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양성이씨(陽城李氏)2021-09-1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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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이씨 창씨 유래

  양성이씨(陽城李氏)는 시조 이수광(李秀匡)이 서기 1,040년대 송(宋)나라에서 특진 금오위대장군 상주국(特進 金吾衛大將軍 上柱國)의 작위를 받으시고, 고려(高麗)에서 삼중대광 보국 양성군(三重大匡 輔國 陽城君)에 봉해짐으로써 득성(得姓)하였다.

이수광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에 귀화, 문종조(1,047~1,083)에 벼슬하여 누차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출중한 인품과 강유겸전(剛柔兼全)한 외교로 상호 이해를 슬기롭게 설득 무마하여 그들의 동침 야욕을 봉쇄, 선린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나라를 안연(晏然)케 한 공을 세워 정난공신 제일(第一)로 책훈되었다. 또한 출장 입상하고 덕망이 높아 당시 사람들이 당(唐)나라 곽자의(郭子儀)에 비하였다.

송나라에 변란이 있어 고려에 구원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 한달에 세 번 승첩을 거두매, 송나라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친필로 “고려 대신 이수광은 공관천하(功冠天下)요, 명양후세(名揚後世)하리라.”고 써주고 위의 벼슬을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영귀공자(榮貴公子)라 칭송하였다.


* 본관지(本貫地)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이수광이 정난공신으로 책훈되고, 양성을 채읍(采邑)으로 하사받은 사패지지에서 연유된다. 시조의 유지(遺址)가 양성구내(陽城九內) 지금 향교의 곁이라고 하며, 묘소는 그 뒤쪽 몇리쯤 떨어져 있었다고 전해져 왔는데, 표지가 없어 실전했다. 양성은 고구려 때는 사복홀(沙伏忽), 신라 경덕왕 때는 적성(赤城), 고려초에 양성(陽城)으로 정한 지명으로 지금 현재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평택시 죽백동 일원에 있는 옛 지명이다. 따라서 양성이씨는 행정구역이 개편된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산43의 3 유좌지원 양성이씨 세장산 시조묘역에 시조위 외 5위를 설단, 매년 음10월 1일에 세향을 받들어 오고 있다.


* 양성이씨 가훈 (석탄공 계자시)

  “북풍이 울부짓고 눈보라치는 겨울날, 너희들은 추위에 떨고 굶주리지나 않는지 걱정되어 한숨지누나. 망녕되게 좋지 못한 친구를 사귀면 끝내 이익됨이 없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멸시한다면 도리어 해를 입는 법. 색은 반드시 몸을 망치니 모름지기 삼가야 하고, 말은 자칫하면 자기를 해치기 쉬우니 깊이 생각하여 말할지어다. 우리가 할 일은 충효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충효를 몸소 실천하면 그 명예 자연히 온 나라에 알게 되리.”


시조 상주국공(上柱國公) 6세손인 석탄공 수방(守邦)은 용의가 아름답고 마음이 그 용모와 같아 원나라 영종(英宗)황제로부터 나해(那海)라는 이름과 직성사인의 벼슬을 받고 귀국함에 고려 충숙왕은 융숭한 예우를 하여 광정대부 도첨의평리 판밀직사사 상호군에 오르게 했으며 또한 왕위 찬탈음모를 분쇄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석탄공은 네 아들을 두셨는데 모두 대현하여 장남 춘부(春富), 차남 인부(仁富), 3남 광부(光富)는 18,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모두 벼슬길에 올랐으나 막내 원부(元富)만은 탈선하여 지내므로 어느날 아침 막내아들의 침실에 들어가 잠자고 있는 머리맡에다 위와 같은 계자시를 써놓아 크게 깨닫게 하여 21세에 장원 급제하고 상서(尙書)가 되게 하였으니 그 인자한 자손의 교육 방식이 맹모 삼천지교에 버금가는 교훈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대대손손 가훈으로 간직해 온 것이다.



<족보수권-創刊譜>

陽城李氏 世譜卷首(舊序 二)

우리 나라에서 벼슬 한 이는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모두 양성이씨 내외손의 후예들이다. 그 수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일일이 기록할 수 없는 터라 혈연의 정을 잊을 수 없는 친척만을 수록하여 족보를 만드노라.

무릇 사람은 명(命)을 하늘에서 받았느냐 사람에게서 받았느냐, 하늘에서 받았다면 천하 만물이 모두 하늘의 아들이니 옛 사람들이 말한 落地兄弟(땅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모두 형제라는 뜻)인 셈이다. 그렇다면 하필 족보를 만들어 구별 할 것은 없는 것이다. 아득한 먼 옛날 천지의 두 元氣가 왕성하게 작용하여 만물이 생겨 날 때 그 중 가장 영(靈)한 기운을 받고 태어난 것이 사람인데 사람이 남(生)에는 각기 조상이 있으니 조상은 자손들의 宗源이며 자손된 자 잊지못할 뿌리인 것이다. 우리 씨족은 모두 우리 시조의 자손들이다. 우리가 자손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미루어보면 시조의 자손 사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니 이는 고금인정이 같음이요. 天地生生之理에서 나온 본능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 덧없는 세상풍속이 야박해져 친족간에 화목을 이루지 못하고 일시의 이해관계로 일가를 멀리하고 박대하는 자 있으니 과연 어떤 사람일런가 鳥獸나 魚鼈(어별은 물고기와 자라)같은 동물들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떼족끼리 떼지어 살며 때로는 우~몰려갔다 흩어지기도하고 때로는 훌쩍 오가면서 이빨과 뿔이며 발톱으로 물어 뜯고 치고 받아 약육강식을 일삼고 동족상장을 자행한다. 인간으로서 일가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동족상잔하는 새, 짐승과 다를 바 없으니 어떻게 하면 친족의 誼를 두텁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를 생각 할 수 있으니 하나는 堯인금의 지극한 공훈도 일가간의 친목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 일이요. 또 하나는 조상들이 포대기에 쌓인 어린  것을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고 길러주신 덕택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는 일이니 이렇게 된다면 같은 뿌리에서 파생한 동족의 의리에 어긋나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조로부터 4대손~7, 8대손까지 내려가면 모두 우리 일가임에는 틀림없지만 四代孫에 가서 服을 입는 일은 끝이 나니 복이 다하면 情도 다하고 정이 다하면 塗人(길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이 되어 버리는데 동기형제가 도인에 이르고 마는 것은 자연의 勢인지라 우리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생각해보면 정은 그래도 잊을 수 없는 바가 있어 만나면 정이 가면서도 서로 서먹서먹하고 머뭇머뭇하며 그 일가가 슬픔을 당하면 한번 울어 슬퍼하고 말 따름이다. 그렇지만 人情天理는 원래 가까우면 친해지고, 멀면 서먹해지는 법이라서 도리 없는 일이다.

그런데 혈연이 멀어진 일가라 할지라도 선비의 기풍을 잃지 않고 孔孟의 도를 닦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士大夫의 기질이 끊어지지 않아서 혁혁했던 우리의 조상들 업적을 엿볼 수 있지마는 반면 혈연도 멀어지고 士族에서 탈락되어버린 일가는 우리 조상의 기운은 흐르고 있겠지만 名門 양성이씨 후예라는 이름만 남아있지 實이 없으니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 족보를 보는 이들 愛族之心이 뭉게뭉게 구름피듯 일어나 내 몸의 顯達을 생각할진데 훌륭했던 조상들을 追念하고 공경한 마음가짐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그 조상만큼 훌륭하게 되어야겠다는 높은 이상을 품고 큼직하고 밝은 행동을 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며 반면 나의 우천함을 돌이켜보고는 나의 조상 훌륭하였는데 나는 양성이씨의 맑은 흐름을 흐르게 하고 있음을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고 조상의 맑은 源泉에 몸을 씻고 奮發(분발)하여 자나 깨나 생각하고 힘써 나가면 점차 그릇된 관념도 바뀌게 될 것이고 행실도 착해질 것이다.

내가 우리 족보를 만드는 것은 우리 일가에게 크게 바라는 바 있어 하는 일이니 나의 소망이 이와 같은 데도 自暴自葉하여 떨치고 일어서지 못하는 자들은 사람 측에 끼지 못할 존재들이니 魚鼈鳥獸로 추락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어별조수는 목숨을 하늘에서 받아 사람의 밥이 되니 우리 인류가 아닌 것이다. 이 꼴이 되어서야 어찌 우리 일가라 하겠는가.

이에 비하여 동시대를 사는 사대부들은 모두 우리 일가는 아닐지언정 그 지취(志趣)가 같고 종사하는 일이 같은 사람들이다. 나아가 같은 士族(여기 사족은 인격과 학문을 닦아 국가에 봉사하는 영재집단 정도로 생각하면 이 글을 이해하기 쉬울 것임)에 끼는 사람들은 옛 사람들이 말한 落地兄弟인데다가 진짜 하늘이 내린 형제인 것이다. 하늘이 내린 형제가 혈연의 형제처럼 정이 두터워 질 수 있다면 거의 천리에 어긋남이 없게 될 것이다. 천리에 어긋나지 않고 인륜에 어긋남이 없게되어야(일가간의 敦睦은 말할 것 없고 같은 사족들과도 혈연친형제처럼 가까워져야)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 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뒤에 우리 족보를 보는 이들 어찌 삼가고 조심하지 않을손가!

後孫 崇祿大夫行吏曹判書 兼 弘文館提學陽城君 承召序함

(行은 품계가 관직보다 높을 때 관직 앞에 붙이는 말)

譯者追考 (序文을 쓰신 연대에 관한 고찰)

이 서문이 쓰여진 연대는 명기되어있지 않은 관계로 어느 해에 쓰여졌다고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前後事를 감안하면 대략 추측은 가능하다. 삼탄공은 1481년에 正憲大夫(正二品)에 올라 이조판서(2품직)를 역임하고 이듬해(1482년)에 좌참찬(2품직)이 되었다고(한국 인명대사전에 의거함) 나와 있을 뿐 어느 해에 숭록대부(從一品)로 올랐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종1품인 숭록대부로 정2품인 이조판서를 지냈기에 行자가 붙은 것인데 그렇다면 이 해가 과연 어느 해 였을까? 정상적으로 승계하였다면 1483년 이후가 될 것인데 삼탄공의 졸년이 1484년이니 이 글은 1483년부터 1484년 逝去 전까지의 兩年사이에 나왔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2수보 서문]
睡隱  姜沆 序文

옛 현인의 글에 이르기를 일년지계(一年之計)는 곡식을 심는 일이요. 十年之計는 나무를 심는 일이며 百年之計는 德을 심는 일이라 하였는데, 곡식을 심는 이는 그 열매를 거두어 들일 것이요. 나무를 심는 이는 재목을 얻게 될 것이며, 덕을 심는 이는 복을 받게 됨은 필연의 이치인 것이다. 그렇지만 곡식을 심었으되 水害나 가뭄피해를 입거나 병충해로 인하여 수확을 거두지 목하는 경우도 있고, 나무를 심었으되 움이 트다 고사해 버리거나 말라죽어버리는 수도 있으니 이는 或然의 數인 것이다.

그런데 必然의 理만 있고 或然의 수(數)는 없어 자신이 받지 않으면 자손이 받게 되고, 現世가 아니면 來世에 나타남이 마치 좌계(左契)와 우부(右符)가 꼭 들어 맞는것 같고(두쪽으로 쪼개어 나누어 가졌다가 후일에 맞추어 증거로 삼는 符信을 예로 든것)아침에 물건을 놓아 두었다가 저녁에 이를 취함과 같은 것이 있으니 이는 덕을 심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날 大家世族들이 대대로 큰 벼슬이 줄을 잇고, 열두 대문에 호화스런 수레를 지니고 만석의 부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고 세인들은 다만 그 으리으리함을 부러워할 따름, 오늘의 복이 옛날에 씨 뿌렸던 것을 수확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나, 양성이씨에서 감탄하는 바가 있으니 양성이씨는 上柱國公이 중국에서 功을 세우고 고려에서 높은 벼슬에 오른 이후, 그 자손이 代代將相으로 王氏를 도왔고 우리나라(朝鮮朝)에 이르러서도 끊이지 않고 번져 사방에서 위세를 떨치니 저 중국에서 四代에 五公이 나왔다는 袁氏며 八代에 三事(三公)가 나온 肅氏며 出將入相의 인재를 무수히 배출한 王氏 및 韓氏와 더불어 수천년 사이를 두고 자웅을 겨루고 있으니 참으로 장관이로다.

세상 사람들은 양성이씨가 흥왕(興旺)한 것은 주국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뿐 주국공 이전에 累代를 德을 심어왔고, 주국공 이후는 다만 씨뿌렸던 것을 거두고 있을 따름임을 모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지의 보살핌이 어찌 이 양성이씨 한집에만 이렇듯 편중될 수 있단 말인가?

양성이씨 후예로 함풍(咸豊)에 거주하는 덕현(德顯)과 진명(晋明)은 나의 제자인데 모두 덕을 좋아하고 글도 잘하며 사람됨이 忠信하여 인격이 확립되고 사회에 기반이 선 사람들인데 천리건너 양성까지 가서 일가를 찾아 족보를 모셔오니 조상의 功業을 넓히고 家門을 대대로 빛내고자 하는 뜻 가히 誠勤하다 하겠다.

柱國公後 七世에 壁上三韓功臣 春富가 이어 그 따님이 목은(牧隱 李穡)의 아들 鍾學에게 출가하였는데 安관찰사 崇孝는 그 분의 사위이다. 그런데 우리 晉山 文良公(강희맹, 성종조 좌찬성 문장가 수은의 5代祖)은 또 安公의 사위가 되니 나 역시 양성이씨의 외손인 셈이다.

그러니 양성이씨가 족보를 닦는다는데 어찌 情이 없을손가 하물며 이 두 사람이 서문을 부탁하는 마당에 벼슬에서 물러났다는 핑계로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양성이씨의 功業은 이미 國史에 실려 있고 그 세대는 족보에 갖추어져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무어라 거듭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萬曆丙午(선조39년 1606년) 3월 上旬에 菁川後人 姜沆 序함

(족보에 실린 이 서문에는 간혹 누락된 말이 있었는데 三修時에 함평 宗人의 家乘에서 正本을 얻었으므로 누락처를 보완하여 入錄하였다. 또 宗丈 진명씨가 쓴 서문도 있으나 이는 私藏 초본임으로 여기에는 수록치 않았음

강항의 호는 수은, 본관은 晋州, 강희맹의 5대손, 成渾의 門人, 丁酉再亂때(1597) 남원에서 分戶曹判書 이광정의 종사관으로 군량보급에 진력 남원 함락 후 고향 영광에서 의병을 모아 싸우다 이순신의 수하로 돌아가기 위하여 남행도중 왜병의 포로가 되어 오사카, 교토에 가서 그곳 고승들과 교유하며 儒學을 가르쳐 일본 성리학의 元祖가 되었으며 한편, 敵國의 地理 軍事 情勢를 인편으로 밀송하였으니 이것을 집록한 것이 유명한 간양록(看羊錄)이다.


#양성이씨#陽城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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