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봉기-민상규2023-02-05 23:03
작성자 Level 10
민봉기(閔鳳基)이등중사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
"민봉기 이등중사는 1930년 5월 7일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의 창설을 전후한 시기인 1948년 12월 30일 충청북도 청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7연대에 입대했다. 그 후 그는 제6사단으로 전속되었다. 민봉기 이등중사는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봉기 이등중사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38도선을 넘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특히 적패잔병들의 끈질긴 저항을 극복하고 드디어 1950년 10월 26일 한·중 접경지역의 초산을 점령하였다. 이 당시 장병들의 가슴은 제6사단이 조국통일의 최선봉 부대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민봉기 이등중사의 제6사단은 중공군의 전쟁 개입 가능성을 미처 판단하지 못했다. 이미 아군의 후방지역까지 들어온 중공군은 10월 28일, 제6사단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중공군과의 치열한 교전으로 개천으로 잠시 철수한 제6사단은 제2군단 예비로 전환되어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민봉기 이등중사의 부대는 1950년 12월 4일, 평양을 출발하여 38도선으로 철수하는 우군의 주력을 보호하는 후속엄호부대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였다. 또한 조국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장병들은 열악한 전장환경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특히 민봉기 이등중사는 이처럼 피아가 혼재된 상황 속에서도 적의 공격에 용감하게 맞서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민봉기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6사단은 12월 12일, 동두천에 도착하여 새로운 방어임무를 부여받았다. 제6사단은 제7연대를 좌, 제3연대를 우, 그리고 제19연대를 사단예비로 하여 또다시 적들과 격돌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봉기 이등중사는 1951년 1월 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가평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봉기 이등중사의 혁혁한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54년 10월 15일 그에게 화랑무공훈장(훈기번호: 130761)을 추서했다. 그의 위패는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30-3-078)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2-ㄲ-087) 관리하고 있다."

민봉기(閔鳳基)일등병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민봉기 일등병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1월 2일 부산·경주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민봉기 일등병은 제8사단에 소속되었다. 민봉기 일등병이 소속된 제8사단은 호남지구일대의 공비토벌작전을 2차에 걸쳐 성공적으로 마치고 3차 공비토벌작전을 전북 순창군 백련산·운장산·팔공산·성수산·장안산 등에서 수행했다. 그 결과 병참선을 확보하고 후방지역의 치안을 확립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민봉기 일등병의 제8사단은 1952년 2월 초에 육군본부 직할로 배속 전환하여 전주-퇴계원-부평리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동 후 3월 15일까지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한 후 3월 하순부터 미 제10군단에 배속 전환되어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로 이동하여 미 제1해병사단의 노전평 북방 854고지, 812고지 작전지역을 인수했다. 5월 1일까지 북한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미 제5공군의 근접 항공지원과 미 제7함대의 함포지원하에 하루 평균 1천여 발의 포격을 가하는 포격전을 전개했다. 또한 적정파악을 위한 소규모 수색 정찰전을 반복했다. 민봉기 일등병의 제8사단이 방어진지를 고수하자 북한군 제45사단은 9월 21일 저녁 6시부터 854·812고지에 공격준비포격을 실시했다. 9월 21일과 22일 양일간 고지전을 끝낸 사단은 11월 1일부터 30일까지 621고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12월 1일부터 31일까지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을 방어전을 전개했다. 1953년 1월 용호리지구 271고지와 수도고지 내의 903고지 및 495고지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2월 1일 김화지구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민봉기 일등병은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1953년 2월 20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봉기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6-6-064)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2-ㅅ-01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봉식(閔奉식)경위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민봉식 경위는 1920년 9월 19일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타 지역 경찰서에서 복무를 하면서 북한군과 전투와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 후 전라북도경찰국 정주경찰서에 소속되었다. 민봉식 경위가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봉식 경위와 동료대원들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군 인민유격대가 침입하여 지방공비와 합류한 후 회문산 일대에 거점을 편성하고 후방을 교란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후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불법 기습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국군은 낙동강방어선까지 후퇴하였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다. 퇴로가 차단되어 미처 철수하지 못한 북한군의 일부는 지방공비들과 합세하여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양민을 학살하며, 식량을 약탈하는 등 치안질서를 교란했다. 민봉식 경위와 동료대원들과 함께 남원 일대에서 준동하는 공비 소탕작전에 투입되었다. 공비들이 남원시 아영면 일대에서 군경과 우익인사 그리고 시민을 학살한다는 정보에 따라 선발대로 출동했다. 경찰 선발대는 공비들과 마주쳤다. 즉시 전투대형으로 전개하여 기습사격을 실시했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공비들의 저항은 강력했다. 민봉식 경위는 대원들과 함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26일 남원 아영면에서 교전하다 체포되어 공비들에게 피살되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봉식 경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05-3-17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7-ㅅ-03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사철(閔四喆)일등병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민사철 일등병은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8월 제8사단에 현지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민사철 일등병은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기초훈련과정도 없이 낙동강방어전투에 투입된 제6사단에 소속되었다. 민사철 일등병이 소속되어 있던 제6사단은 전쟁 초기 춘천방어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신령지역까지 철수하여 북한군과 격돌하였다. 대구 외곽 신령지구에서의 제6사단 선전으로 북한군은 낙동강방어선 돌파에 실패하였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민사철 일등병의 부대는 낙동강전선에서 38도선을 넘어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민사철 일등병의 제6사단은 마침내 1950년 10월 26일, 한·중 접경지역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제6사단은 동두천 지역으로 철수하여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점령한 중공군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 민사철 일등병이 소속된 제6사단 장병들은 눈물을 머금고 한강을 넘어 충주로 철수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1951년 2월 초, 제6사단은 반격을 개시하여 한강선을 향해 진격하였다. 모든 전투에서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용감한 행동을 보였던 민사철 일등병은 지휘관과 동료들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고 있었다. 민사철 일등병과 제6사단 전 장병은 다시 한 번 조국통일을 이루겠다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혹한의 날씨와 열악한 전장 환경을 극복하며 38도선으로 계속 북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사철 일등병은 1951년 3월 12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횡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사철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6-3-19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43-ㄹ-03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삼현(閔삼현)하사

"민삼현 하사는 1926년 3월 1일에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8월 20일 충청남도 논산에 신설된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대규모로 양성하기 위해 제주도의 제1훈련소와 함께 1952년 5월 4일부로 충청남도 논산에 제2훈련소를 개소했다. 민삼현 하사가 입대할 당시의 전황은 공산군 측과 포로송환 문제를 두고 치열한 대치국면이 조성되어 있었다. 공산군 측은 전체의 포로를 포로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원상회복(송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아군은 포로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유송환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삼현 하사는 야전부대에 전입하자마자 고지쟁탈전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양측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 아울러 조만간 포로송환협상이 타결될 경우 유리한 지역에 방어선을 설치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삼현 하사가 야전부대에서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대표적인 전투지역이 수도고지·지형능선전투, 국군 제9사단이 수행한 철원지역 전투, 국군 제2사단이 미군과 함께 수행했던 철원 북방 저격능선전투, 국군 제7사단이 수행했던 양구 북방의 크리스마스고지전투 등이었다. 민삼현 하사가 고지쟁탈전에 임하고 있던 시기의 육군은 전투장비와 물자 보급을 개선하고 부대교대를 통해 후방지역에서 부대훈련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악조건이었다. 민삼현 하사와 국군장병 모두는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민삼현 하사는 책임감이 투철했다. 언제나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임무를 완수했다. 그 시기인 1953년 7월 18일 38도선 부근 전투에서 민삼현 하사는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삼현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8-8-26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상규(閔常圭)일등중사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민상규 일등중사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창설을 전후한 시기인 1948년 경기도 시흥에서 창설된 제17연대에 입대했다. 민상규 일등중사가 소속된 제17연대는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전환되면서 서울 용산으로 이동해 후방지역작전을 수행했다. 민상규 일등중사와 제17연대는 1950년 1월 2일 옹진반도에 투입되었다. 그해 3월 1일에는 육군 직할부대로 전환되면서 38도선 경계 등 옹진반도의 경비를 전담하게 되었다. 옹진반도는 후방이 해주만과 경기만의 바다에 의해 차단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아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부대였기 때문에 육군 직할의 특별부대로 운용되고 있었다. 민상규 일등중사가 38도선 경계 등 옹진반도의 작전에 적응하게 될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었다. 그날 새벽 북한군은 제3경비여단을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는 국사봉 일대에, 제6사단 제1연대를 제3대대가 담당하고 있는 은파산 일대에 투입해 압도적인 병력으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민상규 일등중사와 제17연대 장병은 용전분투했지만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당시 제17연대 장병이 보유하고 있던 2.36인치 로켓포로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제1대대장 김희태 소령이 전사하는 등 38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1대대와 제3대대의 방어선은 당일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민상규 일등중사와 장병은 부대의 건제와 지휘체계가 조기에 붕괴되는 와중에도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민상규 일등중사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제17연대의 능력으로는 중과부적이었다. 민상규 일등중사는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옹진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상규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2-8-179)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6-ㄱ-01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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