월 19일에는 사단과 함께 평양에 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그는 언제나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때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기습공격으로 평택까지 철수했다가 1951년 1월 말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3월 15일에는 서울 탈환에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민연식 일등중사는 1951년 5월 2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임진강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연식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90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3-ㅂ-07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연식(閔連植)일등병
경기도 광주시 목동
"민연식 일등병은 경기도 광주시 목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경기도 노해면(현 서울시 노원구)에서 육군사관학교 교도대에 입대했다. 민연식 일등병은 기초군사훈련을 이수한 후 사관후보생 양성을 위한 교육과 후방지역 작전에 투입되었다. 민연식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부터 북한군의 국지도발은 계속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그날 아침에 대부분의 38도선 방어진지를 유린했다. 당장 서울이 위태롭게 되었다. 특히 문제가 된 곳은 문산-의정부축선과 김포반도였다. 민연식 일등병과 보병학교 교도대대, 육군사관학교 교도대대가 서울특별연대로 편성되어 문산축선에 투입되었다. 서울특별연대장에는 보병학교 학생연대장 유해준 중령이 임명되었다. 민연식 일등병은 25일 오후 용산초등학교에 집결해 용산역에서 열차에 탑승해 문산역으로 이동했다. 문산역에서 하차한 민연식 일등병은 임진강변의 파평산 자락에 배치되었다. 민연식 일등병과 교도대대는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북한군의 공격에 무너지면서 분산되어 철수했다. 지연전을 계속하며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한 그들은 육군사관학교 재건에 참가했다. 육군사관학교는 부산에서 다시 개교했다. 그러나 민연식 일등병이 항상 안전지대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민연식 일등병이 근무했던 부산지역은 수시로 무장공비가 출몰했다. 따라서 민연식 일등병은 수시로 후방지역 작전에 투입되어야 했다. 민연식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위기 상황에서도 혼연일체가 되어 투혼을 발휘하며 임무를 수행했다. 1951년 2월 1일 민연식 일등병은 부산지역 후방지역 작전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연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79-ㅌ-01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연식(閔連植)일등병
광주광역시
"민연식 일등병은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제7사단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38도선 일대에서는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후방지역에서도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무장폭동이 발생해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민연식 일등병은 신생 조국을 구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연식 일등병이 소속된 제7사단은 적성에서 일동까지 47㎞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사단은 제1연대를 좌측 동두천축선에, 제9연대를 우측 포천축선에 배치하여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6월 15일 예비부대인 제3연대를 수경사로 전환했으나 6∙25전쟁 당일 제7사단으로 다시 예속되었다. 민연식 일등병과 제7사단은 38도선 부근에서 진지공사에 매진했다. 이 시기 1949년부터 북한의 도발은 심상치 않았다.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지역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하는 송악산전투가 발생하는 등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면서 준전시와 같은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남침으로 연결되었다. 민연식 일등병이 근무했던 의정부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북한군은 동두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4사단을 투입하고, 포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3사단을 투입해 의정부를 목표로 공격했다. 민성옥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민연식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연식 일등병은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동두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연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3-3-25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1-ㅎ-05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연식(閔連植)이등중사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
"민연식 이등중사는 1927년 1월 27일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의정부에서 동두천-포천일대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7사단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훈련을 위한 장비는 물론 복장조차도 제각각이었다. 민연식 이등중사는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연식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7사단은 적성에서 일동까지 47㎞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사단은 제1연대를 좌측 동두천축선에, 제9연대를 우측 포천축선에 배치하여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6월 15일 예비부대인 제3연대를 수경사로 전환했으나 6∙25전쟁 당일 제7사단으로 다시 예속되었다. 민연식 이등중사와 제7사단은 38도선 부근에서 진지공사에 매진했다. 이 시기 1949년부터 북한의 도발은 심상치 않았다.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지역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하는 송악산전투가 발생하는 등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면서 준전시와 같은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남침으로 연결되었다. 민연식 이등중사가 근무했던 의정부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북한군은 동두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4사단을 투입하고, 포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3사단을 투입해 의정부를 목표로 공격했다. 민성옥 이등중사와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민연식 이등중사와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연식 이등중사는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동두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연식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7-6-19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1-ㅍ-05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열(閔烈)일등병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민열 일등병은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7월 1일 육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대구·부산·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는데, 민열 일등병은 제3사단 제23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열 일등병이 소속되었던 제3사단은 1950년 겨울 중공군의 참전으로 해상 철수를 단행했다가 다시 육로로 북상하여 12월 20일 강원도 홍천에서 제9사단 진지를 인수했다. 1951년 3월 1일부터 제23연대와 제18연대가 전면공격을 감행했으나 689고지 등 주요 거점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3월 26일부터는 38도선 일대의 북한군 방어진지를 전면 공격했다. 그 결과 4월 5일부터 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선 이남의 적을 격멸하는 작전을 전개하여 10일을 전후해서는 캔자스선을 점령하게 되었다. 민열 일등병의 제23연대는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전개된 현리지구철수전에 참전했다. 제3사단의 우측 제22연대가 가리산과 1226고지를 선점하고, 제23연대는 제18연대에 진지를 인계한 후 사단 예비대로 전환하여 상답·중답·하추리에 분산 주둔했다. 5월 17일부터 적 제32·제12사단의 강력한 공세에 밀린 제18·제22연대는 현리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민열 일등병은 제23연대 장병과 함께 제18·제22연대가 현리로 철수할 때 엄호하고, 5월 18일 방대산을 선점하고 있다가 아군 철수를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9사단 철수부대를 통과시킨 후에 적의 추격대를 견제하면서 철수했다. 5월 20일 1359고지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다가 저녁에는 하진부리 북쪽 4㎞와 동산리간에서 적의 남하를 저지했다. 지연전에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열 일등병은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치료하던 중 1951년 7월 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열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9-1-05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27-ㄲ-04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열기(閔烈基)경사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민열기 경사는 1927년 5월 29일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강원도경찰국 삼척경찰서에 소속되었다. 민열기 경사가 입대를 전후한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 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열기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1950년에 들어서면서 적 인민유격대가 태백산 일대에 계속 침입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경찰은 시흥 육군보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경찰간부들을 중심으로 제8·제9전투경찰대대를 편성하여 영월과 춘천지역에 배치했다. 이후 적 유격대와 지방공비들을 제압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민열기 경사가 소속된 강원도 경찰국 삼척경찰서는 1950년 6월 10일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에서 38도선 접경인 경기·강원 2개 도에 비상경비태세강화명령이 내려져 북한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후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국군과 함께 철수하여 북한군과 접전을 거듭하면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격멸했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로 낙동강선까지 철수하여 군경합동으로 낙동강방어작전에 가담했다. 민열기 경사가 소속된 강원도 경찰국 삼척경찰서 대원들은 포항일대에서 북한군과 격렬한 일전을 전개했다. 북한군은 영일비행장과 경주를 목표로 공격했다. 민열기 경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했다. 그러나 운명의 1950년 8월 26일 민열기 경사는 꽃다운 청춘의 푸른 꿈을 남겨둔 채 포항지구 전투에서 적과 교전 중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열기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50-6-09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5-ㄹ-01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관(閔泳寬)이등중사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
"민영관 이등중사는 1926년 7월 12일 경기도 이천시 대월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의 창설을 전후한 시기인 1948년 12월 19일 충청남도 온양에서 창설된 제13연대에 입대했다. 1949년 1월 12일 제1사단의 창설과 함께 민영관 이등중사와 제13연대는 제1사단에 소속되어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민영관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1사단은 청단에서 고랑포까지 94㎞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단은 제12연대를 좌측 개성일대에, 제13연대를 우측 임진강일대에 배치해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케 하고 제11연대는 사단의 예비대로 수색에 배치해 운용하고 있었다. 민영관 이등중사는 개성일대의 방어력 증강을 위한 진지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북한군의 도발이 수시로 이어지면서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되면서 전면전이 되고 말았다. 민영관 이등중사는 즉각 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그날 아침 개성과 고랑포 일대를 점령하고 문산과 임진강 방향으로 공격을 확대했다. 당시 북한군의 전투력은 아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히 우세했다. 민영관 이등중사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민영관 이등중사와 제13연대가 구축했던 38도선 방어진지는 6월 25일 오전 중에 무너져 버렸다. 민영관 이등중사는 소규모로 분산된 채 파평산-행주를 거쳐 철수하면서 적을 지연했다. 6월 28일에는 한강을 건너 용인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민영관 이등중사는 1950년 7월 2일 용인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관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0-ㄲ-05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영국(閔영국)유격대원

"민영국 유격대원은 6·25전쟁으로 위기에 처했던 조국의 운명을 지켜내는 데 기여한 자랑스러운 호국용사다. 그는 군번도 부여받지 못해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데 기여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1951년 8월 4일 황해도 은율군 웅도에서 재편된 유격대 구월산부대 제6연대 제4대대 유격대원이 되었다. 민영국 유격대원과 같이 서해 도서로 피난 온 청년대원들은 고향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를 갈망했지만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간부들이 작전기지사령부 등지에서 각종 화기 사용법과 무전기 조작법, 폭파와 통신, 공수 낙하 등에 관한 기초훈련을 받는 정도였다. 대원들은 간부들에게 간접적으로 배우거나 실전을 통해 하나씩 배워갈 수밖에 없었다. 민영국 유격대원이 소속된 구월산유격부대의 큰 고통은 무기와 탄약, 식량 등 보급품 부족이었다. 해군으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작전 활동 시에 에 탄약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늘 부족했다. 그 후 미군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식량과 무기, 군복 등의 보급품 지원이 크게 호전되었다. 민영국 유격대원과 구월산유격부대 대원들은 1951년 8월 24일 강운리에 주둔 중인 북한군 제23여단 고사포부대를 기습하고, 10월 10일에는 석교리의 경비소대를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2월 11일 야포와 박격포의 집중공격을 받은 피도가 점령당하고, 16일 새벽에는 60여 명의 대원이 주둔한 청양도가 북한군 제23여단의 공격을 받고 실함되었다. 민영국 유격대원은 12월 18일 적 1개 대대 병력이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으며 150여 명의 유격대원이 주둔한 웅도로 쳐들어오자 접전을 벌였다. 약 2시간 동안 혈전을 벌이는 가운데 불퇴전의 용기로 용전분투하던 민영국 유격대원은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12월 18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웅도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영국 유격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06-3-130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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