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경주정씨 [慶州鄭氏]2021-09-15 00:30
작성자 Level 10

시조(始祖):

  우리나라 정씨(鄭氏)의 시원(始原)을 이룬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진한국(辰韓國) 사로(斯蘆)의 6촌(村) 중 자산진지촌장 (觜山診支村長) 지백호(智伯虎)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경주정씨(慶州鄭氏):

 

「삼국사기(三國史記)」 와 「동경지(東京誌)」에 의하면, 지백호(智伯虎)는 기원전 117년(한무제 원수 6) 경주(慶州) 화산(花山)에 강림(降臨)하여 부족국가(部族國家)이던 사로(斯蘆)의 여섯 고을 중 자산진 지촌을 다스리면서 신라(新羅) 건국(建國)에 모체(母體)를 이루었고,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 그의 현손 대(玄孫代)에 와서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 받을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改稱)되면서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下賜)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문화(文和)로 시호를 받았고, 656년(태종무열왕 3)에 감문왕에 추봉(追封)되었다.

그 후 경주 정씨는 시조의 후대로 내려오면서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등 크게 4파로 갈라졌고, 지손(支孫) 계통에서는 30여 본(本)으로 본적(本籍)되어 우리 나라 모든 정씨(鄭氏)의 대종(大宗)을 이루었다.

2000년 통계청이 조사한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정씨(慶州鄭氏)는 전국에 총 94.465가구 303.44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본관(本貫)의 유래(由來):

  경주(慶州)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기원전 57년 이 곳에 6촌(六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古代國家)를 형성, 국호(國號)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蘆), 사라(斯羅)로 하고. 수도(首都)를 금성(金城)이라 하였으나 수도명과 국명을 동일시 하였다.

서기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金氏)의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국호(國號)를 계림(鷄林)으로 칭하기도 하였으나 별칭으로 사용하였으며, 307년(기림왕 10)에 최초로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하였고,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11) 별칭(別稱)으로 낙랑군(樂浪郡)이라 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 제도가 실시되면서 동경(東京)을 설치하고 충렬왕(忠烈王)때 계림부(鷄林府)로 개칭하였다. 1413년(태종 13) 계림부를 경주부(慶州府)로 개칭하고, 여러 차례 변천을 거쳐 1895년 경주군(慶州郡), 1955년에 는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정년(鄭年):

  신라(新羅) 때 무장(武將)으로 826년(흥덕왕 1) 좌복야(左僕射)로서 뛰어났고 특히 잠수술(潛水術)에 능하였다. 장보고(張保皐)와 함께 당(唐)나라에 건너가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어 무예(武藝)로 이름을 떨치다 귀국. 먼저 귀국하여 청해진(淸海鎭) 대사(大使)로 있는 장보고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838년(민애왕 2) 장보고(張保皐)의 군사 5천 명율거느리고 아찬(阿湌) 김우징(金佑徵: 신무왕)을 도와 금명(金明)의 관군을 무찌르고 신무왕(新武王)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후 장보고의 뒤를 이어 청해진(淸海鎭)을 지켰다.

 

정문(鄭文):

  청렴검소(淸廉儉素), 공평정직(公平正直)하였으며, 벼슬은 대아찬(大阿湌)을 지냈고 기자묘(箕子廟)를 세울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정우성(鄭友聖):

  신라에서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을 지냈다.

정사맹(鄭師孟):

  고려(高麗)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정유천(鄭遊天):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고려에서 도관찰사(都觀察使) 겸 안무지휘사(按撫指揮使)를 역임 하였다.

 

정현성(鄭玄成): 시호(諡號)는 경렬(景烈)

 

고려조(高麗朝)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금오위 장군(金吾衛將軍)을 역임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封)해졌다.

 

정심(鄭審):

  고려(高麗) 때 전객(典客) 서령(署令),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역임하였다.

 

정달강(鄭達康):

  고려조(高麗朝)에 추밀원(樞密院) 지주사(知奏事) 좌복야(左僕射) 등을 거쳐 이부(吏部) 상서(尙書)에 오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정경문(鄭景文):

  고려(高麗) 때 흥위위 상장군(興威衛上將軍)을 지냈다.

 

정성지(鄭性之):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부사(密直副使), 이부(吏部)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정균지(鄭均之):

  고려(高麗)에서 좌복야(左僕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정손경(鄭遜卿): 초명(初名)은 원녕(元寧), 호(號)는 동양(東陽)

  고려 예종(睿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 이부(吏部) 상서(尙書)로 월성군(月城郡)에 봉해지고. 판밀직원사(判密直院使), 응양위(應揚衛)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정극중(鄭克中):

  고려(高麗)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광록대부(光祿大夫)로 검교(檢校) 첨의평리(僉議評理), 예부(禮部) 상서(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정극온(鄭克溫): 호(號)는 익렬(翼烈).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이부(吏部) 상서(尙書)를 지냈으며, 재직(在職) 시(時) 북벌남정(北伐南征)에 대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어사대부(御史大夫), 참지정사(叅知政事)등을 역임하였다.

 

정필(鄭弼): 호(號)는 송포(松圃).

  고려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정진후(鄭珍厚): 호(號)는 매포(梅圃).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예부(禮部) 상서(尙書) 극중(克中)의 아들.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정당문학(政堂文學), 병부(兵部) 상서(尙書), 판군기시윤(判軍器寺尹) 등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이학(理學)과 문장(文章)으로 유명했다.

 

정금실(鄭金實):

  고려(高麗)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오르고 검교(檢校) 대장군(大將軍)으로 치사(致仕)했다.

 

정재(鄭材):

  고려조(高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올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이부(吏部)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정보기(鄭寶奇): 시호(諡號)는 창렬(昌烈).

  고려(高麗) 때 병마(兵馬) 도원수(都元帥)를 거쳐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역임하고, 태자(太子) 소보(少保) 대장군(大將軍)으로 치사(致仕)했다.

 

정이기(鄭頥奇):

  고려조(高麗朝)에 월성위(月城尉)에 봉(封)해졌다.

 

정원좌(鄭元佐):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중랑장(中郞將)을 거쳐 우복야(友僕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강주군(康州君)에 봉(封)해졌다.

 

정위(鄭偉):

  고려 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형부(刑部) 원외랑(員外郞),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호부(戶部) 상서(尙書),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하였다.

 

정교(鄭橋):

  1309년(충선왕 1)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사재경(司宰卿)을 지냈다.

 

정을린(鄭乙麟):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판도(版圖) 판서(判書)를 지냈고, 삼사(三司) 좌윤(左尹)에 추증(追贈)되었다.

 

정현영(鄭玄英): 호(號)는 추강(秋江).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고려 때 문하시랑(門下侍郞), 호부(戶部) 상서(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정공단(鄭公但):

  1313년(충선왕 5) 문과에 급제한 후 판형부상서(判刑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본명은 공단(公旦)인데 조선 태조(太祖)의 휘(諱)를 범하게 되기 때문에 인자(人子)를 붙여서 단(但) 자로 하였으며, 김주정(金周鼎) 둥 31인(人)과 함께 10운시(十韻詩)를 모았다.

 

정광한(鄭光漢):

  고려조(高麗朝)에 단성(丹城) 군수(郡守)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정진(鄭璡): 호(號)는 옥봉(玉峯).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중현대부(中顯大夫)에 올랐다.

 

정주(鄭珠):

  고려(高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정종철(鄭宗哲);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이조(吏曹) 전서(典書)를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정종보(鄭宗輔):

  고려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정자초(鄭子楚):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유비창(有備倉) 승(承)을 역임하였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吏曹) 판서(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증직(贈職),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정기(鄭其): 자(字)는 자군(子君)

  조선초(朝鮮初)에 은일(隱逸)로 종묘서(宗廟署) 주부(主簿)를 거쳐 의성(義城) 현감(縣監),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역임하고, 호조(戶曹)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정극부(鄭克扶):

  고려조(高麗朝)에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정인용(鄭仁龍): 호(號)는 송재(松齋).

  고려 때 보승(保承) 중랑장(中郞將)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經莚) 참찬관(叅贊官)을 역임하였고,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형조(刑曹) 참판(叅判)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사하고 고려조에 절의(節義)를 지켰다.

 

정사지(鄭思智): 호(號)는 경재(敬齋).

  고려 때 춘추관(春秋館) 대제학(大提學)으로 중국에 들어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그는 정몽주(鄭夢周) 이 색(李 穡)과 더불어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여 후세 유학(儒學)의 정립에 기틀이 되었다.

 

정사우(鄭思友):

  고려조(高麗朝)에 병부(兵部)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정사계(鄭思啓):

  고려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예조(禮曹) 참의(叅議),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정휘(鄭暉): 1332(충숙왕 1)~?.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대제학(大提學),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 등을 거쳐 1358년(공민왕 7)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 1360년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 都指揮使)를 지내고, 그후 문하시중(門下侍中),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1363년(공민왕 12) 일기도주(一岐島主)가 모반할 때 도원수(都元帥)로서 이를 토벌하여 도첨의(都僉議) 정승(政丞)이 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후에 아들 희계(熙啓)가 조선 개국(朝鮮開國)에 커다란 공을 세우자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정인조(鄭仁祚):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고려(高麗) 때 병부(兵部) 시랑(侍郞)을 지내고 조선조(朝鮮朝)에 대장군(大將軍)으로 진산(珍山) 동쪽 석문(石門) 벌판에서 왜적을 대파하였으며, 조선 태조(太祖)와 같이 일본 장군 아지(阿只)를 죽이는데 공을 세웠다. 누차 대공(大功)을 세우고 순절(殉節)하니 조정에서 진산의 동편 인근 산(山)에 장사지내고 충렬(忠烈)이란 시호(諡號)를 내려주었다.

 

정인온(鄭仁溫)

  조선조(朝鮮朝)에 보문각(寶文閣)을 거쳐 이부(吏部) 상서(尙書)를 지냈다.

 

정인량(鄭仁良):

  1399년(정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및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을 역임하였다 .

 

정인공(鄭仁恭):

  조선 때 군수(郡守)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吏曹) 참의(叅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정차온(鄭次溫): 1399(정종 1)~?. 자(字)는 공후(孔厚).

  학행(學行)으초 천거되어 조산대부(朝散大夫)로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였으나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선위(禪位)하자 충신(忠臣)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며 평양(平壤) 판관(判官)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사(不仕)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진양성에 전념 하였다.

 

정차양(鄭次讓): 1424(세종 6)~?

  1452년(문종 2) 학행(學行)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봉직랑(奉直郞)을 거쳐 해남(海南) 현감(縣監)을 지냈다.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위하자 형(兄)과 더불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형제 5명이 관직에 올랐다가 일시에 다같이 돌아와 세칭(世稱) 오영교(五榮橋)라고 하였고 지금까지도 전하여지고 있다.

 

정차공(鄭次恭):

  1432년(세종 14) 문과에 합격한 후 영천(永川) 군수(郡守)를 거쳐 이조(吏曹) 참의(叅議)를 역임 하였다.

 

정차검(鄭次儉): 1427(세종 9)~?.

  조선 때 수의교위(修義校尉)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정홍덕(鄭弘德): 호(號)는 팔송(八松).

  1419년(세종 1) 무과에 급제한 후 병조(兵曹) 판서(判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빈객(左賓客) 등을 역임하였고, 1454년(단종 2) 사신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단종(端宗)이 퇴위하고 죽음을 당하자 신하(臣下)의 절개를 지켜 순절(殉節)하려 했으나 팔순(八旬) 노모(老母)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아래에 은거하며 2개의 단(壇)을 쌓아 단종(端宗)의 기일(忌日)과 사육신(死六臣)의 기일(忌日)에 분향하고 곡(哭)을 하였다.

 

정희계(鄭熙啓): 7~1396(태조 5). 시호(諡號)는 양경(良景).

  문하평리(門下評理) 휘(暉)의 아들.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대호군(大護軍)에 올랐으며, 공민왕(恭愍王)이 살해된 뒤 최 영(崔 瑩)의 막하가 되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를 거쳐 공양왕(恭讓王) 초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使)로 있다가 1390년(공양왕 1) 이 초(彛 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 이듬해 풀려 나왔다. 1392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이어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응양위(鷹揚衛) 상호군(上護軍)을 겸임했고, 이해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헌.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으로 참찬문하부사(叅贊門下府事), 팔위(八衛)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판팔위사(判八衛事), 좌참찬(左叅贊) 등을 거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죽었다.

 

정진(鄭震): 자(字)는 기원(器元). 호(號)는 운옹(耘翁).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兵曹) 참판(叅判)을 지냈고 경운(耕耘)에 뜻이 있어 호(號)를 운옹(耘翁)이라 하였다. 정극인(丁克仁)과 동서(同婿) 사이로 함께 태인(泰人)으로 낙향하여 고현내(古縣內)를 개척하였다.

 

정임(鄭霖): 호(號)는 남은(南隱).

  조선 태조(太祖)때 공조(工曹) 참의(叅議)를 역임하였으면 태종조(太宗朝)에 무안에서 유학(儒學)을 가르치며 후진 양성에 힘을썼다.

 

정제(鄭霽): 호(號)는 일청(一淸)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상산(商山) 현감(縣監)을 거쳐 이조(吏曹)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정상덕(鄭尙德):

  고려말(高麗末)에 병부(兵部) 상서(尙書)를 지냈다.

 

정한기(鄭漢磯):

  조선(朝鮮)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호조(戶曹) 판서(判書)를 지냈다.

 

정염(鄭廉):

  조선 때 생원(生員)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무안(務安)에서 유학(儒學)을 가르쳤다. 후에 이조(吏曹)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정하(鄭夏):

  조선(朝鮮) 때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를 지냈다.

 

정길상(鄭吉祥): 1368(공민왕 17)~1421(세종 3) 자(字)는 하서(賀瑞).

  1391년(공양왕 2) 문과에 급제한 후 동북병마사(東北兵馬使) 6도(道) 안무지휘사(按撫指揮使) 등을 지내고 조선조에 호조(戶曹) 참의(叅議), 좌승지(左承旨), 호분위(虎賁衛)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으나 4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자헌대부(資憲大夫) 로 이조(吏曹) 판서(判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추증(追贈)되었다.

 

정효상(鄭孝祥): 1372(공민왕 21)~1424(세종 6) 자(字)는 백원(百源).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1395년(태조 4) 문과에 합격한 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역임하였고 사망 후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에 추증(追贈)되었다.

 

정계안(鄭繼安): 자(字)는 태중(泰重), 호(號)는 현호(鉉湖).

  조선 때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역임하였고 태인(泰仁)의 무성리(武誠里)에 은거하였다.

 

정종은(鄭従殷):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으로 의영고(義盈庫) 교수(敎授)를 지냈다.

 

정종상(鄭従商):

  조선(朝鮮)에서 통덕랑(通德郞)으로 후릉(厚陵) 참봉(叅奉)을 지냈다

 

정성순(鄭成順): 일명(一名) 함순(咸順).

  조선조(朝鮮朝)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통덕랑(通德郞)으로 사옹원(司甕院) 별좌(別坐)를 거쳐 공조(工曹) 좌랑(佐郞)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戶曹) 참판(叅判)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성순(鄭成順):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吏曹) 정랑(正郞)을 지냈다.

 

정유의(鄭由義):

  조선(朝鮮) 성종(成宗) 때 음사(蔭仕)로 진잠(鎭岑) 현감(縣監)을 거쳐 봉산(鳳山) 군수(郡守)를 역임하고 공조(工曹)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정석(鄭碩):

  조선 때 호조(戶曹) 전서(典書) 겸 낭중(郎中)을 지냈다.

 

정지년(鄭知年): 1395(태조 4)~1462(세조 7). 자(字)는 유영(有永). 호(號)는 노송정(老松亭)

  1438년(세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를 거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다.

 

정흥방(鄭흥방): 자(字)는 자거(子擧).

  조선(朝鮮)에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음사(蔭仕)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거쳐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정인손(鄭仁孫):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순흥(順興), 여산(礪山)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의손(鄭義孫): 호(號)는 추파(秋波)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단성(丹城)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예손(鄭禮孫):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함경도(咸鏡道) 우후(虞侯)를 지내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정지손(鄭知孫):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흥(長興)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신손(鄭信孫):

  조선(朝鮮)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죽산(竹山)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냈다.

 

정성손(鄭誠孫):

  조선조(朝鮮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래(東萊)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경손(鄭敬孫): 자(字)는 자이(子頤).

  조선 때 상의원(尙衣院) 별제(別提)를 지냈다.

 

정귀방(鄭貴邦):

  조선(朝鮮)에서 장사랑(將仕郞)으로 김해(金海)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귀정(鄭貴廷): 호(號)는 치재(耻齋)

  조선(朝鮮) 때 장사랑(將仕郞)으로 후릉(厚陵) 참봉(叅奉)을 지냈다.

 

정빈(鄭빈):

  조선(朝鮮)에서 병절교위(秉節校尉)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유인(鄭惟仁):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목사(牧使),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정숙형(鄭叔亨): 자(字)는 성도(聖道). 호(號)는 용계(龍溪).

  조선(朝鮮) 예종조(睿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거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지평(持平)을 역임하고 양광(陽光)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정상후(鄭尙厚):

  조선(朝鮮) 때 상주(尙州) 목사(牧使)를 거쳐 좌윤(左尹)을 지냈다.

 

정효항(鄭孝恒): 증좌찬성(贈左贊成) 지년(知年)의 아들.

  1451년(문종 1) 생원(生員)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1455년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부교리(副校理)를 역임. 좌익원종 2등공신(左翼原從 二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1467년 (세조 13)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1481년(성종 12)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50권을 편찬했으며 1485년 서거정 등과「동국통감 (東國通鑑)」 57권을 편수했다. 뒤에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정효상(鄭孝常): 1432(세종 14)~1481(성종 12). 자(字)는 가구(可久), 시호(諡號)는 제안(濟安), 증좌찬성(贈左贊成) 지년(知年)의 아들.

  1451년(문종 1) 생원(生員)이 되고 1454년(단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등을 지내고, 1466년(세조 12)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68년(예종 즉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남 이(南 怡), 강 순(康 純)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3등공신(翊戴 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封)해졌다. 1469년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도승지(都承旨)가 되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오른 뒤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 공조(工曹) 판서(判書)를 거쳐 1476년 이조(吏曹) 판서(判書)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정효종(鄭孝終): 자(字)는 가정(可貞) 증좌찬성(贈左贊成) 지년(知年)의 아들.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錄勳)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예조(禮曹) 참의(叅議)에 이르렀다.

 

정효본(鄭孝本): 자(字)는 가윤(可允) 증좌찬성(贈左贊成) 지년(知年)의 아들.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 예안(禮安) 현감(縣監)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황해(黃海) 감사(監司)를 지냈다.

 

정인필(鄭仁弼):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정유필(鄭裕弼):

  조선조(朝鮮朝)에 공조(工曹) 참의(參議)를 지냈다.

 

정지례(鄭之禮): 1398(태조 7)~1465(세조 11). 자(字)는 숙부(肅夫).

  1438년(세종 20) 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정지지(鄭之智): 1400(정종 2)~1475(성종 6) 자(字)는 서부(瑞夫).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기시(軍器寺) 정(正)을 역임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예조(禮曹)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정지신(鄭之信):

  조선(朝鮮) 때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를 지냈다.

 

정성(鄭晟):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청양(靑陽) 현감(縣監), 영천(永川) 군수(郡守)를 지냈다.

 

정흠(鄭欽): 1433(세종 15)~1503(연산군 9).

  1471년(성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신창(信昌) 현감(縣監), 봉산(鳳山) 군수(郡守), 문화(文化) 현령(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정수덕(鄭守德): 1435(세종 17)~1507(중종 2). 자(字)는 군행(君行)

  조선(朝鮮)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석성(石城) 현감(縣監)을 역임하였으며. 예조(禮曹)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정문덕(鄭文德): 1438(세종 20)~1509(중종 4).

  1461년(세조 7)에 사마시(司馬試) 급제 후 40년간을 병이들어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이르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를 지냈다.

 

정숭덕(鄭崇德): 1439(세종 21)~1507(중종 2). 1

  462년(세조 8) 둘째형 문덕(文德)과 함께 나란히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1477년(성종 8) 문천(文川) 군수(郡守) 및 북청진관(北靑鎭管)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에 이르렀다.

 

정견(鄭堅): 1427(세종 9)~1514(중종 9). 자(字)는 자유(子柔). 호(號)는 죽당(竹堂).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62년(세조 8) 문과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戶曹) 참판(?判)을 역임하였으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6촌 승조(承祖)가 부고죄(不告罪)로 화를 당하자 호남(湖南) 능주(綾州)로 피하여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후에 병조(兵曹) 판서(判書)에 추증(追贈) 되었다

 

정승조(鄭承祖): 자(字)는 술이(述而). 문덕(文德)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감찰(監察)이 되고 검열(檢閱)에 재직중,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로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 풀려 나와 은퇴. 학문연구로 일생을 보냈다.

 

정지운(鄭之雲): 1509(중종 4)~1561(명종 16). 자(字)는 정이(靜而). 호(號)는 추만(秋巒). 인필(仁弼)의 아들.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의 문인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일찍이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여 조화(造化)의 이(理)를 규명한 뒤에 한성(漢城)에서 이 황(李 滉)을 만나 수정(修正)을 받았다. 이것이 뒤에 사칠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되었다. 고양(高揚)의 문봉서원(文峰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정구(鄭구): 자(字)는 서로(瑞老).

  조선(朝鮮)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용양위(龍?衛) 좌부장군(左部將軍)을 역임하고. 선무 2등공신(宣武 二等功臣)에 책록(冊錄)되었다.

 

정진업(鄭振業): 자(字)는 백흥(伯興). 호(號)는 국송당(菊松堂).

  조선(朝鮮)에서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였다.

 

정광업(鄭光業): 자(字)는 중흥(仲興).

  조선 때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역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을 일으켰다.

 

정홍업(鄭弘業): 자(字)는 계흥(季興).

  조선조에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정방경(鄭邦經):

  조선(朝鮮)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의금부(義禁府) 경력(經歷)을 역임하였다.

 

정방강(鄭邦綱):

  조선조(朝鮮朝)에 진사(進士)에 입격하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를 역임 후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황주진관(黃州鎭管)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정방적(鄭邦績): 자(字)늘 공보(功甫)

  조선(朝鮮)에서 거창(居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정방기(鄭邦紀): 자(字)는 언보(彦甫).

  조선조에 음보(蔭補)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정방광(鄭邦?):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정방적(鄭邦績):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정세호(鄭世豪): 1536(중종 31)~1567(명종 22).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내자시(內資寺), 사복시(司僕寺), 군자감(軍資監)의 주부(主簿)를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삭녕(朔寧) 군수(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정세현(鄭世賢): 1478(성종 9)~1547(명종 2).

  1524년(중종 19) 문과에 급제한 후 공조(工曹) 좌랑(佐郞) 춘추관(春秋館) 기사관(記事館)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이조(吏曹) 참판(?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언충(鄭彦忠): 1491(성종 22)~1557(명종 12).

  조선 중종(中宗) 때 후릉(厚陵) 참봉(?奉)을 역임하고. 역학(易學)을 연구하여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저술. 이 항(李 恒), 김인후(金麟厚), 김약묵(金若默) 등과 친분을 두터이 하여 학문의 깊이를 더했으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정종호(鄭?濩):

  1528년(중중 23)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禮曹), 병조(兵曹) 정랑(正郞)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主官)을 역임하였다.

 

정희교(鄭希僑): 자(字)는 정대(貞大). 호(號)는 노은(魯隱).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윤근(鄭允謹): 자(字)는 신수(愼?), 호(號)는 설송(雪松). 정언충(鄭彦忠)의 문인.

  임진왜란 때 의병장군 김천일(金千鎰), 현령(縣令) 민여운(閔汝雲)과 함께 진주(晋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역전 분투했으나 성(城)이 함락되어 순절(殉節)하였다. 그후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 에 추증(追贈)되었다.

 

정명호(鄭鳴濩): 자(字)는 아숙(雅叔). 호(號)는 삼우당(三友堂).

  조선(朝鮮) 때 기자전(箕子殿) 참봉(?奉)을 지냈다.

 

정승복(鄭承復): 1520(중종 15)~1581(선조 14).

  1555년(명종 10) 선전관(宣傳官)에 재임 시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자 추자도(楸子島)에서 수차례 커다란 공을 세워 방백(方伯) 박충원(朴忠元)과 수사(水使) 최희효(崔希孝)의 장계(狀啓)로 함흥(咸興) 판관(判官), 함흥진관(咸興鎭管)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그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에 추증(追贈) 되었다.

 

정유선(鄭惟善): 자(字)는 응지(應之).

  1528년(중종 23)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정명선(鄭明善): 1517(중종 12)~1566(명종 21).

  1534년(중종 29)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세마(洗馬)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한성부(漢城府) 서윤(庶尹)을 역임하였다.

 

정발(鄭발): 1553(명종 8)~IS92(선조 25) 자(字)는 자고(子固), 호(號)는 백운(白雲)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군수(郡守) 명선(明善)의 아틀.

  1575년(선조 12)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강 섬(姜 暹)의 천거로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에 특진되었다. 1592년 부산진(釜山鎭)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어 이해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에 상륙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을 점령당하고 전사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 동래(東萊)의 낙안서원(樂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정탁(鄭擢):

  1579년(선조 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황산도(黃山道)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정백령(鄭栢齡): 1532(중종 27)~1601(선조 34)

  조선 때 충좌위(忠佐衛)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하였고.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사준(鄭思竣): 1553(명종 8)~? 자(字)는 근초(謹初). 호(號)는 성은(城隱).

  조선 선조(宣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수 차례에 걸쳐 대공(大功)을 세웠으며. 1599년(선조 32) 결성(結城) 현감(縣監)을 지낸 후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후 1812년(순조 12)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追贈)되었고.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병조(兵曹) 참판(?判)에 가증(加贈) 되었으며 순천(順天)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다. 1842년(헌종 8) 광주(光州)에 창의비(倡義碑)를. 금산(錦山)의 금곡(金谷)에 대첩비(大捷碑)를 세웠다.

 

정사횡(鄭思?): 자(字)는 여인(汝仁). 호(號)는 매헌(梅軒).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로 들어가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공을 세워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연천(連川), 안음(安陰) 현감(縣監) 을 역임하였고,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1801년 (순조 1)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고, 1842년(헌종 8) 광주(光州)에 창의비(倡義碑)를. 금산(錦山)의 금곡(金谷)에 대첩비(大捷碑)를 세웠다.

 

정사정(鄭思靖): 1565(명종 20)~ ?. 자(字)는 유강(幼康).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무과에 합격한 후 봉사(奉事)를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전공을 세웠고, 형(兄) 사준(思竣), 사횡(思?). 조카 빈과 더불어 곡식을 모아 왕에게 수송한 충절(忠節)로 은직(恩職)을 받았다.

 

정사립(鄭思立):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태인(泰仁)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빈(鄭빈): 1566(명종 21)~1640(인조 18). 우산 안방준(安邦俊)의 문인.

  임진왜란 때 숙부들을 따라 가동(家?)을 거느리고 3백여 리에서 곡식을 왕(王)에게 전하니 충절(忠節)에 감복한 선조(宣祖)가 사온서(司온署) 봉사(奉事)에 임명하였다. 그후 직산(稷山), 아산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1801년(순조 1)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으며, 1842년(헌종 8) 순천(順天)의 옥계사(玉溪祠)에 배향되었다.

 

정노(鄭魯): 자(字)는 치도(致道). 호(號)는 동곡(東谷). 조 식(趙 植)의 문인.

  조선 때 음보(蔭補)로 보충찬위(補忠贊衛)에 이르렀다.

 

정대영(鄭大英): 1555(명종 20)~ ?. 자(字)는 극화(克和). 호(號)는 매헌(梅軒)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사촌 동생 대방(大方)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는 등 방어에 공이 많았다. 그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대방(鄭大方): 1565(명종 20) ~1613(광해군 5).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권 제(權 濟), 최 간(崔 簡), 조지산(曺芝山), 정우복(鄭愚伏)등 군자(君子) 31인(人)이 달성(達成) 팔공산(八空山) 상암(上菴)에서 회맹(會盟)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사촌형(兄)인 대영(大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어 하는데 공을 세웠다.

 

정창문(鄭昌文): 1593(선조 26)~ ?. 자(字)는 장헌(章獻). 호(號)는 성암(省菴), 윤근(允謹)의 아들.

  부친(父親) 윤근(允謹)이 임진왜란 때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진주(晋州) 전투에서 순절하자. 부친의 원한을 마음속에 새겨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10촌 형(兄)인 원길(元吉)과 함께 출전하여 남원(南原) 율치(栗峙)에서 적군 수십 명을 사로잡아 죽이고 정기원(鄭期遠), 이항남(李恒南) 등과 합세하여 사기를 드높였으나 용성(龍城) 북문(北門)에서 적이 세운 계략에 휘말려 순절(殉節)하였다.

 

정호(鄭浩): 1550(명종 5)~1595(선조 28). 자(字) 는 원중(遠中). 호(號)는 안곡(安谷).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한 후 좌부장(左部長)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돌격대(突擊隊) 대장(大將)으로 당포(唐布), 노량(露梁), 발포(鉢浦) 전투에서 적선(敵船) 300여 척을 격파하는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병조(兵曹) 참판(?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응룡(鄭應龍): 자(字)는 이견(而見). 호(號)는 동강(東岡)

  1592년(선조 25)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와 함게 전력 분투하다 1604년(선조 37) 순절(殉節)하였다. 그 후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에 추증(追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병조(兵曹) 참판(參判)에 가증(加贈)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서(追敍)되었다. 후에 정려(旌閭)가 세워졌으며, 의령(宜寧)의 충익사(忠翊司)에 배향되었다.

 

정구(鄭構): 자(字)는 긍보(肯甫). 호(號)는 영모암(永慕庵). 조 식(趙 植)의 문인.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음성(陰城), 산음(山陰)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정인남(鄭仁男):

  조선조(朝鮮朝)에 사옹원(司饔院) 봉사(奉事)를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복시(司僕寺) 정(正)에 추증되었다.

 

정신남(鄭信男): 1572(선조 5)~1670(현종 11).

  1612년(광해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丙科)로 급제 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보령(保寧) 현감(縣監)을 역임하였으나 재임 중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정순석(鄭順錫):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정승훈(鄭承勳):

  조선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정흔(鄭昕): 1578(선조 11)~1626(인조 4). 발(撥) 의 아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거쳐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정에서 복수청(復讐廳)을 창설하여 전국의 장정(壯丁)을 모집하니, 공(公)은 나라에 은혜를 보답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모집에 응하여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에 힘썼다. 1604년(선조 37)에 사량(蛇梁) 만호(萬戶)가 되어 왜군(倭軍)을 격퇴시키니 전라수사(全羅水使)로 승진되었고 첨정(僉正), 정선(旌善) 현감(縣監), 삼도(三道) 주사정리사(舟師整理使) 등을 역임하였다.

 

정득교(鄭得蛟): 1593(선조 26)~1652(효종 3)

  조선 광해군(光海君)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용양위(龍?衛)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악원(掌樂院) 정(正)에 추증(追贈)되었다.

 

정봉남(鄭鳳男): 신 잡(申 ?)의 문인.

  1591년(선조 24) 진사(進士)에 합격된 후 율봉(栗峰)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정황남(鄭凰男): 신 잡(申 ?)의 문인.

  조선조(朝鮮朝)에 은일(隱逸)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천거(薦擧) 되었다

 

정공청(鄭公淸): 자(字)는 수백(守伯). 시호(諡號)는 충의(忠義).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진도군수(珍島郡守)에 역임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부자(父子)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안강(安康), 경주(慶州), 울산(蔚山), 동래(東萊), 태천(態川), 부산(釜山) 등지에서 많은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정윤성(鄭胤成): 자(字)는 원술(元述). 호(號)는 양성당(養性堂).

  조선(朝鮮)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정운망(鄭雲望): 1617(광해군 9)~1676(숙종 2) 득교(得嶠)의 아들.

  조선 때 남포(藍浦) 현감(縣監) 순천진관(順天鎭管)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보성(寶城) 군수(郡守)를 역임하였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병조(兵曹) 참의(?議)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연(鄭淵): 1640(인조 18)~1706(숙종 32). 운경(雲卿)의 아들

  (通訓大夫)로 명천(明川)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추증(追贈)되었다.

 

정백기(鄭伯基): 1608(선조 41) ~1708(숙종 34). 자(字)는 사흠(士欽). 호(號)는 용암(龍岩). 흔(昕)의 아들.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회인(懷仁) 현감(縣監), 목운(木運)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정원기(鄭遠基): 흔(昕)의 아들.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혁(鄭爀): 자(字)는 회부(晦夫). 호(號)는 긍구당(肯?堂)

  조선조에 장악원(掌樂院) 정(正)을 역임하였다.

 

정지화(鄭之和): 자(字)는 유경(有敬)

  조선(朝鮮) 때 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정희충(鄭希忠):

  조선(朝鮮) 때 병조(兵曹) 참판(參判)을 지냈다.

 

정구(鄭球): 자(字)는 경좌(卿佐). 호(號)는 죽사(竹沙)

  조선에서 학자(學者)로서 이름을 떨쳤다.

 

정두언(鄭斗彦): 자(字)는 사정(士貞). 호(號)는 로호재(鷺湖齎).

  조선(朝鮮) 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정응신(鄭應莘): 자(字)는 야수(野?). 호(號)는 화은(花隱).

  조선조(朝鮮朝)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정임형(鄭林亨): 자(字)는 향삼(享三), 호(號)는 성석재(星石齋) 시호(諡號)는 충장(忠壯).

  조선에서 병조(兵曹) 판서(判書)를 지냈다.

 

정내경(鄭內慶):

  조선(朝鮮) 때 (察訪)을 지냈다.

 

정상헌(鄭尙獻):

  조선 때 사예(司藝)를 역임하였다.

 

정상겸(鄭尙謙):

  조선조(朝鮮朝)에 예조(禮曹) 좌랑(佐郞)을 지냈다.

 

정승빈(鄭升賓):

  조선(朝鮮)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정선장(鄭瑄章):

  조선에서 형조(刑曹) 좌랑(佐郞)을 지냈다.

 

정하경(鄭河慶): 자(字)는 만영(萬榮). 호(號)는 망와(望窩)

  1669년(현종 10)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응교(應敎),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조(刑曹) 참의(?議),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정상업(鄭相業): 자(字)는 지원(之元). 호(號)는 백당(栢當)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칠순(七旬)인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危急)하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여 3일이나 생명을 연장 시켰으므로 향인(鄕人)이 효자라 칭송하였다.

 

정문례(鄭問禮): 자(字)는 화백(和伯).

  조선조에 음보(蔭補)로 봉정대부(奉正大夫)에 올라 군자감(軍資監) 정(正)을 역임하였다

 

정석도(鄭碩道): 시호(諡號)는 무양(武揚),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첨사(僉使)를 역임하였으며, 무양공신(武揚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정이상(鄭爾尙): 백기(伯基)의 아들.

  조선조(朝鮮朝)에 서부(西部)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이량(鄭爾亮): 백기(伯基)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조봉대부(朝奉大夫)로 공릉(恭陵)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이원(鄭爾援): 백기(伯基)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수군(水軍) 판관(判官)을 지냈다.

 

정이회(鄭爾誨): 백기(伯基)의 아들.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수군(水軍) 판관(判官)을 지냈다.

 

정두일(鄭斗一): 1652(효종 3)~1738(영조 14). 자(字)는 천추(天樞) 호(號)는 수헌(睡軒).

  선친(先親)의 뜻을 이어 받아 최초로 족보를 정리하고자 전국의 모든 종친(宗親)을 남원(南原) 광한루(廣寒樓)에 모아 족회(族會)를 열고 8도(道)에 통문(通文)을 발송하여 송광사(松廣寺)에서 제유사(諸有司)로 추대되어 3권의 보(譜)를 간행하였다.

 

정제규(鄭齊奎): 1674(현종 IS)~1731(영조 7).

  1693년(숙종 19) 통덕랑(通德郞)에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경흥부(慶興府) 도호부사(都護府使) 해미(海美) 현감(縣監)을 거쳐 충무위(忠武衛) 부호군(副護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고. 1730년(영조 6)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가덕진(加德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지냈다

 

정동악(鄭東岳): 1633(인조 11)~1689(숙종 15). 자(字)는 차산(次山). (호)는 죽당(竹堂). 허 목(許 穆)의 문인.

  성균관(成均館) 장의(掌儀)에 천거되어 김천도(金泉道), 경양도(景陽道) 찰방(察訪)을 지냈다.

 

정숙(鄭璹): 자(字)는 중기(重器), 호(號)는 성재(省齋).

  조선 인조(仁祖) 때 종사랑(從仕郞)으로 의령(宜寧) 훈도(訓導)를 지냈다.

 

정시휘(鄭時輝):

  당대(當代)에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이 뛰어났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용양위(龍?衛)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인중(鄭麟重): 1675(숙종 1)~1721(경종 1). 자(字)는 숙수(叔?). 이량(爾亮)의 셋째 아들.

  남달리 총명하여 성년(成年)이 되기 전부터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으며 19세에 경악(經幄)의 석보(碩輔)가 되었다. 1720년(숙종 46)에 상의원(尙衣院) 직장(直長)에 이르렀으며 4대신(大臣) 조태채(趙泰采),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명(李?命)과 이홍술(李弘述), 이우항(李宇恒), 윤 각(尹 殼), 이취장(李就章), 백시구(白時?), 김시태(金時泰), 심 진(沈 搢)과 사인(士人) 김용택(金龍澤), 이희지(李喜之), 이천기(李天紀), 심상길(沈尙吉) 등과 함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보호함에 생사를 가리지 않고 오직 의리(義理)로써 항거하다 화(禍)를 당했다. 1725년(영조 1) 4대신(大臣)의 충절과 5사인(士人)의 절개(節槪)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나 칭송을 받았고, 1802년(순조 2) 대사간(大司諫) 백사근(白師謹)의 상소로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추증(追贈)되었다.

 

정동윤(鄭東潤): 1696(숙종 22)~1782(정조 6). 자(字)는 윤경(潤卿). 호(號)는 송재(松齎).

  1735년(영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황산도(黃山道) 찰방(察訪)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禮曹) 참의(?議) 등을 역임하였으며.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정윤필(鄭潤弼): 1739(영조15)~1817(순조 17).

  효성이 지극하고 친족(親族)에게 우애가 깊어 경주(慶州) 영장(營將)을 지낼 때 백운대(白雲臺) 시조(始祖: 지백호)의 묘소 및 신라시대(新羅時代) 열위(列位) 묘소와 중시조(中始祖 : 문정공)의 묘소를 개봉(改封)하였으며 표석(表石)을 세웠고, 재실(齋室)을 건립하여 매년 10월 10일 향사(享祀)를 봉행(奉行)하였다. 후에 풍덕(豊德)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정성현(鄭星炫): 1747(영조 23)~1833(순조 33) 초명(初名)은 윤와(允?). 자(字)는 준양(埈養).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정빈(鄭빈): 1747(영조 23)~1810(순조 10).

  백부(伯父) 인하(仁廈)에게 입양(入養)하여 효성(孝誠)이 지극(地極)하여 손가락을 잘라 양부모님의 병환이 호전되게 하였으며, 미강서원(眉江書院)을 중수(重修)하였다. 고을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효행을 영읍(營邑)에 올리니 순찰사(巡察使) 한경이(韓競履)가 조정(朝廷)에 알려서 특별히 동몽(童蒙) 교관(敎官)에 제수(除授)되었다.

 

정무(鄭珷): 자(字)는 자윤(子潤). 호(號)는 성재(省齋).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성현(省峴) 찰방(察訪)을 지냈다.

 

정준교(鄭俊僑): 자(字)는 준언(俊彦).

  조선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용양위(龍?衛)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정익현(鄭益炫): 1745(영조 21)~ ?. 자(字)는 군양(君養). 호(號)는 칠성재(七星齋).

  조선 때 문명 (文名)이 높은 학자(學者)였다.

 

정대현(鄭大鉉): 1830(순조 30)~1914. 자(字)는 군중(君中), 호(號)는 성재(醒齋).

  이순영(李純榮)의 문인. 학문이 뛰어났으며 후배 양성을 위하여 서재계(書齋契)를 설립하여 훌륭한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정진해(鄭鎭海): 1839(헌종 5)~1907(순종 1). 초명(初名)은 진행(鎭行). 자(字)는 여오(汝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인동(仁同) 도호부사(都護府使), 대구진관(大邱鎭管) 병마동절제사(兵馬同節制使)등을 지낼 때 청렴 결백한 관직 생활을 하여 칭송을 받았다.

 

정대섭(鄭臺燮): 1868(고종 5)~1943. 초명(初名)은 대훈(臺薰), 자(字)는 치수(致壽)

  1902년(광무 6) 승훈랑(承訓郞)으로 평안도(平安道) 관찰부(觀察府) 주사(主事)를 거쳐 판임관(判任官) 6등에 올랐다.

 

정규해(鄭?海): 1890(고종 27)~1970. 초명(初名)은 종해(宗海). 자(字)는 치정(致正), 한조(漢朝). 호(號)는 명와(明窩) 윤응선(尹應善)의 문인.

  어려서부더 학문에 열중하여 주경(主敬), 거송(去松), 구인(求仁) 세 가지 안법(安法)을 깊이 체험한 대학자(大學者)이다. 음성(陰城)의 충룡사(忠龍祠)에 배향되었다.

 

정찬해(鄭纘海): 1899(광무 3)~1970. 자(字)는 치선(致善). 호(號)는 계은(溪隱). 정규해(鄭?海)의 문인.

  평생을 맹자(孟子)를 통독하고 대학(大學)의 수신제가(修身齊家)를 근본으로 삼았으며. 정양재(鄭養齋)를 지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문헌공파(文獻公派):

  각 계파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첫 째 문헌공파는 시조의 42세손 진후(診厚: 검교첨의평리 극중의 맏아들)는 고려(高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호부(戶部) 상서(尙書)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판군기사윤(判軍器寺尹)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그의 증손으로 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위(偉)의 아들 현영(玄英)은 호부(戶部) 상서(尙書)와 수문전(修文殿) 태학사(太學士)를 거쳐 삼중대광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하고 시호(諡號)는 문헌(文獻)이며 문헌공파의 파조(派祖)이다.

정헌대부로 이부(吏部) 상서(尙書)를 지내고 월성군(月城郡)에 봉해졌던 종철(宗哲)의 둘째 아들 인조(仁祚)는 공양왕 때 길주(吉州) 목사(牧使)와 병부(兵部) 시랑(侍郞)을 역임한 맹장(猛將)으로 이성계와 함께 일본군 장군 아지(阿只)를 격퇴시켜 더욱 무명(武名)을 떨쳤다.

조선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홍덕(弘德: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인량의 아들)은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고 죽음을 당하자 팔순노모(八旬老母) 와 함께 남원(南原)의 교룡산(蛟龍山) 아래에 은거(隱居)하며 단(壇)을 만들고 단종(端宗)과 사육신(死六臣)의 기일(忌日)에 분향하고 곡(哭)을 했다.

이조(吏曹) 판서(判書) 염(廉)의 아들 지년(知年)은 1438년(세종 20) 문과에 등과(登科)하여 홍문관(弘文館)과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을 거치면서 관직을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를 지냈으며, 단종(端宗)을 보살펴 달라는 문종(文宗)의 수탁 고명신(受託顧命臣)으로서 단종이 손위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종숙(從叔)인 홍덕(弘德)과 함께 남원 교룡산에 은거(隱居)하였다. 그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효항(孝恒)은 성종(成宗)때 서거정(徐居正) 등과 더불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및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撰修)했다.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했던 효상(孝常: 지년의 둘째 아들 효항의 아우)은 예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남 이(南 怡)와 강 순(康 純)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데 공을 세러 익대 3등공신(翊戴三等功臣)에 책록(策錄)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으며, 통덕랑(通德郞) 인필(仁弼)의 아들 지운(之雲)은 성리학(性理學)의 대가로 조화(造化)의 이(理)를 규명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을묘왜변(乙卯倭變)에 추자도(楸子島)에서 수 차례 전공을 세워 함흥(咸興) 판관(判官)에 제수(除授)되고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던 승복(承復)의 아들 사준(思竣)과 사횡(思?)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역전의 무공을 세워 헌종(憲宗) 때 창의비(倡義碑)와 대첩비(大捷碑)가 세워져서 가문에 절맥(節脈)을 세웠으며, 호조(戶曹) 참의(叅議) 윤근(允謹)의 아들 창문(昌文)은 부친이 임진왜란에 진주성(晉州城)에서 순절하자 원한을 마음속에 새겨 정유재란 때 10촌 형(兄) 원길(元吉)과 함께 남원(南原) 율치(栗峙)에서 적군 수십 명을 사로잡았으나 용성(龍城) 북문(北門)에서 적의 계략에 휘말려 순절하였다.

 

양경공파(良景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의 인맥(人脈)으로는 공민왕(恭愍王) 때 일기도주(一岐島主)의 모반사건을 토벌하여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이 되고 월성군(月城郡)에 봉해졌던 휘(暉)의 아들 희계(熙啓)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朝鮮創業)에 훈공을 세워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그의 현손(玄孫) 승조(承祖)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검열(檢閱)에 재직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스승인 김종직은 사사(賜死)되고, 그는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진력했다.

주자학(朱子學)의 충효양전(忠孝兩全)을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때에 효(孝)를 버리고 충(忠)을 택했던 발(潑)은 부산진(釜山鎭) 첨사(僉事)로 나가면서 늙고 병들었던 어머니에게 허락을 청했다. 이에 어머니 남궁씨(南宮氏)는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충(忠)속에 효(孝)가 들어있다면서 개념 말고 나라를 위하라고 타일렀다. 「기재잡기(寄齋雜記)」와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의하면 임진년에 왜군이 늑병(勒兵) 25만 명과 병선 4만 여 척을 거느리고 부산을 쳐들어왔다. 이에 아군은 혼비백산하여 거의 도주하였으나 발(撥)을 중심으로 한 정예군만이 용기를 내어 활을 쏘아 무수한 적을 죽여 세곳에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화살이 다하자 한 비장(裨將)이 발(撥)에게 도주할 것을 종용하자 "도망갈 것을 종용하는 자는 중벌(重罰)에 처하겠다."하고 백병전에 돌입했다가 발에 총을 맞아 장렬하게 순절했다. 발(撥)의 아들 흔(昕)은 정유재란 때 조정(朝廷)에서 복수청(復讐廳)을 창설하여 젊은 장정(壯丁)을 모집하자 나라에 은혜를 보답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모집에 응하고는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 지원(支援)에 힘썼으며, 사량(蛇梁) 만호(萬戶)가 되어 왜군을 섬멸하여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승진되었고 첨정(僉正)과 정선(旌善) 현감(縣監) 등을 역임했다.

그 외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서 돌격대장이 되어 당포(唐浦), 노량(露梁) 해전에 서 적선 300여척을 대파(大破)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던 호(浩)와 인조(仁祖)때 강화(講話)에 항거하다가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어 화원(花源)에 살았던 응신(應莘), 숙종(肅宗) 때 (오사인(五士人))의 한 사람으로 4대신(四大臣: 조태채,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과 더불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수호했던 인중(麟重),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시휘(時輝)와 동윤(東潤) 등이 양경공파(良景公派)를 대표했다.

 

월성위파(月城尉派):

  검교(檢校) 대장군(大將軍) 금실(金實)의 아들로 부마(駙馬)가 되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던 이기(?奇)의 후손에는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올랐던 구(龜)의 아들 광업(光業)과 홍업(弘業) 형제가 유명했다. 선조(宣祖) 때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역임했던 광업(光業)은 임진왜란 때 숙부 원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그의 아우 홍업(弘業)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었다.

1581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공청(公淸)은 진도(珍島) 군수(郡守)를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호신(好臣)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안강(安康), 경주(慶州), 울산(蔚山), 동래(東萊)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무공을 떨쳤다.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월성군(月城郡)에 봉해졌던 손경(遜卿)의 둘째 아들 극온(克溫)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吏部) 상서(尙書)를 지내고 북벌남정(北伐南征)에 대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랐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판삼사 참지정사(判三司?參政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필(弼)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와 한림학사(翰林學士), 평장사(平章事)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사후(死後)에 계림군(鷄林君)에 추봉(追封)되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정(鄭) 씨는 2151879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5 위이며 경주 정(鄭) 씨는 350587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24 위이고 성씨내 본관별 순위는 2 위이다. <br>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경주 정(鄭) 씨는 전체 가구수가 94,465 가구로 본관의 인구는 303,443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27 위이며, 본관별 성씨 내의 순위는 2 위로 나타났다.

#경주정씨 #慶州鄭氏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이전경주최씨 Level 102021-09-15
-경주정씨 [慶州鄭氏] Level 102021-09-15
다음파평윤씨 Level 102021-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