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정씨 본관별 소개2023-03-1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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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鄭)씨
 
성(姓)의 하나. 본관은 경주(慶州)·동래(東萊)·영일(迎日)·하동(河東)·진양(晉陽) 등 약 40여 본이 있다. 정씨의 대부분은 신라 6부촌장의 한 사람인 취산 진지촌(珍支村;本彼部)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서산정씨(瑞山鄭氏)나 낭야정씨처럼 중국에서 귀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백호를 도시조(都始祖)로 하는데, 후손 동충(東沖)이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 정씨로 사성(賜姓)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42만 2220가구, 178만 648명으로 총 274개 성 가운데 제5위였다.


경주정씨~김포(金浦)정씨


경주정씨

시조는 신라 초의 진지촌장이었던 지백호이다. 경주정씨의 시조로 받들어지게 된 것은 1932년(유리왕 9) 지백호의 5세손 동충이 정씨로 사성된 데서 비롯된다. 그 뒤 후손들은 영일·동래·온양(溫陽)·초계(草溪)·하동·진양 등 여러 본으로 분관(分貫)되었으며, 경주정씨 본종은 계림(鷄林) 월성(月城) 등이라 하다가 고려 때 병부상서·평장사 등을 역임하고 월성군에 봉해진 문정공(文正公) 정진원(鄭珍原)이 경주로 고쳐 부르게 되어 그를 중조(中祖)로 하고 있다. 경주정씨는 문헌공파(文獻公派)·양경공파(良景公派)·월성위공파(月城尉公派)·평장공파(平章公派)의 4파로 나누어져 있다. 시조의 제44대손 보기(寶奇)가 위(偉)와 교(僑)두 아들을 두었는데, 위의 아들 현영(玄英)은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문헌>이라는 시호를 받아 문헌공파가 되었고, 조선의 개국공신인 희계(熙啓)는 <양경>이라는 시호를 받아 양경공파가 되었다. 또한 고려 때 부마(駙馬) 이기는 월성위로 봉해져 월성위공파가 되었으며, 고려 때 평장사를 지낸 필(弼)은 평장공파를 이루었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로 왜적을 맞아 용감히 싸우다 순국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 성리학의 대가로 《천명도(天命圖)》를 지어 사칠논쟁(四七論爭)의 서단(緖端)을 제공한 정지운(鄭之雲)이 있다. 인구수 30만 731(1985).


고성(固城)정씨

시조는 고려 때 사람인 정가물(鄭可勿)로, 행적이나 선계(先系) 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선대 이래로 철성(鐵城;固城의 엣 이름)에 토착해 왔으므로, 후손들이 고성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 정개청(鄭介淸)이 있다. 인구수 1만 853(1985).


공산(公山)정씨

시조는 고려 충숙왕 때 사람인 정응규(鄭應圭)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정비(鄭庇)가 공산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으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술보(戊戌譜, 1958)》에 의하면 정비 이전의 선대에 관한 문헌이 없어, 결국 정비가 공산정씨의 시조가 된다고 되어 있다. 공산은 공주(公州)의 별호이다. 공산정씨와 공주정씨는 동원(同源)으로, 호적을 정리할 때 착오를 일으킨 데 불과하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순절한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충정공(忠貞公) 정빈(鄭濱), 역시 진무원종공신 정치방(鄭治邦), 숙종 때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정태방(鄭泰邦), 영조 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정붕익(鄭鵬翼) 등이 있다. 인구수 공산관 652, 공주관 232(1985).


광주(光州)정씨

시조는 고려 말에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추봉된 정신호(鄭臣扈)이다. 《경주정씨족보》에 의하면 <15세 극온(克溫)이 광주정씨파로 분파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정극온의 후계(後系)가 소상히 밝혀져 있지 않으므로 정신호에 이르는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공민왕 때의 공신 정세운(鄭世雲)이 정신호의 선대가 될 것이라고 하나, 그가 광주정씨였다는 것만 분명할 뿐, 역시 사실을 알기 어렵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1630년 진주사(陳奏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면서 홍이포(紅夷砲)·천리경(千里鏡) 등 서양기계와 서적 등을 가지고 왔던 호정(壺亭) 정두원(鄭斗源), 조선 후기 화가로 유명한 겸재(謙齋) 정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정춘수(鄭春洙) 등이 있다. 인구수 1만 4922(1985).


금성(錦城)정씨

시조는 고려 충숙왕 때 금성군에 봉해진 정성(鄭盛)이다. 하동정씨의 기세조(起世祖) 정석숭(鄭碩崇)의 6세손으로 하동정씨에서 분적하였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고려 말 왜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운 정지(鄭地),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정충신(鄭忠信) 등이 있다. 인구수 8976(1985).


김포(金浦)정씨

시조는 고려 인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낸 정응문(鄭應文)이다. 김포 출신의 호족으로 후손들 역시 김포에 세거하며 관향을 김포로 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정초(鄭楚)가 있다. 인구수 2377(1985).


나주(羅州)정씨~야성(野城:盈德)정씨


나주(羅州)정씨

시조는 고려 고종(高宗) 때 문과에 올라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사도(守司徒)를 지낸 정해(鄭諧)이다. 후손들이 나주에 정착, 번성하게 되어 그를 시조로 하고 나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역사상 주요인물로는 고려 말엽에 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중찬(僉議中贊) 등을 역임하고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남긴 정가신(鄭可臣),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은 정여린(鄭如麟) 등이 있다. 인구수 5만 5684(1985).


낭야정씨

시조는 중국 명(明)나라 때 진사(進士)를 지낸 정선갑(鄭先甲)이다. 그는 낭야에서 출생하여 28세 때인 1644년 명청전쟁(明淸戰爭) 때 창의(倡義)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심양관(瀋陽館)에 억류당했으나, 그곳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귀국길에 배종(陪從)하게 됨으로써 입국, 정착하였는데 후손들이 그의 출신지를 본관으로 삼아 계대(繼代)하고 있다. 당시 황명사상(皇明思想)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조야(朝野)에서 황조유민(皇朝遺民)으로 크게 대접, 훨씬 뒤인 정조 때에 이르러서도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인구수 871(1985).


동래정씨

시조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鄭繪文)이다. 그런데 뒤에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의 묘지(墓誌)가 발견되어 보윤공(甫尹公) 정지원(鄭之遠)까지의 3세가 확인됨으로써, 《경신보(庚申譜, 1920)》부터는 세계(世系)가 확실한 정지원을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시조 정회문은 권수(卷首)에 따로 기록하게 되었다. 기세조 정지원은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냈고, 아들 정문도(鄭文道)는 안일호장, 손자 정목(鄭穆)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태부경(太府卿)을 지내는 등 자손들이 현달(顯達)하게 되어, 그의 세거지인 동래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이미 대족(大族)으로 성장하였던 동래정씨는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17명의 상신(相臣)을 배출하였다. 이것은 전주이씨의 22명, 안동김씨의 19명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것이다. 이 밖에 대제학 12, 호당(湖堂) 10, 공신 6, 판서 20여 명과 문과급제자 198명을 배출했다. 왕족인 전주이씨와 세도척족(勢道戚族)인 안동김씨 다음으로 많은 정승을 배출하면서도 외척으로 세력을 얻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고려 때 청백리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에 입전(立傳)된 문안공 정항, 《정과정곡(鄭瓜亭曲)》으로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정서(鄭敍), 청백리 정갑손(鄭甲孫), 여섯 임금을 섬기면서 좌익·익대·좌리공신에 책록되고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鄭昌孫), 성종 때 문신·학자로 글씨에 능했던 정난종(鄭蘭宗),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구하는 데 힘썼던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정광필의 손자로서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유길(鄭惟吉),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낸 정창연(鄭昌衍),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된 정태화(鄭太和), 영조 때 일등 재정통(財政通)으로 우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정홍순(鄭弘淳),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존겸(鄭存謙),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 일제강점기 때 국학자인 정인보(鄭寅普) 등이 있다. 인구수 41만 4782(1985).


봉화(奉化)정씨

시조는 고려 중엽에 봉화현(奉化縣)의 호장(戶長)을 지낸 정공미(鄭公美)이다. 봉화를 본관으로 정한 것은 4세손인 정운경(鄭云敬), 5세손인 정도전(鄭道傳)의 숭덕(崇德)과 위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시조 정공미가 봉화현의 호장이 되면서 영천(榮川)이 세거지가 되었는데, 봉화현은 그 속현(屬縣)이었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고려 공민왕 때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내고 도덕과 문장으로 유명하였던 정운경, 조선왕조 개국공신이며 정치·학문·법제 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정도전,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던 정문형(鄭文炯) 등이 있다. 인구수 2만 468(1985).


서산정씨

시조는 고려 말에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을 지내고 서산군에 봉해진 정인경(鄭仁卿)이다. 본래 중국 저장[浙江(절강)]지방에서 대대로 벼슬을 해왔는데, 정인경의 아버지 정신보(鄭臣保)가 남송(南宋)의 멸망과 함께 고려에 귀화, 서산에 정착하였다고 하며, 1280년(충렬왕 6) 왕이 정인경에게 서산을 본관으로 하사하면서부터 이곳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조선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홍(鄭仁弘) 등이 있다. 인구수 1만 3819(1985).


야성(野城:盈德)정씨

시조는 고려 희종 때 대사도(大司徒)를 지낸 정가후(鄭可侯)로, 연일정씨의 시조인 정습명(鄭襲明)의 후예이다. 고려·원(元)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야성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야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야성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에 속해 있는 지명이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을역임하고 역학(易學)에 밝았던 문경공(文敬公) 정자영(鄭自英) 등이 있다. 인구수 영덕관(盈德貫) 2212, 야성관(野城貫) 1976(1985).


영일(迎日:延日)정씨~정산(定山)정씨


영일(迎日:延日)정씨

영일정씨의 원류는 지백호(智伯虎)이나, 연대가 오래되고 또한 고증이 없으므로 세계(世系)를 상고할 수 없어, 지백호의 원손 종은(鍾殷)을 도시조(都始祖)로 하고 후손 의경(宜卿)이 영일호장을 지낸 뒤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손들이 영일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한편 본관을 영일의 옛 지명을 따라 <연일>로, 또 영일에서도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의 이름을 따서 <오천>이라 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영일로 통일하여 쓰는 추세에 있다. 영일정씨에서는 연원은 같으면서도 갈래가 다른 2파가 있는데, 그 하나는 고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을 제1세조로 하는 지주사공파(鄭夢周·鄭文裔系)와 고려 때 감무(監務)를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제1세조로 하는 감무공파(鄭思道·鄭澈系)이다. 이 2파는 선계(先系)의 실전(失傳)으로 세계(世系)를 고증할 수 없어 합보(合譜)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인구수 연일관(延日貫) 23만 7218, 영일관(迎日貫) 4만 6922, 오천관(烏川貫) 2만 2033(1985).


지주사공파

시조는 고려 예종 때 추밀원지주사를 지내고 형양군(滎陽君)에 봉해진 정습명으로, 그의 대부터 영일에 세거하다가 9세 정광후(鄭光厚)와 10세 정운관(鄭云瓘)의 대를 전후하여 영천(永川)으로 옮겨갔다. 이 파의 후손으로는 고려 말의 명신이며 한국사상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포은(圃隱) 정몽주가 있다. 그러나 정몽주의 순절 이후 조선조에서는 크게 떨치지 못했다. 조선 현종 때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鄭維城), 성리학자 정만양(鄭萬陽)·규양(葵陽) 형제, 숙종 때 양명학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을 배출하였다.


감무공파

시조는 신라 무열왕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낸 정종은(鄭宗殷)이지만 그뒤의 계대(繼代)가 실전되어 감무공 정극유를 기세조로 한다. 그의 후손은 4세조까지는 단계(單系)로 이어졌고, 5세조 이후의 후손에서 몇 개의 파로 나누어졌다. 후손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선 중기 정치가·문인이었던 송강(松江)정철을 들 수 있다. 이 파에서는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4명과 대제학 3명을 배출하였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고려 우왕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내고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 정철의 아들로 대제학을 지낸 정홍명(鄭弘溟),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호(鄭澔), 같은 시기에 <형제정승>으로 이름을 날린 정우량(鄭羽良;우의정)과 정휘량(좌의정) 등이 있다.


예천(醴泉)정씨

시조는 고려 때 지면주사(知沔州事)를 지낸 정소유(鄭少游)이다. 《조선씨족통보》에 따르면 병마사(兵馬使)를 지낸 정남진(鄭南鎭)을 파조(派祖)로 하는 1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구수 2931(1985).


온양(溫陽)정씨

시조는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호부상서에 이른 정희공(貞僖公) 정보천(鄭普天)이다. 고려 때 보승낭장(保勝郞將) 전력부위(展力副尉)를 지낸 정주(鄭珠)를 중조(中祖)로 하는 전력분파(展力分派)가 있는데, 6세까지는 세계(世系)가 일치하나 고려 말 병화(兵火) 등 여러 차례 재난으로 세계를 잃어 정주를 중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시조 이래로 온양에 토착하여 대표적인 지방세력을 이루었으며 이어 아산(牙山)·예산(禮山)·서산 및 고양(高陽) 등지로 옮겨가 산거(散居)하였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조선 명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대윤(大尹)을 제거하는데 적극 활약,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이 되었던 정순붕(鄭順朋), 천문(天文)·음악·의술에 조예가 깊었던 정렴, 광해군의 어의(御醫)였던 정예남(鄭禮男), 효종 때의 문인·학자 정두경(鄭斗卿), 정조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불합리한 조세제도의 개선에 힘썼던 정민시(鄭民始) 등이 있다. 인구수 2만 4134(1985).


장기정씨

시조는 고려 현종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내고 장기백에 봉해진 정자여(鄭子輿)이다. 영일정씨로부터 분관하였으며, 정자여가 추충진국공신(推忠鎭國功臣)으로서 영일에 가까운 장기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후손들이 장기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1980년대 조사에 의하면 충청남도 공주에 1백여 호 이상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 밖에 논산(論山)·청양(靑陽)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인구수 2795(1985).


전주(全州)정씨

시조는 고려 예종 때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를 지낸 정원흥(鄭元興)이다. 그가 전주로 유배되어 정착, 세거하게 됨으로써 영일정씨에서 분적, 본관을 전주로 삼아 계대(繼代)하고 있다. 인구수 6957(1985).


정산(定山)정씨

시조는 조선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낸 정치형(鄭致亨)이다. 그밖의 사실은 알 수 없으며, 다만 후손들이 황해도 곡산(谷山)에서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인구수 1315(1985).


정주(貞州)정씨~초계(草溪)정씨


정주(貞州)정씨

시조는 고려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낭장(郎將) 벼슬을 지낸 정문정(鄭文靖)이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정문정의 후대에 와서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정장(鄭莊)을 파조(派祖)로 하는 낭장공파와 태사(太師) 정준(鄭準)을 파조로 하는 태사공파가 있다고 한다. 인구수 3024(1985).


진주(晉州:晉陽)정씨

진주정씨는 동성동본이면서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8파가 있다. 이를 이른바 <진주8정(晉州八鄭)>이라 한다. 이 8정을 크게 정예(鄭藝)·정자우(鄭子友)·정장(鄭莊)·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으로 나누는 것이 통설이다. <예계(藝系)>의 시조 정예는 고려 초에 광록대부(光祿大夫)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냈는데, 시조로부터 제학공(提學公) 정시양(鄭時陽)까지는 중간 세계를 밝힐 수 없어 제학공을 기세조(起世祖)로 한다고 하였다. 정시양은 고려 문종 때 금자광록대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자우계(子友系)>의 시조 정자우는 호장을 지냈는데, 그의 6세손이며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진 정신열(鄭臣烈)을 중조로, 또는 8세손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 정진경(鄭晉卿)을 중조로 삼는 파가 있다. <헌계(櫶系)>의 시조 정헌은 고려 말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한편 그의 후손인 정택(鄭澤)을 중조로 하는 1파가 있다. <장계(莊系)>의 시조 정장은 고려 말엽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그의 4세손 공대공(恭戴公) 정척(鄭陟)을 중조로 삼는 1파가 있다. 진주정씨는 고려의 개국에 참여한 집안으로 고려 때 이미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 가운데 공민왕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냈으며 사위인 문익점(文益漸)과 함께 목화를 재배하고 보급하는 데 큰 공적을 남긴 정천익(鄭天益), 안향(安珦)의 사위로서 동국8현(東國八賢)의 한 사람인 정수규(鄭守珪),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에 저항하다가 사형당한 정분, 세조∼성종 때 청백리·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정척(鄭陟), 유성룡(柳成龍)의 제자로 영남예학(嶺南禮學)을 대표했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임진왜란 때의 명장 정기룡(鄭起龍), 영조·정조 때의 성리학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등이 유명하다. 인구수 23만 1289(1985).


창원(昌原)정씨

시조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낸 정지각(鄭之覺)이다. 문헌이 없어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인구수 1811(1985).


청산(靑山)정씨

시조는 조선 초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을 지내고 청산부원군에 봉해진 정금강(鄭錦綱)이다. 청산은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尙州)에 속한 옛 지명이다. 낭천현감(狼川縣監)을 지낸 제4세 정희한(鄭希漢)의 대부터 강원도 춘천(春川) 일대에 터를 정하고 세거했으며, 이후 가평(加平)·횡성(橫城)·홍천(洪川) 등지로 옮겨가 정착한 것으로 짐작된다. 인구수 3656(1985).


청주(淸州)정씨

시조는 고려 의종 때 중랑장을 지낸 정극경(鄭克卿)이다. 6세손 정책이 청하군(淸河君)에 봉해지고 서원백(西原伯)에 가자(加資)됨으로써, 본관이 청주로 굳어졌다. 그리고 조선 초에 8세손 정침이 안동(安東)에 터를 잡은 뒤로 자손들이 누대에 걸쳐 그 일대에서 세거해 왔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고려 고종 때 최광수(崔光秀)의 난을 진압한 정의, 조선 개국1등공신 정탁(鄭擢),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탁(鄭琢), 호종(扈從)의 원훈(元勳)으로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봉해진 정곤수, 선조·광해군 때의 성리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이 있다. 인구수 3만 6308(1985).


초계(草溪)정씨

시조는 고려 문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상주국(上柱國)을 지냈던 홍문공(弘文公) 정배걸(鄭倍傑)이다. 그는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 가운데 홍문공도를 창시,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초계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초계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으로 삼았다. 주요 인물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에 봉해진 정윤겸(鄭允謙), 인조 때의 성리학자 정엽(鄭曄), 배청척화(排淸斥和)의 기수 정온(鄭蘊) 등이 있다. 인구수 8만 3311(1985).


팔계(八溪)정씨~해주(海州)정씨


팔계(八溪)정씨

시조는 고려 때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낸 양평공(良平公) 정승(鄭丞)이다. 그의 선대는 초계정씨로, 고려 때 내급사(內給事)를 지낸 정복경(鄭福卿)의 후예이다. 인구수 2886(1985).


풍기(豊基)정씨

시조는 고려 때 영정감무(永定監務)를 지낸 정의(鄭誼)이다. 그의 아들 정기(鄭琪)가 문하시랑에 오른 뒤 풍기군에 봉해져 풍기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시대 인물을 보면 좌찬성에 오른 정성진(鄭聖進), 이조참판에 오른 정괄(鄭括)·정의직(鄭意直), 사간(司諫)을 지낸 정함 등이 있다. 인구수 693(1985).


하동(河東)정씨

본관은 같으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밀직공(密直公) 국룡파(國龍派)의 파조 정도정(鄭道正)은 신라 말에 하동호장(河東戶長)을 지냈으며 고려에 들어 광평성평장사(廣評省平章事)에 올랐다. 지부사공(知部事公) 손위파의 파조 정손위(鄭遜位)는 상서예부(尙書禮部)의 지부사(知部事)를 지냈고, 정승공(政丞公) 응파의 파조 정응(鄭膺)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을 지냈다. 이 가운데 국룡파는 정도정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문하시중을 지낸 정석숭(鄭碩崇)을 제1세조로 삼아 왔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고려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정지연(鄭芝衍), 조선 초기 정치가·학자인 학역재(學易齋) 정인지(鄭麟趾), 성종 때의 성리학자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일두 정여창(鄭汝昌), 임진왜란 때 녹도만호(鹿島萬戶)로서 큰 전공을 세운 정운(鄭運), 정묘호란 때의 의병장 정봉수(鄭鳳壽), 조선 후기의 실학자·지리학자로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한 정상기(鄭尙驥) 등이 있다. 인구수 14만 2418(1985).


함평(咸平)정씨

시조는 고려 때 병부상서 문하시중을 지낸 정언겸(鄭彦謙)이다. 1126년(인종 4) 척준경(拓俊京)의 난이 일어나자 모평(牟平;咸平의 옛 이름)에 퇴거·정착함으로써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어 함평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역사상 주요 인물로는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정현수(鄭賢守)·정함(鄭緘), 대제학을 지낸 정을룡(鄭乙龍)·정안의(鄭安義) 등이 있다. 인구수 6425(1985).


해주(海州)정씨

시조는 고려 때 전법정랑(典法正郞)을 지낸 정숙(鄭肅)이다. 그 뒤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말에 사복시소부소윤(司僕寺少府少尹)을 지낸 정언을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있다. 역사상 주요인물로는 조선 문종의 부마인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 그의 아들 정미수(鄭眉壽), 연산군 때의 은사(隱士)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 중종 때의 성리학자 정붕(鄭鵬),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등이 있다. 인구수 3만 4736(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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