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예안김씨(禮安金氏)2021-09-1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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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는...
 시조(始祖)는 김상(金尙).고려조(高麗朝)에 호장(戶長)을 지냈다.그의 선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을축보(乙丑譜)" 서문에도 예안김씨(禮安金氏)의 선계는 선성(宣城)에서 나와 고려조(高麗朝)에 현달한 씨족으로 되었다고만 적혀 있다. 그래서 세록편(世綠編)에도 김상(金尙) 이하 4대에 걸쳐 호장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고 5대손 김성세(金成世)부터 명사로 등장하고 있다.보승낭장(保勝郎將) 김로(金輅)를 중시조(中始祖)로 한다.  "을묘보(乙卯譜)" 서문에 예안김씨는 고려조에 밀직공(密直公; 成世)으로부터 시작,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문절공(文節公;淡)과 민절공(敏節公; 륵)이 크게 활약했다는 기사가 있다.선성(宣城; 예안의 옛 지명)에서 나왔으므로 선성김씨(宣城 金氏)라고도 한다.

分布와 人口
 시조(始祖) 김상(金尙)의 대 이래로 관향(貫鄕)인 경북 안동(慶北 安東)의 예안(禮安)에 세거하였던 사실이 "계축보(癸丑譜)"에 나타나 있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집성촌은 경북 영주시 문수면 水島리(무섬)로 현재 40여 가구 2백여명의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인구는 1만 5천명 남짓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 외에 예안 김씨 일가가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살고 있는 곳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상리/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연박리/ 충청남도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 충청남도 천안시 동면 구도리/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어양리/ 전라남도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석포리 

  판서공 김소량의 후손은 대체로 경상(영주) 및 충청(제천) 일대에, 참판공 김숙량의 후손은 충청(공주) 및 호남(전주) 일대에, 학생공 김중량의 후손은 황해(개성) 및 강원(양구) 일대에 세거(世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本貫地
 예안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매곡현(買谷縣)이다.신라 때 선곡(善谷)으로 고쳐 나령군(奈寧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고 고려조(高麗朝) 태조(太祖) 때 지금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현종(玄宗) 때 길주(吉州)에 속하였으나 우왕 때 군(郡)으로 독립,뒤에 주(州)로 되었으며 공양왕 때는 감무(監務)를 두었다.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 때 현감(縣監)을 두었고 1895년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에는 군을 없애고 안동(安東)에 합하였다.주요 성씨로는 김,이,우,조,안,박,정씨 등이 있다. 선성(宣城)은 예안(禮安)의 옛이름이다.

家門의 歷史
 5세 김성세(金成世)는 고려조의 인물로 봉익대부(奉翊大夫:종2품)밀직사상호군(密直使上護軍)을 지냈다.역시 고려때 좌우위보승낭장(左右衛保勝郎將)을 지낸 8세 김로(金輅)에게는 김소량(金小良),김숙량(金叔良), 김중량(金仲良)의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김소량(金小良)에게는 증(증), 담(淡), 홍(洪) 세 아들이 있어서, 각각 교리공파(校吏公派),문절공파(文節公派),통찬공파(通贊公派)를 형성하였다.

김숙량(金叔良)의 아들들 역시 신(新)은 참판공파(參判公派), 지(祗)는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비(枇)는장령공파(掌令公派)를 형성하면서 높은 관직에 올랐고, 김중량(金仲良)의 후손들은 학생공파(學生公派)를 이룩하였다.

家門을 빛낸 분들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의 명신(名臣) 담(淡)은 로(輅)의 손자(孫子)로 역수(歷數)와 관상(觀象)에 밝아「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만들었으며 일영대(日影臺)와 천문지(天文誌)·전세(田稅)·구등(九等)에 관한 법을 모두 어명에 따라 선정(選定)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여섯 번이나 소(疏)를 오려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세종은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삼고 천담복(淺淡服 : 엷은 옥색의 제복)을 내리며 "집에 있을 때에는 상복을 입고 조정에 와서는담복을(淡服)을 입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문절(文節)의 시호(諡號)를 받아 문절공파(文節公派)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1456년(세조 2)에 급제한 수손(首孫)은 숙량(叔良)의 손자(孫子)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과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역임하며「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참여했다.
  한편 담(淡)의 현손(玄孫) 늑(륵)은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 말을 잘하여 선조(宣祖) 때 직신(直臣)으로 유명했으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백성들을 위우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광해군(光海君)이 생모(生母) 김씨(金氏)를 위해 궐내에 봉자전(奉慈殿)을 세우려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당하자 영주(榮州)로 낙향하여 구학정(龜鶴亭)과 천운정(天雲亭)을 지어놓고 당대의 석학(碩學) 이수광(李粹光)·한석봉(韓石峰)등과 교유했다. 민절(敏節)의 시호를 받았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수손(首孫)의 증손(曾孫) 해(邂)가 임진왜란 때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아들 경원(慶遠)과 함께 싸움에서 순절하여 이름을 떨쳤다. 김해의 자는 사회(士晦),호는 운송(雲松)으로 선무원종 1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으며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이 때 함께 순절한 차남 성균진사(成均進士) 경원(慶遠)에게도 효자정려(孝子旌閭)가 내려졌으며 난중(亂中)에 부인과 노비도 함께 순절하였으므로 열녀문(烈女門)과 충복문(忠僕門)이 함께 내려져서 한 가문에 정려(旌閭)가 넷이나 되는 일문사정(一門四旌)의 정려로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영조(英祖) 때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약연(若鍊)은 뛰어난 문장(文章)으로 「두암집(斗庵集)」을 남겨 선비들의 학문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었고 숙종(肅宗) 때의 사간(司諫)으로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했던 태일(兌一),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해일(海一)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태일의 자는 추백(秋伯),호는 노주(蘆洲)이며 관직은 사간(司諫)에 이르렀고 저서로 「노주집(蘆洲集)」이 있다.

그 외에 김흠조(金欽祖)의 자는 경숙(敬叔).150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검열(檢閱)을 지냈으며 봉교(奉敎)로서 왕에게 상소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입은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 등을 신원케 하였으며 벼슬이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다.

#예안김씨#禮安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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