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병화-민병후2023-02-05 23:01
작성자 Level 10
민병화(閔병화)유격대원

"민병화 유격대원은 6·25전쟁으로 위기에 처했던 조국의 운명을 지켜내는 데 기여한 자랑스러운 호국용사다. 그는 군번도 부여받지 못해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데 기여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유격대 벽성부대 울팩 제5부대에 소속되었다. 민병화 유격대원이 소속된 울팩 제5부대는 1952년 2월 10일 서해안의 기지사령부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동키 제12부대로부터 확대 재편된 것이다. 동키 제12부대는 1951년 3월 10일 해주만 앞 옹진군 송림면 대수압도로 피난 온 벽성군과 옹진 동부지역의 무장치안대원과 반공청년 33명이 주축이 되어 백령도 기지사령부 산하 유격부대로 출발했다. 민병화 유격대원의 울팩 제5부대는 1개 대대 170여 명으로 편성되었다. 6개 중대에 각각 3개 소대를 예하에 두었다. 벽성군 출신의 대원들이 많아서 일명 ‘벽성부대’로 불리기도 했다. 울팩 제5부대는 닭섬, 용매도, 삼산, 솔매산 등지에 파견대를 주둔시켰으나 1951년 8월 11일 북한군이 닭섬으로 쳐들어오자 대수압도로 통합했다. 9월 10일 봉구면 개머리의 중공군 주둔지를 기습한 작전에서 많은 대원들이 전사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 민병화 유격대원은 울팩 제5부대 제2중대 제2소대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1952년 5월 25일 이명로 부대장은 제2중대를 직접 지휘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옹진군 송림면 제비산에 구축된 적의 참호를 파괴하기 위해 출동하면서 미 해군 함정과 항공기의 공중지원을 받기도 했다. 민병화 유격대원은 제2소대원을 이끌고 제비산 공격의 선봉에 섰다. 적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제비산을 점령하고 적이 구축한 벙크들을 파괴했다. 제비산 공격에 앞장서서 소대원을 지휘하며 용전분투하던 민병화 유격대원은 적의 흉탄을 맞고 1952년 5월 25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봉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화 유격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수습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06-5-330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화(閔丙化)이등중사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민병화 이등중사는 1927년 3월 27일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1948년 6월 7일 인천시 부평에 설치된 특별부대에 입대했다. 그가 소속된 특별부대는 병기, 병참, 통신, 경리 등의 전투근무지원병과 특기병을 양성하는 훈련소였다. 소정의 교육과정을 수료한 그는 육군본부 직할 헌병사령부에 소속되었다. 민병화 이등중사는 헌병분야의 전문특기 습득을 위해 노력했다. 헌병병과에서 전문분야의 헌병으로 근무할 예정이었다.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민병화 이등중사 등 피교육생들은 일요일의 느긋함에 취해 있었다. 갑자기 긴급상황의 비상이 발령되었다. 민병화 이등중사 등 장병들이 속속 귀대하면서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 문산 및 의정부축선으로 이동명령이 하달되었다.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38도선 방어선이 조기에 무너지자 육군본부는 서울주변은 물론 후방지역의 예비사단까지 서울 북쪽으로 전투진지에 투입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민병화 이등중사 등은 육군사관학교, 보병학교 교도대와 함께 서울특별연대에 편성되어 의정부축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현지의 방어병력은 물론 서울주변에서 가용부대를 끌어모아 급조로 편성한 증원부대들도 북한군의 전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일부는 대전차 특공대를 구성해 육탄공격을 시도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민병화 이등중사는 모든 것이 불비한 여건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앞장서서 임무를 완수하는 부사관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T-34전차는 괴물이었다. 민병화 이등중사는 용전분투했지만 꿈 많은 청춘을 남겨둔 채 1951년 6월 28일 미아리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화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1-2-06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0-ㅂ-02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화(閔炳華)일등중사
인천광역시 옹진군
"민병화 일등중사는 인천광역시 옹진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제18연대에 입대했다. 제18연대는 수도경비사령부에 소속되어 서울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민병화 일등중사는 수도권 일원의 주요 시설경계와 무장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민병화 일등중사가 입대할 당시인 1949년부터 38도선 일대의 전방지역은 물론 후방지역의 상황도 심상치 않았다. 민병화 일등중사와 연대는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남침이 시작되면서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의정부지구전투에 투입되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용전분투했다. 북한군이 28일 서울을 점령하자, 그와 연대는 여의도와 영등포 일대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해 적을 지연시켰다. 민병화 일등중사와 연대는 북한군이 진천을 점령하자, 11일 그곳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 선봉에서 용전분투했다. 그는 13일 청주 남쪽 국사봉전투에서도 용전분투하고, 7월 19일~29일 입석-보은-안동으로 이동했다. 민병화 일등중사와 연대는 북한군의 8월공세가 시작되자, 낙동강 남쪽으로 철수하던 중 안동읍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그곳에서 여러 명을 사살했다. 북한군의 9월공세가 시작되어 기계 북쪽에 형성된 저항선이 붕괴되자, 9월 4일 민병화 일등중사와 연대는 경주북방에 있는 낙산(호명리)과 곤제봉, 무릉산 일대에서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민병화 일등중사와 연대는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16일부터 퇴각하는 적을 낙동강전선에서 북쪽으로 추격해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했고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그와 연대는 10월 말 북한군과 교전해 가면서 영흥-함흥을 거쳐 단천과 성진을 점령했다. 그는 11월 5일 길주를 점령하고 18일 부령방향으로 북한군을 추격하던 중 적의 기습사격을 받고 민병화 일등중사는 부거지구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화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25-ㄹ-09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환(閔병환)일등병

"민병환 일등병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951년 2월 부산, 경주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병환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국군은 참전한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재편성과 지연전을 병행하면서 7월 말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한 후 8월 12일부터는 마산-창녕-왜관-다부동-영천-안강-포항을 있는 200㎞의 방어선을 점령해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쳤다. 이어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반격작전으로 전환했다. 9월 말 38도선을 회복하고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민병환 일등병은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자마자 전투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민병환 일등병이 부대에 배치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인해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으로 철수해야 했다. 민병환 일등병은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전분투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말 반격을 시작했다. 2월 10일에는 한강남쪽에 진출해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자 중공군은 1951년 2월 12일 홍천에서 횡성방향으로 제4차 공세를 감행했다. 민병환 일등병과 국군은 중공군의 제4차 공세를 물리치고 3월 15일에는 서울을 재수복한 후 3월 말에는 춘천을 탈환했다. 4월 말에는 38도선 부근으로 진출했다. 그 시기에 민병환 일등병은 중상을 입고 제5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1951년 5월 2일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환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16-2-311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환(閔炳煥)하사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리
"민병환 하사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제1사단에 소속되어 있던 제1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제11연대는 개성지역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후 1950년 4월 25일 제11연대가 개성지역 38도선 경계임무를 제12연대에게 인계하고 예비로 전환되면서 민병환 하사는 제13연대로 전환되었다. 민병환 하사가 소속된 제1사단은 청단에서 고랑포까지 94㎞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사단은 제12연대를 좌측 개성일대에, 제13연대를 우측 임진강일대에 배치해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하고 제11연대는 사단의 예비대로 수색에 배치해 운용하고 있었다. 민병환 하사는 개성일대의 방어력 증강을 위한 진지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북한군의 도발이 수시로 이어지면서 긴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되면서 전면전이 되고 말았다. 민병환 하사는 즉각 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그날 아침 개성과 고랑포 일대를 점령하고 문산과 임진강 방향으로 공격을 확대했다. 당시 북한군의 전투력은 아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히 우세했다. 민병환 하사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대전차특공대를 편성하여 육탄공격을 시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민병환 하사와 제13연대가 구축했던 38도선 방어진지는 6월 25일 오전 중에 무너져 버렸다. 민병환 하사는 소규모로 분산된 채 파평산 방향으로 철수하면서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1950년 6월 25일 임진강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1-8-06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71-ㅎ-059)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환(閔炳煥)일등병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민병환 일등병은 1930년 8월 26일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0년 8월 경상북도 경산시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7교육대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긴급하게 소요되는 전투병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구 등에 7개의 교육대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다. 민병환 일등병은 워낙 다급했던 상황에 따라 기초군사훈련조차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채 1950년 8월 20일 재창설된 제7사단에 소속되었다. 민병환 일등병이 제7사단에 전입할 때의 전쟁 상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힘겹게 저지하고 있었다. 민병환 일등병은 제7사단에 전입하기 직전인 1950년 9월 6일 영천이 북한군 제15사단에게 점령되자 제7사단은 제8사단과 함께 영천을 탈환하는 수훈을 세웠다.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개시하여 성공하고 반격작전이 시작되었다. 민병환 일등병은 6·25전쟁 초기 제9연대가 방어했던 포천으로 진격해 38도선을 회복했다. 전쟁은 외형상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북한군의 주력은 퇴로가 차단되면서 붕괴되었다. 민병환 일등병과 제7사단은 10월 9일 유엔군과 함께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북한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파죽지세의 진격을 계속한 민병환 일등병과 제7사단은 10월 19일 국군 제1사단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민병환 일등병 장병은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격작전에 임했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1950년 11월 26일 민병환 일등병은 중공군의 제2차 공세로 인해 평안남도 덕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 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환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50-ㅂ-06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후(閔병후)순경

"민병후 순경은 해방 이후 치안질서가 정상화되지 않아 남한 사회의 혼란, 북한의 38도선에서 준전시와 같은 도발,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 내의 좌익들의 후방지역 도발, 그리고 1950년 6·25전쟁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어려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입문해 서울특별시경찰국에 소속되었다. 민병후 순경이 경찰에 입문하기 전·후의 국내 상황은 1948년 제주 4·3 사건과 여순 10·19사건 등으로 치안질서가 혼란했다. 1949년 8월 1일에는 각 도 경찰국에도 비상경비사령부를 두어 비상시 경비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적 인민유격대가 태백산 일대에 계속 침입하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민병후 순경은 서울특별시경찰국 대원들과 함께 1950년 6월 10일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에서 38도선 접경인 경기·강원 2개 도에 비상경비태세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고 북한군의 동태를 주시했다. 이후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불법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을 감행했다. 국군은 병력과 전력 면에서 북한군에 비해 형편없이 부족했다. 38도선이 돌파당하고,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외곽지역까지 진출하였다. 민병후 순경은 서울특별시경찰국 대원들과 함께 서울지역 창동 및 미아리 지역에서 북한군의 서울진입을 저지하고 격멸하기 위한 군경합동작전에 투입되었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서울외곽 방어선이 무너졌다. 민병후 순경은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민병후 순경과 동료대원들은 북한군의 시가지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 후 한강방어선에서 진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던 1950년 6월 28일 민병후 순경은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한강교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후 순경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50-1-11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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