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병훈-민봉규2023-02-05 23:02
작성자 Level 10
민병훈(閔丙勳)대위

"민병훈 대위는 일제 치하에서 출생해 조국이 해방되던 시기에 청년기를 맞았다. 그 시기에 조국을 지키는 간성이 되고자 했던 민병훈 대위는 과거 군 경력을 인정받아 1949년 11월 17일 장교로 임관한 후 제3사단 제23연대에 부임하게 되었다. 민병훈 대위가 장교로 부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태릉(현 서울시 노원구)의 육군사관학교에서 장교를 양성하고 있었지만 소요를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과거 군 경력자를 소집해 현지 임관하는 제도를 활용하고 있어서였다. 민병훈 대위가 제23연대에 제23연대는 경상남도 후방지역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많은 무장공비들이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민병훈 대위는 그들을 효과적으로 소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시기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이 발발했다. 민병훈 대위는 비상경계령이 해제된 가운데 모처럼의 일요일 휴일을 갖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상소집에 따라 그는 즉각 전투에 투입할 준비를 갖추었다. 육군본부는 수도권 인근의 부대는 물론 후방지역의 부대까지 모조리 서울 북쪽의 방어에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제22연대가 문산축선으로 투입되었다. 민병훈 대위와 제23연대는 울진지역으로 투입되었다. 7월 16일 경 영덕 및 강구일대에서 북한군 제766유격연대와 치열한 교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7월 26일부로 제3사단이 재건 및 개편되면서 전력을 회복하여 동해안 지역의 방어를 전담하게 되었다. 민병훈 대위는 전투경험이 부족한 장병을 지휘해 북한군의 전차와 맞섰다. 그는 악조건 속에서 용전분투했다. 민병훈 대위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민병훈 대위는 1950년 8월 2일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경상북도 강구지역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민병훈 대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12-ㅇ-03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훈(閔炳勳)이등중사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동
"민병훈 이등중사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1952년 9월 23일 충청남도 논산에 신설된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전투병력을 대규모로 양성하기 위해 제주도의 제1훈련소와 함께 1952년 5월 4일부로 논산에 제2훈련소를 개소했다. 훈련소를 수료한 민병훈 이등중사는 제8사단 제10연대에 소속되었다. 민병훈 이등중사가 소속되었던 제8사단 제10연대는 1952년 9월 중순 854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으나 북한군 제45사단의 집중포격과 중공군의 파상공격으로 고지능선상 584고지에 급편방어를 실시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미 제5공군의 근접지원과 미 7함대의 함포지원, 군단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854고지를 공격한 결과 탈환할 수 있었다. 민병훈 이등중사의 제10연대는 9월 말 가리봉선-인제북방-원통북방-원통북방-미시령-속초선 방어임무를 미 제45사단에 인계하고 미 제10군단에서 미 제9군단으로 배속되었다. 10월 중순 국군 제2군단에 배속되어 중동부전선의 요충지인 수도고지·지형능선을 인수했다. 민병훈 이등중사와 제10연대 장병은 1953년 5월 말까지 수도고지·지형능선의 진지를 강화하면서 전초진지쟁탈전을 전개했다. 5월 초순부터 방어태세를 강화했으나, 594고지·647고지·지형고지를 적에게 빼앗기자 이를 탈환하기 위한 공방전을 치렀다. 6월 12일부터 21일까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수도고지∙지형능선에서 약 1km 후방 지역에 새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후로 제16연대의 방어지역 일부를 인수하고, 적의 침공을 물리쳤다. 민병훈 이등중사는 고지공방전에서 항상 솔선수범하면서 용전분투하는 감투정신을 발휘했다. 그러나 민병훈 이등중사는 1953년 6월 16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강원 김화지구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훈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4-ㄴ-09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흥 (閔丙興)중위
서울시 용산구(龍山區) 신창동(新倉洞)
"민병흥 중위는 서울시 용산구(龍山區) 신창동(新倉洞)에서 태어나 1948 년4월6일 경비사관학교 제5기로 임관하였으며, 제11연대에서 복무하였다. 제11연대는 1948년 5월 4일 경기도 수원에서 창설되어 동년 5월 5일 제주도 제주읍으로 이동한 후,7월 24일까지 제주도 공비토벌작전을 실시 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7월 25일 수원으로 이동 복귀하여 부대정 비 및 향토방위작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연대는 1949년 1월 12일 주둔지를 수원에서 경기도 문산으로 이동하여 38도선경비작전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동년 5월 3일부터 8월 3일까지는 북한군의 불법적인 공격을 저지 격퇴하는 개성지구의 제1,2차 송악산지 구전투 및 배천지구전투를 전개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송악산지역의 아 군진지를 모두 회복하고 적을 격퇴하는 전승(戰勝)을 이루었다. 민병흥 중위는 제11연대가 1948년 7월 25일 수원으로 이동 복귀하여 부대정비 및 향토방위작전 임무를 수행하던 기간 중 1948년 10월 22일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를 길이 추모하고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선양하 기 위하여 서울 국립현충원(國立顯忠院)에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위패번호 는 47-1-108번이다. 또한 전쟁기념관 전사자명비(戰死者銘碑)에 그의 이 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민병흥(閔炳興)일등중사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민병흥 일등중사는 1925년 3월 30일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8월 15일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대구·부산·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이때 민병흥 일등중사는 제8사단 제16연대에 소속되었다. 민병흥 일등중사의 제8사단은 1952년 2월 초에 육군본부 직할로 배속 전환하여 전주-퇴계원-부평리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동 후 3월 15일까지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한 후 3월 하순부터 미 제10군단에 배속 전환되어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로 이동하여 미 제1해병사단의 노전평 북방 854·812고지 작전지역을 인수했다. 민병흥 일등중사와 제16연대 장병은 작전지역을 인수한 후 5월 1일까지 북한군과 대치한 상황에서 미 제5공군의 근접 항공지원과 미 제7함대의 함포지원하에 하루 평균 1천여 발의 포격을 가하는 포격전을 전개했다. 또한 적정파악을 위한 소규모 수색 정찰 및 교전이 끊이지 않았다. 민병흥 일등중사는 제16연대 장병과 함께 1952년 9월 21일부터 22일까지 854고지 및 812고지 공방전에 투입되었다. 제16연대가 점령한 812고지 일대는 적의 1,052고지에서 감제당하는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틀간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했다. 민병흥 일등중사와 제16연대 장병은 1952년 9월 28일 사창리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10월 19일 제2군단에 배속되고, 11월에 621고지, 12월 한 달 동안 수도고지 및 지형능선, 1953년 1월 용호리지구 271고지 방어, 수도고지 903 및 495고지 방어, 2월 김화지구방어전 등을 수행하던 민병흥 일등중사는 부하들을 이끌고 용전분투하다가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치료하던 중 1953년 3월 20일 28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흥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4-ㅎ-02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희(閔丙熙)일등병
경기도 여주시 가남면
"민병희 일등병은 1925년 7월 19일 경기도 여주시 가남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2월 30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제8사단에 소속되었다. 민병희 일등병이 소속된 제8사단은 춘천지구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강력한 협공으로 방어진지가 돌파되자 전략적 철수를 감행했다. 목계를 경유하여 황강리로 이동한 후 부대정비를 실시했다. 그러던 중 2월에 들어서자 제8사단이 소속된 미 제10군단장은 중공군 제19병단의 행동을 탐색하는 한편 전면의 적을 격멸하고 홍천과 용두리를 연하는 선을 탈환하여 차기 군단의 총반격작전에 거점이 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민병희 일등병의 제8사단이 소속된 미 제10군단은 중동부전선에 당시 중공군 제19병단 10만 대군이 춘천까지 남침한 경로에 대해서는 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천 침입 이후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1개 사단이라도 희생시켜 새로운 적군의 상황과 능력을 탐지하려는 과감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제8사단은 임무를 부여받고 북진공격을 개시했다. 민병희 일등병과 제8사단은 미 제10군단의 차기 작전을 위하여 적군의 상황과 능력을 탐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2월 4일부터 6일까지 강원도 원주시 주산리·풍수원·오음산 남쪽 십일천까지 진격하면서 북한군을 격퇴했다. 7일부터 8일까지 사단 및 제16연대 지휘소를 횡성에 설치하고 각 연대는 정면의 적을 맹렬한 공격으로 격퇴했다. 민병희 일등병은 재반격 작전에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적을 공격하는 데 용전분투하여 수훈을 세웠다. 앞장서서 전진하던 민병희 일등병은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2월 7일 26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횡성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희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5-3-01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1-ㅈ-008)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복용 (閔福龍)순경
전라남도 영암군(靈岩郡) 신북면(新北面)
"민복용 순경은 1930년 9월 3일 전라남도 영암군(靈岩郡) 신북면(新北 面)에서 태어나 건국 초기 경찰에 투신, 전라남도경찰국 영암경찰서에서 근무하였다. 민복용 순경은 광복 이후 사회질서가 어지러운 시기를 이용하여 좌익분 자들의 각종 만행이 수시로 일어나자 이들을 소탕하는 기간 중 1947년 5 월 1일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살신보국정신(殺身保國精神)을 기리고 후세에 교훈으 로 남기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전사자명비(戰死者銘碑)에 이름을 새겨 추 모하고 있다."

민복용(閔福龍)경위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민복용 경위는 1925년 3월 8일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타 지역 경찰서에서 복무를 하면서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한 후 전라남도경찰국 나주경찰서에 소속되었다. 민복용 경위가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복용 경위와 동료대원들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적 인민유격대가 침입하여 지방공비와 합류한 후 후방지역을 교란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 후 6월 25일 북한군이 불법 기습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북한군 제6사단이 부산을 점령하기 위하여 서부지역으로 우회하여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는 낙동강방어선 마산방면으로 진출했다. 나주 지역에 은거하고 있던 공비들이 북한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민복용 경위가 소속된 전라남도 나주경찰서 대원들은 나주지역에서 공비들의 만행을 방해하고 양민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민복용 경위는 대원들을 지휘하여 북한군 차량을 습격하여 보급지원을 방해했다. 또 공비들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은 양민을 학살한다는 주민신고를 받고 즉각 출동했다. 양민들을 학살하고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던 공비들과 마주쳤다. 그와 대원들은 기습사격을 개시했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민복용 경위는 대원들과 함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2일 나주지구에서 공비들과 교전하다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복용 경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9-ㄲ-08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복준(閔福俊)경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모충동
"민복준 경위는 1917년 5월 20일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모충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타 경찰서에서 복무하다 북한군과의 전투와 공비토벌에 참가한 후 충청북도경찰국 청주경찰서에 소속되었다. 민복준 경위가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복준 경위와 동료대원들은 1950년 초 적 인민유격대가 침입하여 후방을 교란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후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불법 기습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국군은 낙동강방어선까지 후퇴하였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다. 퇴로가 차단되어 미처 철수하지 못한 북한군의 일부는 지방공비들과 합세하여 산악지역에 은거하면서 경찰파출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식량약탈과 양민학살 등 만행을 저질렀다. 민복준 경위와 동료대원들은 후방지역 공비들을 포획·섬멸하기 위해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되었다. 공비들이 보은 속리산일대에서 마을을 습격하여 식량을 약탈하고, 군경과 우익인사 그리고 주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민복준 경위는 동료대원들을 지휘하여 공비들이 출몰한 지역에 출동했다. 즉시 전투대형으로 전개하여 기습사격을 실시했다. 쌍방의 총탄이 빗발치는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공비들의 저항은 강력했다. 민복준 경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1951년 9월 13일 보은군에서 공비와 교전하다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복준 경위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고(경찰1-504-32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95-ㅁ-04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복희(閔福喜)경사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민복희 경사는 1932년 6월 7일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해방 이후 남한 사회의 혼란과 북한의 38도선 및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타 지역 경찰서에서 복무하다 북한군과의 전투와 공비토벌에 수차례 참가한 후 전라남도경찰국 화순경찰서에 소속되었다. 민복희 경사가 입대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혼란했다. 치안국은 치안교란 사태에 즉각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설치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민복희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1950년 초 적 인민유격대가 침입하여 후방을 교란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후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불법 기습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되었다. 국군은 낙동강방어선까지 후퇴하였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반격작전을 전개하였다. 퇴로가 차단되어 미처 철수하지 못한 북한군의 일부는 지방공비들과 합세하여 경찰파출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차량의 보급수송을 방해하며,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민복희 경사와 동료대원들은 후방지역 공비들을 포획·섬멸하기 위해 관내 화순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공비들이 반드시 이동해야 할 장소에 동료 대원들과 같이 배치되어 만반의 전투준비태세를 갖추었다. 공비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야간에 식량을 약탈하기 위해 접근했다. 민복희 경사와 동료 대원들은 공비들에게 일제히 기습사격을 했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민복희 경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1952년 5월 4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화순에서 공비들과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복희 경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00-ㄴ-02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봉규(閔鳳圭)이등중사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민봉규 이등중사는 1928년 11월 28일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8년 경기도 시흥에서 창설된 제17연대에 입대했다. 민봉규 이등중사가 소속된 제17연대는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 전환되면서 서울 용산으로 이동해 후방지역작전을 수행했다. 민봉규 이등중사와 제17연대는 1950년 1월 2일 옹진반도에 투입되었다. 그해 3월 1일에는 육군 직할부대로 전환되면서 38도선 경계 등 옹진반도의 경비를 전담하게 되었다. 옹진반도는 후방이 해주만과 경기만의 바다에 의해 차단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아군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고립된 부대였기 때문에 육군 직할의 특별부대로 운용되고 있었다. 민봉규 이등중사가 38도선 경계 등 옹진반도의 작전에 적응하게 될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었다. 그날 새벽 북한군은 제3경비여단을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는 국사봉 일대에, 제6사단 제1연대를 제3대대가 담당하고 있는 은파산 일대에 투입해 압도적인 병력으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민봉규 이등중사와 제17연대 장병은 용전분투했지만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당시 제17연대 장병이 보유하고 있던 2.36인치 로켓포로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제1대대장 김희태 소령이 전사하는 등 38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1대대와 제3대대의 방어선은 당일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민봉규 이등중사와 장병은 부대의 건제와 지휘체계가 조기에 붕괴되는 와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했다. 민봉규 이등중사는 언제나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제17연대의 능력으로는 중과부적이었다. 민봉규 이등중사는 인천으로 철수한 후 1950년 7월 11일 충청북도 음성지구 지연전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봉규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2-8-18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0-ㅇ-05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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