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청주곽씨(淸州郭氏) 2021-09-15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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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곽씨 시조는 신라 헌강왕 때에 시중을 지낸 곽상이다. 4세(世) 곽원(郭元)[?~1029]은 고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상서를 거쳐 참지정사를 지냈으며, 6세 곽상(郭尙)은 추밀원 좌승선을 거쳐 호부상서·참지정사에 오르고 두 아들로 문충공 탄(坦)과 진정공 여(輿)를 두었다.

누전하여 11세인 곽예(郭預)[1232~1286]는 문한학사와 지밀직사사를 지내고, 두 아들로 운용(雲龍)과 운진(雲鎭)을 두었다. 13세인 곽연준(郭延俊)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개성부사·전법판사에 이르고 충정왕 2년(1350)에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며 만년에 청주로 낙향하여 세거하면서 본관을 청주로 삼았다.

세거지 분파는 18세(世) 이후 지파별로 세거지를 형성하였으며 청주 근교의 세거지는 다음과 같다.

지사공파(進士公派)는 청주, 백동파(栢洞派)는 청원군 강외면, 회암파(回岩派)는 청원군 옥산면 회암리, 성촌파(城村派)는 청원군 옥산면 금계리, 행당공파(杏塘公派)는 청원군 옥산면, 보은파(報恩派)는 보은군, 부강파(芙江派)는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청주파(淸州派)는 청주시 흥덕구 휴암동 등이다.

​중시조는 시호가 문성공(文成公)인 곽원(郭元)이다. 그는 고려 성종조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으며, 성품이 청렴하여 대성(臺省)의 중임을 역임하였고 관리로 능하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6세 곽상(郭祥)은 형부상서(刑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예종의 스승으로서 국왕의 총애가 두터웠고 중신들간에 명성이 좋았다고 한다. 그는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곽탄(郭坦) 또한 부친의 영항으로 명성이 좋았으며, 둘째아들 곽여(郭輿)는 시정공(諡靜公)인데 선친보다도 더욱 예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예종은 그를 선생이라 부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길 즐겼으며, 도성 동쪽 약두산일봉(若頭山一峰)을 하사하여 초당(草堂)을 짓고 이곳에 거처케 하고 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하였다.
8세 곽동순(郭東珣)도 진정공(眞靜公)의 행적을 이어 국왕의 총애를 받으니 일문삼세(一門三世)의 총애를 받은 당시 곽문(郭門)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었다.
11세인 곽예(郭預)는 고종4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었다. 그는 원종14년에 첨사부록사(詹事府錄事)로서 홍저(洪泞)와 함께 일본에 가 고려에 대한 침력적인 행동의 중단과 끌려간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고 돌아왔으며, 그후 예빈주부(禮賓主簿) 겸 직한림원(直翰林院), 우부승지(右副承旨), 동지공거(同知貢擧)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12년에 성절사(聖節使)로 원에 다녀온 뒤 55세로 세상을 떠났음이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의정부도진사장(議政府都津寺長)인 곽운룡(郭雲龍)이요, 들째아들은 교서랑(校書郞) 곽운진(郭雲鎭)이다. 이 형제에 이르러 곽(郭)씨는 비로소 양파(兩派)로 나뉘어졌다.
13세 곽연준(郭延俊)은 시호가 충헌공(忠憲公)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였는데, 충정왕2년에 그가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지면서 곽(郭)씨는 본관을 청주(淸州)로 하였다.
또한 충렬왕11년에 문과에 급제한 장원공(壯元公) 곽인(郭麟)은, 당시 원 세조가 일본에 선무공작(宣撫工作)을 하기 위해 첨추원(僉樞院) 홍군상(洪君詳)을 고려에 보내니, 충렬왕이 김유성(金有成)으로 하여금 선유정사(宣諭正使)로 삼아 일본에 보내고자 했으나 모두가 서장관(書狀官)하기를 피하였다.
그렇지만 장원공(壯元公)은 충직한 용기가 있어 이런 일에 피한다는 것은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고 가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는 그 가족을 보살펴 주었다.
15세 곽추(郭樞)는 정포은(鄭圃隱) 선생과 같이 동문수학(同門修學)하여 사이가 유달리 좋았다. 그는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밀직사사(密直司事), 대성(臺省) 등을 역임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태조 태종이 불러도 나가지 않고 고려 신하로서의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청주곽씨(淸州郭氏)는 조선에 와서 관작은 고려만 못하지만 의(義)를 실천하여 대대로 인물이 전래하였다.
곽해룡(郭海龍)은 고려 우왕10년에 중랑장(中郞將)으로 임금에게 건의하여 무예도감(武藝都監)을 설치케 했으며, 조선 개국 후 태조2년에 주문사(奏聞使)의 통역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태종조에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에 이르렀다.

곽존중은 태조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종 태종 세종 4대임금을 모셨으며, 세종때 도승지 경창부윤, 병조 예조 이조 참판을 역임 하시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대왕이

조선의 가장 추앙받는 성군으로 남아있는것은 퇴천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곽충보(郭忠輔)는 우왕9년에 병마사(兵馬使)로 왜구를 물리쳤으며, 1388년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다. 조선개국 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를 거쳐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렀다.
곽설(郭說)은 선조 34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지냈는데, 외숙인 김자점(金自點)이 권세를 남용하므로 간언(諫言)을 하였으나 듣지 않자 병을 칭하고 원주(原州)로 내려갔다.
임진왜란 때 왜구격퇴에 앞장서서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는 곽수인(郭守仁)·곽희검(郭希儉)·곽수지(郭守智) 등을 들 수 있다.
곽시징(郭始徵)은 집의(執義)를 역임한 곽지흠(郭之欽)의 아들로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천거로 참봉(參奉)이 되었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퇴직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근래의 인물로는 3.1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滿州)로 망명한 곽재려(郭在驪)가 있다. 그는 김원봉(金元鳳)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20년 국내에 들어와 밀양(密陽)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가 체포되어 6년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해방후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단장(大韓民國建國功勞勳章單章)이 수여되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곽(郭) 씨는 203188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36 위이며 청주 곽(郭) 씨는 20713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265 위이고 성씨내 본관별 순위는 2 위이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청주 곽(郭) 씨는 전체 가구수가 5,601 가구로 본관의 인구는 18,218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253 위이며, 본관별 성씨 내의 순위는 2 위로 나타났다.


청주곽씨 대종회에서는 인터넷 족보(http://www.cheongkw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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