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밀양손씨 2021-09-1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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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는 통일 신라의 효자 손순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손순은 신라 개국 당시 사로 6촌장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 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31세손이다. 구례마는 서기 32년(유리왕 9년) 6촌장에 사성(賜姓)할 때 ‘손(孫)’이라는 성을 하사받아 손씨(孫氏)가 시작되었다.

시조 손순(孫順)은 신라 흥덕왕 때 경북 경주 모량리 출신으로 효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손순은 일찍이 아내와 함께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는데, 어린 아들이 항상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 어머니가 굶주리는 걸 가슴 아프게 여기던 손순과 아내는 아이를 땅에 파묻게 되었다.
부부가 땅을 파는 순간 석종(石鐘)이 발견되었고, 이 사실을 들은 흥덕왕이 손순에게 집과 쌀을 하사하였으며 월성군(月城君)에 봉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였다.

손익감(孫翼減)은 손순의 손자인데,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다. ‘응천(凝川)’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손익감으로 인하여 밀양(密陽)이라는 본관을 갖게 되었다.
밀양손씨가 세력을 갖게 된 것은 고려 초기 태조 왕건의 개국공신인 손긍훈(孫兢訓)에 의해서다.
손긍훈은 936년(태조 19)에 왕식렴 등과 함께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의 신검을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삼중 대광 사도(三重大匡司徒)에 추증되고 광리군(廣理君)에 올랐다.
이때부터 밀양손씨는 고려 시대 문벌 귀족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밀양손씨는 고려 시대에서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19세기 말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1861~1922]를 들 수 있다.
손병희는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났을 때, 북접을 이끌고 일제에 맞서 싸웠다. 또한 1905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였고, 일제 강점기 국내 민족 운동의 구심체로 발전시켰다.
역사적인 1919년 3·1 운동도 천도교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민족 운동이었다. 그 외에 역사학자 손진태(孫晋泰)[1900~?], 손기정(孫基禎)[1912~2002] 등을 들 수 있다.

밀양 손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8명, 무과 급제자 125명을 배출하였다.


분파
좌사전공파(左師傅公派)
전농시사공파(典農寺事公派)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
군사공영파(郡事公榮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오곡공파(梧谷公派)
오한공파
국자진사공파(國子進士公派)
명천공파(明川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기로공파(耆老公派)
정승공파(政丞公派)
사부공파(師傅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충의공파


인물
손수경(孫守卿) :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1326년(고려 충숙왕 13)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전 왕인 충혜왕(忠惠王)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뇌물을 가지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1339년(충혜왕 복위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가서 형부(刑部)에 투옥되자 함께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이 공으로 1342년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로 1등공신에 책록(冊錄)되고, 토지 100결(結)과 노비 10구(口) 등을 받았다. 1343년(충혜왕 복위 4)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물(貢物)을 바치고 돌아왔으며,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첨의참리(僉議參理)가 되어 서연(書筵)에서 시강(侍講)하였다. 이어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왕자 저(㫝 : 뒤의 충정왕(忠定王))를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와 즉위시킴으로써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 판삼사사 의창부원군(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判三司事義昌府院君)에 봉해졌다. 곧 좌정승(左政丞)에 이어 우정승(右政丞)을 거쳐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었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역임한 후 1356년 전 호군(護軍) 임중보(林仲甫)가 충혜왕의 서자인 석기(釋器)를 추대하여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이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했다.[2]
손비장(孫比長) : 자는 영숙(永叔), 호는 입암 (笠巖). 아버지는 현감 손민(敏)이다. 전라도 부안 출신. 1464년(세조 10)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69년(예종 1) 예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세조실록』 및 『예종실록』을 편찬한 공으로 1471년(성종 2) 이조정랑으로 승진되고 1475년 장령이 되어 여러 차례 시무소(時務疏)를 올렸다. 1476년 전첨으로 문과중시에 갑과로 급제, 예문관부제학·참찬이 되어, 간언에 기꺼이 따를 것과 대간의 임기를 연장할 것 등의 내용으로 된 시무4조(時務四條)를 왕에게 건의하였다. 다음해 대사간·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행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1478년 승지로서 왕이 성균관에 행차할 때 예에 어긋났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1485년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찬진(撰進)하고 이어 공조참의·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예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손기양(孫起陽, 1559년 ~ 1617년) : 1585년(선조 18)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전적, 울주판관, 영천군수를 역임했다.[3]
손덕심(孫德沈)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손덕호(孫德浩)·손덕순(孫德淳)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의 창암(蒼巖)에서 적을 무찔러 여현(礪峴)을 방비하였다.
손병희(孫秉熙, 1861년 ~ 1922년) : 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지도자. 독립운동가.
손일민(孫逸民, 1884년 ~ 1940년) :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상임의원
손원상 : 신라, 아간

손응상 : 신라, 시호 문열, 병부상서

손도명 : 신라, 병부상서

손도기 : 신라, 시호 문충, 병부상서

손 형 : 고려, 시호 문열, 대상

손광립 : 고려, 예부상서

손 현 : 고려, 형부상서

손효려 : 고려, 평장사

손수령 : 조선, 병조판서

손 사 : 조선, 시호 문헌, 병조판서

손 고 : 조선, 한성판윤

손서륜 : 조선, 집현전박사

손윤생 : 조선, 관찰사

손비장 : 조선, 부제학

손세옹 : 조선, 대사간

손순석 : 조선, 이조판서

손동욱(孫東頊, 1909년 ~ ) : 대법관
손경식(孫京植, 1939년 ~ ) : CJ그룹 회장
손지열(孫智烈, 1947년 ~ ) : 대법관. 제14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손학규(孫鶴圭, 1947년 ~ ) : 대한민국 제14·15·16·18대 국회의원. 제31대 경기도지사.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
손혜원(孫惠園, 1955년 ~ ) : 제20대 국회의원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손(孫) 씨는  457303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25 위이며  밀양 손(孫) 씨는  306895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28 위이고 성씨내 본관별 순위는  1 위이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밀양 손(孫) 씨는 전체 가구수가 85,333 가구로 본관의 인구는 274,665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29 위이며, 본관별 성씨 내의 순위는 1 위로 나타났다.

#밀양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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