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8경학사(10학사) 성씨연원(지씨,곽씨,원씨,위씨,모씨,신씨,홍씨,장씨,이씨,노씨)2023-03-17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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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지씨 시조 지경와 현풍곽씨 시조 곽경, 원주원씨 시조 원경, 장흥위씨 시조 위경, 함평모씨 시조 모경, 영산신씨 시조 신경이며 또 홍경, 장경,이경 노경 자세하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중 홍경은 남양홍씨 일족이라고 함,
고구려 보장왕(642년경) 때 당태종이 파견한 홍경(洪鏡), 지경(池鏡), 신경(辛鏡) 등 경(鏡.거울경)을 이름으로 하는 일명 8학사또는 10학사이르켜 왔다,
당태종이 경(鏡)을 이름으로 하사한 것은 "모든 사람이 본받을 수 있는 거울이 되라"는 뜻이었다
8성씨는 서로 종씨라 부르며 혼인도 하지 않고 의좋게 살았었다고 한다고 합니다.

충주지씨의 시조 지경(903~1003)확실하지 않다            장흥위씨의 시조 위경(연대미상)

현풍곽씨의 시조 곽경(1117~1179)확실하지 않다          원주원씨의 시조 원경(연대미상)

영산신씨의 시조 신경(연대미상)                                  함평모씨의 시조 모경(연대미상)

남양홍씨의 시조 홍경(연대미상) 모든 노씨 도시조 노수은 본래 이름은 노경이라고도 한다,

장경와 이경은 자세하지 않다

8성씨 또는 10성씨는 당나라 태종 떄 파견한 사신이며 서로 종씨라 부르며 혼인도 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정확한 고증 문헌이 없기 때문에 상고하기에 어렵다.

 

1. 원주원씨

 

우리나라 원씨(元氏)의 시조(始祖)는 643년(고구려 보장왕 2) 당(唐)나라 태종(太宗 : 제2대 왕 재위기간 : 627∼649)이 고구려에 문화사절로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원 경(元 鏡)이다.
원주(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원씨(元氏)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운곡공계(耘谷公系 : 원경을 시조로 함)·원성백계(原城伯系 : 원성백 원극유를 시조로 함)·시중공계(侍中公系 : 시중 원익겸을 시조로 함) 등 크게 세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하고 있으며,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원충갑(元沖甲)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으나 최근에 그가 원성백계(原城伯系) 극유(克猷)의 11세손임이 밝혀져 합보(合譜)가 되었다.
각 계통별(系統別)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운곡공계(耘谷公系)에서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의 7세손 천석(天錫)이 유명했다. 그는 고려 말에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득세로 조정이 혼란해지자 고향인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이름을 감추고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했다. 학문과 문장이 당세에 유명하여 방원(芳遠 :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신조(新朝)에 불사(不仕)하고 절의(節義)를 지켰던 고려의 충신이었다. 「여사제강(麗史提綱)」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여러번 요직에 등용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태종이 그를 만나러 치악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치악산 계곡으로 피신하여 끝내 태종을 만나지 않았다. 태종이 계곡의 석대(石臺)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돌아와서 천식의 아들 형(泂)을 풍기감무(豊基監務)로 삼았으며, 태종이 앉았던 바위는 <태종대(太宗臺)>로 불렀다고 한다. 운곡(耘谷) 천석은 치악산에 묻혀 살며 망국(亡國) 고려(高麗)를 회고하는 야사(野史) 6권과 시사(詩史) 2권을 저술하여 운명할 때 자손들에게 유언하기를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 그리고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며 열어 보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불에 태웠다고 한다. 운곡(耘谷)의 증손 보륜(甫崙)은 세종(世宗) 때 지평(持平)과 교리(校理)를 역임했고, 6세손 황( )은 선조(宣祖) 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진해(振海)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나 필명(筆名)을 떨쳤다.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던 극유(克猷)의 후손에서는 좌복야(左僕射) 진(瑨 : 극유의 9세손)의 아들 부(傅)가 고려 원종(元宗) 때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는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고금록(古今錄)」의 편찬
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이르렀다. 한편 첨의평리(僉議評理) 선지(善之 : 부의 손자)의 아들 송수(松壽)는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왕(王)을 호종하여 피난한 공(功)으로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신 돈(辛 旽)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그 울분으로 병사했다. 특히 시문(時文)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예학(禮學)에도 밝았다. 송수의 아들 상(庠)은 고려말에 김 저(金 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 색(李 穡)과 함께 혹형을 당한 끝에 정몽주(鄭夢周)의 구제소(救濟疏)로 광주(光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장단(長湍)의 대덕산(大德山)에 은거(隱居)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소문났었던 창명(昌命 : 상의 아들)은 세종 때 조견례(朝見禮)를 올리려 궁전에 들었을 때 난간에 중(僧) 옷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는 그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임금에게 배알하여 "상감께서는 신 돈(辛 旽)이 나라 망친 일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 금중(禁中)에 승니(僧尼)의 자취가 있으니 전철을 밟을까 저어합니다"라고 말하여 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시중공계(侍中公系)의 인맥(人脈)으로는 별장(別將) 헌(憲)의 아들 호(昊)가 유명했다. 1423년(세종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던 그는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王位) 찬탈 음모가 무르익어가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있다가 병을 핑계하고 벼슬을 버린 후 원주(原州) 남송촌(南松村)에 은거(隱居)하였다.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내쫓기자 호(昊)는 열월 서쪽에 집을 짓고 조석(朝夕)으로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예(禮)를 다했으며, 단종이 사사(賜死)당하자 3년상을 치르고 원주 옛 집으로 돌아와 이웃 사람들이 수년이 지나도록 얼굴 한번 볼 수 없었을 만큼 폐문불출하였다.
세조(世祖)의 좌익공신인 조카 효연(孝然 : 원산군 황의 아들)이 하인을 거느리지 않고 찾아와 문 앞에서 뵙자고 간청했으나 그는 방 안에서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으며, 세조가 호조 참의(戶曹參議)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내가 죽거든, 업어다 앉히라"고 과격하게 불응했다. 어느날 강원도 관찰사가 도사처럼 평복차림으로 호를 찾아 갔을 때 야인인줄로만 알고 나가 맞았다가 보니 관찰사라 손을 내두르며 도망쳐 방안에 들어가서 고리를 잠그고 자기 있는 동(東)쪽으로 머리를 향했고, 그가 사는 남송촌도 관부(官府)에 가까워 그 오예(汚穢)의 기운이 젖어든다는 이유로 보다 골짜기가 진 주천현(酒泉縣) 산골로 들어가 평생을 마치었다. 임진왜란 때 아들 유남(裕男)과 함께 무명(武名)을 떨쳤던 호(豪)는 김덕수(金德壽)의 문인으로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1567년(명종 22) 무과로 진출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미포(龜尾浦)·마탄(馬灘)·운무(雲霧) 등지의 작전에서 전공을 올려 적진(敵陣)을 여주에서 완전히 봉쇄했던 지장(知將)이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겸 경기·강원도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북로(北路)의 왜군 토벌 임무를 맡고 김화(金化)로 진군 도중 적의 복병을 만나 포위되어 깊은 산 낭떠러지 끝으로 몰리게 되자 투신하여 살신(殺身)하였다.
적군은 호(豪)의 머리를 잘라 김화(金化) 고을 성문(城門)에 매어달고 <조선 군사와 백성이 모두 귀순했는데 원 호만이 우리에게 항거하였기로 이같이 벌을 준다>라는 글귀를 써붙여 놓았다. 특히 호는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은(銀)의 고장인 단천(端川)의 군수(郡守)로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은반지 하나를 사 낀 일이 있었다. 이를 본 호는 <은고지(銀庫地) 원으로서 은물건을 우리집에 두다니......>하며 아내와 물건을 사온 종을 매질하고는 은가락지를 빼앗아 버렸다.
호의 아들 유남(裕男)은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용력(勇力)으로 이름을 떨쳤고,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 3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아버지 유남과 함께 인조반정에 유공하여 정사 2등공신으로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에 봉해졌던 두표(斗杓)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어영부사(御營副使)로 남한산성을 수비했고, 효종(孝宗) ㄸ 좌찬성(左贊成)·좌참찬(左參贊)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그밖의 인물로는 목사(牧使) 명귀(命龜)의 아들 경하(景夏)가 영조(英祖) 때 이조 및 병조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로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문장(文章)과 검소한 생활로 명망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인손(仁孫)은 우의정을 역임하였고, 계손(繼孫)은 시(詩)·서(書)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져 학문(學問)과 충절(忠節)을 지켜온 원주 원씨의 전통을 지켰다

 

2. 장흥위씨

 

위씨(魏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주(周)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晉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唐)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인 위 경(魏 鏡)이 신라(新羅) 태종(太宗)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경(鏡)의 동래설(東來說)은 또 다른 설(說)이 있는데, 신라(新羅) 왕(王)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 왔다고도 한다.
경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侯)·아찬(阿 ) 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懷州 : 장흥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신라 말(新羅末)에 대각관 기중(大覺官侍中)을 역임한 위창주(魏菖珠)를 일 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위씨(魏氏)의 본관(本貫)은 13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재는 장흥(長興) 단본으로 전한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창주(菖珠)의 5세손 계정(繼廷)이 고려(高麗)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원개(元凱)가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10세손 온(溫)이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증흥시켰다. 조선(朝鮮)에 와서도 위씨(魏氏)의 가문은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는데, 덕의(德毅)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몽진 (蒙塵: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겨감)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석 달을 걸어 의주(義州)까지 찾아가 왕을 모시는 충성을 보여, 명(明)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鐘)으로부터 "동국(東國)의 산은 오직 천관(天冠:장흥에 있는 산)이요, 사람은 덕의(德毅)가 있을 뿐이다."는 극찬을 받았다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전공을 세우고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된 대용(大用)과 이순신 휘하의 조전장(助戰將)으로 율포(栗浦)·목포(木浦)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이른 대기(大器), 그리고 영조(英祖)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한 창조(昌祖) 등이 있다.
이 외에도 호남(湖南) 실학(實學)의 거목 백규(伯圭)는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해「삼절(三絶)」로 불린 조부(祖父) 세보(世寶)로부터 글을 배워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 천문(天文)·역학(易學)·지리(地理) 등을 모두 섭렵하여 당대의 석학(碩學)으로 이름났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경세철학(經世哲學)을 체계화했으며 90여 권의 책을 저술하여 백과전서격 학문을 집대성하고,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다 91년이나 앞서 조선전도(朝鮮全圖)를 그려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였다.

 

3. 충주지씨 

황명만성통보(皇明萬姓統譜)와 운부군옥(韻府群玉)에 『지씨(池氏)는 서하(西河:중국의 지명) 땅에서 나서 그 산 곳(居住地)의 이름으로 성(姓)을 삼으니 치음(徵音:五音의 하나)에 속(屬)한다』하였고 또 성씨비고(姓氏備考:책이름)에는「서하(西河)는 경치 좋은 곳으로 계속하여 물이 맑게 흐르는데 진(秦)과 송(宋)나라에서 으뜸인 고장으로 지자화(池子華)는 지(秦)나라 승상(丞相)이었고, 지몽리(池夢鯉)는 송(宋)나라 함순(咸淳:南宋-1265~1574)년간에 특별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으며, 한(漢)나라 지원(池瑗)은 중모령(中牟令)으로 어진이(賢人)로 이름이 낫고, 송(宋)나라 지광정(池光庭)은 진사(進士)로 문학(文學:글과 학문)으로써 이름을 떨쳤는바 모두 『장계(長溪) 사람이다』하였다.

지씨(池氏)는 충주(忠州) 단일본(單一本)으로 일부는 단양(丹陽) 광주(廣州) 등을 쓰고 있으나 세거지(世居地)에 불과하다

시조 선의공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8성씨[곽씨,])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주를 본관으로 정하게 된 것은 시조할아버지의 5세손 되는 지종해(池宗海)께서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란 높은 벼슬을 지내시고 식읍(공이 많은 신하에게 어느 고을을 맡겨 군(君)으로 봉하였기로 이로부터 충주가 본관(本貫)이 된 것이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또 본래는 충주 지씨였다가 고려 태조에게 충주 어씨로 성을 하사 받은 어중익(魚重翼)도 충주 지씨 6세이다. '충주지씨대동보'는 시조 지경의 아들에 지해관(海貫, 찬성사), 지도관(道貫, 평장사) 형제가 있고, 지해관의 아들에 지윤(胤, 안렴사), 지영(瀛, 부원수) 형제가 있으며, 지영의 아들에 지득상(得尙, 평장사), 지응상(應尙, 찬성사)이 있어 지득상의 손자가 지종해(평장사)이고 지응상의 손자가 지중익, 즉 어중익(평장사)으로 기록되어 있다.
1천여년 동안 47세의 大宗을 이루고 있다.

충주지씨의 세계는 크게 11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40여 파로 분파된다. 11대파는 충의군파(忠義君派)·충무공파(忠武公派)·충의공파(忠義公派)·감찰공파(監察公派)·판관공파(判官公派)·주서공파(注書公派)·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판형공파(判形公派)·주서명천공파(注書明川公派)·봉사영흥공파(奉事靈興公派)·낭장공파(左營公派) 등이다.
그중 충의군파(忠義君派)·충무공파(忠武公派)·충의공파(忠義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며, 전체인구가 특히 충의군파(忠義君派)가 전체 충주지씨의 80%를 차지한다.
고려에 36명이 정승에 버금가는 평자사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조선에 문과급제자 12명, 진사 75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는데, 이들 3파가 사실상 충주지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충주지씨는 고려초(光宗 11年:960)부터 중앙(中央)의 지배계급(支配階級)으로 정착(定着)하여 대대(代代)로 많은 人物을 배출하고 고려말(高麗末)까지 세록구신(世祿舊臣)으로 벼슬이 끊이지 않아 고려조(高麗朝)에만 36평장사(平章事)와 24대장군(大將軍)을 배출한 명문(名門)으로 특히 지씨려말사걸(池氏麗末四傑)이라 일컬는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李成桂의 長男 鎭安大君의 丈人)과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 지환(池桓)의 아들 상원수(上元帥) 지용도(池龍圖-忠懿公), 상원수 지용수(池龍壽-忠武公) 형제 그리고, 판호조사(判戶曺事) 지복룡(池福龍)의 아들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장군 등이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지윤(池奫)은 우왕때 찬성사(贊成事)로 서북면 도원수(西北面 都元帥)가 되어 북원(北元)을 방비하였고 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심왕(瀋王) 모자의 반역을 방비하였으며 중앙의 인사(人事)를 담당하는 정방제조(政房提調)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판 판도사사(判 版圖司事)의 직무를 겸하면서 재상에 올랐다.

충의공(忠懿公) 지용도(池龍圖)는 서북면(西北面) 상원수(上元帥)로 거제(巨濟) 고성(固城)에 처들어온 왜적(倭賊)을 격퇴하고 1356년 금병(金兵)의 침입을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나아가 크게 격파하였다. 공민왕 7년에 내사시 문하평장사(內史寺 門下平章事)겸 이부랑 판혜덕부사(吏部郞 判惠德府事)가 되었고, 1364년 역적 최유(崔濡)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아우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나아가 물리쳤다.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는 공민왕 12년(1363)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안우(安祐)와 같이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쳐 경성(京城)을 수복한 1等공신으로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임명되였고, 순무사(巡撫使)로 덕흥군(德興君) 최유(崔濡) 등 반적(叛賊)을 토벌한 공으로 다시 1등공신이 되고 밀직사(密直事) 지도첨의(知都僉議), 상원수(上元帥) 겸 평양윤(平壤尹)을 역임하고 공민왕 19년(1370) 서북면 상원수로서 이성계(李成桂) 양백안(楊伯顔) 등과 원(元)의 동령부(東寧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등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충의군 지용기(池湧奇)는 공민왕때 삼사우윤(三司右尹)에 이르렀고 우왕(禑王)때 예의판서(禮儀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 후 양광도 부원수(楊廣道 副元帥),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 都巡問使) 도원수(都元帥) 등을 역임(歷任)하면서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왜적(倭賊)을 물리치는데 큰공을 세웠으며 특히 장흥(長興), 보성(寶城) 정읍(井邑) 나주(羅州) 등지의 전투에서 적 수십급(數十級)을 베고, 우리 백성 수백명을 포로에서 구출하였고, 응령역(應嶺驛)전투에서 적의 화살을 맞기도 하였다. 우왕 14년 위화도 회군때는 안주도 도원수(安州道 都元帥)로 이성계의 회군에 공을 세우고 찬성사(贊成事)로서 이성계 등과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 흥국사(興國寺) 모임에 참가한 9功臣의 한분으로 중흥공신(中興功臣) 충의군(忠義君)에 다시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에 봉(封)하였고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으나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獄)에 연루된 김종연(金宗衍) 당으로 지목, 탄핵을 받아 삼척(三陟)에 귀양갔다가 풀려나 충남 면천(沔川)에서 졸(卒)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충원부원군(忠原府院君) 지용기(池湧奇)의 아들 충주지씨 중시조 지유용(池有容)은 세종(世宗)때 우군첨총제(右軍僉摠制)와 충청안무사(忠淸按撫使), 판경성부사(判鏡城府事), 종성도호부사(鍾城都護府使), 강계부사(江界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능력과 용맹을 갖추어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판의주목사(判義州牧事)로 卒하니 왕이 부의를 보냈다.

지유용(池有容)의 아들 지개(池開)는 진사(進士),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官職에 나아갔으며, 이어 그 자손이 8代에 걸쳐 연속(連續)하여 進士, 生員에 급제 함으로서 무려 일문에 사마(司馬)가 22명이 배출되는 명문(名門)으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도 좌승지(左承旨) 지세함(池世涵:進士)과 그 아들 교관(敎官) 지달해(池達海) 도사(都事) 지달문(池達汶)형제, 그리고 지달해의 아들 왕자사부(王子師傅) 지봉휘(池鳳輝:進士) 부처(夫妻) 등이 삼세(三世)에 오효(五孝)로 정려(旌閭)와 사복십결(賜復十結)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지달해(池達海)는 생원(生員)으로 시문(詩文)에 뛰어나 세상에 이름이 나서 中國에서까지 詩를 구하고자 하였으며 광해군(光海君)때 시학교수(詩學敎授)로 추천되였으나 폐모론(癈母論)이 일자 일체의 관직을 멀리하고 충청도로 숨어버려 문장(文章)과 기절(氣節)뿐만 아니라 孝行으로 세상에서 추앙을 받았고,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이항복(李恒福), 유근(柳根) 등과 교의(交誼)가 두터웠다.

지덕해(池德海)도 생원(生員)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강직한 인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충청도 소모관(忠淸道 召募官)으로 의병(義兵)과 군량미(軍糧米) 모집에 공이 컸으며 용강(龍岡) 령해부사(寧海府使) 등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지여해(池汝海)는 덕해(德海)의 재종제(再從弟)로 지용(智勇)이 뛰어난 무관(武官)으로 용천(龍川), 철산부사(鐵山府使) 등을 지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위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별장(別將)으로 300명 결사대(決死隊)를 이끌고 城을 나아가 싸우다 순절(殉節)하니 병조참판(兵曹叅判)에 추증 되었다.

지봉수(池鳳遂)는 효자(孝子) 증참판(贈叅判) 지달문(池達汶)의 아들로 진사(進士)에 합격,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종묘봉사(宗廟奉事)로 묘주(廟主)를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하였는데 체찰사(體察使)가 亂中에 풍류를 갖추고 술을 권하니 公이 정색(正色)을 하고 제찰사를 꾸짓었으며, 신주(神主)를 안전히 모실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더니 마침내 강화가 적에게 함락 되여서는 모든 관원(官員)이 다 도망하되 혼자 묘주(廟主)를 지킨 의리로 적도 감히 해(害)하지 못하였다. 후에 회덕현감(懷德縣監)을 지내고 인조의 항복을 憤하게 여기고 槐山에 落鄕하여서 다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충성군(忠城君) 지계최(池繼漼)는 인조(仁祖) 때 관서행영(關西行營)의 도원수(都元帥)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으로서 이괄(李适)의 반란군(叛亂軍)을 정충신(鄭忠信), 남이흥(南以興), 이수일(李守一) 등과 같이 맞아 섬멸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정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했다. 그 후 남해현감(南海縣監), 의주판관(義州判官), 서흥부사(瑞興府使), 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역임하며 치적을 남기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적과 싸우다 신계(新溪)에서 순절(殉節)하니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추증하였다.

또한 지경철(池景澈)은 문장(文章) 도의(道義)가 훌륭하여 교관(敎官)으로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남한산성에 호가(扈駕)하여서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리더니 화친이 성립되자 관대(冠帶)를 찢고 귀향(歸鄕)하였으며, 그 아들 兄弟는 남한(南漢) 근친(覲親)中에 적에게 살해되니 충효양전(忠孝兩全)이라 하였다.

이렇듯 지씨(池氏)는 조선조에서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까지 많은 인물(人物)을 배출하였으나 청(淸)의 지배를 받은 인조(仁祖) 이후 출사(出仕)를 멀리하고 각지(各地)로 낙향(落鄕)하여 지조(志操)를 지키며 학문(學文)에만 힘을 썼다. 조선조(朝鮮朝) 중옆(中葉)에는 池門八鳳八海라하여 鳳字, 海字 항열(行列) 각 8名씩이 그 중에도 출중(出衆)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敎官 지경철(池景澈)의 後孫으로 지우성(池友星 : 武科 同樞 五衛將), 지우두(池友斗 : 通德郞), 지우규(池友奎 : 兄友星과 武科 聯璧宣傳官), 지우삼(池友三 : 贈戶叅), 지우익(池友翼 : 武科 三陟營將陞資憲) 五兄弟와 지일휘(池日輝 : 武科 同樞 五衛將, 友三의 子), 지일호(池日浩 : 武科 沃溝縣監, 友奎의 子) 등 兩代에 五名이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이름이 났는데 특히 방어사(防禦使) 지우익(池友翼)은 사천(泗川), 남해현감(南海縣監)으로 善治稱頌이 있었고, 부인 全州 李氏는 享年 九十四世(1694~1789)로 正祖로부터 貞敬夫人의 老典을 받았으며, 아들 沃溝縣監 지일호(池日浩) 역시 善治와 孝子로 이름나서 縣民追頌者가 甚多했다.

그 외에도 세조(世祖) 때 충청절제사(忠淸節制使)로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 화(禍)를 입은 지정(池淨:寧越 莊陵 配食壇 配享),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신립(申砬)의 별장으로 충주 탄금대에서 순절(殉節)한 판결사(判決事) 지하복(池河福), 관북(關北)에서 의병장(義兵將) 정문부(鄭文孚)와 같이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을 물리치고, 토적(土賊)을 목베인 좌승지 지달원(池達源:鏡城 彰烈祠 配享),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江華)에서 절개를 지킨 지평(持平), 지달원(池達遠), 문한(文翰)으로 이름난 이조정랑(吏曹正郞) 지달하(池達河), 지씨홍사(池氏鴻史)를 편찬한 지광한(池光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 청구자(靑丘子) 지광진(池光晉), 그리고 성리학자(性理學者) 주하(柱下) 지운호(池運浩)의 오형제(五兄弟) 등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당대의 명사(名士)가 많다.

근대(近代)에 와서는 우리나라에 우두법(牛痘法:種痘法)을 처음 보급한 의학자(醫學者)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이 뛰어났다. 1876년(고종 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가 종두법(種痘法)을 배워 온 박영선(朴永善)에게 종두법을 익혔으며, 김홍집(金弘集)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종두법(種痘法)을 배우고 돌아와서는 전주(全州) 등지에서 우두국을 설치하여 종두의 전국 보급을 시작하였고,「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하여 국민보건에 위대한 업적(業績)을 남겼으며, 그의 형인 백연(白蓮) 지운영(池運永)은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여 시(詩)․서(書)․화(畵)의 <삼절(三絶)>로 불려졌다.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지홍문(池弘文)은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강화갑곶(江華甲串)에서 일본군 1개 중대(中隊)를 격멸했으며,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지청천(池靑天)은 3․1운동이 일어난 뒤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독립군(獨立軍) 간부를 양성하였고 청산리(靑山里) 전투 후에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작전을 피해 흑룡강(黑龍江)으로 이동하여,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 항일전(抗日戰)을 수행하였으며 광복군(光復軍)을 통합(統合)한 후 광복군총사령관(光復軍總司令官)에 취임 활동하다가 8.15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건국초에 무임소장관을 역임하였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복장이 수여되었다. 만주(滿洲) 대학살 때 순국(殉國)한 지하영(池霞榮)과 함께 충주지씨(忠州池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또한 한말(韓末) 의병장(義兵將으)로 강원도일대(江原道一帶)에서 13년간 왜적(倭賊)과 격렬(激烈)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지용기(池龍起) 의병장이 있다. 그는 1867년 춘천(春川)에서 역시 의병활동을 한 지명재(池明在)의 외아들로 1895년 乙未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으로 전국(全國)에서 의병(義兵)이 붕기할 때 춘천 의병장으로 추대된 이진응(李晋應) 휘하에서 약사원(藥司院) 전투에 참여하였고 관동9군(關東九郡)의 의병진과 合流하여 원산(元山)을 습격하고 뒤에 호좌 창의대장(湖左 倡義大將) 유인석(柳麟錫) 의병진과 제천(堤川), 충주(忠州), 청주(淸州) 등지에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1908년 춘천(春川) 전투에서 순국(殉國)하니 나이 42歲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서훈(敍勳)되었다.

한국어문학회장(韓國語文學會長)과 어문연구회장(語文硏究會長)을 역임한 장암 지헌영(藏庵 池憲英)은 지씨홍사(池氏鴻史)를 펴낸 설악 지광한(雪嶽 池光瀚)의 七代孫으로 1931년 연희전문 재학중 항일운동(抗日運動)에 가담하여 옥고(獄苦)를 치르고 퇴학하였다가 광복후 충남대 국문과 교수로 대전일보(大田日報) 사장으로 언론과 어문학계에서 활동하였고, 호중(湖中=忠淸道) 유림(儒林)의 추앙을 받은 취송당(翠松堂) 지재우(池載鄅)는 뇌봉(雷峰) 지덕해(池德海)의 후예로 성품이 고결(高潔)하고 문장이 출중(出衆)하여 당대의 이름난 문인학자(文人學者) ,시인(詩人),묵객(墨客)과 교류(交流)가 많았고 특히 흩어진 지씨문헌(池氏文獻)을 재정비하여 중간(重刊), 복원(復元)에 힘써서 지문의 보배(池門의 寶貝)라 일컬는다.

4. 현풍곽씨

 

시조 곽경(郭鏡)의 처음 이름은 약노(若魯), 자(字)는 노이(魯以), 호(號)는 암곡(巖谷) 또는 초수이며, 익호(謚號)는 정각(正殼)다 당시 태학사(8성씨[지씨,])이다
그는 본래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문연각(文淵閣) 한학사(翰學士)가 되었고 고려 인종 11년 7명의 학사(學士)들과 우리나라에 와, 인종 16년 등과(登科)하여 여려 관력(官歷)을 거친 뒤 편장사문하시중(平章事門下侍中)을 지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
그런데 시조 곽경(郭鏡)에 관한 기록중 구보(舊譜)에는 생존연대 등의 기록이 빠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30년 시조의 묘(墓)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되었고 거기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앞서와 같고, 그가 중국 관서(關西)의 혼농(弘農)사람이라는 것과 고려 명종 9년에 세상을 떠난 사실도 밝혀졌다.
현풍곽씨(玄風郭氏) 중에는 한때 본관(本貫)을 선산(善山) 해미(海美) 강릉(江陵) 등 별관(別貫)을 써온 때가 있었으나 그들의 족보(族譜) 첫머리에 의례 현풍곽씨(玄風郭氏)(시조 郭鏡)의 후예라 써 왔기에 1976년 ‘병진대동보(丙辰大同譜)’때 대종회(大宗會) 의결(議決)로 본관을 현풍(玄風)으로 통일하였다.
현풍곽씨(玄風郭氏) 후손들은 시조 포산군(苞山君)의 봉호(封號)를 소중히 여겨 족보(族譜)의 표제(表題)나 비명(碑銘)의 제면(題面)등에는 포산곽씨(苞山郭氏)라 많이들 쓴다.

현풍곽씨의 세계는 크게 20여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100여 파로 분파된다.
전리공파(典理公派) 아래 7개파, 제학공파(提學公派)외 7개파, 밀직공파(密直公派)ㆍ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ㆍ도사공파(都事公派)ㆍ부사공파(府使公派)ㆍ우장군공파(右將君公派)외 3개파ㆍ노제공파(魯제公派)외 2개파ㆍ두정공파ㆍ서령공파(署令公派)ㆍ전서공파(典書公派)ㆍ판관공파(判官公派)ㆍ상서공파(尙書公派)ㆍ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외 5개파,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ㆍ소감공파(小監公派)ㆍ교리공파(校理公派)ㆍ현령공파(縣令公派)외 3개파, 목사공파(牧使公派)ㆍ경제공파(警제公派)ㆍ둔제공파(遯제公派)ㆍ교리공파(校理公派)ㆍ구거당공파(九居堂公派)외 10개파ㆍ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외 14개파ㆍ동정공파(同正公派)ㆍ참봉공파(參奉公派)등 78파(派)가 있다.

현풍곽씨(玄風郭氏)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친다. 조선조 때 정려(旌閭)가 12개나 되어, 12정려(旌閭)는 <현곽(玄郭))>의 대명사로 통한다. 정려(旌閭)란 충신ㆍ효자ㆍ열녀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그들이 산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이다.
삼강(三綱)이 유교사회의 기본적 가치관이었던 옛날에는 정려(旌閭)가 하나만 나도 그 가문과 고을의 자랑거리였다. 하물며 12정려(旌閭)라면 그 가문의 영광은 당시 조선 천지에 뻗칠 만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곽문(郭門)의 정려(旌閭)는 전국 각지에 여기저기 서 있어 가문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
1117년 출생하여 1179년 10월 15일에 사망한 곽경(郭鏡)의 묘지는 문헌상(文獻上) 경기도 파주군 적성(坡州郡 積城)에 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실전(失傳)되었고, 문헌(文獻)에 의거하여 설치했던 제전(祭壇)도 1980년 군사지역으로 편입됨에 따라 철수하고 용인군 외서면 박곡리(龍仁郡 外西面 朴谷里)에 대덕사(大德祠)(시조사당(始祖祠堂))를 건립하여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그의 후손중 안방(安邦)(世祖때 益山郡守)이 첫째 청백리로 꼽힌다.
충(忠)ㆍ효(孝)ㆍ열(烈)의 뿌리는 그로부터 내리기 시작한다.
그의 현손에 <주(走)>자 항렬의 8형제중 越ㆍ?ㆍx 3 형제가 특히 빼어나고 이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름으로써 당시 영남(嶺南) 일대에서는 <현곽팔주(玄郭八走)>로 이름을 떨쳤다.

3형제 중 곽준 일가는 <일문삼강(一門三綱)>의 집으로 유명하다. 그는 임진왜란때 안음(安陰)현감으로 호남(湖南)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고수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이때 두 아들 이상(履常)ㆍ이후(履厚)는 ‘아버지가 임금을 위해 죽었는데 어찌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죽지 않으랴’(父死於君 子不可死於父乎)하며 뒤따라 전사했다.
이어 딸과 며느리 신(愼)씨도 남편들이 전사하자 ‘아버지가 죽고서 내가 살아있음은 남편이 있기 때문이거늘 남편까지 전사하니 어찌 내가 살리오’(父死而生 爲夫在故也 今夫被害 何忍生)하고 스스로 목매 죽으니 곧 충(忠)에 부사(父死)하고 효(孝)에 자사(子死)하고 열(烈)에 부사(婦死)함으로써 일문(一門)에 삼강(三綱)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곽준의 형 월(越)은 특히 활을 잘 쏘았으니 그의 아들이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유명한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충익공(忠翼公) 1552~1617년)다.
“우리 역사상 미증유의 국난인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갈 때 이 나라를 구한 사람은 바다의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육지의 의병들이었고 의병 중에서도 제일 먼저 일어나 가장 큰공을 세운 이는 망우당(忘憂堂) 선생이었다.”고 원로 사학자 이선근(李瑄根) 박사는 말한적이 있다.
홍의(紅衣) 장군의 탄생이자 의병의 발상지는 경남 의녕(慶南 宜寧)이다. 제철을 맞아 연초록으로 뒤덮힌 남산(南山) 밑에는 72년 의녕(宜寧) 군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국내 최대의 의병탑(높이 72미터, 가로 5.5미터)이 장엄하게 서있다.
‘의조실록(宜祖實錄)‘에 따르면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왜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첫발을 디딘지 열흘이 못되는 1592년 4월 22일이었다. 장군은 생가인 의녕군 유곡면 세우리(宜寧郡 柳谷面 世于里)마을 앞 정자나무에 북을 매달아 울리며 의병을 모았다.
후세 사람들이 이름붙여 현고수(懸鼓樹). 세월이 흘러 꼭 3백90년. 수령 5백 20년의 노거수(老巨樹)(높이 15미터 둘레 7미터) 는 5본(本)의 지주에 의해 몸뚱이를 유지한 채 바람이 불 때 마다 장군의 호령소리를 느끼게 한다.
‘흰 기운이 남방에 가득 차니 바다에서 오는 악한 기운 때문이로다. 7,8년 뒤에는 바다가 반드시 편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괴로워지겠구나’
어느 날 문경(聞慶)새재 마루턱에 30대 선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읊조렸다.
그는 조선 명종(朝鮮 明宗) 7년(1552) 8월 28일 경상도 의녕현 세우리(慶尙道 宜寧縣 世于里) 외가집에서 황해도(黃海道) 감사 곽월(郭越)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곽재우(郭再祐)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읜 그는 눈에 광채가 번득이고 성품이 밝고 호탕해 일찍부터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8세가 되던 해 그의 부친 곽월(郭越)이 지은 용연정(龍淵亭)에 올라 공부했고, 15세가 되자 도굴산 보리사(菩提寺)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이때 그는 남명 조식(南溟 曺植)의 눈에 들어 외손녀 사위가 된다. 40세까지는 그는 대자연에 묻혀 낚시와 독서로 세월을 낚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난 것은 그가 41세 되던 해. 파죽지세로 조선(朝鮮)을 휩쓰는 왜군(倭軍)에 분노한 그는 팔뚝을 걷고 일어섰다.
심대승(沈大承).박필(朴弼)등 의녕(宜寧)고을의 장사들과 친족, 하인 등을 모아 의병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 입고 양쪽에 날개를 단 투구를 쓰고 백마에 올라타니 사람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다.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전라도(全羅道)땅으로 들어오기 위해 정암(鼎岩)나루에 이르렀다. 여름비가 내린 뒤라 땅은 질고, 진군이 어렵게 되자 왜군은 선발대를 보내 마른땅을 고라 나무를 꽂아 표시를 했다. 이를 안 그는 밤이 되자 나무를 빼 진흙에다 옮겨 놓고 이튿날 적을 기다렸다.
왜군은 곽재우(郭再祐)의 계략에 말려들었고, 이어 패주하게 된다. 야스꾸니(安國寺 惠瓊)의 2만군을 물리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전략과 용병술이 세상에 알려지자 인근 고을 백성들은 너도나도 그의 깃발 아래 모여들기 시작했고, 곽재우(郭再祐)는 왜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
곽재우(郭再祐)는 유명한 진주대첩(晋州大捷)에서도 수훈을 세운다. 왜군은 전세가 소강상태에 빠지자 진주성(晋州城)공격으로 전세를 타개하려 했다. 진주성은 호남의 곡창지대로 들어가는 전략적 요충지, 진주(晋州)목사 김시민(金時敏)은 전황이 위급하자 곽재우(郭再祐)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홍의(紅衣)장군이 출진했다. 심대승(沈大承)은 진주(晋州)교외의 비황산(飛凰山)에 올라 그의 전략대로 어지럽게 나팔을 불고 또 밤에는 막대기 하나에 횃불 다섯 개씩을 달아 마구 흔들어 적을 교란했다. 곽재우(郭再祐)군의 기습작전과 성중수비군의 협공으로 왜군은 큰 희생을 내고 퇴각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임진란3첩의 하나인 진주(晋州)대첩이다.
광해군(光海君)에게 많은 직언을 하다가 끝내 유배까지 당했던 장군을 가리켜 후세 사가(史家)들은 "난전(亂前)에는 선생이었고, 난중(亂中)엔 위풍당당한 장군이었으며, 만년에는 풍월을 즐긴 도인(道人)이었다"고 평한다.
당시 조정은 곽재우(郭再祐)의 충정을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백면서생으로 민족을 구하려 했던 그가 조정의 명령 없이 의병을 일으키자 경상(慶尙)순찰사 김수는 왕에 대한 반역이라 상소했다. 이에 격분한 곽재우(郭再祐)는 김수에 대한 팔조수죄(八條數罪)란 격문을 만들어 의병의 동요를 막았다. 그러나 끝내 홍여순(洪汝淳)의 모함에 걸려 영암(靈岩)에 유배되는 어처구니없는 풍파를 겪기도 했다.
3년의 유배생활을 끝낸 그는 얼마 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갔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 하자 이를 간하는 상소를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사영엽록와운산(辭榮葉祿臥雲山)
사사망우신자한(謝事忘憂身自閑),
막언고금무선자(莫言古今無仙子)
지재오심일오문(只在吾心一悟門)
(영화를 사양하고 녹을 버려 운산에 누웠으니/근심을 잊어 몸이 절로 한가하네/옛부터 신선이 없다고는 하지만/오직 마음으로 깨친 순간 신선이 되는구료)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 나라가 어려울 때 백성과 함께 의연히 나서서 나라를 구한 충정, 벼슬에 연연치 않았던 청렴한 선비정신이 그의 이 시에 잘 묘사되어 있다.
광해군(光海君)7년(1617) 4월10일 6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난국에 처했을 떄 그가 보여준 <구국의 의지>는 현풍(玄風)후손의 정신속에, 한 민족의 역사 속에 저류가 되어 흐르고 있다.
문집'망우당집(忘憂堂集)'이 전한다.
이밖에도 중종(中宗)때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사간(司諫)을 지내고 시국이 어려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운문산(雲門山)에 칩거했다가 명종(明宗)초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에 연루되어 숨진 경제 곽순(警齊 郭珣), 임진 왜란 때 중봉 조헌(重峰 朝憲)의 휘하 막료로 청주(淸州)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금산(錦山)전투에서 전사한 곽자방(郭自防), 임진.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훈을 세운 망우당(忘憂堂)의 4촌 괴헌 곽재겸(槐軒 郭再謙)등이 돋보이는 현풍(玄風) 인물들이다.
곽문(郭門)의 또다른 인물 중 면우 곽종석(1846-1927)이 있다. 구한말 영남(舊韓末 嶺南)의 대표적 유학자로, 호남(湖南)의 간재 전우(艮齋 田愚)와 쌍벽을 이룬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 폐기와 매국척신들의 처형을 주장하는 소(疏)를 올렸다. 1919년 2월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장서(長書)를 지어 제자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을 시켜 상해(上海)에서 영문으로 번역, 가져가게 했다.
소위 '파리장서(巴里長書)'로 불리는 이 성명에는 1백 37명의 유림이 서명했으며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전문 2천 6백 74자의 순한문으로 된 것이다. 결국 이 일이 탄로가 나 옥고를 치렀고 1963년에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5. 영산신씨

 

시조 신 경(辛 鏡)은 고려 인종조에 문과에 올라 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평장사(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정의(貞懿)다.
널리 알려진 대로 영산 영월 신씨(靈山 寧越 辛氏)의 시조 신 경(辛 鏡)의 선계(先系)는 중국 농산(隴山)사람으로 당(唐)나라 천보(天寶)연간에 엄시랑(嚴侍郞)과 함께 신라에 왔다는 것이다. ‘기미보(己未譜)’ 영워득성록(寧越得姓錄)편에도 이렇게 적혀 있는데, 특히 태사공 신도비명(太師公神道碑銘)에 신씨(辛氏)는 본래 농산(隴山)의 영주(寧州)사람인데 영주(寧州)는 농주(隴州)의 속현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신씨성관고(辛氏姓貫考)’편에는 영주(寧州)는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 영변(寧邊)의 옛 이름이라는 고증(考證)을 하여 귀화(歸化)성씨가 아니라고 변증(辨證)하였다.
아뭏든 신씨(辛氏)의 선대(先代)는 신라말까지 올라가지만 그 뒤의 계서(系序)가 분명치 않아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에 오른 정의공 신 경(貞懿公 辛 鏡)을 시조로 삼아 기세(起世)하고 있다.
또한 신씨(辛氏)가 영산(靈山)과 영월(寧越)로 분관(分貫)돼 온 것은 9세손 신 장(辛 藏) 신 혁(辛 革) 신 온(辛 蘊) 신 한(辛 漢) 대부터라 한다.
또 4세손 신몽삼(辛夢森)의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거기에 본관(本貫)이 영주(寧州)라 적혀있어 본래는 영주 신씨(寧州 辛氏)임이 드러났다. 
시조는 신 경(辛 鏡).
고려 중엽 중국(中國)의 북송(北宋)대 8성(姓)(위(魏), 모씨, 원씨, 노씨, 신씨, 장(張)ㆍ엄(嚴)ㆍ곽(郭)ㆍ경(慶)ㆍ이(李)ㆍ신(辛)ㆍ지(池))이 의형제를 맺고 이름을 모두 경(鏡)으로 같이 해 우리나라에 건너왔다는 이른바 8학사(學士) 8경공(鏡公)의 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신경(辛鏡)은 고려 11대 인종 16년에 벼슬에 나서 금자광록대부문하시중평장사(金紫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의 관직에 올랐는데 시호는 정의(貞懿)이다.
신 경(辛 鏡)이 중국(中國)에서 건너올 당시 평양(平壤) 대동강(大同江)상에 공작대(共作臺)를 팔경대(八鏡臺)라 하고 그 곳에서 지었다는 시가 전해진다.
“물이 있고 돌이 없으면 물은 의미 없는 돌과 같고 돌이 있고 물이 없으면 그 돌의 모양이 기이하지 않은 법인데 이 곳은 물과 돌이 함께 있어 하늘이 조화를 이루어 내 시를 짓노라.”(有溪無石溪還俗, 有石無溪石不奇, 此地有溪兼有石, 天爲造化我爲詩).
득성(得姓)에 관한 내용이 실린 ‘신씨득성록(辛氏得姓錄)’에는 통일 신라조의 경덕왕시대에(682~704년)에 당현종(唐玄宗)이 파락사(波樂使)로 중국(中國) 감숙성(甘肅省) 사람인 신시랑(辛侍郞)과 엄시랑(嚴侍郞)을 신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신시랑(辛侍郞)과 시조 신 경(辛鏡)의 관계는 신시랑(辛侍郞)은 신 경(辛鏡)보다 400년 전 사람이라 한다.
신경(辛鏡)은 자신이 살던 중국(中國)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천축산(天竺山)과 산세가 비슷한 창녕(昌寧) 영취산(靈鷲山)에 이르러 터를 잡았다.
6대조 신백련(辛百鍊)이 원령산현(元靈山縣) 장마리(丈麻里)에 있는 마고지(麻姑池)변에서 못에 미친 달을 바라보며 읊은 시 “誰將百鍊照心鏡, 掛在山第一峰, 影八虛齊霜夜白, 山光水色有無中.”이 이를 뒷받침 해 준다.
영산(靈山)ㆍ영월신씨(寧越辛氏)는 고려말 홍건적의 난 때 신부(辛富)ㆍ신 순(辛珣)의 충신을 배출했다.
또한 문신으로는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인 신(辛)천이 빼어났다. 신(辛)천은 안 향(安 珦)의 문인으로 사상최초의 서원(書院)을 세웠으며 동국공맹(東國孔孟)의 학자 17인 중의 하나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낸 신식(辛息),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신을화(辛乙和)등도 돋보이는 이름.
문무(文武)에 출중한 인재를 수없이 배출한 영ㆍ영신(靈ㆍ寧辛)씨는 여말(麗末) 풍운의 정치승려 신돈(辛旽)을 낳는다. 그는 공민왕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정치, 종교의 대권을 장악했다. 공민왕 15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 자신이 판사(判事)에 취임해 문란한 토지제도를 개혁, 농민의 권익옹호와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했다. 그러나 끝내 권력남용으로 인망을 잃고 역사에 부정적 인물로 기록됐다.
조선조에 들어 신(辛)씨 인물로는 태종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신균(辛均)과 정용호군(精勇護軍)으로 25차레나 왜구(倭寇)와 싸운 문장 신유정(辛有定)이 이름을 드러냈다. 신유정(辛有定)은 태종 3년 강원도(江原道)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의주도병마사(義州都兵馬使), 평안도도안무사(平安道都安撫使)를 지냈다.
학문을 좋아했던 세종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신석조(辛碩祖)가 집현전(集賢殿)학사에 등용됐다. 그는 학문과 문장에 능해 ‘세종실록(世宗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의방유취(醫方類聚)’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같은 시대의 신인손(辛引孫)은 사관(史官)으로 여러 대군(大君)들과 서사(書史)를 강론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형조판서(刑曹判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신영희(辛永禧)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文人)으로 과거(科擧)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남효온(南孝溫) 홍유손(洪裕孫)등과 죽림(竹林)의 벗이 되어 학문에 정진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이 밖에도 조선조에 문신으로 활약한 (영ㆍ영신씨)(靈ㆍ寧辛氏)는 명종때의 신륜(辛崙) 신응시(辛應時) 선조때의 신경진(辛慶晋) 광해군때의 신광업(辛光業) 신경연(辛景衍)등이 있고 신계영(辛啓榮)은 외교관으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 인조 2년 임란(壬亂)때 포로로 일본(日本)에 붙잡혀간 1백46명의 동포를 데려오기도 했다. 그는 인조 17년 볼모로 잡혀갔던 세자를 맞으러 심양(瀋陽)에 갔으며 효종 3년에는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국(淸國)에 다녀오기도 했다.
(영ㆍ영신씨)(靈ㆍ寧辛氏)의 애국 충절은 일제(日帝)하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돼 신일용(辛日鎔)ㆍ신태악(辛泰嶽)ㆍ신공제(辛公濟) 신영락(辛泳洛) 등의 애국지사를 배출해 냈다. 신태악(辛泰嶽)은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신공제(辛公濟)는 3.1운동 후 일경(日警)에 쫓겨 중국(中國)으로 망명했고 신영락(辛泳洛)은 3.1운동 당시 경남 창녕(昌寧)에서 결사대를 조직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6, 함평모씨

 

모씨(牟氏)는 본래 중국(中國) 평양(平陽:지금의 절강성 구해도 임분현)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하며, 고대(古代) 축융(祝融)의 후예(後裔)가 고을 이름을 성(性)으 로 삼은 것이 시원(始源)을 이룬 것으로 전한다.
우리나라 모씨(牟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관서지방의 홍농(弘農) 출신인 모 경(牟慶)이 고려(高麗)때 귀화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부터이다. 함평모씨세보(咸平牟氏世譜)에 의하면 모 경(牟 慶)은 북송(北宋)의 휘종조(徽宗朝:북송의 8대 왕, 재위기간: 1101∼1125)에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호북 경서(湖北京西) 선무사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북송의 마지막 왕조(王朝)인 흠종(欽宗)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올랐다. 고려에서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이 반역을 꾀하고 왕비(王妃)를 시켜 수차왕을 독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모 경이 사신(使臣)으로 왔다가 이 모반 음모를 저지하고 왕권(王權)을 바로 세우는 데 공(功)을 세워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서훈되었다. 그후 귀국하여 홍농후(弘農侯)에 봉해졌으나 금(金) 나라가 송경(宋京)을 침입하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납치해 가자 고려에 도움을 청하러 나왔다가 송나라가 패망하고 귀국길이 막히자 고려에 귀화하여 그대로 머무르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功)을 세운 모 경을 후대하여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내리고 모평군(牟平君)에 봉하여 우리나라 모씨(牟氏)의 터를 이루게 하였다. 모씨의 본관(本貫)은 함평(咸平) 외에도 진주(晋州), 인천(仁川), 영평(永 平), 무안(務安), 해평(海平), 청도(淸道), 창성(昌城) 등 12본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모두가 함평 모씨(咸平牟氏)의 분파(分 派)이며, 현존(現存)하는 함평 모씨와 진주 모씨(晋州牟氏)는 계보(系譜)를 같이하고 있다. 함평 모씨의 인맥(人脈)을 살펴보 면 시조 경(慶)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광정(光炡)이 고려 의종(毅宗)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고, 광정의 맏아들 정린 (挺麟)은 명종조(明宗朝)에 전서(典書)를 지냈다. 한편 부자(父子) 평장사(平章事)로 이름을 떨쳤던 여장(汝長)은 정린의 증 손(曾孫)이며, 그의 아들 호(皓)가 1306년(충렬왕 3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관(敎官)을 지내고 삼군도총제 부원수(三軍都 摠制副元帥)가 되어 원(元)나라 침공 때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한편 함평 모씨의 중흥 인물인 순(恂)은 1417년(태종1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사간(左司諫)을 거쳐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재임동안 보릿고개에도 굶어죽는 사람이 없고 문을 열어 놓아도 도둑이 들지 않았다고 하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머니 초계 정씨(草溪鄭氏)가 종기로 고생하자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 낫게 하였고, 늙어서 대변을 누자 맛을 보고 환후를 알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효행(孝行)에 대해 전해지는 전설적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 세택(世澤)이 병으로 눕자 그는 주야 (晝夜)를 가리지 않고 병간호를 극진히 했으며 약을 구하러 가던중 큰 비가 쏟아져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없자 하늘을 향해 통곡하니 비가 그쳤고, 상(喪)을 당한 후 강물이 불어 건널 수 없게 되자 하늘을 향해 외치니 강물이 흐름을 멈췄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절강(截江)이라는 아호(雅號)를 얻게 되었으며, 그이 효행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경남 진양군 사봉면(慶南晋陽 郡寺奉面) 등건 마을 입구에다 정려각(旌閭閣)을 세워 그의 효행을 사표로 삼게 했다.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 하고 왕위(王位)을 천탈한 후 <절강일명 명어해동 종산일발 수양동청(截江一名 明於海東 種山一髮首陽同靑:절강이라는 한 이름이 해동을 밝히고 종산의 한 머리칼은 수양과 함께 푸르리)>이라는 시(詩)을 지어보내 은근히 자신을 따르도록 회유했으나, 그는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아 진주(晋州)의 삼가현(三嘉縣)에 유배되었다. 이때 순(恂)은 아들 3형제 중 수천(秀阡) 을 데리고 귀양을 가서 진주(晋州)로 칭관(稱貫)하는 일파(一派)를 이루었으나, 함평(咸平)과 서로 큰집임을 주장하여 지금 껏 합보(合譜)를 하지 못해 문중단합에 큰 과제가 되고 있다. 그밖에 모씨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 여 왜병(倭兵)과 대적했던 정(禎), 극심(克諶), 수명(受明), 윤성(允誠)이 의열(義烈)의 전통(傳統)을 이으며, 정(禎)의 증손 유 추(有秋)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양덕 현감(陽德縣監)을 지냈고,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한 일성(一成)은 숙종(肅宗)때 흥양 현감(興陽縣監)을 지낸 세무(世茂)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7. 남양홍씨

 

홍씨의 연원(淵源)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의 후손인 공공궁기(共工窮奇)가 있었는데, 그는 당시의 관명(官名)이었던 공공(共工)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뒷날 중국 돈황(敦煌)(감숙성의 서북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의 공공(共工)씨의 후손이 물의 덕으로 원수를 피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공자(共字)에 삼수변(水字)을 붙여 처음으로 홍씨(洪氏)의 성(姓)이 생겼다고 하며, 우리나라 홍씨(洪氏)의 역사는 당(唐)나라 태종(太宗)때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가 고구려 영류왕(營留王)의 요청에 의해 고구려에 들어와 당(唐) 문화(文化) 보급에 공헌하고 삼한 통합(三韓統合)에 따라 신라(新羅)에서 태자태사(太子太師)가 되어 당성백(唐城伯)에 봉해진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홍씨(洪氏)의 본관(本貫)은 문헌(文獻)에 111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홍씨(洪氏)는 남양(南陽).남양토홍(南陽土洪).풍산(豊山).홍주(洪州)등 4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홍씨(洪氏) 중에서도 대본(大本)으로 알려진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홍은열(洪殷悅)을 시조(始祖)로 하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와 전혀 근원(根源)을 달리하는 고려 고종(高宗)때 금오위 별장(金吾衛別將)을 지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始祖)로 하는 「남양 홍씨 토홍계(南陽洪氏 土洪系)」가있는데, 이 두 계통은 역사적으로도 구분되어 왔다.
전체 홍씨 인구중 남양 홍씨(南陽洪氏)가 8할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토홍 제외(土洪 除外)」
그외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고려 고종(高宗)때 국학직학(國學直學)을 역임한 홍지경(洪之慶)을 시조(始祖)로 하며, 역시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익찬공신(翊贊功臣)으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진 홍 규(洪規)는 홍주 홍씨(洪州洪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이러한 홍씨(洪氏)는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시켜 「십대벌열(十代伐閱)」로 손꼽혀 왔으며, 근대에 와서도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를 비롯한 실학자(實學者)와 각계(各界)의 선각자를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어가고 있다.

남양 홍씨(南陽 洪氏)

선시조(先始祖) : 홍천하(洪天河) 당학사(唐學士)로 신라덕산촌주(新羅德山村主). 당성백(唐城伯)·태자태사(太子太師)·당성후(唐城侯).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광익경제공신(匡翊經濟功臣)·삼중대광(三重大匡)·태사(太師)로 전하는 은열(殷悅)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그의 선계(先系)는 고구려(高句麗) 영류왕(營留王 : 27대 왕, 재위기간:618∼642)이 덕예 문학의 선비를 뽑아 보내 달라는 사신(使臣)을 보내자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여덟 명의 학사(學士)를 문화사절(文化使節)로 고구려에 파견할 때 그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온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으로 전한다.
천하(天河)는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했으며, 고구려가 망하고 삼한 통합(三韓統合)에 따라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유학(儒學) 발전에 공(功)을 세워 문무왕(文武王) 때 당성(唐城 : 남양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지고, 신무왕(神武王)이 태자 태사(太子太師)로 추대했으며 효소왕(孝昭王)은 당성후(唐城候)를 삼았다고 한다.
그후 당성(唐城)의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후손들은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고 은열(殷悅)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특히 조선조(朝鮮朝)에서 「십대명벌(十代名閥)」로 손꼽혔다.
남양홍은 홍학사(이름 天河)를 선시조로 모셔 두고 그의 10대손(족보의 기록)인 고려(高麗) 개국(開國) 공신 홍은열(洪殷悅)[초명 유(儒)]을 시조로 그로부터 세계를 헤아려 온다. 그의 손자대에서 1파 [재신공파(宰臣公派)], 증손대에서 다시 1파[예사공파(禮史公派)], 6세손대 때 1파[중랑장파(中郞將派)]가 갈리고 13세손대 에서 13파가 갈려 모두 16파조로 나뉘는데 그중에도 맏이인 남양군(南陽君)[홍주(洪澍)]파와 문정공(文正公)[홍언박(洪彦博)]파가 남양홍 전체의 70%를 차지할 만큼 수도 많고 융성을 누렸다.
그밖에 판중추(判中樞)[홍언수(洪彦修)파]·익산군(益山君)[홍운수(洪云遂)파]·예사공(禮史公)[홍복파] 중랑공(中郞公)[홍후(洪厚)파]가 버금가는 세력을 차지, 이들 6파가 남양홍 위세의 주력인 셈. 특히 남양군 홍주의 7대손인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선조조 한성우윤(宣祖朝 漢城右尹)]의 자손에서만 상신(相臣) 5명과 문형(文衡)[大提學] 2명, 왕비(王妃) 1명, 20여 명의 판서(判書)급을 배출하는 화려한 가통을 이루었다. 석벽은 천민(天民)[선조조 도승지(宣祖朝 都承旨)]· 일민(逸民)[현감(縣監)]· 성민(聖民)[대제학 참찬(大提學 參贊)]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성민의 후손에서 4명의 정승이 나왔다.

8, 교하노씨

 

노씨는 중국 범양 출신으로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낸 노 수(盧 穗)할아버님이 본래 이름은 노경이며 877년(신라 헌강왕 3년) 황소의 난을 피하여 아들 아홉 형제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동래(東來)하여 처음에 평안도 정주 능리촌에 정착 하였다가 용강쌍제촌으로 옮겨 뿌리를 내림으로 우리나라 노씨의 연원을 이루었다. 그후 아들 아홉형제가 고려조에서 벼슬을 지내며 나라에 공을 세워 각각 봉군이 되었는데, 해는 광주백, 오는 교하백 지는 풍천백, 구는 장연백, 만은 안동백, 곤은 안강백, 증은 연일백, 판은 평양백, 원은 곡산백으로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봉군받은 고을 이름을 각각 관향으로 삼았고, 교하백 오의 후손에서 신창, 광주백 해의 후손에서 해주, 경주는 안강백 곤의 후손에서, 만경은 평양백 판의 후손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 용성. 영광. 동성. 선산. 함평. 청도등을 포함하여 59본까지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의 분파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렇게 뿌리를 내린 노씨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꾸준히 번성을 누려 오면서 비교적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명문의 대열에 올랐다.

근대에 와서도 각계에 훌륭한 인재를 배출시켜 국가 발전에 공헌하고 있으며, 전남 광주시에서 10여리 떨어지 오치동 부근의 삼각산 기슭에 도시조 수와 아홉 형제들의 비석을 정렬한 삼릉단을 설치하여 서조의 업적을 기리고 전국노씨중앙종친회 설립하여 가문의 결속을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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