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창녕 조씨(昌寧曺氏)2021-09-1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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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조씨(昌寧曺氏)의 시조및 본관의 유래 :
시조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이다.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가 이상이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계룡은 자라서 진평왕의 부마도위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창녕으로 하였다. 이후 문헌의 실전으로 조계룡의 후손 조겸을 1세로 하고 있다. 조겸은 고려 태조의 딸 덕공 공주와 혼인하고 대악서승을 지냈다.「창녕 조씨가첩」에 의하면 조겸의 손자인 조연우로부터 10세 조자기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를 배출하여 가문의 번성을 누린 것으로 전한다.

- 유명한 조상 :
조 겸 : 고려 때 대악서승을 역임하였다.

조의생 : 고려 때 태학사를 지냈으며,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遺臣)을 이르는 말.

조한룡 : 시호는 청간. 고려 때 시중을 역임하였다.

조민수 : 공양왕때 순주부사로 여러 장군들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2등공신에 올랐다. 도순문사,전리 판서,동지밀직사사 등을 역임. 안무사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비했으며, 충근보리공신에 녹훈되었다. 우왕 초 경상도 도순문사로 왜구를 물리쳤고, 지문하부사,서북면 도체찰사,문하평리,문하시중을 역임, 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요동정벌군의 좌군 도통사로 출정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중요 역할을 하여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에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 도통사가 되었다.

조희직 : 고려조에 을 지냈으며,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조상치 : 시호는 충정. 길 재의 문인. 세종때 증광문과에 장원, 정언이 되고, 이어 집현전에 들어가 수학했다. 세종·문종·단종의 세 왕을 섬겨 성삼문·박팽년과 함께 특별한 총애를 받고, 단종때 집현전 부제학에 발탁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노산조 부제학 포인 조상치지묘」라는 묘비를 미리 써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히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임종 때 자기 시문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조석문 : 시호는 공간, 동부승지가 되어 세조의 즉위에 공헌하여 좌익 3등공신에 녹훈, 도승지에 승진했다. 창녕군에 봉해졌다. 이시애의 난 때 병마부총사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 1등공신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조숙기 : 시어에 능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조 좌랑으로 윤필상의 건주 정벌에 종사관으로 수행, 전략가로서 많은 공을 세워 3관등이 특진 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문무를 겸비했고「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조 위 : 시호는 문장. 김종직의 문인.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차례 시제에 장원하여 문명을 떨쳤다. 여러 관직을 거쳐 어머니 봉양관계로 사퇴를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고향의 수령인 함양 군수에 전임되어 선정을 베풀고 수차 표리,녹비 등을 상으로 받았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글씨를 잘 썼다. 황간의 송계서원, 금산의 경렴서원에 제향되었다.

조 신 :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 성종때 통신사 신숙주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문명을 떨쳤으며 돌아와 왕이 친히 글을 지어 시험하고 시를 짓게 했는데, 그 글이 매우 훌륭하여 사역원정으로 발탁되었고, 중종의 명으로「이륜행실도」를 편찬했다. 외국어에도 뛰어나 역관으로 명나라에 일곱 번, 일본에 세 번 다녀왔고, 명나라에 갔을 때 안남국 사신과 시로 수창, 외국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만년에는 은퇴하여 금산에 거주,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조한보 :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나 1473년(성종 4) 생원 임지,최희철등과 함께 성균관 관원들을 배척하여 동맹유학을 했다가 장형을 받고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이후 이언적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 스승과 무극,태극에 대한 의견 교환을 4, 5 차나 거듭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널리 고서를 통독하여 학식이 풍부했으며 선학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조치우 : 진사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연산군의 학정에 불만을 품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주종때 대구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고 뒤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효행이 뛰어나 왕으로부터「소학」과 옥비를 하사받았으며, 55세에 모친의 봉양을 위해 사직했다.

조언형 : 생원으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조윤손 : 시호는 장호. 무과에 급제. 류 빈,윤상로 등과 협의하여 연산군을 폐하려 했으나, 박원종,성희안 등의 반정이 먼저 성공함으로써 공신녹권만을 받았다.
웅천 현감때 남해안 일대에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했고, 갑산부사때 야인을 토벌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때에는 여연,무창에 들어와 정착하려 하는 야인을 몰아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야인의 침입을 격퇴했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조 현 : 무과에 급제. 을묘왜변때 가리포 첨절제사로서 호남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병조 참의에 추증되고 능주의 포충사에 제향되었다.

조 식 : 호는 남명, 시호는 문정.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지리산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 여러 대가의 서적을 섭렵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했다. 성명을 닦은 후의 실행을 주장하고 경의를 신조로 하여 반궁체험과 지경실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왕의 부름으로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 두류산 덕산동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고, 수차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했다. 문하에서 김효원,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선조때 대사간에 추증, 광해군 때에 영의정이 더해졌다. 진주의 덕천서원, 김해의 신산서원, 삼가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 등이 있다.

조광익 : 이황의 문인.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문과중시에 장원, 의금부 도사에 이르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조호익 : 호는 지산, 시호는 정간, 뒤에 문간으로 개시.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했다.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 지방에서 학풍을 크게 떨쳤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의 청으로 풀려나와 소모관(召募官)이 되고 군민을 규합,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 받았다. 여러 관직을 거친후 정유재란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 뒤에 선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죽은 뒤 이조판서에 추증, 영천의 지봉서원과 도잠서원, 성천의 학령서원, 강동의 청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조사남 : 임진왜란때 곽재우의 의병에 가담. 공을 세웠으나 지산에서 전사했다.

조우인 : 호는 매호,이재. 진사,참봉을 지낸 뒤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고궁의 황폐함을 보고 시를 지은 것이 백대연 등 이이첨 일당에 의해 대혁의 뜻이 있다는 무고를 받아 투옥당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다. 글씨,그림,시에 능해 삼절이라 일컬어졌으며, 글씨는 특히 진체와 초서에 뛰어났다.

조명욱 :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조명교 : 호는 담운. 사마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사헌,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했다. 덕해오가 학문으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비문을 썼다

조문수 : 호는 설정. 좌승지,강원도 관찰사등 역임. 하흥군에 봉해젔으며 시와 해서에 능했다.

조행립 :
호는 태호. 김장생의 문인. 여러 관직을 거친후 고향에 내려가 향약을 제정하여 풍속의 순화에 노력하고 뒤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죽었다. 영암의 구림사에 제향되었다.

조윤형 : 호는 송하옹.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광주목사,호조참의,지돈령부사 등을 역임.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풀,돌,대나무를 잘 그렸다.

조윤대 : 호는 동포.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형조 판서,예문관 제학,대사헌,예조판서,판의금부사,이조 판서,황해도 관찰사,한성부 판윤,판돈령부사,지중추부사 등 역임.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조세걸 :
호는 패주,수천. 첨절제사역임. 중국의 명적을 많이 수집 소장했고, 김명국의 화법을 후세에 전했다. 산수,인물을 잘 그렸고, 그의 단채는 보통 화가의 수묵도말과 다른 독자적 수법을 보였으며 또한 섬세·정교한 필치와 선명한 색채로써 명말,청초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조성환 : 호는 청사. 26세 때 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 사형을 선고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칙명으로 3년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참위에 임관되었으나 사직하고, 1907년(융희 1)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의 만주 방문을 계기로 암살하려다 실패,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석방되어 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군무차장을 지내고, 다시 만주에 가서 서일,계화 등과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부장에 취임, 청산리 싸움 후에 독립운동단체가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될 때 외교부장이 되고, 이어 신민부를 조직, 외교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을 거쳐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으로 8년간 재직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에는 임시정부의 군사특파원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중국 정부와 협의, 광복군 창설의 기초를 닦았다.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최고통수부 판공처장으로 있다가 해방으로 귀국,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조만식 : 호는 고당. 정치가,독립운동가.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M.K.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교장이 되었다.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김성수,송진우와 함께 연정회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그 후 숭인중학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하다가 한때 구금되었다.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하였다. 그 후 6·25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공산당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1991년 유발(遺髮)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조봉암 : 호는 죽산. 3.1 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복역,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 중앙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에 가담,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이어

- 창녕 조씨(昌寧曺氏)의 시조및 본관의 유래 :
시조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이다.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 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가 이상이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계룡은 자라서 진평왕의 부마도위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창녕으로 하였다. 이후 문헌의 실전으로 조계룡의 후손 조겸을 1세로 하고 있다. 조겸은 고려 태조의 딸 덕공 공주와 혼인하고 대악서승을 지냈다.「창녕 조씨가첩」에 의하면 조겸의 손자인 조연우로부터 10세 조자기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를 배출하여 가문의 번성을 누린 것으로 전한다.

- 유명한 조상 :
조 겸 : 고려 때 대악서승을 역임하였다.

조의생 : 고려 때 태학사를 지냈으며,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遺臣)을 이르는 말.

조한룡 : 시호는 청간. 고려 때 시중을 역임하였다.

조민수 : 공양왕때 순주부사로 여러 장군들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2등공신에 올랐다. 도순문사,전리 판서,동지밀직사사 등을 역임. 안무사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비했으며, 충근보리공신에 녹훈되었다. 우왕 초 경상도 도순문사로 왜구를 물리쳤고, 지문하부사,서북면 도체찰사,문하평리,문하시중을 역임, 창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요동정벌군의 좌군 도통사로 출정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중요 역할을 하여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에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 도통사가 되었다.

조희직 : 고려조에 을 지냈으며,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조상치 : 시호는 충정. 길 재의 문인. 세종때 증광문과에 장원, 정언이 되고, 이어 집현전에 들어가 수학했다. 세종·문종·단종의 세 왕을 섬겨 성삼문·박팽년과 함께 특별한 총애를 받고, 단종때 집현전 부제학에 발탁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노산조 부제학 포인 조상치지묘」라는 묘비를 미리 써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히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임종 때 자기 시문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조석문 : 시호는 공간, 동부승지가 되어 세조의 즉위에 공헌하여 좌익 3등공신에 녹훈, 도승지에 승진했다. 창녕군에 봉해졌다. 이시애의 난 때 병마부총사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 1등공신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조숙기 : 시어에 능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이조 좌랑으로 윤필상의 건주 정벌에 종사관으로 수행, 전략가로서 많은 공을 세워 3관등이 특진 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문무를 겸비했고「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조 위 : 시호는 문장. 김종직의 문인.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차례 시제에 장원하여 문명을 떨쳤다. 여러 관직을 거쳐 어머니 봉양관계로 사퇴를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다가 고향의 수령인 함양 군수에 전임되어 선정을 베풀고 수차 표리,녹비 등을 상으로 받았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더불어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글씨를 잘 썼다. 황간의 송계서원, 금산의 경렴서원에 제향되었다.

조 신 :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를 잘 지었다. 성종때 통신사 신숙주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문명을 떨쳤으며 돌아와 왕이 친히 글을 지어 시험하고 시를 짓게 했는데, 그 글이 매우 훌륭하여 사역원정으로 발탁되었고, 중종의 명으로「이륜행실도」를 편찬했다. 외국어에도 뛰어나 역관으로 명나라에 일곱 번, 일본에 세 번 다녀왔고, 명나라에 갔을 때 안남국 사신과 시로 수창, 외국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만년에는 은퇴하여 금산에 거주,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조한보 :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으나 1473년(성종 4) 생원 임지,최희철등과 함께 성균관 관원들을 배척하여 동맹유학을 했다가 장형을 받고 과거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이후 이언적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 스승과 무극,태극에 대한 의견 교환을 4, 5 차나 거듭하여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널리 고서를 통독하여 학식이 풍부했으며 선학에도 일가견을 가졌다.

조치우 : 진사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연산군의 학정에 불만을 품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주종때 대구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고 뒤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효행이 뛰어나 왕으로부터「소학」과 옥비를 하사받았으며, 55세에 모친의 봉양을 위해 사직했다.

조언형 : 생원으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조윤손 : 시호는 장호. 무과에 급제. 류 빈,윤상로 등과 협의하여 연산군을 폐하려 했으나, 박원종,성희안 등의 반정이 먼저 성공함으로써 공신녹권만을 받았다.
웅천 현감때 남해안 일대에 창궐하는 왜구를 격파했고, 갑산부사때 야인을 토벌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때에는 여연,무창에 들어와 정착하려 하는 야인을 몰아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야인의 침입을 격퇴했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조 현 : 무과에 급제. 을묘왜변때 가리포 첨절제사로서 호남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병조 참의에 추증되고 능주의 포충사에 제향되었다.

조 식 : 호는 남명, 시호는 문정.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시 유학계의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지리산에 은거하며 성리학을 연구, 여러 대가의 서적을 섭렵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룩했다. 성명을 닦은 후의 실행을 주장하고 경의를 신조로 하여 반궁체험과 지경실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왕의 부름으로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 두류산 덕산동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고, 수차 조정에서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했다. 문하에서 김효원,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선조때 대사간에 추증, 광해군 때에 영의정이 더해졌다. 진주의 덕천서원, 김해의 신산서원, 삼가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 등이 있다.

조광익 : 이황의 문인.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문과중시에 장원, 의금부 도사에 이르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조호익 : 호는 지산, 시호는 정간, 뒤에 문간으로 개시.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했다.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 지방에서 학풍을 크게 떨쳤다. 임진왜란 때 류성룡의 청으로 풀려나와 소모관(召募官)이 되고 군민을 규합,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 받았다. 여러 관직을 거친후 정유재란 때 다시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 뒤에 선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했다. 죽은 뒤 이조판서에 추증, 영천의 지봉서원과 도잠서원, 성천의 학령서원, 강동의 청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조사남 : 임진왜란때 곽재우의 의병에 가담. 공을 세웠으나 지산에서 전사했다.

조우인 : 호는 매호,이재. 진사,참봉을 지낸 뒤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고궁의 황폐함을 보고 시를 지은 것이 백대연 등 이이첨 일당에 의해 대혁의 뜻이 있다는 무고를 받아 투옥당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다. 글씨,그림,시에 능해 삼절이라 일컬어졌으며, 글씨는 특히 진체와 초서에 뛰어났다.

조명욱 :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다가 과로로 죽었다.

조명교 : 호는 담운. 사마시를 거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사헌,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했다. 덕해오가 학문으로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비문을 썼다

조문수 : 호는 설정. 좌승지,강원도 관찰사등 역임. 하흥군에 봉해젔으며 시와 해서에 능했다.

조행립 :
호는 태호. 김장생의 문인. 여러 관직을 거친후 고향에 내려가 향약을 제정하여 풍속의 순화에 노력하고 뒤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죽었다. 영암의 구림사에 제향되었다.

조윤형 : 호는 송하옹.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광주목사,호조참의,지돈령부사 등을 역임.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풀,돌,대나무를 잘 그렸다.

조윤대 : 호는 동포.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형조 판서,예문관 제학,대사헌,예조판서,판의금부사,이조 판서,황해도 관찰사,한성부 판윤,판돈령부사,지중추부사 등 역임.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조세걸 :
호는 패주,수천. 첨절제사역임. 중국의 명적을 많이 수집 소장했고, 김명국의 화법을 후세에 전했다. 산수,인물을 잘 그렸고, 그의 단채는 보통 화가의 수묵도말과 다른 독자적 수법을 보였으며 또한 섬세·정교한 필치와 선명한 색채로써 명말,청초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조성환 : 호는 청사. 26세 때 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 사형을 선고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칙명으로 3년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참위에 임관되었으나 사직하고, 1907년(융희 1) 안창호,이갑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의 만주 방문을 계기로 암살하려다 실패,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1년만에 석방되어 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군무차장을 지내고, 다시 만주에 가서 서일,계화 등과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부장에 취임, 청산리 싸움 후에 독립운동단체가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될 때 외교부장이 되고, 이어 신민부를 조직, 외교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 뒤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을 거쳐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으로 8년간 재직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에는 임시정부의 군사특파원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중국 정부와 협의, 광복군 창설의 기초를 닦았다.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최고통수부 판공처장으로 있다가 해방으로 귀국,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조만식 : 호는 고당. 정치가,독립운동가.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M.K.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교장이 되었다.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김성수,송진우와 함께 연정회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그 후 숭인중학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하다가 한때 구금되었다.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하였다. 그 후 6·25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공산당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1991년 유발(遺髮)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조봉암 : 호는 죽산. 3.1 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복역,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 중앙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에 가담,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이어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이해 11월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이해 11월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창녕조씨#昌寧曺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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