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성기-민성호2023-02-05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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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기(閔성기)일등병

"민성기 일등병은 1930년 7월 7일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에 이어 중공군의 개입과 공세로 인해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2년 2월 13일 제주도 모슬포항에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민성기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전황은 공산군 측과 포로송환 문제를 두고 치열한 대치국면이 조성되어 있었다. 공산군 측은 전체의 포로를 포로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원상회복(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아군은 포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유송환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성기 일등병은 야전부대에 전입하자마자 고지쟁탈전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양측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 아울러 조만간 포로송환협상이 타결될 경우 유리한 지역에 방어선을 설치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성기 일등병이 야전부대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대표적인 전투지역이 수도고지·지형능선전투, 국군 제9사단이 수행한 철원지역 전투, 국군 제2사단이 미군과 함께 수행했던 철원 북방 저격능선전투, 국군 제7사단이 수행했던 양구 북방의 크리스마스고지전투 등이었다. 민성기 일등병이 고지쟁탈전에 임하고 있던 시기의 육군은 전투장비와 물자 보급을 개선하고 부대교대를 통해 후방지역에서 부대훈련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악조건이었다. 민성기 일등병과 국군장병 모두는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민성기 일등병은 책임감이 투철했다. 언제나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임무를 완수했다. 그 시기 38도선 부근전투에서 민성기 일등병은 중상을 입고 제27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1953년 5월 2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기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수습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41-1-1587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기(閔城基)하사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민성기 하사는 1930년 8월 14일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2년 1월 13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항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제38보충교육연대로 전속되어 포로수용소 경비임무를 수행했다. 1952년 4월 28일 제38연대로 증편되어 11월 22일 창설된 제15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성기 하사가 배치된 제15사단은 고성 일대의 요충지인 월비산과 351고지를 확보하는 것이 임무였다. 사단은 우측에 제38연대를 배치하여 351고지 일대를 방어하고, 좌측에 제39연대를 배치하여 554고지 일대를 방어했다. 그리고 제50연대는 사단예비로서 산정리 일대에 집결 보유했다. 민성기 하사가 소속된 제15사단은 351고지 일대에서 진지강화 및 정찰활동을 계속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1953년 휴전협상 타결이 확실해지자 상황은 긴박해졌다. 북한군은 5월부터 전례에 보기 드문 각종 포화의 맹렬한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방향에서 고지 정상으로 육박해 왔다. 민성기 하사가 소속된 부대는 지체 없이 지원사격을 요청하면서 치열한 육박전을 전개했지만 351고지를 지탱할 수가 없어 물러났다. 민성기 하사는 최일선에서 351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반복했다. 그러나 적은 집중 포화와 동굴진지를 이용해 강력히 저항함으로써 소속부대의 많은 장병이 희생되었다. 민성기 하사는 사단이 351고지의 북한군 진지를 포격하는 상황에서 앞장서서 맹렬히 돌진하여 유개호에 있는 적 여러 명을 사살했다. 그는 다시 앞으로 용감하게 전진하던 중 351고지 동굴진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적의 집중 사격을 받고 1953년 6월 16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강원도 고성지구 전선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기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3-2-17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76-ㅂ-04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기(閔晟基)순경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
"민성기 순경은 1928년 11월 27일 전라남도 해남군 마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타 지역 경찰서에서 복무를 하면서 수차례 공비토벌에 참가한 후 전라남도경찰국 해남경찰서에 소속되었다. 민성기 순경이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성기 순경과 동료대원들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적 인민유격대가 침입하여 지방공비와 합류한 후 후방지역을 교란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6월 25일 북한군이 불법 기습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북한군 제6사단이 서부지역으로 우회하여 목포, 나주 방향 각각 진격하자 영광일대에서 거점을 편성하고 있던 공비들이 북한군의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경찰서 습격, 양민학살 등 치안을 교란했다. 민성기 순경과 동료대원들은 공비들의 치안교란 행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영광지역에 투입되었다. 민성기 순경과 동료대원들은 묘량면 지역 일대에서 공비들을 포획·섬멸하는 작전을 전개했다. 공비들의 은거지역을 수색하여 섬멸하고, 오열을 색출하여 치안질서를 확립했다. 한편 공비들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양민을 학살한다는 주민신고를 받고 출동하였다. 양민들을 위협하던 공비들과 마주쳤다. 쌍방의 총일이 빗발치는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민성기 순경과 대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1950년 7월 23일 영광 묘량지구에서 공비와 교전 중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기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8-ㅈ-08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기(閔聖基)일등병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민성기 일등병은 1932년 9월 7일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2월 부산·경주 등에 긴급 설치된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민성기 일등병은 제8사단 제10연대 소속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민성기 일등병이 소속되었던 제8사단 제10연대는 1951년 2월부터 북한군 제5군단의 원주 공격에 대비해 횡성부근에서 수색작전을 전개했으나, 중공군의 제4차 공세에 포위되어 고립되었다가 주포리로 분산 철수했다. 민성기 일등병의 제10연대는 횡성지구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대구로 이동하여 재편성했다. 4월 초 전주로 이동하여 호남지구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 후 미 제10군단 예비로 전환하여 제천-평창-홍천-현리-인제-원통리로 이동하면서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민성기 일등병의 제10연대는 7월 20일 인제군 원통리 북방 노전평지구의 제5사단 작전지역을 인수했다. 8월 9일부터 13일까지 인제군 서화 계곡의 노전평 부근에서 굴절된 불리한 방어선을 개선하기 위해 북한군 4개 사단과 고지쟁탈전을 치렀다. 북한군 대대규모와 수십 차례 육박전을 전개한 결과 무명고지와 785고지를 점령했다. 민성기 일등병은 제10연대 장병과 함께 7월 20일 제5사단 배속에서 해제되어 제8사단으로 원복한 후 8월 9일부터 13일까지 제1차 노전평지구전투에 투입되어 무명고지·785고지 등을 점령했으나 13일 1031고지와 965고지 방향에서 쳐들어온 적을 격퇴한 후 진지를 강화했다. 무명고지는 10일 적에게 빼앗겼다가 14일 야간에 탈환했다. 18일부터 철미동 동남방지구전투에 투입되어 20일 1031고지를 점령하고 21일 적의 역습을 격퇴했다. 고지공방전에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성기 일등병은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1951년 8월 25일 19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기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2-ㅊ-06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기(閔聖基)일등병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민성기 일등병은 1931년 4월 4일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때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 긴급하게 설치된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성기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국군의 주력은 한강 북쪽에서 붕괴되었다. 북한군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그 시기에 유엔군이 참전했다. 국군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재편성과 지연전을 병행하면서 7월 말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했다. 민성기 일등병은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자마자 전투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8월 초 국군은 왜관-구미-의성-안동-청송-영덕까지 120㎞ 구간을 방어했으나 8월 12일부터는 왜관-다부동-영천-안강-포항을 있는 80㎞의 방어선을 점령해 방어했다. 민성기 일등병이 방어하고 있는 지역에서 북한군은 집요한 공세를 계속했다. 같이 입대한 신병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전사하는 사례도 허다했다.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국군은 위기를 돌파하고 유엔군과 함께 반격에 나섰다. 민성기 일등병은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는 전투경험이 많지 않은 신병에 불과했지만 언제나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는 10월 초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나서 압록강부근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이 기습적인 공세를 감행해 왔다. 민성기 일등병과 국군은 조국통일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민성기 일등병은 1950년 12월 16일 북한지역에서 38도선으로 철수하는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기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2-3-25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1-ㅍ-03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기(閔聖基)일등병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민성기 일등병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입대했다. 민성기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부터 북한군의 국지도발은 계속되고 있었다. 38도선 곳곳에서 전투에 준하는 국지도발이 발생했다. 그중에서도 1949년 5월 4일 개성 북쪽의 송악산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한 송악산전투는 전쟁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후방지역의 상황도 비슷했다. 북한에서 침투한 무장공비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연결된 도발사건이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민성기 일등병과 장병은 북한의 계속된 도발로 인해 긴장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경계태세 강화를 위한 비상경계령이 수시로 하달되었다. 민성기 일등병과 장병은 휴가는커녕 외출·외박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4일 토요일을 기해 그동안 계속되어오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었다. 많은 장병들이 농번기를 위한 휴가를 출발하고, 영내에 남아 있던 병력들도 외출·외박을 나갔다. 민성기 일등병과 장병이 일요일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무렵인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그날 아침에 대부분의 38도선 방어진지를 유린했다. 민성기 일등병은 부대와 함께 방어진지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당시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일부 장병은 대전차특공대를 조직해 육탄공격을 시도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민성기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용전분투했다. 민성기 일등병과 장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성기 일등병은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38도선 부근의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기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1-7-05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79-ㅋ-01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식(閔聲植)일등병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민성식 일등병은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8월 1일 제8사단에 현지 입대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민성식 일등병은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기초훈련과정도 없이 낙동강방어전투에 투입되어 제8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성식 일등병이 소속된 제8사단은 한·중국경선을 향해 계속 북진하면서 최종 유엔군과 크리스마스 공세를 했으나, 중공군의 제2차 및 제3차공세로 38도선까지 철수했다. 그 후 1951년 1월 중순부터 유엔군과 반격을 했으나, 중공군은 2월 11일부터 원주방향으로 4차 공세를 감행했다. 민성식 일등병의 제8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차기작전을 위하여 적 상황과 능력을 탐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2월초 강원도 주산리, 풍수원, 오음산 남쪽 십일천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대삼고지와 오음산을 연하는 선에서 저지당했다. 그 다음 날 공격진출 지점을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이목동, 창봉리를 연하는 선 일대에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적정을 파악했다. 민성식 일등병과 제8사단 장병은 2월 12일 중공군 제66군 3개 사단의 대 반격공세로 포위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미 제10군단장에게 건의하였으나, 적을 과소평가하고 건의를 묵살했다. 군단장은 차후 주포리로 철수명령을 하달했으나, 각 연대와 연락이 두절되고 적에게 고립된 상태에서 분산 철수했다. 이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고 육군본부 직할로 전환하여 대구에서 부대를 재편성한 후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민성식 일등병은 적에게 고립된 상태에서도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하여 적을 물리치는 수훈을 세우고, 대구에서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은 민성식 일등병은 1951년 4월 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2-1682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0-ㅈ-01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옥(閔成玉)하사
경기도 평택시 평택동
"민성옥 하사는 1932년 4월 12일 경기도 평택시 평택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7월 2일 의정부에서 동두천-포천일대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7사단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훈련을 위한 장비는 물론 복장조차도 제각각이었다. 민성옥 하사는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성옥 하사가 소속된 제7사단은 적성에서 일동까지 47㎞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사단은 제1연대를 좌측 동두천축선에, 제9연대를 우측 포천축선에 배치하여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6월 15일 예비부대인 제3연대를 수경사로 전환했으나 6∙25전쟁 당일 제7사단으로 다시 예속되었다. 민성옥 하사와 제7사단은 38도선 부근에서 진지공사에 매진했다. 이 시기 1949년부터 북한의 도발은 심상치 않았다.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지역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하는 송악산전투가 발생하는 등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면서 준전시와 같은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남침으로 연결되었다. 민성옥 하사가 근무했던 의정부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북한군은 동두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4사단을 투입하고, 포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3사단을 투입해 의정부를 목표로 공격했다. 민성옥 하사와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민성옥 하사와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성옥 하사는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동두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옥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8-1-21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1-ㅌ-05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운(閔성운)유격대원

"민성운 유격대원은 6·25전쟁으로 위기에 처했던 조국의 운명을 지켜내는 데 기여한 자랑스러운 호국용사다. 그는 군번도 부여받지 못해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데 기여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1951년 8월 4일 황해도 은율군 웅도에서 재편된 유격대 구월산부대 제6연대 제4대대 유격대원이 되었다. 민성운 유격대원과 같이 서해 도서로 피난 온 청년대원들은 고향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를 갈망했지만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간부들이 작전기지사령부 등지에서 각종 화기 사용법과 무전기 조작법, 폭파와 통신, 공수 낙하 등에 관한 기초훈련을 받는 정도였다. 대원들은 간부들에게 간접적으로 배우거나 실전을 통해 하나씩 배워갈 수밖에 없었다. 민성운 유격대원이 소속된 구월산유격부대의 큰 고통은 무기와 탄약, 식량 등 보급품의 부족이었다. 해군으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작전 활동 시에 탄약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늘 부족했다. 그 후 미군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식량과 무기, 군복 등의 보급품 지원이 크게 호전되었다. 민성운 유격대원과 구월산유격부대 대원들은 1951년 8월 24일 강운리에 주둔 중인 북한군 제23여단 고사포부대를 기습하고, 10월 10일에는 석교리의 경비소대를 기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2월 11일 야포와 박격포의 집중공격을 받은 피도가 점령당하고, 16일 새벽에는 60여 명의 대원이 주둔한 청양도가 북한군 제23여단의 공격을 받고 실함되었다. 민성운 유격대원은 12월 18일 적 1개 대대 병력이 강력한 화력지원을 받으며 150여 명의 유격대원이 주둔한 웅도로 쳐들어오자 접전을 벌였다. 약 2시간 동안 혈전을 벌이는 가운데 불퇴전의 용기로 용전분투하던 민성운 유격대원은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12월 18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웅도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운 유격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06-5-290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재(閔聖在)일등병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민성재 일등병은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그는 제6사단 제7연대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성재 일등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경상북도 군위·신령 지역까지 조직적으로 철수하여 또다시 북한군과 격돌하였다. 당시 제6사단은 운산동-화산간 15Km에 이르는 방어정면을, 좌측에는 제1사단이 가산-신원간 13Km에 달하는 방어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민성재 일등병은 이 당시 북한군 제8사단이 신령을 거쳐 영천을 점령하려는 악착스러운 공격을 동료장병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저지하였다. 결국 북한군의 공격은 좌절되었고 영천 점령을 위해 동시에 공격에 나셨던 북한군 제15사단은 고립되어 괴멸되었다. 민성재 일등병과 제6사단 장병들은 찌는 듯한 무더위와 열악한 보급지원하에서도 오로지 조국수호를 위한 투철한 애국심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들은 엄청난 인명손실을 마다하지 않고 악귀처럼 덤비는 북한군을 근접전투와 처절한 백병전으로 물리쳤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어 심지어 고지에서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민성재 일등병의 제6사단은 대구 외곽선인 신령지구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대구를 점령하려던 적의 기도를 결국 좌절시켰다. 또한 이 전투는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성재 일등병은 1950년 9월 3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신령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재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1-2-10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0-ㅂ-00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호(閔성호)군속

"민성호 군속은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1년 기술분야 군속으로 선발되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운용되는 자동차 등의 장비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 운전과 정비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고급기술자군에 속했다. 민성호 군속은 4863부대에 소속되었다. 민성호 군속은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1년 기술 분야 군속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민간인 신분으로 육군 직할부대에서 근무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운용되는 자동차 등의 장비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자동차 운전과 정비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고급 기술자군에 속했다. 따라서 민성호 군속은 유능한 기술자였다고 할 수 있다. 민성호 군속이 4863부대에에 근무하고 있을 당시의 전황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새로운 양상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예상과 달리 1951년 2월 12일 제4차 공세 등 일제히 대규모 공세를 감행해왔다. 민성호 군속이 근무하는 부대는 대부분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전선의 후방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선의 상황에 따라 전방의 전투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현장지원을 계속했다. 민성호 군속도 안전한 후방지역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후방지역도 언제나 안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북한군의 유격대가 곳곳에서 출몰해 후방교란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민성호 군속은 현역 군인이 아니었지만 현역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근무했다. 그는 모든 것이 불비한 여건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임무를 완수하는 애국심에 불타는 군속이었다. 그러나 민성호 군속은 1951년 4월 10일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임무수행 중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호 군속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36-53-196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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