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병호-민병홍2023-02-05 23:00
작성자 Level 10
민병호(閔병호)소령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민병호 소령은 1927년 12월 26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출생해 조국이 해방되던 시기에 청년기를 맞았다. 민병호 소령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분연히 일어섰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과 생업을 포기하고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민병호 소령은 과거의 군사경력을 인정받아 1950년 9월 12일 장교로 임관한 후 육군 예하부대에 배치되었다. 민병호 소령이 임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상실한 국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치면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한 인천상륙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민병호 소령이 부대에 부임했을 때 부대는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초기의 반격작전은 고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대열이 무너지자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말 38도선을 회복했다. 10월 초에는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기습공격으로 1951년 1월 초 또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해야 했다. 민병호 소령과 국군은 1월 말 유엔군과 함께 반격으로 전환했다. 중공군과 공방전을 거듭하며 2월 10일 한강 남쪽에 도달했다. 중공군은 홍천 축선에서 황성방향으로 제4차 공세를 감행했다. 국군 제8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붕괴되었다. 민병호 소령은 악조건 속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언제나 앞장서서 임무를 완수했다. 민병호 소령은 용전분투했지만 중공군의 제4차 공세의 와중인 1951년 2월 12일 중부전선의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민병호 소령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2-1-5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5-ㅌ-04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호(閔병호)이등중사

"민병호 이등중사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제8사단에 입대했다. 당시 38도선 일대에서는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후방지역에서도 무장폭동이 곳곳에서 발생해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민병호 이등중사는 신생 조국을 구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병호 이등중사가 소속되었던 제8사단은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의성지구전투(8.3∼13), 보현산부근전투(8.14∼9.1)에서 격렬한 방어전을 전개하면서 타격을 가했다. 영천지구전투(9.2∼12)에서는 북한군 제15사단을 무력화시키고 아군이 반격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민병호 이등중사와 제8사단은 9월 16일을 기하여 제2군단의 조공으로 의성-안동-영주선을 따라 총반격을 개시했다. 제8사단은 9.20∼28일까지 경북 영천 보현산 초고령 일대에서 저항한 북한군 제12·제15사단을 격파하고 북진하여 경북 구산동-의성 부근에서 포위 섬멸시키고 안동-영주를 점령했다. 민병호 이등중사와 제8사단은 충북지구의 대강-삼곡-신립을 거쳐 불과 6일 만에 양평지구에 도달하여 10.1∼2일까지 북한군을 격멸했다. 3일 서울에 입성한 후 연천방향으로 북진하자 북한군은 8일부터 19일까지 연천·철원·이천지역에서 패잔병을 1개 사단 규모로 재편성하여 저항했다. 제8사단은 21일 성천, 22일 가창, 23일 북창으로 진격하면서 잔적을 소탕했다. 민병호 이등중사는 제8사단 장병과 함께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잔적을 소탕하며 북진했다. 사단 지휘소도 10월 14일 이천을 거쳐 15일 곡산으로 진격했다. 사단은 24일 덕천 서북방 239고지의 적을 격멸하고, 26일 구장을 점령하여 잔적을 소탕했다. 북진작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

민병호(閔丙鎬)일등병
경상북도 안동시
"민병호 일등병은 1925년 1월 13일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 긴급하게 설치된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병호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국군의 주력은 한강 북쪽에서 붕괴되었다. 북한군은 7월 3일 아침 T-34전차를 노량진 방향으로 도하시켜 국군의 한강방어선을 돌파해 국군을 계속 추격했다. 다행히 유엔군이 참전해 국군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재편성과 지연전을 병행하면서 7월 말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했다. 민병호 일등병은 그때부터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어 전투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은 왜관-구미-의성-안동-청송-영덕까지 120㎞ 구간을 방어했으나 8월 12일부터는 왜관-다부동-영천-안강-포항을 있는 80㎞의 방어선을 점령해 방어했다. 민병호 일등병과 같이 입대한 신병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전사하는 사례도 허다했다. 군번은 고사하고 부대원 명부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중대장은 물론 소대장이나 분대장이 소속대원의 이름을 익히기도 전에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민병호 일등병은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는 전투경험이 많지 않은 신병에 불과했지만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누구보다 투철했다. 언제나 용전분투하던 민병호 일등병은 1950년 9월 8일 낙동강방어선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호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2-5-25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1-ㅎ-07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호(閔炳浩)일등병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민병호 일등병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제7사단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38도선 일대에서는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후방지역에서도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무장폭동이 곳곳에서 발생해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민병호 일등병은 신생 조국을 구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병호 일등병이 소속된 제7사단은 적성에서 일동까지 47㎞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사단은 제1연대를 좌측 동두천축선에, 제9연대를 우측 포천축선에 배치하고 제3연대는 예비로 사단사령부와 함께 의정부에 배치했다. 그러나 제3연대는 전쟁 발발 직전인 6월 15일 수경사로 전환되어 용산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예비대가 없었다. 민병호 일등병은 포천축선의 방어력 증강을 위해 진지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당시 38도선에서는 1949년 5월 개성 북방의 송악산 전투로 제1사단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하는 등 준전시상황이었다. 제7사단 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적의 도발이 계속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이 시작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민병호 일등병은 즉각 38도선 방어전투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은 포천축선에 제2사단과 40여대의 T-34전차를 투입해 공세를 감행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은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일부에서는 대전차특공대를 편성하여 육탄공격을 시도했으나 저지할 수 없었다. 민병호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북한군은 그날 오전 양문리와 만세교를 돌파해 포천으로 진격했다. 민병호 일등병은 의정부, 창동전투를 수행하고 철수했지만 1950년 6월 30일 한강방어선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호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5-3-159)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2-ㄲ-018)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호(閔炳護)일등병
경상북도 구미시
"민병호 일등병은 1928년 3월 30일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9월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육군 직할부대에 배치되었다. 민병호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북한군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국군의 주력은 한강 북쪽에서 붕괴되었다. 소수의 국군은 참전한 유엔군의 지원을 받아 지연전을 계속하며 7월 말 낙동강방어선으로 철수해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저지했다. 민병호 일등병은 그 시기에 소총격발요령 등 가장 기초적인 훈련만을 습득한 후 부대에 배치되어 각종 지원임무와 함께 전투임무까지 수행하게 되었다. 낙동강방어선에서 민병호 일등병과 같이 입대한 신병들은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어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전사하는 사례도 허다했다. 군번은 고사하고 부대원 명부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상태에서 중대장은 물론 소대장, 분대장이 이름을 익히기도 전에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민병호 일등병은 각종 지원임무가 주 임무였지만 전투임무에도 언제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수행했다. 그는 전투경험이 많지 않은 신병에 불과했지만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신념만큼은 누구보다 투철했다. 민병호 일등병은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반격으로 전환했다. 전투부대들과 함께 부대들을 지원하면서 반격작전에 나섰다. 전투는 전후방이 따로 없이 계속되었다. 언제나 용전분투하던 민병호 일등병은 1950년 10월 초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 중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기습공격으로 인해 북한지역에서 철수 중 1950년 12월 12일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호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32-1682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4-ㄱ-045)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호(閔炳鎬)일등병
대전광역시
"민병호 일등병은 대전광역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0년 9월 13일 분연히 입대했다. 워낙 다급했던 상황에 따라 기초군사훈련조차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채 전투지역에 투입되었다. 민병호 일등병은 제2사단 제25연대에 소속되었다. 입대 당시 전황은 육군본부는 부대를 개편해 제7사단의 예비인 제3연대를 6월 15일부로 수도경비사령부로 전환했다. 그 대신 제25연대를 6월 20일자로 제7사단에 예속했다. 그 시기인 1950년 6월 25일 6·25전쟁 발발했다. 그때 제25연대는 온양에서 의정부로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병호 일등병과 제25연대는 다시 제2사단으로 예속이 전환되어 의정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북한군은 초성리-동두천 방향과 만세교-포천 방향으로 강력한 포병화력과 함께 각각 40여대의 T-34전차, 제4사단과 제3사단을 투입해 공격을 시작했다. 38도선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방어부대는 당일 오전 중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민병호 일등병과 제25연대는 25일 오후 황급하게 의정부에 도착해 역습을 시작했지만 북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화기 탄약도 평소에 휴대하고 있던 경계용 수준에 불과했다. 제25연대 장병은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대전차특공대를 구성해 적의 전차에 대항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민병호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그들이 저항은 한계가 있었다. 민병호 일등병은 지연전과 재편성을 병행하며 남쪽으로 철수를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제25연대는 제8사단 제21연대 제2대대로 흡수되었다. 이어 1950년 9월 13일 민병호 일등병은 낙동강방어선 영천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호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0-5-16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82-ㅎ-01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홍(閔丙洪)하사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민병홍 하사는 1928년 8월 25일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에서 출생했다. 그는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2월 부산·경주 등에 긴급 설치된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민병홍 하사는 제8사단 제21연대에 소속되어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병홍 하사가 소속되었던 제8사단 제21연대는 사단 명령에 따라 충청북도 제천으로 이동하여 제5사단의 작전을 지원하다가 1951년 2월 27일 대구 남쪽에 집결했다. 병력을 보충 받고 4주간 교육을 실시한 후 3월 27일 부대 재편성을 완료했다. 민병홍 하사와 제21연대는 4월 3일부터 5월 11일까지 호남지구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제10연대는 광주, 제16연대는 진주로 이동하여 공비토벌작전을 벌였다. 그 후 제8사단은 5월 하순부터 평창-홍천-현리-인제-원통으로 이동하여 미 제10군단 예비로서 후방지역 경계를 담당했다. 민병홍 하사의 제8사단이 1951년 7월 무렵부터 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선에 방어진지를 한층 강화하자 적군도 병력을 보강하고 보급품을 수송하는 등 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소대 규모 병력을 침투시켜 포로를 획득하거나 정보를 수집하려는 노력을 병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규모 무력 충돌이 빈번히 발생했다. 민병홍 하사와 제21연대 장병은 1951년 8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인제 북방의 노전평 제2차전투와 제3차전투(9.10∼18)에 투입되었다. 9월 10일부터 578고지와 무명고지, 854고지 일대를 공격하여 578고지를 점령한 후 854고지 전방 2백 미터까지 진출했다. 11일 공격이 적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자 578고지로 철수했다.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병홍 하사는 적의 흉탄을 맞고 1951년 9월 11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인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홍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2-ㅁ-070)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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