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선기-민성규2023-02-0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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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기 (閔璇基)이등중사

"민선기 이등중사는 출신지와 생년월일은 미확인되었으나 조선경비대 제 9연대로 입대하여 제2연대에서 복무하였다. 제2연대는 1946년 2월 28일 충청남도 대전에서 창설되어 부대확장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향토방위작전 임무를 수행하다가,1948년 10월 23일부터 여수 순천반란진압작전에 참가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작전을 수 행하였다. 이후 1948년 12월 29일부터 1949년 7월 6일까지 제주도지구 공비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민선기 이등중사는 제주도지구 공비토벌작전 기간 중 1949년 3월 3일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를 길이 추모하고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 기 위하여 서울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에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위패번호 는 30-8-155번이다. 또한 전쟁기념관 전사자명비(戰死者銘碑)에 그의 이 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민선기(閔선기)이등중사

"민선기 이등중사는 국군 창설 직후인 1948년 경기도 시흥에서 창설된 제17연대에 입대했다. 그가 소속된 제17연대는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전환되면서 서울 용산으로 이동해 서울의 주요시설경계와 후방지역 무장공비소탕작전을 수행했다. 민선기 이등중사는 제2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선기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7사단을 증원하기 위해 6월 26일 새벽 금오리에 도착한 즉시 43번 도로 동측의 208고지, 백석고지 남쪽에 배치하여 대비했다. 그와 장병들은 북한군 제3사단이 보전협동으로 축석령으로 공격해 오자 가용화기를 이용하여 적을 퇴각시켰다. 장병들은 북한군의 월등한 화력과 기습공격으로 퇴로가 차단되고 사단 지휘소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병력, 장비, 탄약부족으로 인해 전투다운 전투를 하지 못하고 의정부 동북쪽의 요충지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장병들은 분산 철수하여 6월 27일 창동지역으로 집결하여 신 방어선을 형성하고 북한군을 저지했다. 민선기 이등중사와 장병들은 수원으로 철수하여 한강방어를 위해 우면산-남태령에 주진지를 배치하고, 그 북쪽 매곡리의 86-101고지 일대에 경계진지를 마련 동작동-과천-군포-경부국도와 연결되는 도로를 방어했다. 7월 3일 노량진 부근의 한강방어선이 무너짐으로써 수원마저 포기해야 하는 결정적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7월 14일 청주-괴산에서 철수하여 고은리와 문의 일대에서 방어임무를 수행했다. 고은리 지역에서 북한군 제2사단과 격전을 벌이고 7월 16일 미군의 금강방어선이 무너지자 회인지역으로 전선을 조정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민선기 이등중사는 북한군의 집중포화와 공세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을 물리치는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1950년 7월 19일 민선기 이등중사는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진천-청주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선기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35-2-2139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선기(閔善基)이등중사

"민선기 이등중사는 1948년 경기도 시흥에서 창설된 제17연대에 입대했다. 민선기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17연대는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전환되면서 서울 용산으로 이동해 서울 일대의 후방지역작전을 수행했다. 민선기 이등중사와 제17연대는 1950년 1월 2일 옹진반도에 투입되었다. 그해 3월 1일에는 육군 직할부대로 전환되면서 38도선 경계 등 옹진반도의 경비를 전담하게 되었다. 옹진반도는 후방이 해주만과 경기만의 바다에 의해 차단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아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부대였기 때문에 육군 직할의 특별부대로 운용되고 있었다. 민선기 이등중사가 38도선 경계 등 옹진반도의 작전에 적응하게 될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었다. 그날 새벽 북한군은 제3경비여단을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는 국사봉 일대에, 제6사단 제1연대를 제3대대가 담당하고 있는 은파산 일대에 투입해 압도적인 병력으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민선기 이등중사와 제17연대 장병은 용전분투했지만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당시 제17연대 장병이 보유하고 있던 2.36인치 로켓포로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제1대대장 김희태 소령이 전사하는 등 38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1대대와 제3대대의 방어선은 당일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민선기 이등중사와 장병은 부대의 건제와 지휘체계가 조기에 붕괴되는 와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했다. 민선기 이등중사는 언제나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제17연대의 능력으로는 중과부적이었다. 민선기 이등중사는 인천으로 철수한 후 1950년 7월 19일 경상북도 상주군 화령장 동관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선기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6-ㅌ-05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선기(閔璇基)일등병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민선기 일등병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1년 3월 15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민선기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1950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했다. 1월 말에는 다시 반격을 시작해 3월 13일 서울을 되찾고 4월에는 38도선 부근으로 진격했다. 민선기 일등병은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자마자 전투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민선기 일등병이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시작해 38도선 부근까지 진격한 후 중공군과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민선기 일등병은 부대에 배치되어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부근에서 중공군을 계속해서 격파했다. 중공군은 1951년 2월 11일 홍천축선에서 시작한 제4차 공세를 시작으로 4월 22일에 제5차 공세를, 5월 16일에 제6차 공세를 잇달아 감행했다. 민선기 일등병과 장병의 용전분투로 중공군의 공세를 물리치면서 전투는 38도선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이어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38도선 일대에서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고지쟁탈전은 더욱 가열되었다. 민선기 일등병과 장병은 장차 휴전에 대비해 유리한 휴전선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전개했다. 그 시기인 1952년 6월 1일 민선기 일등병은 양구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선기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7-ㅌ-07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선식(閔善植)일등병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민선식 일등병은 1923년 8월 7일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해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1950년 8월 16일 부산시 북구 구포에 위치한 제3훈련소에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민선식 일등병은 카투사(KATUSA, 한국에 파병된 미군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한국군) 요원으로 선발되어 연합군지원한국군 미 제25사단에 배치되었다. 민선식 일등병이 소속된 카투사는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탄생한 제도였다. 평시 상태였던 미군은 감소 편성,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부족했다. 반면 한국의 인적자원은 충분했지만 장비와 물자가 부족했다. 이런 요인들에 따라 한국에 파병되는 유엔군의 부족한 병력을 한국군 병력으로 보충시켜 유엔군의 전투력 발휘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민선식 일등병과 미 제25사단은 낙동강방어선의 마산지역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친 후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반격으로 전환했다. 9월 말에는 38도선을 회복한 후 북진작전에 돌입해 평양에 입성하고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연이어 계속된 세 차례의 기습공세로 인해 평택을 연하는 37도선까지 철수해야 했다. 다시 반격으로 전환한 민선식 일등병과 미 제25사단은 임진강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해 중공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계속했다. 민선식 일등병과 카투사 병사들은 미군과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지만 용맹을 발휘했다. 특히 그는 한국군의 용맹을 대표하기 위해 매 전투마다 앞장서며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전선이 교착되어 주로 전초전과 고지쟁탈전이 전개되고 있던 1951년 12월 12일, 민선식 일등병은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철원 남방에서 후방침투한 적과 교전 중에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선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0-ㄴ-09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선재(閔先在)이등상사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민선재 이등상사는 1932년 7월 1일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2월 8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 설치된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민선재 이등상사는 제8사단 제21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선재 이등상사가 소속된 제8사단은 1953년 5월 13일부터 제10연대가 마제형진지전투를 전개하자 제21연대 제3대대를 배속시켰다. 그러나 기선을 잡은 중공군이 29일 747고지에서 감제되는 수도고지와 주저항선으로 쳐들어왔고, 제21연대 장병들이 많은 피해를 입은 채 적에게 점령당했다. 민선재 이등상사의 제8사단은 앞서 5월 중순 약 4개 대대가 전투능력을 상실하며 주저항선 진지들을 빼앗겼다. 이를 탈환하기 위해 역량을 강화하고 있던 상황에서 6월 12일 제21연대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수도고지 후방 주저항선이 공격을 받고, 우익연대 주저항선이 붕괴되었다. 민선재 이등상사의 제21연대는 수색중대가 663고지를 목표로 투입되었다가 돈좌되자 지형능선 최고봉을 14일 빼앗겼다. 이때 제3대대는 적을 격퇴했으나 제2대대는 패퇴하여 분산되었다. 이 금성동남방지구전투(6.12∼21)를 수행한 후로 제8사단은 새로운 주저항선으로 이동하기 위한 원동지구 철수 및 별우지구반격전(7.13~18)을 전개했다. 민선재 이등상사와 제21연대는 7월 13일 밤부터 14일 오전까지 주저항선에서 중공군 제67군을 저지하다가 좌우 인접사단이 15일 철수함에 따라 금성천 남쪽으로 철수했다. 이날 저녁부터 다시 공격하여 제1대대가 461고지를 점령했다. 제2·제3대대는 16일 흑운토령을 탈환한 후 광대곡의 금성천변을 초월했으나, 17일 적의 곡사화력과 자동소화기에 큰 타격을 입었다.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선재 이등상사는 적의 흉탄을 맞고 1953년 7월 18일 21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김화지구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선재 이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6-ㄱ-046)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성규(閔成奎)일등병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민성규 일등병은 1934년 3월 16일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3월에 주둔하고 있던 제2사단에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민성규 일등병은 신생 조국을 구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성규 일등병이 소속된 제2사단은 1950년 11월 7일 서울에서 재창설되었다. 민성규 일등병의 입대를 전후한 시기의 전황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은 참전한 유엔군과 함께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쳤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과 10월 25일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청천강으로 후퇴해 최종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민성규 일등병과 제2사단은 경기도 북부의 포천-김화-평강 등의 지역에서 암약하고 있던 북한군 잔적소탕에 나섰다.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후방이 차단된 북한군의 일부가 산악지역에서 기존의 빨치산과 연결해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지역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성규 일등병이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수행할 때인 1950년 11월 24일 국군과 유엔군이 최종공세(크리스마스공세)를 감행했다.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유인해 통렬한 타격을 가했다. 결정적인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지역을 포기하고 38도선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그 시기에 북한군 제10사단이 아군의 후방지역으로 침투해 산악지역의 북한군 패잔병과 연결하면서 후방지역의 무장공비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민성규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후방지역 무장공비의 위협이 정규군의 규모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1951년 1월 20일 민성규 일등병은 충청북도 제천지구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성규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3-5-178)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8-ㅈ-07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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