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상기-민석재2023-02-05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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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상기(閔尙棋)이등중사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민상기 이등중사는 1928년 2월 28일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창설 초창기인 1949년 광주광역시에서 창설된 제21연대에 입대했다. 민상기 이등중사와 제21연대는 1949년 6월 20일 강릉에서 제8사단이 창설되면서 제8사단에 예속되어 삼척 일대에 주둔하게 되었다. 민상기 이등중사가 소속되었던 제8사단은 1949년 6월 20일 제10연대와 제21연대를 기간으로 강릉에서 창설되었다. 그 후로 동부지역 38도선 경계와 오대산에서 태백산까지 북한 유격대 및 공산 잔비들을 소탕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제5사단·제38경비 제1여단 3개 대대와 대적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동해안을 따라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장리·서림리 등 경계진지로 공격하고, 북한군 제766부대와 육전대 5백여 명은 해상으로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임원진 등지로 상륙하여 협공작전을 시도했다. 민상기 이등중사의 제21연대는 6월 28일까지 전개된 강릉지구 전투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의 수륙양면 기습으로 불리한 상황하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포병 지원과 대전차포 등 압도적 전력으로 38도선 경계진지와 양양군 현북면 북방 화랑고지 일대로 밀고 들어왔다. 제8사단 장병들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민상기 이등중사는 북한군이 주문진 방면에서 국군의 주저항선으로 쳐들어오자 제21연대 장병들과 함께 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제동을 걸었다. 27일 주문진 탈환전에 실패하고 지연전을 전개하다가 평창-제천에서 대구로 남하했다가 북상하여 단양부근전투(7.8~7.12)에 투입되었다. 적은 도담리를 교두보로 남하하여 9일 695고지로 쳐들어왔다. 제21연대는 695고지에서 물러나 664고지-슬금산 671고지-현천리-324고지로 전개하여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전개했다.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상기 이등중사는 적의 흉탄을 맞고 1950년 7월 9일 22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상기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6-ㄲ-05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상기(閔牀基)이등중사
충청북도 청주시
"민상기 이등중사는 1932년 6월 14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3월 17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민상기 이등중사가 입대할 당시의 전황은 공산군 측과 포로송환 문제를 두고 치열한 대치국면이 조성되어 있었다. 공산군 측은 전체의 포로를 포로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원상회복(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아군은 포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유송환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상기 이등중사는 야전부대에 전입하자마자 고지쟁탈전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양측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 아울러 조만간 포로송환협상이 타결될 경우 유리한 지역에 방어선을 설치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상기 이등중사가 야전부대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대표적인 전투지역이 수도고지·지형능선전투, 국군 제9사단이 수행한 철원지역 전투, 국군 제2사단이 미군과 함께 수행했던 철원 북방 저격능선전투, 국군 제7사단이 수행했던 양구 북방의 크리스마스고지전투 등이었다. 민상기 이등중사가 고지쟁탈전에 임하고 있던 시기의 육군은 전투장비와 물자 보급을 개선하고 부대교대를 통해 후방지역에서 부대훈련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악조건이었다. 민상기 이등중사와 국군장병 모두는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민상기 이등중사는 책임감이 투철했다. 언제나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임무를 완수했다. 그 시기인 1953년 6월 19일 38도선 부근 전투에서 민상기 이등중사는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상기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8-ㅊ-08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상기(閔相基)하사
황해북도 개풍군
"민상기 하사는 황해북도 개풍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이 북한지역을 점령한 시기인 1950년 10월 초에 간단한 기초훈련을 마치고 해군 PC-704함에 승선하였다. 민상기 하사가 승선한 PC-704함은 1950년 7월 25일 진해에 입항하여 7월 26일부터 남·서해 봉쇄작전을 주 임무를 맡아 덕적도, 영흥도 상륙작전을 비롯하여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성공적인 임무를 수행한 부대였다. 민상기 하사가 참전한 PC-704함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인 1950년 9월 30일부터 1951년 말까지 묵호기지 수복전, 북한 전진기지 설치, 서해안 철수작전, 황해도 옹진 및 연백지구 작전, 서해안 도서지구전투 및 서해 경비작전 등 주요 해상작전에서 운용되었다. 민상기 하사가 전투에 투입한 당시 전황은 1951년 11월 27일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의 결정은 진지쟁탈전을 일시 중지시켜 전선은 소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소규모 전초진지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북한군은 해안선의 방어진지를 요새화하고 아군의 상륙을 방어하기 위한 철조망과 지뢰를 매설하는 등 장애물을 설치한 상황이었다. 민상기 하사와 PC-704함은 1951년 12월 26일, 원산항에 상륙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야간에 거센 풍랑의 악조건을 무릅쓰고 원산항 해안에 은밀히 접근하여 적 해안포대에 함포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PC-704함이 함포 공격을 하면서 외해로 방향을 전환할 때, 거센 파도에 떠밀려 기뢰에 접촉하게 됨으로써 원산 근해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민상기 하사는 이날 해상작전에서 애석하게도 PC-704함이 침몰함에 따라 승선한 승조원 57명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민상기 하사도 이날 PC-704함의 침몰과 함께 1951년 12월 26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원산항 근해에서 고귀한 목숨을 조국에 바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상기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19-8-128)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1-ㅇ-04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상식(閔商植)일등병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민상식 일등병은 1933년 9월 16일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4월 29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항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민상식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1950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인해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했다. 1월 말에는 다시 반격을 시작해 3월 13일 서울을 되찾고 4월에는 38도선 부근으로 진격했다. 민상식 일등병은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자마자 전투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민상식 일등병이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부근에서 중공군과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민상식 일등병은 부대에 배치되어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부근에서 중공군을 계속해서 격파했다. 중공군은 1951년 2월 11일 홍천축선에서 시작한 제4차 공세를 시작으로 4월 22일에 제5차 공세를, 5월 16일에 제6차 공세를 잇달아 감행했다. 민상식 일등병과 장병의 용전분투로 중공군의 공세를 물리치면서 전투는 38도선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이어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38도선 일대에서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고지쟁탈전은 더욱 가열되었다. 민상식 일등병과 장병은 장차 휴전에 대비해 유리한 휴전선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고지쟁탈전을 전개했다. 그 시기에 민상식 일등병은 38도선 부근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제36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1952년 8월 21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상식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수습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41-2-1570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7-ㅊ-10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상언(閔相彦)일등병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민상언 일등병은 1924년 11월 20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9월 4일 부산시 북구 구포에 위치한 제3훈련소에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민상언 일등병은 카투사요원으로 미 제7사단 제32연대에 배속되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후, 11월 초에 제9사단 제28연대로 전속되었다. 그는 사단 주도로 전개된 대둔산 공비토벌 작전 이후 중공군의 제3차 공세에 대비하기 위해 동부전선 인제-현리 부근전투와 정선-창리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송계리전투에 투입되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민상언 일등병이 참전한 전선은 1951년 3월 초 국군이 중동부전선에서 북한군을 격퇴하고, 후방 산악지대에서 준동하는 잔적을 소탕하기 위해 속사리-횡계리-강릉에 이르는 강력한 진격선을 구축함에 따라 북한군은 발왕산과 노향산 일대를 점령하고 북으로의 도주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민상언 일등병의 제28연대는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해 송계리 북쪽인 송현리에, 2개 연대는 석이양산에서 백봉령에 이르는 선에 배치했다. 한편 태백산에서 북상 중인 북한군은 아군 폭격기의 포 사격 및 지속적인 추적 작전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이탈자가 속출했다. 민상언 일등병과 연대는 신기리에서 북상 중인 북한군 2,000여 명이 평창동에 은신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섬멸하기 위하여 포위망을 구축했다. 민상언 일등병과 연대가 포위망을 형성하여 적진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으나, 북한군은 고적대에 집결하여 북상하고 말았다. 민상언 일등병과 연대는 13일에도 북한군이 장아리로 진출함에 따라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민상언 일등병은 이날 북한군과의 숨 막히는 백병전에서 임전무퇴의 각오로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총상을 입고 치료하던 중 3월 15일 청춘을 뒤로한 채, 송계리전투에서 고귀한 목숨을 국가에 헌납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상언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1-2-12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8-ㄴ-00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상용(閔상용)이등상사

"민상용 이등상사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0년 9월 10일 분연히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상용 이등상사는 수도사단 제1연대에 소속되었다. 전쟁 발발 이후 1951년 당시 수도사단은 제1연대, 제26연대, 기갑연대로 편성되어 5월 설악산일대를 점령했으나 중공군의 제6차 공세로 말미암아 설악산~대관령선으로 철수한 후 그들의 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했다. 사단은 6월 향로봉전투에서 적들을 물리쳤다. 그 후 사단은 8월 미 제8군의 크리퍼(Creeper) 작전에 참가해 8월 16일 924고지-754고지를 공격했다. 민상용 이등상사와 연대는 8월 18일 적이 점령한 924고지 진지를 공격했다. 그러나 지형의 경사가 심한 데다 잘 구축된 진지에서 적이 방어하고 있어 전진은 부진했다. 민상용 이등상사와 연대는 고지 8부 능선일대에서 일제히 적진으로 돌입해 924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20일 그와 연대는 적의 파상공격으로 고지를 탈취당했다. 이에 25일 증원부대를 급파했지만 연대의 방어정면이 넓어 효과가 없었다. 그와 연대는 30일 924고지 중턱에서 과감히 적진으로 돌격해 고지를 점령했다. 민상용 이등상사와 연대는 9월 6일 동해안 지역으로 이동해 월비산전투에서 4일간의 격전 끝에 월비산을 탈취했다. 그 후 11월 16일 호남지구에 창설된 백야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되어 지리산과 백운산 일대의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다. 그와 연대는 1952년 3월 17일 화천으로 이동해 금성천 북안에서 4월 20일 진지 전방으로 정찰활동을 수행하던 중 적들을 여러 명 사살했다. 민상용 이등상사는 7월 14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강원 김화지구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상용 이등상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43-2-178)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상출(閔商出)하사
경상북도 상주시 헌신동
"민상출 하사는 1927년 9월 1일 경상북도 상주시 헌신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3월 4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안전하게 양성하기 위해 대구에 있던 제1훈련소를 제주도로 이전해 운영하고 있었다. 민상출 하사는 제12사단 제52연대에 소속되었다. 민상출 하사가 입대하기까지의 전쟁 상황은 6·25전쟁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이 유엔군의 도움으로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쳤다. 이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했으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후퇴했다가 1951년 1월 말부터 반격을 시작해 38도선 일대로 진격 후 중공군과 공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민상출 하사의 소속부대인 제12사단은 1952년 11월 8일 강원도 양양에서 제53·55·56교육연대를 모체로 창설되었다. 제12사단은 12월 28일 경기도 포천으로 이동해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었다. 이어 인제군 서화축선으로 이동해 12월 30일부터 미 제45사단이 방어하던 812-854고지를 인수해 고지쟁탈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당시 판문점에서는 그동안 2년을 끌어오던 포로송환협상이 합의에 도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양측은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민상출 하사와 제12사단은 그때부터 서화축선에서 812-854고지 및 쌍용고지를 사이에 두고 북한군 제45사단과 치열한 교전을 계속했다. 민상출 하사와 장병은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어진지를 지키기 위해 집요한 공격을 계속해 오는 북한군과 공방전을 계속했다. 그러던 1953년 7월 22일 민상출 하사는 인제지구 서화축선전투에서 꽃다운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상출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75-ㄴ-078)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석기(敏錫基)이등중사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민석기 이등중사는 1933년 5월 27일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10월 2일 분연히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했고 그는 제6사단 제2연대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석기 이등중사의 제6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신령지역까지 철수하여 북한군과 격돌하였다. 대구 외곽 신령지구에서의 제6사단 선전으로 북한군은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실패하였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민석기 이등중사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38도선을 넘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민석기 이등중사의 제6사단은 마침내 1950년 10월 26일, 한·중 접경지역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제6사단은 동두천 지역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한 중공군은 더 공격하지 못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민석기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6사단 장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한강을 넘어 충주로 철수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1951년 2월 초, 제6사단은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 선을 향해 진격하였다. 민석기 이등중사와 제6사단 전 장병은 다시 한 번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열악한 전장 환경을 극복하며 38도선으로 계속 북진하였다. 민석기 이등중사의 제6사단은 1952년 3월에는 강원도 김화지역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부대는 전투준비를 하면서 수시로 북진을 위한 공격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석기 이등중사는 1952년 6월 29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교암산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석기 이등중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1954년 10월 15일 그에게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33324)을 추서했다. 그의 위패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46-6-062)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5-ㄷ-020) 관리하고 있다."

민석기(閔石基)일등병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
"민석기 일등병은 1929년 3월 27일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제2사단에 소속되어 충청북도 청주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제16연대에 입대했다. 민석기 일등병이 제16연대에 전입하던 시기에 제16연대는 충청북도 일대의 후방지역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민석기 일등병이 소속된 제16연대는 평시에는 군 예비로 있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전방사단에 대한 증원 및 의명 공세이전을 위한 역습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연대는 전쟁이 발발하면 신속히 서울로 집결하여 서울 주변지역에 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침투를 방지하는 동시에 의정부지구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연대는 청주에 위치하고 사단 본부와 인접 연대는 대전, 온양에 위치했다. 제1대대는 태백산 지역의 공비소탕을 위해 전개되었다. 민석기 일등병과 제16연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의정부, 포천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제7사단이 위기에 처하자 의정부, 포천 지역으로 이동하여 전방사단을 증원하고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는 명령을 받았다. 6월 25일 19시에 제2대대는 연대본부와 함께 청주에서 출발하고 제1대대는 충주에서 각각 야간 열차편으로 다음 날 새벽 금오리에 도착 예정이었다. 도착한 즉시 사단장으로부터 축석령을 방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43번 도로 동측의 208고지 일대와 백석고지 남쪽에 급편방어태세를 하고 북한군 제3사단 진격에 대비할 계획이었다.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38도선을 방어하고 있던 부대는 적의 강력한 포병화력과 T-34전차에 의한 공격으로 방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전선이 무너져 물밀듯이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석기 일등병은 북한군의 집중포화와 공세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하여 적을 물리치는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민석기 일등병은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쟁 첫날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석기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2-3-175)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5-ㄹ-07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석재(閔石宰)이등중사

"민석재 이등중사는 1925년 11월 20일에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1월 15일 전라남도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15연대에 입대했다. 민석재 이등중사가 제15연대에 입대하던 시기에 연대는 순천과 구례 일대의 후방지역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민석재 이등중사가 후방지역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민석재 이등중사와 제15연대는 문산축선에 투입되었다. 민석재 이등중사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대전차특공대를 편성하여 육탄공격을 시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민석재 이등중사와 제15연대는 제1사단과 함께 철수를 시작했다. 민석재 이등중사는 소규모로 분산된 채 봉일천과 행주를 거쳐 한강을 건넜다. 일단 김포에서 집결한 후 수원으로 철수했다. 다행히도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국군은 땅을 내어 주면서 유엔군의 증원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민석재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15연대는 7월 5일 평택에서 부대를 재편성하면서 제1사단 제13연대 제2~3대대로 흡수 통합되었다. 기존의 제13연대는 제1대대로 통합되었다. 전력을 보강한 제13연대는 지연전으로 북한군의 추격을 저지하면서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민석재 이등중사는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는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누구보다 투철했다. 그러나 전투는 치열했다. 민석재 이등중사가 방어전투를 수행하는 고지에서는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반복되면서 적과 아군의 시체가 쌓여갔다. 그 시기인 1950년 8월 9일 민석재 이등중사는 구미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석재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2-5-13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4-ㄹ-00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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