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현풍곽씨2023-03-17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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氏族의 연원

시조 곽경(郭鏡)의 처음 이름은 약노(若魯), 자(字)는 노이(魯以), 호(號)는 암곡(巖谷) 또는 초수이며, 익호(謚號)는 정각(正殼)다
그는 본래 중국 송(宋)나라 사람으로 문연각(文淵閣) 한학사(翰學士)가 되었고 고려 인종 11년 7명의 학사(學士)들과 우리나라에 와, 인종 16년 등과(登科)하여 여려 관력(官歷)을 거친 뒤 편장사문하시중(平章事門下侍中)을 지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포산군(苞山君)에 봉해졌다.
그런데 시조 곽경(郭鏡)에 관한 기록중 구보(舊譜)에는 생존연대 등의 기록이 빠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30년 시조의 묘(墓)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되었고 거기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앞서와 같고, 그가 중국 관서(關西)의 혼농(弘農)사람이라는 것과 고려 명종 9년에 세상을 떠난 사실도 밝혀졌다.
현풍곽씨(玄風郭氏) 중에는 한때 본관(本貫)을 선산(善山) 해미(海美) 강릉(江陵) 등 별관(別貫)을 써온 때가 있었으나 그들의 족보(族譜) 첫머리에 의례 현풍곽씨(玄風郭氏)(시조 郭鏡)의 후예라 써 왔기에 1976년 ‘병진대동보(丙辰大同譜)’때 대종회(大宗會) 의결(議決)로 본관을 현풍(玄風)으로 통일하였다.
현풍곽씨(玄風郭氏) 후손들은 시조 포산군(苞山君)의 봉호(封號)를 소중히 여겨 족보(族譜)의 표제(表題)나 비명(碑銘)의 제면(題面)등에는 포산곽씨(苞山郭氏)라 많이들 쓴다.

본관지 연혁
현풍(玄風)은 본래 신라의 추량화현(推良火縣)인데 경덕왕이 현효(玄驍)로 고쳐 화왕군(火王君)의 영현(令縣)으로 만들었고 고려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때 밀성군(密城郡)에 소속되었고 공양왕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1895년 창녕(昌寧)에 소속되었다가 복구, 군(郡)이 되었고 1914년에는 달성군(達成郡)에 병합되었다.
주요 성씨로는 곽(郭)ㆍ윤(尹)ㆍ문(文)ㆍ임(林)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전리공파(典理公派) 아래 7개파, 제학공파(提學公派)외 7개파, 밀직공파(密直公派)ㆍ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ㆍ도사공파(都事公派)ㆍ부사공파(府使公派)ㆍ우장군공파(右將君公派)외 3개파ㆍ노제공파(魯제公派)외 2개파ㆍ두정공파ㆍ서령공파(署令公派)ㆍ전서공파(典書公派)ㆍ판관공파(判官公派)ㆍ상서공파(尙書公派)ㆍ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외 5개파,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ㆍ소감공파(小監公派)ㆍ교리공파(校理公派)ㆍ현령공파(縣令公派)외 3개파, 목사공파(牧使公派)ㆍ경제공파(警제公派)ㆍ둔제공파(遯제公派)ㆍ교리공파(校理公派)ㆍ구거당공파(九居堂公派)외 10개파ㆍ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외 14개파ㆍ동정공파(同正公派)ㆍ참봉공파(參奉公派)등 78파(派)가 있다.
주요 세거지
시조 곽경(郭鏡) 이래 고려말까지 11세 전후에 걸쳐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경기 일원에 산거(散居) 하였다. 조선초부터 종파(宗派)인 5세 곽기정(郭基正)의 후손들은 중부(中部)ㆍ호남(湖南)ㆍ서북(西北) 지역으로 세거지(世居地)를 개척하였고 차파(次派)인 5세 곽한정(郭漢正)의 후손들은 관향지(貫鄕地)인 현풍(玄風)을 중심으로 영남 일대에 세거지(世居地)를 확대함으로써 현풍곽씨(玄風郭氏)를 크게 기호계(畿湖系)와 영남계(嶺南系)로 나누게 되었다.
‘병진보(丙辰譜)’에 나타난 현풍곽씨(玄風郭氏)의 구성을 보면 기호계(畿湖系)45파(派)ㆍ영남계(嶺南系) 33파(派)로 되어있다. 그들의 세거지(世居地)를 살펴보자.
기호계(畿湖系) 5세 곽기정(郭基正)의 후손중 12세 곽항(郭恒)의 자손들은 곽항(郭恒)의 아들 대에 봉화(奉化)ㆍ괴산(槐山)ㆍ협천(陜川)에 정착하여 살다가 15세 곽의산(郭宜山)이 성종조 갑년(甲年)에 황해도 봉산(鳳山)으로, 18세 곽금정(郭今貞)이 충남 아산(牙山)의 온양(溫陽)으로, 17세 곽점산(郭點山)이 경남 남해(南海)로, 14세 곽성문(郭成文)이 세종 25년에 평남 강서(江西)의 함종(咸從)으로 옮겨간 뒤에 이들 지역에도 자손들이 살게 되었다.
12세 곽종(郭悰)의 자손들은 대체로 곽종(郭悰)의 손자인 곽겸(郭謙)의 대를 전후하여 용인(龍仁)의 박곡(朴谷)ㆍ음성(陰城)ㆍ청양(靑陽)ㆍ서산(瑞山) 등지에 나뉘어 장착하였고, 24세 곽성기(郭成畿) 이래로 함양(咸陽)에, 21세 곽희남(郭希楠) 이래로 평창(平昌)에, 19세 곽천애(郭天愛) 이래로 당진(唐津)에 일부가 자리잡았던 것 같다.
그밖에 원주(原州)ㆍ수원(水原)ㆍ김제(金提)ㆍ천안(天安)ㆍ횡성(橫城)등지에도 많이 살았던 것 같다
12세 곽돈(郭惇)의 자손들은 15세 곽원부(郭元富) 이래로 황해도 수안(遂安)과 전북 김제(金提)에, 곽성(郭惺)의 자손들은 곽성(郭惺)의 대 이래로 청주(淸州)를 비롯하여 천원군(淸原郡) 일대에, 곽□의 자손들은 당진(唐津)ㆍ대구(大邱) 등지에 나뉘어 살았으며, 그중 일부는 13세 곽충이 황해도 서흥(瑞興)으로 옮겨간 뒤 그곳에 정착했다고 믿어진다.
그리고 11세 곽유희(郭游義)의 자손들은 일부가 16세 곽맹원(郭孟元)ㆍ곽수향(郭秀享) 이래로 보은(報恩)과 경기도 이천(利川)에, 15세 곽치생(郭致生) 이래로 황해도 장연(長淵)에, 13세 곽기(郭祁)이래로 정읍(井邑)에, 18세 곽우이래로 시흥(始興)에 옮겨가 세거(世居)했으며, 일부는 14세의 대에 곽득향(郭得享)이 연산조에 임실(任實)의 주천(酒泉)에 퇴거한 것을 비롯하여 파주(坡州)ㆍ령암(靈岩)ㆍ무안(務安) 등지에 터를 잡았던 것 같다.
20세 곽충양(郭忠陽)의 대 이후에 나주(羅州)ㆍ영광(靈光)ㆍ완주(完州)ㆍ고창(高敞)ㆍ영양(英陽)ㆍ고흥(高興) 등지와 함흥(咸興)ㆍ홍원(洪原)ㆍ길주(吉州)ㆍ괴산(槐山)ㆍ울진(蔚珍)의 평해(平海)ㆍ부산(釜山)등지로 산거(散去)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11세 곽유예(郭游禮)의 자손들은 12세 곽사(郭師)가 단종 손위(遜位) 때에 벼슬을 버리고 아들 곽득창(郭得昌)과 함께 금산(錦山)의 천황동(天皇洞)에 은거한 뒤에 충남 금산(錦山) 일대를 세거의 터로 삼았고, 일부는 13세 곽득하(郭得賀) 이래로 상주(尙州)ㆍ청주(淸州)ㆍ보은(報恩) 등지에 가 정착 했다고 믿어진다.
또한 11세 곽승산(郭承山)의 후손들은 경북 인동(仁同)에 정착하고, 12세 곽해(郭海)의 자손들은 곽해(郭海)가 려말(麗末)에 광주(光州) 산막동(山幕洞)에 은거한 이래로 그 후계(後系)가 지금의 광산(光山)에 자리잡은 것을 비롯하여, 13세 곽사녕(郭思寧) 이래로 전남 해남(海南)에, 15세 곽자정(郭滋貞) 이래로 진도(珍島)에, 17세 곽수종(郭守宗) 이래로 고흥(高興)의 흥양(興陽)에 나뉘어 살게 되었다.
그밖에 장성(長城)ㆍ함평(咸平)ㆍ남해(南海) 등지에도 일부가 살았던 것 같다.
7세(世) 곽일신계(郭日申系)인 11세 곽려(郭麗)의 자손들은 대체로 14세 곽호(郭琥)의 대 이래로 지금의 평남 평원(平原)과 강원도 홍천(洪川)ㆍ강화(江華)ㆍ강릉(江陵)ㆍ정선(旌善) 등지에 산거(散居) 하였고, 7세 곽우현계(郭佑賢系)로 15세 곽윤성(郭允誠)의 자손들은 곽윤성(郭允誠)의 아들 곽수원(郭綏元)이 조선조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충남 옥천(沃川)에 많이 살았으며, 그밖에 대전(大田)ㆍ영동(永同)ㆍ대덕(大德)의 회덕등 충남 일대에 세거하였다.
한편 영남계(嶺南系) 5세 곽한정(郭漢正)의 자손들 중에서 10세 곽윤명(郭允明)의 후계는 선대(先代)부터 세거해온 경북 달성(達成)의 현풍(玄風)과 창원(昌原)ㆍ고령(高靈)ㆍ칠곡(漆谷)등지에 많이 살았고, 곽윤명(郭允明)의 동생인 곽윤광(郭允光)의 후계(後系)는, 14세 곽수녕(郭遂寧)ㆍ곽우(郭宇)의 대를 전후하여 경북 영천(永川)ㆍ전북 완주(完州)에 정착하였고 그 중 일부가 대구(大邱)ㆍ청도(淸道) 등지로 옮겨갔던 것 같다.
14세 곽승양(郭承陽)의 자손들은 현풍(玄風)ㆍ고령(高靈)ㆍ창원(昌原)에 주로 세거하고 일부가 곽승양(郭承陽)의 증손(曾孫) 곽후인(郭厚仁)의 대부터 울진(蔚珍)에 자리 잡은 것을 비롯하여 19세 곽홍목(郭鴻睦) 이래로 울산(蔚山)에, 17세 곽□(郭□)이래로 고려(高麗에 가 살았으며, 20세 곽몽해(郭夢海)의 대부터 5대에 걸쳐 협천(陜川)ㆍ성주(星州)ㆍ완도(莞島)ㆍ밀양(密陽)ㆍ함안(咸安)의 칠원(漆原)ㆍ경산(慶山)의 자인(玆仁) 등지에 터를 굳히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곽승양(郭承陽)의 동생 곽승화(郭承華)의 자손들은 현풍(玄風)ㆍ의녕(宜寧)ㆍ창녕(昌寧)에 주로 세거하고 곽승화(郭承華)의 대 이래로 창녕(昌寧)에 세거하였으며, 19세 곽순(郭淳)ㆍ곽동(郭潼)의 대를 전후하여 일부가 대구(大邱)ㆍ의녕(宜寧)ㆍ선산(善山)ㆍ협천(陜川)의 삼가(三嘉)에, 다시 25세 곽철의 대에 이르러 사천(사川)ㆍ진천(鎭川)ㆍ상주(尙州)ㆍ임실(任實)ㆍ거제(巨濟)ㆍ진주(晋州)ㆍ고성(固城)ㆍ김해(金海)ㆍ영천(永川) 등지에 산거(散居)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4세 곽승문(郭承文)의 자손들은 대구(大邱)ㆍ청도(淸道)ㆍ창녕(昌寧)에 많이 살았다.
1930년경 현풍곽씨(玄風郭氏)는 충남 금산군 남일면(錦山郡 南一面), 전남 진도군 군내면(珍島郡 郡內面), 경북 달성군 현풍면(達城郡 玄風面)ㆍ유가면(瑜伽面)ㆍ구지면(求智面), 경남 남해군 서면(南海郡 西面), 황해도 봉산군 초와면(鳳山郡 楚臥面), 평남 용강군 다미면(龍岡郡 多美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 대표적 집성촌의 하나로 경북 달성군 현풍면 대동리 솔예(達成郡 玄風面 大同里 率禮)마을을 꼽는다.
솔예(率禮)마을에만 1백 20여가구가 모여 살고 있으며 이웃의 현풍(玄風)ㆍ논공(論工)ㆍ고령(高靈)ㆍ유가(瑜伽)까지 합치면 1천여 가구에 달하는 현풍(포산)곽씨(玄風(苞山)郭氏) 마을이다.
6ㆍ25때 동네가 몽땅 불에 타 뿔뿔이 흩어 졋던 자손들이 다시 모여 곽씨 동족 부락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현풍곽씨(玄風郭氏)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친다. 조선조 때 정려(旌閭)가 12개나 되어, 12정려(旌閭)는 <현곽(玄郭))>의 대명사로 통한다. 정려(旌閭)란 충신ㆍ효자ㆍ열녀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그들이 산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이다.
삼강(三綱)이 유교사회의 기본적 가치관이었던 옛날에는 정려(旌閭)가 하나만 나도 그 가문과 고을의 자랑거리였다. 하물며 12정려(旌閭)라면 그 가문의 영광은 당시 조선 천지에 뻗칠 만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곽문(郭門)의 정려(旌閭)는 전국 각지에 여기저기 서 있어 가문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
1117년 출생하여 1179년 10월 15일에 사망한 곽경(郭鏡)의 묘지는 문헌상(文獻上) 경기도 파주군 적성(坡州郡 積城)에 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실전(失傳)되었고, 문헌(文獻)에 의거하여 설치했던 제전(祭壇)도 1980년 군사지역으로 편입됨에 따라 철수하고 용인군 외서면 박곡리(龍仁郡 外西面 朴谷里)에 대덕사(大德祠)(시조사당(始祖祠堂))를 건립하여 향사(享祀)를 받들고 있다.
그의 후손중 안방(安邦)(世祖때 益山郡守)이 첫째 청백리로 꼽힌다.
충(忠)ㆍ효(孝)ㆍ열(烈)의 뿌리는 그로부터 내리기 시작한다.
그의 현손에 <주(走)>자 항렬의 8형제중 越ㆍ?ㆍx 3 형제가 특히 빼어나고 이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름으로써 당시 영남(嶺南) 일대에서는 <현곽팔주(玄郭八走)>로 이름을 떨쳤다.
3형제 중 곽준 일가는 <일문삼강(一門三綱)>의 집으로 유명하다. 그는 임진왜란때 안음(安陰)현감으로 호남(湖南)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고수하다 장렬히 전사했다. 이때 두 아들 이상(履常)ㆍ이후(履厚)는 ‘아버지가 임금을 위해 죽었는데 어찌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죽지 않으랴’(父死於君 子不可死於父乎)하며 뒤따라 전사했다.
이어 딸과 며느리 신(愼)씨도 남편들이 전사하자 ‘아버지가 죽고서 내가 살아있음은 남편이 있기 때문이거늘 남편까지 전사하니 어찌 내가 살리오’(父死而生 爲夫在故也 今夫被害 何忍生)하고 스스로 목매 죽으니 곧 충(忠)에 부사(父死)하고 효(孝)에 자사(子死)하고 열(烈)에 부사(婦死)함으로써 일문(一門)에 삼강(三綱)이 한꺼번에 나온 것이다.
곽준의 형 월(越)은 특히 활을 잘 쏘았으니 그의 아들이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유명한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충익공(忠翼公) 1552~1617년)다.
“우리 역사상 미증유의 국난인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갈 때 이 나라를 구한 사람은 바다의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육지의 의병들이었고 의병 중에서도 제일 먼저 일어나 가장 큰공을 세운 이는 망우당(忘憂堂) 선생이었다.”고 원로 사학자 이선근(李瑄根) 박사는 말한적이 있다.
홍의(紅衣) 장군의 탄생이자 의병의 발상지는 경남 의녕(慶南 宜寧)이다. 제철을 맞아 연초록으로 뒤덮힌 남산(南山) 밑에는 72년 의녕(宜寧) 군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국내 최대의 의병탑(높이 72미터, 가로 5.5미터)이 장엄하게 서있다.
‘의조실록(宜祖實錄)‘에 따르면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왜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첫발을 디딘지 열흘이 못되는 1592년 4월 22일이었다. 장군은 생가인 의녕군 유곡면 세우리(宜寧郡 柳谷面 世于里)마을 앞 정자나무에 북을 매달아 울리며 의병을 모았다.
후세 사람들이 이름붙여 현고수(懸鼓樹). 세월이 흘러 꼭 3백90년. 수령 5백 20년의 노거수(老巨樹)(높이 15미터 둘레 7미터) 는 5본(本)의 지주에 의해 몸뚱이를 유지한 채 바람이 불 때 마다 장군의 호령소리를 느끼게 한다.
‘흰 기운이 남방에 가득 차니 바다에서 오는 악한 기운 때문이로다. 7,8년 뒤에는 바다가 반드시 편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괴로워지겠구나’
어느 날 문경(聞慶)새재 마루턱에 30대 선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읊조렸다.
그는 조선 명종(朝鮮 明宗) 7년(1552) 8월 28일 경상도 의녕현 세우리(慶尙道 宜寧縣 世于里) 외가집에서 황해도(黃海道) 감사 곽월(郭越)의 셋째아들로 태어난 곽재우(郭再祐)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읜 그는 눈에 광채가 번득이고 성품이 밝고 호탕해 일찍부터 주위 사람들의 촉망을 받았다.
8세가 되던 해 그의 부친 곽월(郭越)이 지은 용연정(龍淵亭)에 올라 공부했고, 15세가 되자 도굴산 보리사(菩提寺)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이때 그는 남명 조식(南溟 曺植)의 눈에 들어 외손녀 사위가 된다. 40세까지는 그는 대자연에 묻혀 낚시와 독서로 세월을 낚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난 것은 그가 41세 되던 해. 파죽지세로 조선(朝鮮)을 휩쓰는 왜군(倭軍)에 분노한 그는 팔뚝을 걷고 일어섰다.
심대승(沈大承).박필(朴弼)등 의녕(宜寧)고을의 장사들과 친족, 하인 등을 모아 의병의 깃발을 치켜들었다.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 지어 입고 양쪽에 날개를 단 투구를 쓰고 백마에 올라타니 사람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다.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전라도(全羅道)땅으로 들어오기 위해 정암(鼎岩)나루에 이르렀다. 여름비가 내린 뒤라 땅은 질고, 진군이 어렵게 되자 왜군은 선발대를 보내 마른땅을 고라 나무를 꽂아 표시를 했다. 이를 안 그는 밤이 되자 나무를 빼 진흙에다 옮겨 놓고 이튿날 적을 기다렸다.
왜군은 곽재우(郭再祐)의 계략에 말려들었고, 이어 패주하게 된다. 야스꾸니(安國寺 惠瓊)의 2만군을 물리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전략과 용병술이 세상에 알려지자 인근 고을 백성들은 너도나도 그의 깃발 아래 모여들기 시작했고, 곽재우(郭再祐)는 왜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다.
곽재우(郭再祐)는 유명한 진주대첩(晋州大捷)에서도 수훈을 세운다. 왜군은 전세가 소강상태에 빠지자 진주성(晋州城)공격으로 전세를 타개하려 했다. 진주성은 호남의 곡창지대로 들어가는 전략적 요충지, 진주(晋州)목사 김시민(金時敏)은 전황이 위급하자 곽재우(郭再祐)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홍의(紅衣)장군이 출진했다. 심대승(沈大承)은 진주(晋州)교외의 비황산(飛凰山)에 올라 그의 전략대로 어지럽게 나팔을 불고 또 밤에는 막대기 하나에 횃불 다섯 개씩을 달아 마구 흔들어 적을 교란했다. 곽재우(郭再祐)군의 기습작전과 성중수비군의 협공으로 왜군은 큰 희생을 내고 퇴각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임진란3첩의 하나인 진주(晋州)대첩이다.
광해군(光海君)에게 많은 직언을 하다가 끝내 유배까지 당했던 장군을 가리켜 후세 사가(史家)들은 "난전(亂前)에는 선생이었고, 난중(亂中)엔 위풍당당한 장군이었으며, 만년에는 풍월을 즐긴 도인(道人)이었다"고 평한다.
당시 조정은 곽재우(郭再祐)의 충정을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백면서생으로 민족을 구하려 했던 그가 조정의 명령 없이 의병을 일으키자 경상(慶尙)순찰사 김수는 왕에 대한 반역이라 상소했다. 이에 격분한 곽재우(郭再祐)는 김수에 대한 팔조수죄(八條數罪)란 격문을 만들어 의병의 동요를 막았다. 그러나 끝내 홍여순(洪汝淳)의 모함에 걸려 영암(靈岩)에 유배되는 어처구니없는 풍파를 겪기도 했다.
3년의 유배생활을 끝낸 그는 얼마 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갔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려 하자 이를 간하는 상소를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사영엽록와운산(辭榮葉祿臥雲山)
사사망우신자한(謝事忘憂身自閑),
막언고금무선자(莫言古今無仙子)
지재오심일오문(只在吾心一悟門)
(영화를 사양하고 녹을 버려 운산에 누웠으니/근심을 잊어 몸이 절로 한가하네/옛부터 신선이 없다고는 하지만/오직 마음으로 깨친 순간 신선이 되는구료)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 나라가 어려울 때 백성과 함께 의연히 나서서 나라를 구한 충정, 벼슬에 연연치 않았던 청렴한 선비정신이 그의 이 시에 잘 묘사되어 있다.
광해군(光海君)7년(1617) 4월10일 6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난국에 처했을 떄 그가 보여준 <구국의 의지>는 현풍(玄風)후손의 정신속에, 한 민족의 역사 속에 저류가 되어 흐르고 있다.
문집'망우당집(忘憂堂集)'이 전한다.
이밖에도 중종(中宗)때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사간(司諫)을 지내고 시국이 어려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운문산(雲門山)에 칩거했다가 명종(明宗)초 을사사화(乙巳士禍1545년)에 연루되어 숨진 경제 곽순(警齊 郭珣), 임진 왜란 때 중봉 조헌(重峰 朝憲)의 휘하 막료로 청주(淸州)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금산(錦山)전투에서 전사한 곽자방(郭自防), 임진.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훈을 세운 망우당(忘憂堂)의 4촌 괴헌 곽재겸(槐軒 郭再謙)등이 돋보이는 현풍(玄風) 인물들이다.
곽문(郭門)의 또다른 인물 중 면우 곽종석(1846-1927)이 있다. 구한말 영남(舊韓末 嶺南)의 대표적 유학자로, 호남(湖南)의 간재 전우(艮齋 田愚)와 쌍벽을 이룬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 폐기와 매국척신들의 처형을 주장하는 소(疏)를 올렸다. 1919년 2월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장서(長書)를 지어 제자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을 시켜 상해(上海)에서 영문으로 번역, 가져가게 했다.
소위 '파리장서(巴里長書)'로 불리는 이 성명에는 1백 37명의 유림이 서명했으며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전문 2천 6백 74자의 순한문으로 된 것이다. 결국 이 일이 탄로가 나 옥고를 치렀고 1963년에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역대 주요 인물
▲고려조

곽경(郭鏡,호(號):암곡(巖谷).포산군(苞山君).시(諡):정의(正懿).문하시중(門下侍中)
곽헌(郭憲 .지승선(知承善) 곽림(郭琳,호(號):계은(溪隱).문하대아(門下大牙).찬성사(贊成事) 곽연(郭演,문하중랑장(門下中郞將) 곽기정(郭基正,포산백(苞山伯).리부상서(吏부尙書)

▲조선조

곽정부(郭廷府,고양군수(高揚郡守)
곽린(郭璘,현감(縣監)
곽경(郭瓊,영천군수(永川郡守)
곽항(郭恒,호(號):매곡(梅谷).판관(判官)
곽종(郭悰,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곽감(郭감,부사(府使)
곽사(郭師,이조판서(吏曹判書)
곽규(郭赳,호(號):만담재(晩蕁齋.승지(承旨)
곽황(호(號):탁청헌(濯淸軒).함양군수(咸陽郡守)
곽점산(郭點山,호(號):춘계(春溪).이조정랑(吏曹正郞)
곽준(호(號):존재(存齋).시(諡):충렬(忠烈).안음현감(安陰縣監)
곽저(호(號);예곡(禮谷).군수(郡守)
곽수봉(郭壽峰)
곽황(郭璜,부여현감(扶餘縣監)
곽방욱(郭邦郁,호(號):만오재(晩悟齋).의병장(義兵將)
곽재상(郭載祥,호(號):송포(松圃).금부도사(禁府都事)
곽영탁(郭永鐸,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곽천성(郭天成,현감(縣監)
곽한정(郭漢正,포산군(苞山君).병부상서(兵部尙書)
곽자의(郭子儀,금오위교위(金吾衛校尉)
곽돈효(郭敦孝,예부상서(禮部尙書)
곽혁손(郭赫孫,검교장군(檢校將軍)
곽일신(郭日申,상장군(上將軍)
곽우현(郭佑賢,호(號):서천(西川).선산군(善山君).문하시중(門下侍中)
곽원진(郭元振,호(號):석천(石川),시(諡):문헌(文憲).포산군(苞山君.대제학(大提學)
곽경(부마도위(駙馬都尉)
곽인적(郭仁迪,호부상서(戶部尙書)
곽숭(郭崇,태자담서(太子澹書)
곽충관(郭忠貫,판도판서(版圖判書)
곽충경(郭忠敬,병부상서(兵部尙書)
곽연옥(郭連玉,유비창증(有備倉烝)
곽원(郭元,상장군(上將軍)
곽겸(郭謙,대호군(大護軍)
곽유강(郭維崗,도승지(都承旨)
곽윤명(郭允明,개성부윤(開城府尹)
곽윤광(郭允光,공조전서(工曹典書)
곽중선(郭仲先,보승랑장(保承郞將)
곽의(郭義,태자태보(太子太保)
곽거인(郭居仁,전리판서(典理判書)
곽유례(郭遊禮,공조전서(工曹典書)
곽려(郭麗,통례문지후(通禮門祗侯)
곽보견(郭甫堅,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
곽보민(郭保民,호(號):석주(石洲).청도교수(淸道敎授)
곽보완(郭保完,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곽안방(郭安邦,익산군수(益山郡守)
곽순종(郭順宗,안주목사(安州牧使)
곽충(郭沖,안변부사(安邊府使)
곽기(郭祁,시(諡):장절(莊節).우장군(右將軍)
곽도(郭都,호(號);노재(魯齋).도승지(都承旨)
곽득하(郭得賀,청주판관(淸州判官)
곽만경(郭萬慶,용진백(龍津伯)
곽거완(郭居完,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곽호(郭湖,호(號):악천(樂天),경기감사(京畿監司)
곽전(郭詮,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곽심(郭諶,이조좌랑(吏曹佐郞)
곽수녕(郭守寧,호(號):증산(甑山),시(諡):정정(靖節).도사(都事)
곽득강(郭得康,호(號):남계(南溪),판관(判官)
곽득형(郭得亨,곡성현감(谷成縣監)
곽승화(郭承華,호(號):규헌( 軒),진사(進士)
곽치생(郭致生,호군(護軍)
곽한철(郭漢哲,집의(執義)
곽분(郭汾,호(號):송재(松齋),한림학사(翰林學士)
곽순(郭珣,호(號):경재(警齋).사간(司諫)
곽황(郭凰,양덕현감(陽德縣監)
곽대관(廓大寬,덕원부사(德源府使)
곽종원(郭宗元,대사간(大司諫)
곽종번(郭宗藩,장령(掌令)
곽지번(郭之藩,사성(司成)
곽은(郭垠,호(號):용촌(龍村).담양부사(潭陽府使)
곽연성(郭連成,시(諡):정헌(正憲),청성군(淸城君)
곽흘(郭屹,호(號):대헌(大軒).시(諡):충의(忠義).한성판윤(漢城判尹)
곽재우(郭再佑,호(號):망우당(忘憂堂).시(諡):충익(忠翼).의병대장(義兵大將)
곽재겸(郭再謙,호(號):괴헌(槐軒).부호군(副護軍)
곽자안(郭自安,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곽시(郭詩,호(號):탄암(坦岩).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곽영희(郭永禧,호(號):만취당(晩翠堂),현감(縣監)
곽영(郭嶸,호(號):노곡(蘆谷),방어사(防禦使)
곽지선(郭止善,군수(郡守)
곽순성(郭舜成,호(號):한계(寒溪),사직(司直)
곽종문(郭宗閔,소모관(召募官)
곽종도(郭宗道.소모관(召募官)
곽방건(郭邦鍵,호(號):독송재(獨松齋),부사(府使)
곽종문(郭宗文,선부관(宣傅官)
곽기수(郭期壽,호(號):한벽당(寒碧堂),병조좌랑(兵曹佐郞)
곽충백(郭忠伯,수문장(守門將)
곽수민(郭秀閔,부사정(副司正)
곽린(郭麟,수문장(守門將)
곽세희(郭世希,수문장(守門將)
곽은부(郭殷夫,우림위(羽林衛)
곽작산(郭鵲山,사복사정(司僕寺正)
곽려향(郭麗鄕,부호군(副護軍)
곽려수(郭麗壽,사복정(司僕正)
곽자방(郭自防,봉사(奉事)
곽천호(郭天豪,호(號): 죽창(竹窓),교리(校理)
곽천성(郭天成,안주목사(安州牧使)
곽수강(郭壽崗,호(號):매헌(梅軒),학행(學行)
곽후창(郭後昌,호(號):농포(農圃).현감(縣監)
곽천구(郭天衢,호(號):구봉(九峰),평산부사(平山府使)
곽운립(호(號);송담(松潭),동부승지(同副承旨)
곽양향(郭揚響,호(號):괴헌(槐軒),부위(副尉)
곽연(郭硏,호(號);구준당(久俊堂).전적(典籍)
곽세익(郭世翼,호(號);둔곡(遯谷),사성(司成)
곽원철(郭元哲,중추부동지사(中樞附同知事)
곽재화(郭齋華,호(號):남계(南溪),집의(執義)
곽동(군수(郡守)
곽유번(郭維藩,호(號):오암(鰲岩),첨무추(僉中樞)
곽위국(郭衛國,호(號):낙수(洛 ),목천현감(木川縣監)
곽강화(郭康華,호(號):치곡(痴谷),증병조참의(贈兵曹參議)
곽세건(郭世楗,호(號):무위자(無爲子),군수(郡守)
곽음(호조좌랑(戶曹佐郞)
곽기화(郭氣和,호(號):무한당(無限堂),영장(營將)
곽천중(郭千重,지중추(知中樞)
곽신장(郭信章,부사직(副司直)
곽후천(郭後天,통덕랑(通德郞)
곽후태(郭厚泰,호(號):청계당(聽溪堂),학행(學行)
곽홍지(郭弘址,호(號):태허정(太虛亭),부사(府使)
곽정구(郭禎垢,첨중추(僉中樞)
곽문용(郭文溶,선산부사(善山府使)


[조선조 급제자 등록]

덕연(德淵,태조(太祖)5년·식년시(式年試)·진사(進士))
규(珪,태조(太祖)14년·식년시(式年試)·진사(進士))
거완(居完,태조(太祖)14년·친시(親試)·을과2등(乙科2等))
순(珣,세종(世宗)·친시(親試)·을과2등(乙科2等))
자호(自湖,문종(文宗)1년·증광시(增廣試)·정과(丁科))
자용(自容,단종(端宗)2년·증광시(增廣試)·정과(丁科))
은(垠,성종(成宗)3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심(諶,성종(成宗)13년·친시(親試)·병과(丙科))
종원(宗元,성종(成宗)16년·별시(別試)·을과(乙科))
종번(宗藩,성종(성종)21년·별시(別試)·병과(丙科))
수녕(遂寧,연산(燕山)1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봉(鳳, 중종(中宗)6년·별시(別試)·병과(丙科))
지번(之藩,중종(中宗)15년·별시(別試)·병과(丙科))
지운(之雲,중종(中宗)19년·별시(別試)·병과(丙科))
희조(熙조,중종(中宗)2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순(珣,중종(중종)2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간(명종(明宗)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익(翼,명종(明宗)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두(명종(明宗)10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황(黃,명종(明宗)11년·별시(別試)·을과(乙科))
월(越,명종(明宗)11년·별시(別試)·병과(丙科))
응기(應機,선조(宣祖)5년·춘파태시(春坡台試)·병과(丙科))
기수(期壽,선조(宣祖)16년·별시(別試)·병과(丙科))
지선(止善,선조(宣祖)2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운립(선조(宣祖)26년·전주별시(全州別試)·을과(乙科))
천호(天豪,선조(宣祖)38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영희(永禧,선조(宣祖)3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천구(天衢,광해(光海)8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천성(天成,광해(光海)13년·알성시(謁聖試)·을과(乙科))
엄(奄,인조(仁祖)1년·개시(改試)·병과(丙科))
융(融,인조(仁祖)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성구(聖龜,인조(仁祖)9년·별시(別試)·병과(丙科))
홍지(弘址,인조(仁祖)1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연(硏,인조(仁祖)2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급(及,인조(仁祖)26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제화(齊華,효종(孝宗)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세익(世翼,효종(孝宗)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후창(後昌,효종(孝宗)8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수구(壽龜,숙종(肅宗)17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진익(鎭益,정조(正祖)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태노(泰魯,헌종(憲宗)15년·정시(庭試)··병과(丙科))
기락(基洛,철종(哲宗)1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기(琦,고종(高宗)23년·정시(庭試)··병과(丙科))


[벌열(閥閱)]

●문형(文衡)
:곽제화(郭齊華,현종조)
●청백리(淸白吏)
:곽제화(郭齊華,현종조)
●공신(功臣)
:곽연성(郭連城,단종조 계유정란2등공신(癸酉靖亂2等功臣)
●문형(文衡)
:곽순(郭珣,중종조) 곽월(郭越,명종조)
●청백리(淸白吏)
:곽안방(郭安邦,세조조) 곽순(郭珣,중종조) 곽월(郭越,명종조) 곽간(명종조) 곽재우(郭再祐,선조조) 곽준(선조조) 곽기수(郭期壽,선조조) 곽희태(郭希泰,인조조) 곽치흠(郭致欽,효종조)
●장신(將臣)
:곽재우(郭再宇,선조조·방어사(防禦使)
●명륜(明倫)
:효행(孝行) 곽치견(郭致堅,증가선대부(郭致堅,贈嘉善大夫)·공조참판(工曹參判)·정려(旌閭)
●문집(文集)
:훈자육대도(訓子六大圖,곽재겸(郭再謙) 망우당집(忘憂堂集,곽재우(郭再宇) 면우집( 宇集,곽종석(郭鍾錫)

 
#현풍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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