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인물

제목19세기의 주요인물2021-09-16 14:52
작성자 Level 10
김문근(金汶根/1801~186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 노부(魯夫). 시호 충순(忠純). 철종의 장인. 1841년(헌종 7) 음보로 가감역(假監役)이 된 뒤 현감을 지냈다. 51년(철종 2) 딸이 왕비로 책봉되자,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었다. 금위대장·총융사·훈련대장 등의 요직을 맡아 제2차 안동김씨 세도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돈령부영사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몸이 비대하여 포물부원군(包物府院君)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최재우(崔濟愚/1824~1864)
 
동학(東學)의 창시자. 본관 경주(慶州).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56년(철종 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天)·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62년 도수사(道修詞)·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64년(고종 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순도하였다. 1907년(융희 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최시형 崔時亨/1827~1898)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敎主).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63년 초대 교주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대 교주가 되었다. 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다. 92년 손천민(孫天民)·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
 
조선 후기의 왕족·정치가.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 안동김씨의 주류(主流)를 숙청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 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載晃)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졌으나, 3국(독일·프랑스·러시아)의 간섭으로 친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어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
 
 
 
김기수(金綺秀/18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연안. 자 계지(季芝). 호 창산(蒼山). 서울 출생. 1875년(고종 12) 현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응교(應敎)로 뽑혔다. 이듬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근대 한일교섭의 시초이다. 이때의 견문을 기술한 《일동기유(日東記游)》 《수신사일기》 등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폐쇄되었던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신사유람단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 79년 덕원부사(德源府使), 81년 대사성(大司成) 등을 지냈고, 93년 황간(黃澗)·청풍(淸風)의 민란에 안핵사(按使)로 파견되었으며, 참판에 이르렀다. 명필로도 유명하였다.
 
 
김홍집(金弘集/1842~1896)
 
조선 후기의 문신·정치가. 본관 경주(慶州). 초명 굉집(宏集). 자 경능(敬能). 호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시호 충헌(忠獻). 개성부유수 영작(永爵)의 아들. 1868년(고종 5)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광양현감(光陽縣監)을 거쳐 80년 예조참의로 수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할 때 중국인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지고 와서 이를 소개하고, 조선은 미국·청국·일본 등과 손을 잡고 세계발전의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개화파의 지지를 받아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나, 유학자 중심의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의 심한 반발을 받아 부득이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82년 구미(歐美) 열강의 통상요구에 따른 복잡한 국내문제와 임오군란(壬午軍亂)의 뒷처리 등으로 다시 기용되어 미국·영국·독일 등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부사로서 활약하고 이어 제물포조약 체결에 외교수완을 발휘하여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우의정·좌의정 등으로 전권대신(全權大臣)이 되어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94년 동학농민운동 후 일본 세력이 표면화되고 강력해지자, 그 힘으로 제1차 김홍집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세력을 잡자 강력한 친일파 인사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발표하여 새로운 국가체계를 세우고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의 대립으로 내각은 와해되고, 이어서 들어선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열강에 접근하려는 정책을 쓰자,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제3차 김홍집내각을 세웠다. 내각은 일본의 압력을 받아 단발령(斷髮令)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규탄을 받았으며, 96년 친러파 내각의 탄생과 함께 김홍집내각은 붕괴되었다. 그때 많은 대신들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김홍집도 광화문에서 난도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항상 조선이 발전하려면 선진 외국과 제휴해야 한다는 개화 교류사상의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개화사상의 특징은, 개화는 필연적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급진적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며 점진적 방법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3차의 내각을 성립시켰으나, 외세의 도전을 자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기도 전에, 정국의 혼란으로 군중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순종 때 대제학이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이정학재일록(以政學齋日錄)》이 있다.
 
 
 
김옥균(金玉均/1851~1894)
 
조선 후기의 정치가. 본관 안동(安東). 자 백온(伯溫). 호 고균(古筠)·고우(古愚). 시호 충달(忠達).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하였다. 6세 때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리(校理)·정언(正言)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박규수(朴珪壽)·유대치(劉大致)·오경석(吳慶錫)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81년(고종 18)에 일본을 시찰하고, 다음해 다시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는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서재필(徐載弼)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박영효·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다가, 84년(고종 21)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측에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閔氏)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守舊的)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의 제거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신축한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를 감행하여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94년(고종 31)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은 민중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닌 소수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과 구분되고,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가 아닌 기층질서에 대한 개혁의지였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과도 구분된다. 또 왕조의 제도적 개혁을 뛰어넘어 왕조질서 그 자체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甲午改革)과도 구분된다. 갑신정변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王政史)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95년(고종 32)에 법부대신 서광범(徐光範)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융희 4)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手記)》 등이 있다.
 
 
 
박영효(朴泳孝/1861~1939)
 
한말의 정치가. 본관 반남. 자 자순(子純). 호 춘고(春皐)·현현거사(玄玄居士). 초명 무량(無量). 수원 출생. 판서 원양(元陽)의 아들.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永惠翁主)와 결혼하여 금릉위(錦陵尉)가 되고, 유대치(劉大致)를 중심으로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서광범(徐光範) 등 개화당 요인들과 결속, 정치적 혁신을 주창하며,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과 러시아의 침투를 억제하는 데 주력했다. 1882년(고종 19) 수신사(修信使)에 임명되어 민영익·김옥균 등과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시도했으나 민태호(閔台鎬)·김병시(金炳始)·김병국(金炳國) 중심의 수구파의 집권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 84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내각이 조직될 때 친군전후영사겸좌포장(親軍前後營使兼左捕將)이 되어 군사와 경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삼일천하(三日天下)로 그쳐,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85년 잠시 도미(渡美)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자키[山崎永春]로 개명하고 메이지학원[明治學院]에 입학, 영어를 배우고, 유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하다가 94년 갑오개혁으로 죄가 용서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에서 김홍집·박영효의 연립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내무대신으로 있으면서 자주적 개혁을 꾀하였으나 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재차 일본에 망명했다. 98년 중추원 회의에서 그를 정부요직에 다시 기용하자는 건의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이런 움직임을 반대파에서는 박영효 대통령설을 유포시켜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 데 이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정치적 변동은 친일 세력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7년 오랜 망명생활 끝에 다시 귀국, 궁내부대신(宮內部大臣)에 임명되었다가 고종의 양위에 앞장선 대신들을 암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 회유정책으로 주어진 후작(侯爵)을 받았으며 18년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사에 취임하였다. 20년 동아일보사 초대 사장, 26년 중추원의장, 32년 일본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39년 중추원 부의장에 있을 때 죽었다. 저서에 《사화기략(使和記略)》이 있다.
 
 
 
조병갑(趙秉甲/?~?)
 
조선 후기의 탐관(貪官). 본관 양주(楊州). 1893년(고종 30) 고부군수(古阜郡守)로서 만석보(萬石洑:貯水池)를 증축할 때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水稅)를 징수 착복하였으며, 무고한 사람에게 죄목을 씌워 재산을 착취하는 한편, 태인군수(泰仁郡守)를 지낸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고 금품을 강제 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자행하였다. 격노한 군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했으나, 듣지 않고 오히려 학정을 가중함으로써 이듬해 동학농민운동을 유발한 직접 원인이 되었다. 전봉준(全琫準)의 습격을 받았으나 도피, 뒤에 파면되어 유배되었다.
 
 
 
손병희(孫秉熙/1862~1922)
 
한말 천도교의 지도자, 독립운동가.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淸州)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완용 (李完用/1858~1926)
 
한말의 정치가. 본관 우봉(牛峰). 자 경덕(敬德). 호 일당(一堂).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주서(注書)·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검교(檢校)·수찬(修撰)·동학교수(東學敎授)·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81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應敎), 세자시강원 겸 사서(司書)를 지냈다. 87년 주차미국참사관(駐箚美國參事官)으로 도미(渡美),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외무참의(外務參議)를 역임하였다. 그 해 12월 미국 주차대리 공사가 되어 다시 도미했다가 80년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을 역임하였다. 95년 학부대신(學部大臣)·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96년(건양 1)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친러파로서 외부대신·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있다가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乙巳五賦臣)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 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밀사사건 후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키는 등 매국행위를 하다가 1909년 이재명(李在明)으로부터 자격(刺擊)을 받았으나 상처만 입었다. 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伯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1년 조선귀족원 회원을 역임, 20년 후작(侯爵)에 올라 죽을 때까지 일본에 충성을 다했다. 글씨에 뛰어났다.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유인석(柳麟錫/1842~1915)
 
조선 후기의 학자·의병장. 본관 고흥(高興). 자 여성(汝聖). 호 의암(毅菴). 강원 춘성군 남면 출생. 철종 때의 거유(巨儒)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글을 배우다가 1868년 그가 죽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힘쓰는 한편,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도 직접 참여하였으며, 뒤에 그 자신도 제천(堤川)에서 강학(講學)하였다. 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문하(門下)의 유생들을 이끌고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94년(고종 31) 갑오개혁 후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켜 충주(忠州)·제천 등지에서 부패관리들을 죽였으나, 관군에게 패전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회인현(懷仁縣)에 은신 중 고종황제의 유지(諭旨)가 내려 한때 귀국하였다가, 98년 다시 만주로 갔다. 1909년(융희 3)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3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되어 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침공을 기도하던 중 일본의 외교적 절충으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으나 뒤에 석방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봉천성 관전현(奉天省寬甸縣)에서 병사하였다. 이항로의 학통(學統)을 계승한 학자로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1962년 대한민국건국 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서재필(徐載弼/1866.11.20~1951)
 
독립운동가. 본관 달성(達城). 호 송재(松齋). 영어명 제이슨(P.Jason). 전남 보성(寶城) 출생.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79년(고종 16) 전강(殿講)에 장원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 83년 일본의 도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후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操鍊局) 사관장이 되었다. 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洪英植)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85년 미국으로 망명, 89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민씨 일파가 몰락하자 96년 귀국 후 중추원(中樞院)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그 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유해와 함께 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한응(李漢應/1874.9.21~1905.5.12)
 
외교관. 본관 전의(全義). 자 경천(敬天). 호 국은(菊隱). 경기 용인 출생. 한응(漢膺)으로도 표기한다.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 9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97년 한성부주사(漢城府主事)가 되고 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되었다가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駐箚公使館) 3등 참사관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에 부임하였다. 1903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이듬해 주영공사(駐英公使)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署理公使)가 되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는 제1차 한일협약이 맺어져 나라의 형세가 위축되고 대외적으로는 영·일동맹으로 한국정부의 지위가 떨어지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죽은 뒤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이 국내로 옮겨져 용인에 안장되고,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추증되었다.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고,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민영환(閔泳煥/1861~1905)
 
한말의 문신·순국지사. 본관 여흥. 자 문약(文若). 호 계정(桂庭). 겸호(謙鎬)의 아들. 명성황후의 조카. 백부(伯父)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태호(泰鎬)에게 입양하였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수찬 등을 거쳐 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8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생부 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居喪)하였다.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관계(官界)로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지냈다. 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88년, 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93년 형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으며, 94년 내무부독판사(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 95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였는데, 이 때 일본·미국·영국 등지를 두루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귀국 후 의정부찬정(贊政)·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97년(광무 1)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이 때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다. 군제(軍制)의 개편만이 채택되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參政大臣) 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閑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육의전)에 모여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조용히 자결하였다.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현직(顯職)의 명예를 던지고 망국(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써 달랬다.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 고종의 묘소에 배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설 (李相卨/1870.~1917)
 
독립운동가. 본관 경주(慶州). 자 순오(舜五). 호 부재(溥齋). 충북 진천(鎭川) 출생. 일찍이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러시아어·법률 등을 공부하면서도 189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쳐 1904년 보안회(保安會)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이 되었고, 1905년 법부협판(法部協辦)·의정부참찬(參贊)을 지냈다. 그 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 등과 협의, 조약의 무효를 상소하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1906년 이동녕(李東寧)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노우키에프스크[煙秋]로 이주, 원동임야회사(遠東林野會社)를 세우고, 간도(間島) 룽징춘[龍井村]으로 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 교포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였다. 1907년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참석,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여 전세계에 알리려 하였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이 때 이준은 자결을 단행, 세계를 놀라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궐석재판(闕席裁判)이 진행되고 쓰설에게는 사형이,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그래서 귀국을 단념하고 영국·미국을 거쳐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유인석(柳麟錫) 등과 성명회(聲鳴會)를 조직,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각국에 발송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요청을 받은 러시아 관헌에게 붙잡혀 투옥되었다. 이듬해 석방되어 이동녕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권업보(勸業報)》 《해조신문(海潮新聞)》 등을 발행,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준(李儁/1859~1907)
 
항일애국지사. 초명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자 순칠(舜七). 호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함북 북청(北靑) 출생. 29세에 북청에서 초시(初試)에 합격, 1894년(고종 31) 함흥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상경,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하고, 96년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들추어 파헤치다가 그들의 면관(免官) 운동 때문에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되고 곧 독립협회에 가담,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97년(광무 1)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고 귀국, 다시 독립협회 일을 보다가 무고로 간부 17명과 함께 피체, 수개월 후 석방되었다. 99년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되자 민영환(閔泳煥)·이동휘(李東輝)·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침략과 친일 주구(走狗)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를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하고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친일대신(親日大臣) 5명을 성토하다가 피체, 철도(鐵島)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민영환·이용익(李容翊)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로 발전시켰다.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세웠고 함경도 출신 유학생 장학회인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뒤에 이를 서우학회(西友學會)로 발전시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세웠다. 그 해 평리원(評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검사가 되어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하다가 미움을 받아 8개월 만에 평리원에 피검, 고종의 특명으로 석방되어 검사에 복직되었으나 법무대신의 책동으로 곧 파면되었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령(密令)으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합류,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그 동안 헤이그에 묻혀 있던 유해는 63년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되었다.
 
 
 
  이위종(李瑋鍾/1887~?)
 
외교관·독립운동가. 본관 전주(全州). 7세 때부터 아버지인 범진(範晉)을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각국을 순회하여,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에 능통하였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을 지내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공사관이 철수된 후에도 러시아에 남아 있었다. 1907년 고종의 밀령을 받고 이준(李儁)·이상설(李相卨) 등과 함께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갔으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만국기자협회를 통하여 연설할 기회를 얻어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공박,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였다. 이에 일본은 이들 3인에 대한 궐석재판(闕席裁判)을 열어 종신형을 선고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그래서 이미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에 묻은 후 이상설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민종식(閔宗植/1861~1917)
 
한말의 의병장. 본관 여흥(驪興). 자 윤조(允朝). 호 퇴초자(退樵子). 188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충남 정산(定山)에 은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격분하여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듬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격파당하고 공주(公州)에 은신 중 체포되었다. 1907년 평리원(平里院)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주청(奏請)으로 감형, 진도(珍島)에 귀양갔다가 특사로 석방되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崔益鉉/1833~190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지사(志士).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 포천(抱川) 출생.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79년 석방되었다. 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신돌석(申乭石/1878.11.3~1908.11.17)
 
한말의 의병장. 본관 평산(平山). 자 순경(舜卿). 본명 태호(泰浩). 이명 돌석(乭錫). 경북 영덕(盈德) 출생.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항일의식이 남달랐고 애국애족하는 마음이 강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 1906년 영해(寧海)에서 의병 3백여 명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다. 울진군(蔚珍郡) 평해면(平海面)으로 가서 다시 3천여 명의 의병을 재편하고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접전, 경상도·강원도 일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전으로 많은 적을 사살하는 등 가는 곳마다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만큼 명성도 높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도 증원되어 부득이 일월산(日月山), 백암산(白岩山) 등지로 퇴각하면서도 일본군에게 요소요소에서 큰 타격을 입혔다. 1907년 12월 서울공격을 목적으로 13도의 의병이 연합하기도 하고 양주에 모여들었을 때 신돌석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외되자, 의병을 이끌고 영해로 돌아와 항전을 계속하였다. 일본은 그를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탐낸 고종(姑從) 김자성(金子聖)이 일본인에게 매수되어 그를 집으로 초대, 독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형제가 무참히 도끼로 찍어 죽였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3.26)
 
독립운동가. 본관 순흥(順興). 아명 안응칠(安應七).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商)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재명  (李在明/1890~1910)
 
독립운동가. 일명 수길(秀吉). 평북 선천(宣川) 출생. 1903년 그리스도교도가 되어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美國勞動移民社)의 하와이 이민모집에 응모, 미국에 건너가 수년 간 노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곧 제1·2차 한일협약(韓日協約)이 강제체결되자 귀국, 항일운동을 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博文]와 순종의 평양 순행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1909년 1월 동지들과 이토를 죽이고자 평양역에 대기하였으나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단념하고, 그 해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암살소식을 듣고는 친일매국노의 암살을 계획, 12월 명동(明洞)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李完用)을 찔러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히고 체포되어 이듬해 사형당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田明雲/1884~1947)
 
독립운동가. 1905년 하와이로 이민, 1년간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철도공사장이나 알래스카어장 등의 노무자로 지내면서 항일독립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 회원이 되었다. 1908년 한국정부의 외부고문(外部顧問)인 친일파 미국인 D.W.스티븐스가 휴가차 귀국하여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침략을 찬양하는 발언을 한 데 격분, 살해할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영사와 함께 오클랜드역에 내리는 기회를 이용, 기습하여 쇠뭉치로 강타, 격투를 벌이던 중에 같은 목적으로 대기하고 있던 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저격, 중상을 입혔다. 장인환의 공범자로 구속되었으나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그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09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30년경부터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다가 47년 비참한 생활고 끝에 사망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인환 (張仁煥/1876.3.10~1930.5.22)
 
독립운동가. 평양(平壤) 출생.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학업을 포기하는 등 어렵게 생활하면서 그리스도교인이 된다. 1905년 하와이 이민으로 마우이에 갔다가 이듬해 미국으로 가서 철도노무자, 알래스카 어장노무자로 일하고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에 들어갔다. 1908년 3월 한국정부의 외부(外部) 고문인 미국인 D.W.스티븐스가 휴가차 귀국하여 기자회견을 자청,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영사와 함께 오클랜드역에서 하차하는 기회를 이용, 저격하려 하였으나 한국인 의혈청년 전명운(田明雲)이 먼저 쇠뭉치로 습격, 격투를 벌이는 것을 보고 권총으로 스티븐스를 쏘아 중상을 입혀 2일 후에 죽게 하였다. 재판 결과 2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애국심과 예의바른 품행으로 10년 만에 출옥하였다. 27년 조만식(曺晩植) 등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51세 윤치복(尹致福)과 결혼한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세탁업을 하였으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병고에 시달리다가 자살하였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유길준(兪吉濬/1856~1914)
 
정치가·개화운동가. 본관 기계(杞溪). 자 성무(聖武). 호 구당(矩堂). 서울 출생. 1881년(고종 18)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다가 82년 귀국, 83년 외무랑관(外務郞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한 뒤 주미 전권대사 민영익(閔泳翊)을 수행하여 도미(渡美), 보스턴대학을 다녔다. 85년 유럽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돌아온 뒤 개화당으로 몰려 구금되었다. 구금기간에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기 시작하여 95년에 탈고했다. 94년 갑오개혁 때 외무참의(外務參議) 등을 지내고, 95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내무협판(內務協辦)을 역임, 96년 내부대신에 올랐으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내각이 해산되자 일본에 망명했다가 1907년 순종황제의 특사로 귀국했다. 그 후 흥사단(興士團)에 참여하여 활동했고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를 설립했으며 계산학교(桂山學校)를 설립했다.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훈1등 태극대수장(勳一等太極大綬章)을 받았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에서 남작(男爵)을 주었으나 거절했다. 저서에 《보로사국 후례대익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大益大王七年戰史)》《영법로토 제국 가리미아전사(英法露土諸國哥利米亞戰史)》 《노동야학독본(勞動夜學讀本)》 《대한문전(大韓文典)》 《구당시초(矩堂詩)》 《구당선생집(矩堂先生集)》《세계대세편(世界大勢編)》 《정치학(政治學)》 《평화광복책(平和光復策)》 《이태리 독립전사(伊太利獨立戰史)》 《파란쇠망전사(波蘭衰亡戰史)》 《구당서간집(矩堂書簡集)》이 있다.
 
 
 
  이인직(李人稙/1862.7.27~1916.11.1)
 
신소설가·언론인. 호 국초(菊初). 경기 이천(利川) 출생. 일본 도쿄[東京] 정치학교를 수학한 뒤 1906년에 《만세보(萬歲報)》 주필이 되면서 신소설 《혈(血)의 누(淚)》를 동지에 연재, 계속 많은 작품을 썼다. 1908년에는 극장 원각사(圓覺社)를 세위 자작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상연하는 등 신극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국권피탈 때 이완용(李完用)을 돕고 다이쇼[大正] 일본왕 즉위식에 헌송문(獻頌文)을 바치는 등 철저한 친일행동을 하기도 했으나 한국에서 처음으로 산문성(散文性)이 짙은 언문일치의 문장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는 크다. 《혈의 누》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귀(鬼)의 성(聲)》, 그 밖에 《치악산(雉岳山)》 《모란봉(牡丹峰)》 등이 있고, 단편으로 《빈선랑(貧鮮郞)의 일미인(日美人)》이 있다. 한국 최초의 신소설가로서 개화사상을 고취하고 갈등과 성격 묘사, 그리고 사실적 문장을 처음으로 구사하였다.
 
 
 
 주시경 (周時經/1876.12.22~1914.7.27)
 
한글학자. 본관 상주(尙州). 호 한힌샘·한흰메. 초명 상호(相鎬). 황해도 평산(平山) 출생. 1897년 배재학당 만국지지(萬國地誌)특별과를 졸업, 이어 보통과에 입학, 1900년 졸업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獨立協會) 조직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협성회(協成會)를 창립하여 《협성회보(協成會報)》를 발간하였고 또 조선문동식회(朝鮮文同式會)를 결성, 한글 기사체(記寫體)의 통일과 연구에 힘쓰는 한편, 여러 학교와 강습소의 교사·강사직을 맡아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98년 《국어문법(國語文法)》을 완성, 1910년 이를 수정·발간하였다. 1905년 국어연구와 사전(辭典) 편찬사업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였고, 1907년 어윤적(魚允迪)·이능화(李能和) 등과 함께 학부(學部:교육부)의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 위원이 되었다. 한국말과 글을 과학적으로 체계를 세워 국어학 중흥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 보급에 정성을 기울여 김두봉(金枓奉)·이규영(李奎榮)·최현배(崔鉉培)·장지영(張志暎)·이병기(李秉岐)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21년에는 이들 문하생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한글학회의 전신)를 창설함으로써 33년 드디어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 맞춤법의 과학적 연구가 결실을 보게 되었다. 8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국어문법》 《월남망국사》 《한문초습(漢文初習)》《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 《국문초학(國文初學)》 《말의 소리》 등이 있다.
 
 
 
  박은식(朴殷植/1859~1925)
 
한말 일제강점기의 민족사학자·독립운동가. 본관 밀양. 자 성칠(聖七). 호 겸곡(謙谷)·백암(白巖)·태백광노(太白狂奴). 10세 이후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고,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주자학 연마에 심혈을 기울여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날렸다. 학문적 계보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찍부터 신기영(申耆永)·정관섭(丁觀燮)같은 정약용(丁若鏞)의 문인들과도 접촉하면서 그의 실학사상을 체득하였다. 26세를 전후하여서는 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사사하였다. 1885년 향시에 합격, 88~94년까지 숭인전참봉·동명왕릉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90년대 서울에 거주하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상도 종래의 정주학(程朱學) 중심에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바탕으로 교육·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1904년 《학규신론(學規新論)》을 간행하는 한편, 서우학회(西友學會)를 발기하고 1908년 그 후신인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기관지 《서우》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교육·학회 활동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이 밖에도 그는 1909년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하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여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민중계몽·교육·언론 활동도 10년 국권피탈과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고, 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桓仁縣]으로 망명하면서 나라 밖에서 구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나라 잃은 슬픔을 국사연구를 통하여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등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博達)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는데, 이때 《안중근전》과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지었다. 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8년에는 러시아에서 한인교포 잡지 《한족공보(韓族公報)》 발행에 관여하던 중 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이에 그는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기 시작, 이듬해 이를 간행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 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의 이념·방법·지연·인맥 등의 파벌 암투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임정의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그 해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遺囑)을 남기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정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길로(靜安吉路)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는 그의 독립활동과 많은 저술들을 통해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정신주의적·관념적 역사관에 머물긴 했지만 역사 연구와 서술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신채호(申采浩/1880~1936)
 
항일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 본관 고령(高靈). 필명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 호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대전 출생. 1897년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또는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靑島]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 활동하다가, 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5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博達學院)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議政院)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단장, 신대한청년동맹(新大韓靑年同盟) 부단주(副團主) 등에 피선되었다. 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創造派)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쫓겨가 다물단(多勿團)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27년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東方同盟)에 가입, 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基隆港]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36년 옥사했다.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古朝鮮)과 묘청(妙淸)의 난(亂)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近代史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이순신전(李舜臣傳)》 《동국거걸(東國巨傑)》《최도통전(崔都統傳)》 등이 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장지연(張志淵/1864~1921)
 
언론인·우국지사. 본관 인동(仁同). 초명 지윤(志尹). 자 순소(舜韶). 호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경북 상주(尙州) 출생. 1894년(고종 31)  진사(進士)가 되고, 이듬해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각처에 발송하고, 97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고종의 환궁(還宮)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를 기초하였다. 이 해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대한예전(大韓禮典)》 편찬에 참여, 이듬해 내부주사(內部主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이승만(李承晩)·남궁 억(南宮檍)·양흥묵(梁興默)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총무위원으로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였다. 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의 주필로 항일구국(抗日救國)의 필봉을 휘둘렀으며, 한때 사직하고 광문사(廣文社)를 설립,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전력을 다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써서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이로 인해 일본 관헌에 잡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정부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기용하였으나 거절하고, 물러나 역대 문헌의 수집과 저술에 힘썼다. 1906년 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구국운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강제로 해산을 당하자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개편하였으나, 압력이 심하여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해조신문(海潮新聞)》 주필이 되었다. 경영난으로 신문이 폐간되자 상하이[上海]·난징[南京] 등지를 방랑하다가 귀국, 1909년 진주(晉州) 《경남일보(慶南日報)》 주필로 취임, 이듬해 8월 29일 국권침탈이 되던 날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 이로 인하여 《경남일보》는 폐간되었다. 저서에 《유교연원(儒敎淵源)》《동국유사(東國類史)》 《대동시선(大東詩選)》 《농정전서(農政全書)》 《일사유사(逸士遺事)》 《위암문고(韋庵文庫)》 《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대동문수(大東文粹)》 《대동기년(大東紀年)》 《화원지(花園誌)》 등이 있다. 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지석영(池錫永/1855~1935)
 
의사·문신·국문학자. 자 공윤(公胤). 호 송촌(松村). 본관 충주(忠州). 서울 출생. 1876년(고종 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던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 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79년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이 해 겨울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德山面)에서 한국 최초로 종두를 실시, 이듬해 서울에서도 부산제생의원에서 보내온 두묘(痘苗)로 종두를 실시하였다. 80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위생국에서 두묘의 제조법과 독우(犢牛)의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우고 귀국,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우두를 실시하는 한편, 일본 공사관 의관(醫官) 마에다 기요노리[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우기도 했다. 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체포령이 내려 일시 피해 있다가 정국이 수습된 후 불타버린 종두장(種痘場)을 다시 열어 종두를 보급, 그 해 9월 전라도 어사(御使) 박영교(朴泳敎)의 요청에 따라 전주(全州)에서, 이듬해에는 공주(公州)에서 각각 우두국(牛痘局)을 설치, 종두를 실시하고 그 방법을 각 군에서 뽑혀 올라온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83년(고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 87년 장령(掌令)으로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우두의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승지(承旨)를 거쳐 96년(고종 33) 동래부사를 지냈고 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교장에 취임, 그 후 10년간 의학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글 보급에 힘써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상소,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1909년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집필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적을 남겼다.
 
 
 
명성왕후(明聖王后 1851-1895(철종2-고종32)
 
1. 출신과 간택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하여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 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2. 대원군과의 갈등
 
소녀시절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틈틈이 《춘추 春秋》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수완이 능란한 그녀는 수년 후부터 곧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흥선대원군의 희망과는 달리 일생을 두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간의 정치적 대립으로 각기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명성황후와 대원군 사이가 갈라진 것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립 공작 때문이라 하나,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의 세력과 새로 들어온 남인(南人)과 일부 북인(北人)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했다.
명성황후는 갖은 방법으로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물러나도록 공작하여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政敵:趙成夏를 중심으로 한 趙大妃 세력, 趙斗淳·李裕元 등 노대신 세력, 金炳國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 대원군의 장자 載冕과 형 李最應 세력 및 崔益鉉 등 유림세력)과 결탁하고,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 상소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하야하게끔 하여 양주(楊州) 곧은골[直谷]에 은퇴시켰다.  
 
3. 정권 장악과 친정외교
 
대원군의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근대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시책을 승인했다.
1882년 민씨 정부의 정책에 불평을 품어온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俸糧米)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구군인(舊軍人)의 세력을 업고 쿠데타를 감행하자, 명성황후는 재빨리 궁중을 탈출하여 충주목(忠州牧)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왕과 연락하는 한편, 청국에 군사적 개입을 요청하여 청국군을 출동하게 하고 일시 정권을 장악했던 흥선대원군을 청국으로 납치하게 하였으며, 다시 민씨세력이 집권하도록 암약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開化派)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84년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나 잠시 개화당 정부에 정권을 빼앗겼으나 곧 청국세력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왕궁에서 외교적 국면에 매우 민첩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885년에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면서 유연성 있는 접촉을 유지하였다.
 
4. 을미사변과 명성황후 시해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의 정국이 얽혔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침략공세를 펴게 된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 세력을 거세하려고 공작하였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일본이 미는 개화세력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한반도에 진주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조선 정계에 적극 압력을 가하게 되자, 사세가 불리해진 명성황후는 친러정책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일본 세력에 대항하였다.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일본의 대륙침략의 기세가 꺾이게 되자, 조선 정계의 친러 경향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침략정책에 정면 대결하는 명성황후와 그 척족 및 친러 세력을 일소하고자 일부 친일정객과 짜고, 1895년 8월에 일본군대와 정치낭인(政治浪人)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명성황후는 나이 45세로 일본인의 손에 살해되고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이때의 정부는 친일정책을 펴 폐비조칙(廢妃詔勅)을 내렸다. 10월 10일 복위되어 태원전(泰元殿)에 빈전을 설치하고 숭릉(崇陵) 우강에 능호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장을 준비하였다.
그후 1897년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되고 난 뒤 11월 양주 천장산(天藏山) 아래 국장되어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 미금시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19세기의 주요인물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