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여산 송씨(礪山 宋氏) 2021-09-11 08:05
작성자 Level 10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시대 진사(進士)로서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다고 한다.

송유익의 증손자인 송송례(宋松禮, 1207년 ~ 1289년)가 1270년(고려 원종 11년)에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로서 권신 임유무(林惟茂) 일파를 제거하여 추성익대보리(推誠翼戴輔理) 동덕좌명공신(同德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랐으며, 찬성사(贊成事)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송송례의 장남 송염(宋琰)도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고, 행주 기씨(幸州奇氏) 기홍영(奇洪穎)의 딸과 혼인하여 송운(宋惲), 송방영(宋邦英), 송자상(宋子祥), 송자연(宋子淵), 송원미(宋元美) 다섯 아들을 두었으며 사위는 왕유소(王惟紹)이다.

송송례의 차남 송분(宋玢)은 충렬왕(忠烈王)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추성찬화안사공신(推誠贊化安社功臣)에 책록되고 낙랑공(樂浪公)에 봉해졌으며 1318년 중찬으로 치사하였다. 송분은 송진(宋瑨), 송린(宋璘), 송유(宋瑈), 송서(宋瑞) 등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송진(宋瑨)은 우부승지(右副承旨), 송린은 지신사(知申事), 송서는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1]


분파

고려 충렬왕 때 중찬(中贊)을 지낸 송례(松禮)의 아들 염(琰)·분(玢)의 형제대에서 원윤공파(元尹公派)·밀직공파(密直公派)·소윤공파(少尹公派)·지신공파(知申公派)·정가공파(正嘉公派)의 5파로 갈라졌는데, 앞의 3파는 염의 아들이고 나머지 2파는 분의 아들이다. 여산송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2명(영의정 1명, 좌의정 1명)과 왕비 1명, 그리고 많은 판서급 인물을 배출했는데, 5파 중에서도 특히 지신공파와 정가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지신공파에서는 현수(玹壽)를 비롯하여 세림(世琳)·세형(世珩) 형제, 상현(象賢)·상인(象仁) 형제, 성명(成明)·진명(眞明) 형제, 그밖에 인명(寅明)·문재(文載) 등의 명신들이 나왔다. 현수는 단종의 국구(國舅)로서 단종복위운동 사건 이후에도 세조의 아낌을 받았으나 금성대군(錦城大君) 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세림은 문장·서화에 뛰어났고, 세형은 명종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오르고, 대사헌, 호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상현은 임진왜란의 절신으로 유명하고, 상인은 인조 때 암행어사·부사·관찰사 등을 지냈다. 성명은 예조·이조판서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진명은 호조·이조·예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인명은 좌의정에 올라 당쟁의 타파에 공이 컸으며, 문재는 관찰사·대사헌·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정가공파에서는 영의정 질(帙), 중종의 부마 인(寅)과 문림(文琳)·언신(言愼) 등이 나왔다. 질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며, 그의 손자 인은 중종의 부마가 되고 도총관(都摠管)을 지냈으며, 시문과 서예에 능하였다. 문림은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언신은 병조·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광해군 원년 관찰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었다 한다. 

원윤공파에서는 익필(翼弼)이 대표적 인물이다. 선조 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서출(庶出)이라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여산송씨의 5파 중에서 원윤공파는 전라남도 고흥(高興), 밀직공파는 경상북도 영덕(盈德), 소윤공파는 전라북도 부안(扶安)·익산(益山), 지신공파는 전라북도 부안, 정가공파는 경기에 밀집해 있다.


집성촌(集成村)

-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 침교리

-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수리

-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대강리

-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상남리

- 전라남도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

-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풍류리

- 전라남도 보성군 노동면 옥마리

- 전라북도 익산시 동산동

-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나천리

- 경상북도 칠곡군 북상면 오평동

- 경상북도 상주군 중동면 금당리


 인물(人物)

송염(宋琰)고려 후기 무신. 고려 말기 무신. 중시조(中始祖) 송송례(宋松禮)의 장남. 임유무 제거, 출륙환도의 공로를 인정받아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송현수(宋玹壽, ? ~ 1457년) : 1454년(단종 2) 딸이 단종의 비(妃)로 책봉되자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가 되고 여량군(礪良君)에 책봉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돈령부판사가 되어 보필했다.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대간의 건의로 처벌이 불가피했으나 세조(世祖)가 두둔하여 무사하였다. 그러나 금성대군(錦城大君) 유가 사사되자 정창손과 양사의 주장으로 주살 당하였다.

송세림(宋世琳, 1479년 ~ ?) : 조선 전기의 문신. 자 헌중(獻中). 호 취은(醉隱)·고송(孤松)·눌암(訥庵). 1498년(연산군 4) 진사(進士)가 되고 1502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능성현령,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송겸(宋㻩) 조선 중기 문신. 1520년(중종 15) 별시 문과에서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고원군수(高原郡守)‧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형조참판(刑曹參判)‧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평안감사(平安監司) 등을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송희립(宋希立) 조선 중기 무신. 1592년 임진왜란때 큰형인 송대립(宋大立)과 함께 이순신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임난공신에 올랐으며 선조 34년에는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송익필(宋翼弼, 1534년 ~ 1599년) : 조선 중기의 학자. 서얼 출신이기 때문에 벼슬을 하지 못했으나, 조선팔대문장가로 문장에 뛰어났고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우하면서 성리학과 예학(禮學)을 탐구하여 조예가 깊었다.

송상현(宋象賢, 1551년 ~ 1592년) :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재직하였고 왜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송준(宋駿, 1564년 ~ 1643년) : 자는 진보(晉甫), 호는 성암(省菴).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정언으로 임명된 뒤 병조정랑·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597년 장령·사성(司成)·사간 등에 제수되고, 다음해 홍문관직제학이 되어 왕에게 『중용』을 강론하였다. 1599년 호조참의가 된 뒤 병조참의·이조참의·형조참의 등 6조의 요직을 역임하고, 대사성·부제학 등을 지냈다. 1603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상사 박이장(朴而章)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명을 받아 유구국(琉球國)의 국정을 살피고 돌아와서 상전(賞典)과 옥권(玉圈) 1부, 공로를 치하한 시 1절을 하사받았다. 1606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병으로 체임되었고, 1608년 당쟁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다시 복직되어 1623년(인조 1) 이조·병조·형조 등의 당상으로 요직을 거쳐 1626년 공충도관찰사(公忠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가 사직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성암유고』가 있다.

송상순(宋祥淳, 1842년 ~ 1921년) : 제주도 조천읍 출신. 철종(哲宗) 14년(1863) 계해(癸亥) 제주별시(濟州別試) 갑과(甲科)에 장원 급제하였다. 1862년(철종 13) 제주민란으로 제주안핵 겸 찰리사(濟州按覈兼察理使) 이건필(李建弼)이 부임해 왔는데, 그때 실시한 과거에서 급제한 것이다. 1878년(고종 15) 양지현감(陽智縣監), 1979년(고종 16) 2월 제주판관(濟州判官)에 부임하였다가 1880년(고종 17)에 장령(掌令)에 제수(除授)되어 떠났다. 1881년(고종 18)에 봉상시첨정(봉상시첨정), 지평(持平)을, 1882년(고종 19)에 정의현감(旌義縣監)을, 1892년(고종 29)에는 헌납(獻納)을 지냈다. 1880년(고종 17) 문묘의 생우전(牲牛錢) 2백냥을 마련하는 등 제주도민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송간(宋侃, 1405년 ~ ?) : 조선 단종조 충신
송경원(宋慶元, 1419년 ~ 1510년) : 송운의 6세손. 1455년 전라도사에 임명되었다.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켜 임실생육신(任實生六臣)이라 불린다.
송대립(宋大立, 1550년 ~ 1597년) : 조선 중기의 무장. 희립, 정립 등 삼형제 중 맏이
송세형(宋世珩, ? ~ 1553년) : 송세림의 동생. 명종 때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오르고, 대사헌, 호조·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송상인(宋象仁, 1569년 ~ 1631년) : 송상현의 아우. 1605년(선조 3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집의(執義), 부사 등을 지냈다.
송극인(宋克認, 1573년 ~ 1635년) : 1602년(선조 35)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부사·판결사 등을 역임하였다.
송시철(宋時喆, 1610년 ~ 1673년) : 송극인의 아들. 1653년(효종 4)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좌승지를 거쳐 형조·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송광연(宋光淵, 1638년 ~ 1695년) : 송시철의 아들. 1666년(현종 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송징은(宋徵殷, 1652년 ~ 1720년) : 송시철의 손자. 1689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형조·호조참판에 이르렀다.
송성명(宋成明, 1674년 ~ 1740년) : 송징은의 아들. 1705년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이조판서와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송진명(宋眞明, 1688년 ~ 1738년) : 송성명의 동생.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이조·예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청렴강직하였다.
송인명(宋寅明, 1689년 ~ 1746년) : 송광연의 손자. 1719년(숙종 45) 증광 문과에 급제하고, 1736년에 우의정을 거쳐 1740년에 좌의정이 되어 당쟁 타파를 위해 노력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송문재(宋文載, 1711년 ~ ?) : 송성명의 손자. 1746년(영조 22)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관찰사·대사헌·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송문림(宋文琳, 1409년 ~ 1476년) : 1457년(세조 3)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종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되고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다. 1472년 이조참판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무(恭武)이다.
송질(宋軼, 1454년 ~ 1520년) : 1477년(성종 8)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06년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러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시호는 숙정(肅靖)이다.
송인(宋寅) : 송질의 손자로 10세에 중종의 셋째 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으며, 도총관(都摠管)을 지냈다. 시문과 서예에 능했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송언신(宋言愼, 1542년 ~ 1612년) : 1577년(선조 10)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광해군 원년 관찰사로 있을 때 처음으로 족보를 만들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송(宋) 씨는  683494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18 위이며  여산 송(宋) 씨는  294788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29 위이고 성씨내 본관별 순위는  1 위이다.
2000년 통계청 인구 조사에 의하면 여산 송씨(礪山 宋氏)는  232,753명으로 나타남.

#여산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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