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수영-민억성2023-02-05 23:07
작성자 Level 10
민수영(閔수영)방위대원

"민수영 방위군대원은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있던 1950년 12월 소집되어 국민방위군에 편성되었다. 그가 소집된 시기의 전황은 1950년 10월 9일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해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하면서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기습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수영 방위군대원이 소속된 국민방위군은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6·25전쟁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됨에 따라 1950년 12월 21일 법률 제172호를 근거로 설치된 예비군 성격의 부대였다. 국민방위군사령부는 경상남·북도 일원과 제주도에 총 52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68만여 명에 달하는 제2국민역을 소집해 예비군으로 양성할 준비를 갖추었다. 민수영 방위군대원과 동료들은 많은 인원이 과거 대한청년단 예하의 청년방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국민방위군이 창설되면서 대부분 국민방위군사령부 예하에 편입되었다. 국민방위군사령부가 단시일 내에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기 위한 조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청년방위대의 핵심간부들이 그대로 국민방위군사령부의 핵심간부로 편성되었기 때문이다. 민수영 방위군대원과 동료 대원들은 전국에서 52개 교육대가 설치된 경상·남북도와 제주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교육대와 근거리에 위치한 방위군대원들은 용이하게 교육대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원거리에서 소집된 방위군대원들은 보급이 불충분한 굶주림과 추위를 극복해 가며 대부분 도보로 교육대를 향해 장거리 이동을 시작했다. 민수영 방위군대원은 소집된 이후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한 채 교육대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동 중 북한군 게릴라의 기습공격도 있었고 기아에 의한 사망도 있었다. 민수영 방위군대원은 1951년 5월 16일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수영 방위군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51-4-22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순근(閔順根)하사
황해북도 개풍군
"민순근 하사는 1932년 1월 2일 황해북도 개풍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1월 15일 부산·경주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민순근 하사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제8사단 제16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순근 하사가 소속된 제8사단 제16연대는 11월 24일 유엔군과 같이 크리스마스공세에 참가하여 한∙중 국경선을 향해 반격했으나, 중공군의 제2·제3차 공세로 37도선으로 철수했다.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전략요충지인 홍천지역의 적을 격멸하기 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민순근 하사의 제16연대 지휘부가 1951년 2월 12일 자정 무렵 중공군 대병력이 침입하자 전선을 조정해줄 것을 군단장에게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다. 중공군의 대공세에 포위되어 고립된 상태에서 분산 철수하다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 후 육본직할로 전환되어 대구에서 부대를 재편성하고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민순근 하사의 제16연대와 제8사단 예하 연대는 4월 6일 호남지구공비토벌작전 임무를 부여받았다. 16일부터 5월 11일까지 제10·제21연대가 금산·국사봉·부안 등지에서 전개한 공비토벌작전을 지원했다. 그 후 5월 말부터 미 8군 예비대로 전환하여 후방지역을 경계했다. 이어 제천-평창-홍천-현리-인제-원통리로 이동하면서 후방지역의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민순근 하사와 제16연대 장병은 8월 9일부터 제1차 노전평지구전투에 투입되었다. 새벽부터 지뢰지대와 박격포 사격을 극복하고 목표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10일 공격전에서는 제16연대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2일 야간 방어전에 적을 격퇴했으나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순근 하사는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8월 13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순근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16-10-336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2-ㅅ-02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순기(閔舜基)일등병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민순기 일등병은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1년 1월 5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순기 일등병은 제2사단에 소속되었다. 당시 제2사단은 초기전투에서 붕괴된 후 예하의 제5연대와 제16연대가 타 부대에 흡수 통합된 후 해체되었다가 1950년 11월 7일 서울에서 제17연대, 제31연대, 제32연대를 근간으로 하여 재창설하였다. 사단은 창설 직후 포천, 평강지역의 잔적소탕 작전을 수행한 후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가평지구 탈환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가평지구 작전에 투입되었다. 민순기 일등병이 소속된 제2사단은 북한군 제10사단에 대항하여 청평일대에서 접전을 이루며 대승을 거두었다. 사단은 이후 미 제10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되어 제8사단의 2개 대대를 배속 받아 일월산, 보현산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 후 경상북도 영양일대의 공비토벌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 후 육군본부 직할로 배속이 변경되어 의성으로 이동 후 계속하여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했다. 민순기 일등병이 소속된 제2사단은 공비소탕 임무를 완수하고 경기도 양평으로 이동해 노네임 방어선을 미 제24사단으로부터 인수하여 양평의 청계산, 사창리 백운산에서 전격전을 수행하여 광덕산, 대성산, 삼천봉으로 각각 진출하고 있었다. 이때 민순기 일등병은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던 중 1951년 8월 25일 민순기 일등병은 745고지전투에서 꽃다운 나이에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순기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42-1-1505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9-ㅍ-056)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순원(閔順元)하사
경상북도 영천시
"민순원 하사는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0년 8월 10일 대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긴급하게 소요되는 전투병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구 시내의 동촌 등 10여 곳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훈련 후 민순원 하사는 제6사단 제2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순원 하사가 소속되어 있던 제6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신령지역까지 철수하여 북한군과 격돌하였다. 대구 외곽 신령지구에서의 제6사단 선전으로 북한군은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실패하였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민순원 하사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38도선을 넘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민순원 하사의 제6사단은 마침내 1950년 10월 26일, 한·중 접경지역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제6사단은 동두천 지역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한 중공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민순원 하사가 소속된 제6사단 장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한강을 넘어 충주로 철수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혹심한 추위와 열악한 보급지원하에서도 그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6사단은 온전한 전투력을 유지한 채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1년 2월 초, 제6사단은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 선을 향해 진격하였다. 민순원 하사와 제6사단 전 장병은 다시 한 번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혹한의 날씨와 열악한 전장 환경을 극복하며 38도선으로 계속 북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순원 하사는 1951년 4월 29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화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순원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11-4-359)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1-ㄴ-01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승구(閔承九)일등병

"민승구 일등병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1월 8일 분연히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육군 직할부대에 소속되었다. 민승구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국군의 주력은 한강 북쪽에서 붕괴되었다. 소수의 국군은 참전한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지연전을 계속하며 7월 말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해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저지했다. 이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반격으로 돌입해 38도선을 회복한 후 10월 초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10월 말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기습공세로 인해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철수해야 했다. 민승구 일등병은 그 시기에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어 각종 지원임무와 함께 전투임무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민승구 일등병이 부대에 도착했을 때 국군은 평택-삼척 일대에서 반격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승구 일등병과 같이 입대한 신병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전사하는 사례도 허다했다. 군번은 고사하고 부대원 명부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이름을 기억하기도 전에 전사해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민승구 일등병은 각종 지원임무가 주 임무였지만 전투임무에도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수행했다. 민승구 일등병과 국군은 1월 말 37도선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용전분투하던 민승구 일등병은 1951년 3월 14일 중부전선에서 전투 중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승구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2-16828)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5-ㅊ-09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승무(閔承武)일등병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민승무 일등병은 1926년 5월 18일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1년 1월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제7사단 제8연대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승무 일등병의 입대를 전후한 전황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국군이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쳤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또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후퇴했다가 1951년 1월 말부터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민승무 일등병은 북진작전에 가담했다가 영월까지 철수한 후 반격을 시작해 평창 일대에 도달했다. 그는 제7사단 장병과 함께 조심스러운 반격작전을 계속해 인제군 남면으로 진출했다. 민승무 일등병과 제7사단은 소양강 남쪽인 풍암리-음양리를 연하는 선을 점령했다. 1951년 5월 16일 중공군의 제6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작전 초기부터 제7사단은 통신이 두절되면서 부대의 통제력을 잃었다. 인접에 위치한 제3군단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붕괴된 채 속사리까지 70㎞를 후퇴했다. 민승무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한 중공군의 공세는 치열했다. 중과부적이었다. 민승무 일등병과 제7사단은 철수와 지연전을 반복하며 부대를 수습한 후 반격에 나섰다. 그 시기인 1951년 7월 23일 민승무 일등병은 인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승무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3-ㅇ-01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승식(閔승식)이등중사

"민승식 이등중사는 국군의 창설을 전후한 시기인 1948년 5월 1일 강원도 강릉에서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10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그가 소속된 제10연대는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6사단 소속이었다. 그 후 부대개편 계획에 따라 1949년 6월 20일 창설된 제8사단에 전속되었다. 민승식 이등중사가 소속되었던 제8사단은 동부지역 38도선 경계와 오대산으로부터 태백산까지 북한인민유격대 및 잔존공비를 소탕하고 있었다. 이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전면 기습남침이 개시되자 강릉에서 공방전을 전개했다. 민승식 이등중사의 제8사단은 동부지역 38도선 경비지역으로 침공한 북한군 제5사단, 제38경비 제1여단 3개 대대와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 명지리, 장리, 서림리 등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또한 제8사단은 북한군 제766부대와 육전대가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 임원진 등 해안으로 약 5백 명이 상륙하여 협공작전을 전개하는 북한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민승식 이등중사와 제8사단은 강릉지구전투(6.26∼27)에 참가하여 북한군 제5사단의 주력부대가 주문진방면으로 남하하고 있을 때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석교리에 배치된 아군 포병의 맹렬한 사격과 접전으로 북한군 보병부대에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제8사단의 주저항선인 강릉시 연곡일대에 맹렬한 포격과 2개 연대규모의 공격으로 주저항선을 붕괴시켰다. 이 전투로 제8사단은 인제군 원통리·난곡리로 철수했으나, 강동지역으로 상륙한 북한군의 양면공격을 받고 부득이 대관령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민승식 이등중사는 북한군의 집중포화와 압도적인 공세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며 적을 물리치는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민승식 이등중사는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1950년 6월 27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승식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6-2728)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0-ㄹ-056)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승옥(閔承玉)일등병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민승옥 일등병은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제7사단 제3연대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승옥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국군과 유엔군은 평안북도 개천까지 진출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후퇴한 후 재반격을 시작했다. 민승옥 일등병과 제7사단은 재반격에 가담했다. 영월에서 출발하여 평창 일대에 도달한 후 반격작전을 계속해 강원도 양구군으로 진출했다. 당시 적과 아군은 한 개의 고지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전선에서의 충돌은 더욱 격화되어갔다. 민승옥 일등병과 제7사단 장병은 강원도 양구 북쪽 방산면 일대의 접촉선에서 중공군 및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양구읍에서 군량현, 공수리, 성골령으로 이어지는 산악지대에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 지역은 지대 내의 대표적인 고지 백석산의 전초진지인 셈이었다. 백석산은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에 위치한 1,142고지다. 양측은 백석산을 장악하게 되면 장차 군사분계선 설정 시 유리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백석산을 점령하기 위한 공방전을 반복했다. 민승옥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지쟁탈전에 임했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무수한 인명이 희생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북한군과 중공군 양측은 상대방을 압박하기 위해 고지쟁탈전을 계속했다. 민승옥 일등병은 치열한 전투에서 항상 앞장서서 솔선수범하였으나 1952년 2월 3일 양구지역 고지쟁탈전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승옥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3-ㅁ-09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승원(閔승원)군속

"민승원 군속은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1년 기술분야 군속으로 선발되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운용되는 자동차 등의 장비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 운전과 정비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고급기술자군에 속했다. 민승원 군속은 제11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승원 군속이 소속된 제11사단의 일부가 제2군단에 배속되어 제6사단 좌일선 연대의 전투정면을 인수하여 작전을 전담했다. 이 무렵인 1953년 6월에 접어들면서 적이 대공세를 준비하는 징후를 보였는데, 당면한 휴전회담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7월 초부터 적의 공세가 교암산 정면의 전투전초 진지로 집중되었다. 민승원 군속의 제11사단의 일부 장병은 매우 급박한 상황에서 전선을 인수하였으므로 더욱 용전분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적의 공세가 강화된 상황에서 부대를 교체했기 때문에 적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승원 군속이 투입된 교암산 작전지역은 숲이 울창하고 장마철에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짙게 끼어 관측과 시계가 매우 불량한 상황이었다. 또한 계속해서 비가 내려 화력지원 및 항공지원이 제약을 받았다. 반면에 적은 은밀하게 아군 진지에 접근할 수 있는 유리한 작전환경이었다. 민승원 군속의 제11사단의 장병은 제6사단의 전투정면 주진지와 전투전초진지 일부를 인수하여 싸웠다. 그러나 정면에 대한 적의 공격이 확대되고 후방 퇴로가 위협받자 포위망을 뚫고 철수했다. 적에게 큰 인명손실을 입히고도 중공군 제67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진지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민승원 군속은 작전 부대를 근접 지원하다가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1953년 7월 19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강원 금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승원 군속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5-4-99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승천(閔승천)일등병

"민승천 일등병은 1930년 4월 7일 출생했다. 그는 국군창설 초창기인 1949년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하고 있던 제1병참단에 입대했다. 민승천 일등병은 병참관련 특기교육을 이수하고 제8사단 제21연대로 전속되었다. 민승천 일등병이 소속되었던 제8사단 제21연대는 북한군 제15·제8사단을 추격하여 10월 1일 원주에 이르는 고갯마루에서 접전하고, 2일에는 양평에서 2시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10월 3일부터는 미아리-의정부-동두천-전곡리를 거쳐 10일에는 철의삼각지에 진입했다. 이어 곡산지구전투(10.15∼16)와 석봉지구전투(10.17∼18)를 전개한 후, 강동(20일)-성천(21일)-북창(23일)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10월 말 선두부대가 평남 희천에 진출했을 때 중공군의 침략으로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민승천 일등병의 제21연대는 제16연대와 함께 덕천에서 적의 좌측부분을 경계하다가 국군 제7사단이 들어오자 진지를 교대한 후 영원으로 직행하고, 제16연대는 맹산으로 이동했다. 제21연대는 영원까지 수색전을 전개하면서 11월 22일 영원 동쪽 문곡리에 도착하여 부대를 정비했다. 이어 23일부터 27일까지 전개된 영원부근 전투에 투입되었다. 민승천 일등병과 제21연대는 제8사단의 주력으로서 영원 동쪽 30㎞ 문곡리 부근에서 소대규모의 적 전초를 격파하고 수색전을 전개했다. 24일부터 전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전면공격을 개시하자 제21연대는 943고지-902고지선에서 25일까지 공방전을 전개하여 물리쳤다. 민승천 일등병은 제8사단 장병과 함께 11월 26일 새벽부터 공세로 이전한 중공군에 의해 제7사단 제8연대 정면이 붕괴되자 평안남도 맹산 동북쪽 28㎞ 떨어진 대양감령 일대에 진지를 편성했다. 야음을 이용해 틈타 쳐들어온 연대규모의 적을 물리치며 용전분투하던 민승천 일등병은 적탄에 맞아 1950년 11월 26일 20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승천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5-2-22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승철(閔承喆)일등병

"민승철 일등병은 1928년 9월 28일 출생했다. 그는 국군창설 초창기인 1949년 6월 1일 서울시 용산구에 위치하고 있던 제1병참단에 입대했다. 민승철 일등병은 병참관련 특기교육을 이수하고 제8사단 제21연대로 전속되었다. 민승철 일등병이 소속되었던 제21연대는 제8사단 좌측의 매곡동 278고지 정상부에서 서측 일대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16연대가 후퇴하여 영천을 빼앗기자 고립되었으나 13일까지 적을 몰아냈다. 21일 구산동 남쪽 고지에서 적 2천여 명을 육박전으로 격파하고 22일 구산동을 탈환했다. 제2군의 주공인 제6사단이 도원동-충주선으로 진격하자, 의성-안동-영주선으로 북상하면서 25일부터 30일까지 안동·영주·단양지구반격전을 전개했다. 민승철 일등병과 제21연대 장병은 북한군 제15·제8사단을 추격하여 10월 1일 원주에 이르는 고갯마루에서 접전하고, 2일에는 양평에서 적을 정면 공격하여 2시간 동안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10월 3일부터는 미아리-의정부-동두천-전곡리를 거쳐 10일에는 철의삼각지에 진입했다. 이어 곡산지구 전투(10.15∼16)와 석봉지구 전투(10.17∼18)를 전개한 후, 강동(20일)-성천(21일)-북창(23일)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10월 말 선두부대가 평남 희천에 진출했을 때 중공군의 침략으로 상황이 급변하게 되었다. 민승철 일등병의 제21연대는 제16연대와 함께 덕천에서 적의 좌측 부를 경계하다가 11월 20일 제7사단 선두부대와 진지를 교대하고, 영원에 이르는 기동로 일대를 수색하면서 이동했다. 이때 제16연대는 맹산으로 이동했다. 제21연대는 영원까지 수색전을 전개하면서 전술적 도보이동으로 22일 영원 동쪽 31㎞ 떨어진 문곡리에 도착하여 부대를 정비했다. 이 같은 기동 및 수색작전에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승철 일등병은 적의 흉탄을 맞고 1950년 11월 20일 22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승철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5-2-218)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9-ㅎ-05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승호(閔承鎬)일등병
경상남도 산청군 차황면
"민승호 일등병은 경상남도 산청군 차황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2월 8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승호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국군은 참전한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재편성과 지연전을 병행하면서 7월 말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한 후 8월 12일부터는 마산-창녕-왜관-다부동-영천-안강-포항을 있는 200㎞의 방어선을 점령해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쳤다. 이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9월 말 38도선을 회복하고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민승호 일등병은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자마자 전투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민승호 일등병이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점령하고 있었다. 긴장된 나날이 계속되었다. 민승호 일등병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공세는 서울을 또다시 점령하기 위해 서울 북쪽에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민승호 일등병은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렇지만 중공군의 대공세로 인해 중과부적이었다. 민승호 일등병과 국군은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해야 했다. 그때인 1951년 1월 20일 민승호 일등병은 중부전선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승호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8-2-27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5-ㅋ-01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승호(閔承鎬)하사

"민승호 하사는 1929년 9월 18일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3월 26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안전하게 양성하기 위해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훈련 후 민승호 하사는 제6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승호 하사가 소속되어 있던 제6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신령지역까지 철수하여 북한군과 격돌하였다. 대구 외곽 신령지구에서의 제6사단 선전으로 북한군은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실패하였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민승호 하사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38도선을 넘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민승호 하사의 제6사단은 마침내 1950년 10월 26일, 한·중 접경지역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제6사단은 동두천 지역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한 중공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민승호 하사가 소속된 제6사단 장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한강을 넘어 충주로 철수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1951년 2월 초, 제6사단은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 선을 향해 진격하였다. 민승호 하사와 제6사단 전 장병은 다시 한 번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열악한 전장 환경을 극복하며 38도선으로 계속 북진하였다. 민승호 하사의 제6사단은 1952년 3월에는 강원도 김화지역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부대는 전투준비를 하면서 수시로 북진을 위한 공격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승호 하사는 1952년 10월 3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김화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승호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31-2451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신국(閔신국)유격대원

"민신국 유격대원은 6·25전쟁으로 위기에 처했던 조국의 운명을 지켜내는 데 기여한 자랑스러운 호국용사다. 그는 군번도 부여받지 못해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데 기여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1950년 12월 7일 창설된 연풍유격부대에 소속되었다. 그 후 연풍유격대는 1951년 3월 14일 백령도 유격기지사령부에서 동키 제2부대로 호출 부호를 배정받고, 유격대 제6연대 제4대대로 개편되었다. 민신국 유격대원과 같이 서해 도서로 피난 온 청년대원들은 고향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를 갈망했지만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간부들이 작전기지사령부 등지에서 각종 화기 사용법과 무전기 조작법, 폭파와 통신, 공수 낙하 등에 관한 기초훈련을 받는 정도였다. 민신국 유격대원이 소속된 연풍유격부대의 큰 고통은 무기와 탄약, 식량 등 보급품의 부족이었다. 비록 해군으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작전 활동 시에 탄약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늘 부족했다. 그 후 미군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식량과 무기, 군복 등의 보급품 지원이 크게 호전되었다. 민신국 유격대원은 동료대원들과 함께 1950년 12월 13일 구월산 공비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은율군 장연을 사수했다. 12월 23일과 28일에도 공비들의 근거지를 소탕했다. 31일에는 북한군 제26여단 일부가 주둔한 안악군 온정리를 포위한 후 1951년 1월 1일 미명에 공격하여 물리쳤다. 민신국 유격대원과 동료대원들은 3월 23일 제2연대와 함께 월사리 해안에서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적과 교전을 벌였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5월 16일에는 적의 치하에 있는 대원 가족과 피난민을 교정면에서 섬으로 피신시키는 작전을 전개하다가 해안에 고립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침투작전에 항성 앞장서던 민신국 유격대원은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1951년 7월 25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생팔지구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신국 유격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51-4-22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신환(閔신환)일등중사

"민신환 일등중사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9월 15일 육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대구·부산·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는데, 민신환 일등중사는 제8사단 제21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신환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8사단 제21연대는 1951년 11월 초에 제6사단으로 배속 변경되었다가 11월 20일 제8사단이 육군본부 직할로 전환함에 따라 춘천을 거쳐 전북 전주로 이동해 용면·창평·백아산·회문산의 공비를 토벌하고 1952년 1월 20일 임무를 종료했다. 제21연대는 1952년 3월 하순 미 해병 제1사단의 방어진지를 인수하자 서화리의 진지를 강화했다. 대치상황 속에서 수색 정찰과 조우전을 빈번히 전개하던 중 9월 21일과 22일까지 인제 서화 북쪽의 854고지 및 812고지 공방전을 전개했다. 민신환 일등중사와 제21연대 장병은 미 제45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9월 28일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사창리에서 부대정비와 훈련에 주력했다. 10월 19일 제2군단에 배속되자 사단사령부는 화천 북방 주파리에 주둔했다. 25일부터는 수도사단의 주저항선을 인수하여 방어전을 수행했다. 이로부터 주저항선 북방의 적과 수색정찰 간에 빈번히 조우전이 벌어졌다. 민신환 일등중사는 1952년 11월 621고지 방어전에 이어 12월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1953년에 들어서 용호리 지구 271고지 방어, 수도고지 내의 903고지 및 495고지 방어, 김화지구방어임무를 수행했다. 5월 13일부터 제10연대가 마제형진지전투를 전개하자 제21연대 제3대대가 배속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집중 포화를 받고 돈좌되자 제21연대가 작전권을 인수했다. 이 전투에 부하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신환 일등중사는 적의 포화에 중상을 입고 치료하던 중 1953년 5월 17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강원 원동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신환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3-2-198)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양호(閔양호)근로대원

"민양호 근로대원은 6·25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7월 근로대원으로 소집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이나 생업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해 전투를 수행했다. 근로대원으로 소집된 사람들은 나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어 전투요원으로 소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민양호 근로대원은 제101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양호 근로대원은 부대와 함께 이동하고 전투를 수행하면서 후방지원을 담당했다. 민양호 근로대원이 주로 수행한 임무는 후방지역의 교량 및 도로보수, 탄약과 군 장비의 전선 운반, 기타 기술근무 등으로 전투부대들이 전투임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온갖 궂은 지원들을 전담했다. 민양호 근로대원과 동료들이 안전한 후방지대에서 근무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노무부대’ 혹은 ‘지게부대’라고 불리며 탄약과 장비들을 등에 짊어지고 최일선 전투지대를 찾아가 탄약과 무기를 보급하는 것도 그들의 주 임무 중 하나였다. 민양호 근로대원은 적의 포탄의 세례 속에 전투진지를 찾아가 탄약과 장비를 전달했다. 민양호 근로대원과 노무요원들은 모든 것이 불비한 여건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탄약과 장비를 짊어지고 전투가 이루어지는 최일선을 방문했을 때 적의 포탄세례로 목숨을 잃은 노무요원들이 부지기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넘어진 병사의 소총을 대신 들고 전투에 임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민양호 근로대원은 언제나 앞장서서 임무를 수행하던 대원이었다. 민양호 근로대원은 어떠한 전투상황에도 변함없이 전투현장을 찾아 보급품을 나르며 전투수행을 지원했다. 그날도 민양호 근로대원은 전투현장을 찾아가 임무수행에 매진하던 중 적의 포탄에 맞아 1953년 1월 13일 연천지역 전투현장에서 꿈 많은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양호 근로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36-53-1964)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억성(閔億成)일등병
전라북도 군산시 문화동
"민억성 일등병은 전라북도 군산시 문화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 긴급하게 설치된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억성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국군의 주력은 한강 북쪽에서 붕괴되었다. 북한군은 7월 3일 아침 T-34전차를 노량진 방향으로 도하시켜 국군의 한강방어선을 돌파해 국군을 계속 추격했다. 다행히 유엔군이 참전해 국군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재편성과 지연전을 병행하면서 7월 말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했다. 민억성 일등병은 그때부터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어 전투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은 왜관-구미-의성-안동-청송-영덕까지 120㎞ 구간을 방어했으나 8월 12일부터는 왜관-다부동-영천-안강-포항을 있는 80㎞의 방어선을 점령해 방어했다. 민억성 일등병과 같이 입대한 신병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전사하는 사례도 허다했다. 군번은 고사하고 부대원 명부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중대장은 물론 소대장이나 분대장이 소속대원의 이름을 익히기도 전에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민억성 일등병은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는 전투경험이 많지 않은 신병에 불과했지만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누구보다 투철했다. 언제나 용전분투하던 민억성 일등병은 1950년 9월 9일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억성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9-7-26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1-ㅅ-11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영웅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