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제목한국전쟁영웅 민병하-민병혜2023-02-05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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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하(閔병하)하사

"민병하 하사는 1928년 11월 21일에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육군에 입대했다. 그는 1951년 1월 13일 부산, 경주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병하 하사는 제1사단에 소속되었다. 민병하 하사가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긴 국군이 낙동강까지 철수해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민병하 하사는 제11연대에 소속되어 팔공산전투를 수행했다. 민병하 하사와 제1사단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반격으로 전환했다. 아군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으로 진격했다. 민병하 하사와 장병 모두는 혼연일체가 되어 투혼을 발휘했다. 민병하 하사는 통일된 조국을 꿈꾸며 38도선을 넘어 임진강-토산-신계-수안-상원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민병하 하사는 10월 19일에는 사단과 함께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민병하 하사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앞장서서 압록강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대병력이 두 차례의 기습공격을 감행해왔다. 민병하 하사는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으나 계속되는 중공군의 공세로 평택까지 철수했다가 반격을 시작했다. 민병하 하사는 수원을 향해 진격한 후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계속했다. 민병하 하사는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한 후 38도선에 도달해 휴전회담과 함께 공방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던 1953년 2월 20일 민병하 하사는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연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하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고(10-3-1582)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하(閔丙夏)일등병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
"민병하 일등병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육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학업 또는 생업을 중단하고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들은 대구, 부산, 제주 등의 훈련소에서 간단한 기초교육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병하 일등병은 당시 상황에 따라 소총격발 요령 등 간단한 기초훈련을 수료한 후 제1사단 제15연대에 배치되었다. 민병하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의 상황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부대의 건제가 붕괴된 국군이 재편성을 하면서 지연전을 계속해 낙동강까지 철수한 후 북한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치고 있었다. 민병하 일등병은 제1사단에 소속되어 반격작전에 참가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9월 말에는 예전에 제1사단이 방어했던 38도선에 도달했다. 민병하 일등병과 제1사단은 10월 9일 유엔군과 함께 38도선을 돌파했다. 조국통일의 꿈을 안고 임진강-토산-신계-수안-상원 방향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10월 19일 평양에 최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민병하 일등병이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민병하 일등병은 언제나 앞장서서 투혼을 발휘했다. 민병하 일등병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38도선을 지켜내려 했다. 그러나 1950년 12월 31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3차 공세는 중과부적이었다. 파평산에서 철수한 민병하 일등병은 평택까지 철수했다가 1951년 1월 말 반격으로 전환했다. 민병하 일등병은 2월 10일 한강남쪽에 도달했으나 1951년 3월 6일 한강지역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 둔 채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하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7-4-250)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73-ㅌ-02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하(閔炳夏)일등중사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민병하 일등중사는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국군이 창설되기 전 국방경비대 시절이었던 1946년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연대에 입대했다. 민병하 일등중사가 후방지역 작전에 임하고 있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었다. 민병하 일등중사는 의정부전투에 투입되었다. 민병하 일등중사는 용감하게 맞섰지만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민병하 일등중사는 분산된 채 철수해 한강을 건넜다. 민병하 일등중사는 철수과정에서 제1사단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지연전을 반복하며 7월 말 낙동강방어선을 점령했다. 그때부터 9월 중순까지 공방전을 거듭하면서 방어선을 지켜냈다. 9월 15일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민병하 일등중사와 제1사단은 파죽지세의 진격으로 9월 28일 서울탈환에 기여하고,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해 북진작전에 돌입했다. 10월 19일에는 평양에 선두로 입성하는 수훈을 세웠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중공군의 공세가 두 차례나 계속되면서 다시 38도선으로 철수했다. 민병하 일등중사는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가 서울을 향해 시작되면서 민병하 일등중사는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평택까지 철수했다. 민병하 일등중사와 제1사단은 1951년 1월 말 반격으로 전환했다. 수원을 향해 진격한 후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일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계속했다. 민병하 일등중사는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한 후 38도선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던 1951년 4월 24일 민병하 일등중사는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임진강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하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3-ㄲ-054)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학(閔병학)일등병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민병학 일등병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초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주둔하고 있던 육직 병기단에 입대했다. 당시는 군 창설 초창기였기 때문에 장비와 보급상태가 매우 열악했다. 많은 장비들이 노후화된 상태에 있거나 보충되지 못해 실제 전투력 발휘가 제한되는 등 곳곳에 문제점이 산적해 있었다. 민병학 일등병이 병기부대에서 근무할 당시 자동차 운전과 정비 등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고급기술자 그룹에 속했다. 따라서 민병학 일등병은 당시로서는 고급기술에 속하는 병기정비 기술을 습득해가고 있었다. 민병학 일등병이 입대할 당시부터 북한군의 국지도발은 계속되고 있었다. 38도선 곳곳에서 전투에 준하는 국지도발이 발생했다. 민병학 일등병은 각급 전투부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계속되는 비상경계령으로 인해 휴가는커녕 외출·외박조차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 시기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다. 육군본부는 서울이 위태롭게 되자 수도권의 예하부대는 물론 후방지역의 부대까지 서울방어에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민병학 일등병은 부대와 함께 전투요원으로 편성되어 방어진지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북한군의 T-34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대전차화기가 없었다. 당시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일부 장병은 대전차특공대를 조직해 육탄공격을 시도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민병학 일등병은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조건 속에서 용전분투했다. 민병학 일등병과 장병은 앞장서서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병학 일등병은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38도선 부근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학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19-1-093)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79-ㅊ-01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학(閔炳學)일등중사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민병학 일등중사는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입대했다. 그는 12월 30일 대구 동촌 등에 긴급하게 설치되어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워낙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그는 간단한 기초훈련만을 수료한 후 전투지역에 배치되었다. 민병학 일등중사는 제2사단 제32연대에 소속되었다. 민병학 일등중사의 입대를 전후한 전황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 및 북진작전에 돌입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그때 예상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과 세 차례의 공세로 또다시 평택-삼척을 연하는 선까지 철수해 반격을 시작했다. 민병학 일등중사와 제2사단은 경북 및 충북 일원의 후방지역에서 무장공비 소탕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무장공비는 단순한 게릴라 수준을 넘어 정규군과 유사한 수준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이 차단된 북한군 주력과 추가로 침투한 북한군 병력이 아군의 후방 산악지역에서 도발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안동, 청송의 보현산일대, 영주의 풍기일대, 충청북도 보은의 속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는 무장공비의 공세는 집요했다. 따라서 민병학 일등중사와 제2사단은 계속되는 중공군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후방지역 작전을 계속했다. 민병학 일등중사와 제2사단은 정규전에 임하는 각오로 용전분투했다. 제2사단은 1951년 4월 말까지 경북 및 충북 일원의 무장공비 주력을 소탕한 후 속리산 일대의 작전을 계속했다. 이어 1951년 5월 16일 시작된 중공군의 제6차 공세를 물리친 아군은 대규모의 반격작전을 전개했다. 그때 민병학 일등중사와 제2사단은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 및 적근산 일대로 진출해 전·후방 동시작전을 수행했다. 그 시기인 1951년 6월 13일 민병학 일등중사는 철원지구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학 일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19-ㅈ-023)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한(閔丙漢)하사
경상남도 산청군 오부면
"민병한 하사는 6·25전쟁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던 1952년 5월 17일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기초군사훈련만을 수료한 후, 제9사단 제28연대에 배속되어 외풍동전투, 백마고지전투 등 고지쟁탈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철원지구 삼각고지전투에 투입되었다. 민병한 하사가 참전한 중부전선은 제2군단과 미 제9군단이 사창리를 종단하는 선을 군단 전투지경선으로 하여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민병한 하사와 사단은 1952년 10월 6일부터 12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백마고지 정상을 탈환한 후, 10월 26일 미 제3사단에 인계하고 강원도 사창리로 이동했다. 상부의 지시로 민병한 하사와 연대는 10월 31일 김화로 이동하여 제2사단에 배속되었다. 민병한 하사가 투입된 전선은 비교적 평상 상태를 유지하였으나, 10월 14일부터 중공군이 저격능선을 끈질기게 공격함에 따라 민병한 하사와 연대는 10월 30일 적에게 빼앗긴 정면의 삼각고지에 전 병력을 투입하여 고지 능선상을 완전히 탈환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11월 1일 민병한 하사의 제1대대는 우일선으로 하감령에, 제2대대는 좌일선 598고지 남쪽의 송정부근에, 제3대대를 상감령의 전진진지로 추진 배치했다. 민병한 하사와 연대 장병들은 11월 2일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3일 새벽에 부대의 재정비를 위해 철수했다. 이날 오전 598고지를 향해 삼면에서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자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피아간 육박전과 백병전이 전개되었으나, 끝내 삼각고지를 탈환하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민병한 하사는 이날 적과의 백병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용맹스럽게 혈전을 벌였으나 애석하게도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에서 치료 중, 10월 14일 끝내 김화지구 삼각고지전투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한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7-2-204)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9-ㅇ-058)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한(閔丙翰)이등중사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민병한 이등중사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8월 1일 제주도 모슬포에 위치하고 있던 제1훈련소에 입대하여 간단한 기초군사훈련만을 수료한 후, 제9사단 제29연대에 배속되어 현리지구전투, 343고지전투 등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백마고지전투에 투입되었다. 민병한 이등중사가 참전한 당시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이 전 전선에 걸쳐 주도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휴전회담을 고려하여 공격을 제한했으나, 공산군은 협상과 전쟁 양상을 노골화했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에게 압력을 가하고, 정전 후의 군사분계선을 고려하여 중동부에서 1952년에 들어서도 고지쟁탈전이 계속 전개되었다. 민병한 이등중사와 사단은 1951년 10월부터 철원-김화지구의 주저항선에 투입되어 좌로는 백마고지, 우로는 중강리까지 철원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초부터 절정에 달했다. 민병한 이등중사가 방어하고 있던 백마고지에 10월 초 중공군이 포격을 집중함과 동시에 봉래호 둑을 파괴하여 역곡천을 범람시키며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민병한 이등중사와 연대 장병들은 중공군과의 3차례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격퇴시켰다. 민병한 이등중사가 방어 중인 백마고지는 10월 15일 제12차 중공군과의 최종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전날 391고지를 탈환한 연대 장병들은 이날 새벽에 241고지에서 대기 중이던 제2대대 장병들을 395고지로 전진시키고 백마고지 일대에 대한 총공세를 펼쳐 적과의 백병전 끝에 완전히 점령했다. 이날 백마고지전투에 투입된 민병한 이등중사는 적과의 백병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워 수많은 전공을 남긴 채, 10월 16일 애석하게도 적의 총탄을 맞고 소중한 목숨을 조국에 바쳤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한 이등중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69-ㅍ-052)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해(閔炳海)하사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
"민병해 하사는 1934년 2월 6일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951년 1월 15일 부산·경주 등에 설치되어 있던 제2훈련소에 입대했다. 민병해 하사는 긴급했던 상황에 따라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후 제3사단에 소속되었다. 민병해 하사가 소속된 제3사단은 1950년 겨울 중공군 참전으로 해상 철수를 단행했다가 북상하여 12월 20일 홍천에서 제9사단과 교대했다. 1951년 3월 1일 제23·제18연대가 공격을 감행했으나 689고지 등 주요거점을 점령하지 못했다. 사단 화력을 총동원하여 17일부터 22일까지 유천리부근전투를 전개하고, 26일부터는 38도선 일대의 적 진지를 공격했다. 민병해 하사의 제3사단은 4월 중에 제18연대가 덕적리지구공략전, 제22연대가 한석산 및 매봉전투, 5월 초에 제22연대의 가리산지구전투에 이어 5월 16일부터 22일까지 현리지구철수전을 전개했다. 사단의 우측 제22연대가 가리산과 1,226고지를 선점하고, 제23연대는 제18연대에 진지를 인계한 후 예비대로 전환하여 상답·하추리에 주둔했다. 5월 17일부터 적 제32·제12사단의 대공세로 인해 제18·제22연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민병해 하사는 제18·제22연대가 현리로 철수할 때 제23연대가 엄호하는 사단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5월 18일 제23연대가 방대산을 선점하고 있다가 제9사단 철수부대를 통과시킨 후에는 적의 추격대를 견제하면서 철수했다. 5월 22일 제3사단 지휘소가 송계리에 위치한 가운데 사단 예하 연대 병력들이 정선군 임계로 남하했다. 민병해 하사는 제3사단이 5월 26일까지 송계리에 위치하며 병력을 수습하고 재편성할 때 엄호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매사에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병해 하사는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치료하던 중 회복하지 못한 채 1951년 6월 18일 17세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양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해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06-7-18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27-ㄱ-02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헌(閔炳憲)하사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민병헌 하사는 1921년 10월 13일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해 조국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1950년 9월 21일 부산시 북구 구포에 위치한 제3훈련소에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마친 민병헌 하사는 카투사(KATUSA, 한국에 파병된 미군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한국군) 요원으로 선발되어 연합군지원한국군 미 제24사단에 배치되었다. 민병헌 하사가 소속된 카투사는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탄생한 특이한 제도였다. 평시 상태였던 미군은 감소 편성, 운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부족했다. 반면 한국의 인적자원은 충분했지만 장비와 물자가 부족했다. 이런 요인들에 따라 한국에 파병되는 유엔군의 부족한 병력을 한국군 병력으로 보충시켜 유엔군의 전투력 발휘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민병헌 하사는 미 제24사단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따라 반격으로 전환하여 대전 지역을 소탕하고 38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작전 중에 있던 10월 초순 사단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민병헌 하사와 미 제24사단은 중공군이 개입한 후 서울 이남으로 철수한 후, 1951년 3월 철의삼각지 이남 지역 확보를 위한 반격작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데 이어 4월의 중공군 제5차 공세에서는 김화 서남쪽 문혜리~신술리 지역에서 이를 격퇴하였다. 민병헌 하사와 카투사 병사들은 미군과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지만 용맹성을 발휘했다. 그들은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을 대신해 수색 및 정찰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민병헌 하사는 특히 김화 서남쪽 문혜리~신술리 지역에서 4월의 중공군 제5차 공세에 맞서 용전분투했다. 그러나 1951년 8월 2일, 민병헌 하사는 김화 서남방에서의 수색 및 정찰작전 시 후방침투한 적과 교전 중에 장렬히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헌 하사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23-11-6764)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28-ㅌ-027)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헌(閔炳憲)일등병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민병헌 일등병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 의정부에서 동두천-포천일대의 38도선 경계를 담당하고 있던 제7사단 제1연대에 입대했다. 당시 국군은 훈련을 위한 장비는 물론 복장조차도 제각각이었다. 민병헌 일등병은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병헌 일등병이 소속된 제7사단은 적성에서 일동까지 47㎞에 이르는 광정면의 38도선 경계임무를 담당했다. 사단은 제1연대를 좌측 동두천축선에, 제9연대를 우측 포천축선에 배치하여 38도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6월 15일 예비부대인 제3연대를 수경사로 전환했으나 6∙25전쟁 당일 제7사단으로 다시 예속되었다. 민병헌 일등병과 제7사단은 38도선 부근에서 진지공사에 매진했다. 이 시기 1949년부터 북한의 도발은 심상치 않았다.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지역에서 육탄10용사가 산화하는 송악산전투가 발생하는 등 38도선 전역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계속되면서 준전시와 같은 상황이었다. 북한군의 도발은 1950년 6월 25일 전면남침으로 연결되었다. 민병헌 일등병이 근무했던 의정부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북한군은 동두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4사단을 투입하고, 포천축선에 40여대의 전차와 제3사단을 투입해 의정부를 목표로 공격했다. 민병헌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용전분투했으나 T-34전차를 앞세워 공격하는 북한군에게 중과부적이었다. 국군이 가진 대전차무기 2.36인치 로켓포는 T-34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다. 민병헌 일등병과 장병 모두는 악조건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그러나 민병헌 일등병은 전쟁이 시작된 첫날인 1950년 6월 25일 동두천지구 전투에서 푸른 청춘의 꿈을 남겨둔 채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헌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28-1-026)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001-ㅋ-051)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협(閔병협)일등병

"민병협 일등병은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춘천으로 이동해 38도선 방어를 담당하는 제7연대에 입대했다. 그 후 그는 제6사단 제7연대로 전속되었다. 민병협 일등병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국군을 건설한다는 자부심으로 훈련과 작전에 임했다. 민병협 일등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6·25전쟁 발발 이후 당시 북한군 제8사단이 신령을 거쳐 영천을 점령하려는 악착스러운 공격을 동료장병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저지하였다. 당시 부대 장병들은 열악한 전투장비와 빈약한 보급지원하에서도 불타는 애국심으로 부여된 임무수행에 최선을 다했다. 결국 이와 같은 국군의 감투정신으로 북한군의 공격은 좌절되었다. 민병협 일등병의 부대는 대구 외곽선인 신령지구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대구를 점령하려던 적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또한 이 전투는 낙동강방어선에서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민병협 일등병의 소속부대도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아군 제6사단 정면의 북한군도 급속도로 붕괴되어 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아군은 적에게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일일 40Km 이상 전진하며 적을 추격하였다. 국군이 38도선을 돌파 이후에는 조국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전 장병은 사기가 충천했다. 민병협 일등병의 제6사단은 파죽지세로 전쟁초기 울분을 삭히며 철수했던 지역을 수복하며 쾌속으로 춘천을 향해 진격했다. 이 반격작전에서 민병협 일등병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자 생과 사를 넘나들며 숱한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병협 일등병은 1950년 10월 3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춘천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협 일등병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시고(30-4-107)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115-ㅎ-086)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민병혜(閔병혜)유격대원

"민병혜 유격대원은 6·25전쟁으로 위기에 처했던 조국의 운명을 지켜내는 데 기여한 자랑스러운 호국용사다. 그는 군번도 부여받지 못해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 데 기여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유격대 타이거여단에 소속되었다. 그가 소속된 유격부대는 황해도 연백지역을 중심으로 반공투쟁을 하던 연백학생동지회·온천치안대 등을 중심으로 출범했다. 그 후 1951년 3월 27일 본부를 교동도에 두고 육군 을지 제2병단으로 편성되었다. 민병혜 유격대원의 을지 제2병단은 청년방위군 장교 및 낙오된 국군 부사관들을 중심으로 교육대를 편성하여 훈련을 받았다. 1951년 3월 28일부로 미군 제8군 통제하의 백령도 기지사령부로 소속이 전환되어 동키 제5부대가 되었다. 그 후 4월 동키 제11부대에 편입되었다가 1951년 8월에 강화도에 주둔한 울팩기지의 통제를 받는 타이거여단으로 개편되었다. 민병혜 유격대원은 임진강·예성강·한강 하구의 도서들을 방어하면서 해성면·호남면·송봉면·해룡면 등 연백군 전역과 벽성군·청룡면·일신면·평산군 일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침투작전을 전개했다. 그밖에 공군의 항공폭격을 유도하기 위한 첩보수집활동도 병행했다. 1951년 4월 15일 일부 대원이 청룡면에 상륙하여 북한군 8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민병혜 유격대원이 소속된 유격부대는 1951년 8월 무렵에도 일제·소련제와 노획한 무기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본부인 교동도의 인근 도서 지역과 연백군·개풍군 등지에서도 유격전을 전개했다. 심지어는 그 이북지역으로 출동하여 기습·파괴공작·첩보수집 활동을 벌이는 등 일명 ‘딱정벌레 작전’이라는 소규모의 산발적인 유격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앞장서서 용전분투하던 민병혜 유격대원은 적의 흉탄에 중상을 입고 1951년 8월 5일 꽃다운 청춘을 남겨둔 채, 호남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부는 호국의 별이 된 고 민병혜 유격대원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시고(06-5-3121)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사자 명비에 그의 이름을 새겨 명복을 빌며, 그의 나라사랑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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