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파평윤씨2021-09-15 00:29
작성자 Level 10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신라 경명왕 2년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태사에 이르렀다. 윤신달은 유금필, 김선평, 장길, 유차달 등 11인과 함께 고려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그의 5세손인 윤 관(尹瓘,1040~1111) 장군은 고려 문종 때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1107년(고려 예종 3)에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뒤 여진정벌에 나서 적 5천 명을 죽이고 130명을 생포하는 등 북진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파평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의 지명이다.


시조는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신달(莘達)이며, 현손 관(瓘)은 고려 중엽의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파평윤씨의 중시조이다. 아들 7형제를 두었으며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파평윤씨 가운데서 주로 판도공파(版圖公派:承禮)와 소정공파(昭靖公派:坤)에서 대대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 두 파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여 파평윤씨의 약 80%를 차지한다.


시조 윤신달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경기도 파평(파주)에 있는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어느 날 이곳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 지 사흘째 되는 날, 윤 온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궤가 떠 있는 것을 보고 건져서 열어보니 한 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채 속에 누워 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 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다.

잉어에 대한 전설은 윤신달의 5대손인 윤 관의 일대기에도 또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 와 강가에 이르자 잉어떼는 어느 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서 파평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시조의 묘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봉계동에 있다.


윤신달의

5세손에는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은 윤관이 있다. 그는 고려 선종 때 합문지후와 좌사낭중을 지내고, 여진정벌에 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출전, 함주와 영주 등 9지구에 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족을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벼슬이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이르렀고, 7형제를 낳아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래서 파평윤씨에서는 윤관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파평 윤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 윤신달부터 5세손 윤관까지 전부 단계로 내려오고 있다. 즉 윤관은 5대 독자이자 모든 파평 윤씨는 윤관의 후손이라는 말이 된다. 시조로부터 윤관까지 세계를 내려가면 윤신달-윤선지-윤금강-윤집형-윤관이 된다.

윤관 장군의 영정. 윤관 장군은 문신이지만 별무반을 편성하여 지금의 함경도와 간도 일대를 점령하고 동북 9성(함흥·길주 등)을 쌓았다.


파주라는 명칭도 파평 윤씨 가문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세조는 계유정난 이후 점차 시국이 안정됨에 따라, 정변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조비 파평 윤씨(정희왕후)의 고향인 원평도호부를 파평 윤씨에서 '파'자를 따와 파주목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할머니 원경왕후(여흥 민씨)의 고향인 여흥 또한 여주목으로 승격시켰다.


윤관의 7형제는 다시 아랫대로 내려가면서 수십 파로 분파되었다.

윤관의 장남 윤언인의 손자 윤위는 남원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남원백에 봉해졌다. 그 이후 후손들을 남원 윤씨라고 불렀다. 윤위의 손자 윤돈 또한 함안에서 난을 진압하여 함안백으로 봉해졌다. 그 이후 윤돈의 장남 윤희보의 후손들은 함안 윤씨로 분파되었고 윤돈의 나머지 세 아들의 후손들은 남원 윤씨로 세계를 이어갔다. 현재에 이르러 이 두 성씨는 유래가 명확하므로 각각 파평 윤씨 함안파와 남원파로 합본되었다. 연산군의 어머니로 유명한 제헌왕후(폐비 윤씨)가 함안 윤씨이다. 남원 윤씨로는 효종-숙종 연간 남인의 거두였던 백호 윤휴가 있다.

윤관의 5남 윤언식의 후손들은 윤언식의 증손자 윤은형이 덕산군에 봉해짐에 다라 덕산군파로 불려지고 있다.


이외 나머지 파평 윤씨의 분파인, 문정공파(文定公派) 신녕공파(新寧公派) 대언공파(代言公派) 봉록군파(奉祿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야성파(野城派) 전의공파(典儀公派) 소정공파(昭靖公派) 원평군파(原平君派) 소도공파(昭度公派) 판도공파(版圖公派) 소부공파(小府公派) 태위공파(太尉公派) 등은 6남 윤언이의 후손들이다. 이들 가운데서 후손인 판도공파(版圖公派)와 소정공파(昭靖公派)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윤관의 다른 아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거나 후손이 전해져 오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 문벌 귀족의 자제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대각국사 의천은 왕족 출신이다.

여담으로 파평 윤씨의 대부분(90%)은 소정공파(昭靖公派)와 판도공파(版圖公派)로 다른 성씨 본관의 파에 비해 한쪽 파(派)에 많이 쏠려 있는 편이다. 후손이 적은 파도 있지만 일부 파의 대부분이 북한에 거주한 영향도 있다.

파평 윤씨는 조선시대 들어와 가문이 크게 번성하면서 명문세도가의 반열에 올랐다.(이미 고려시절부터 문벌귀족 15가문을 시작으로 권문세족 안에서도 재상지종 9가문의 명문가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5명[1]의 왕비를 배출했으며, 수많은 과거급제자와 고관대작들이 나왔다. 그중 중종 대에서는 파평 윤씨에서 2명의 왕비(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나와 한 가문에서 대윤과 소윤으로 갈려 싸우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판도공파의 파조는 윤승례인데, 그는 시조 윤신달의 13세손으로 윤척의 아들이다. 윤승례의 아들이 세조의 장인인 윤번이고, 윤번의 딸이 정희왕후(세조 비)이다. 판도판서공파는 윤승례의 아들 대에서 제학공파 부윤공파 정정공파로 갈라진다. 그중 정정공파에서 2명의 왕비가 나와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 빚어졌다.


윤승례의 아들 윤번은 세조의 장인이고, 윤번의 맏아들인 윤사분은 우의정, 둘째인 윤사균은 예조판서, 셋째인 윤사흔이 우의정이 되어 형제간에 정승을 지냈으며 7∼8대에 걸쳐 국구부원군과 공신부원군, 정승, 판서와 당상관들이 배출되어 조선시대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이 윤사분과 윤사흔 두 집안에서 각각 중종의 왕비(장경왕후, 문정왕후)가 배출되어 왕실 및 왕위계승을 놓고, 대윤과 소윤으로 갈라져 싸우는 비극이 일어났다.


윤사균의 손자인 윤여필의 딸이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이고, 그녀의 오빠가 윤임이다. 장경왕후는 세자(인종)를 낳고 곧바로 죽었다.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윤사균의 동생인 윤사흔의 증손 윤지임의 딸이 제2계비로 책봉되어 문정왕후가 되었다. 먼 친척뻘인 고모와 질녀가 같은 왕의 왕비가 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4명의 공주를 낳은 끝에 어렵사리 아들 경원대군을 낳았다. 그 뒤로 그녀는 남동생 윤원형을 끌어들여(소윤)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을 중심으로 한 일파(대윤)와 정치적 암투를 벌였다. 이를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라고 한다.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경원대군이 왕위(명종)를 계승함으로써 소윤의 승리로 끝났으나, 소윤 역시 문정왕후가 죽자 몰락하였다. 결국 대윤과 소윤의 싸움은 파평윤씨 판도공파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소정공파는 윤승례의 형 윤승순의 아들인 윤곤의 후손이다. 윤승순은 공민왕 때 요승인 신돈의 살해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호군이 되어 왜국의 침입을 막아냈다. 창왕 때는 권근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명나라의 명에 의해 공양왕을 즉위케하였고, 판개성부사를 지냈다.


윤곤은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손자 윤호는 성종의 장인으로서 딸이 성종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그 후 그는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윤곤의 후손 중에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이 있다. 그는 문종 때 추장문과에 급제했다. 이시애의 난에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우참찬에 특진하였다. 성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하였다는 죄로 진도에 유배되고 사약을 받았다.


그의 증손인 윤현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이밖에 소정공파의 윤사로는 세종대왕의 딸 정현옹주와 결혼하여 영천군에 봉해지고, 세조 즉위년 좌익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 중추부영사에 이르렀다.

문강공(윤언이)의 아들 3형제(인첨, 자고, 돈신)와 문정공(윤인첨)의 아들 3형제가 양대에 걸쳐 모두 대과 급제했다. 참판공(윤민신)은 다섯 아들이 나란히 급제하고 그 중 한 사람이 장원을 하여 세상 사람들은 참판공이 사는 마을을‘오자등과터(五子登科터)’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1,424명이 있다. 문과 340명, 무과 86명, 사마시 934명, 역과 41명, 의과 11명, 음양과 2명, 율과 10명이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윤(尹) 씨는 1020547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8 위이며 파평 윤(尹) 씨는 770932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9 위이고 성씨내 본관별 순위는 1 위이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파평 윤(尹) 씨는 전체 가구수가 221,477 가구로 본관의 인구는 713,947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9 위이며, 본관별 성씨 내의 순위는 1 위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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