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인물

제목18세기의 주요인물22021-09-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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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李德懋) 1741-1793(영조17-정조17)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 호는 형암(炯庵)·아정(雅亭)·청장관(靑莊館)·영처(#영05處)·동방일사(東方一士). 정종의 별자(別子) 무림군 선생(茂林君先生)의 10세손이며 통덕랑 성호(聖浩)의 아들이다.
박학다식하고 고금의 기문이서(奇文異書)에 이르기까지 달통하였으며, 문장에 개성이 뚜렷하여 문명을 일세에 떨쳤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어릴 때 병약하고 빈한하여 거의 전통적 정규교육은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총명한 그는 가학(家學)으로써 6세에 이미 문리(文理)를 얻고, 약관에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와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떨쳤다.
특히 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박제가·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의 북학파실학자들과 깊이 교유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면에 있어서의 급진적인 개혁이론보다는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고증학적 방법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고염무(顧炎武)·주이존(朱彛尊) 등 명말청초(明末淸初)의 고증학 대가들의 저서에 심취한 나머지 1778년(정조 2) 사은겸진주사(謝恩兼陳奏使) 심염조(沈念祖)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직접 연경(燕京)에 들어가 기균(紀均)·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육비(陸飛)·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 등 청나라 석학들과 교유하는 한편, 그곳의 산천·도리(道里)·궁실(宮室)·누대(樓臺)·초목·충어(蟲魚)·조수(鳥獸)에 이르기까지 자세한 기록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고증학에 관한 책들도 많이 가져왔다.
이것은 그의 북학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가 되었으며, 그의 명성은 정조에게까지 알려져 1779년 박제가·유득공·서이수와 함께 초대 규장각 외각검서관이 되었다.
14년간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규장각신(奎章閣臣)을 비롯한 많은 국내학자들과 사귀는 한편, 그곳에 비장되어 있는 진귀한 서적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규장각의 도서편찬에도 적극 참여하여 《도서집성 圖書集成》·《국조보감 國朝寶鑑》·《규장각지 奎章閣志》·《홍문관지 弘文館志》·《송사전 宋史筌》·《검서청기 檢書廳記》·《대전회통 大典會通》·《기전고 箕田攷》·《규장전운 奎章全韻》·《시관소전 詩觀小傳》 등 많은 서적의 정리와 교감에 종사하였다.
항상 소매 속에 책과 필묵을 넣어 다니면서 보고 듣고 생각나는 것을 그때그때 적어두었다가 저술할 때 참고로 하였다. 내성적 성격이지만, 근면하고 특히 시문에 능하여 규장각 경시대회(競詩大會)에서 여러 번 장원함으로써 정조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1781년에는 내각검서관으로 이배(移拜)되는가 하면, 사도시주부(司#도42寺主簿)·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적성현감 등을 거쳐, 1791년에는 사옹원주부가 되었다.
비속한 청나라의 문체를 썼다 하여 박지원·박제가 등과 함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 정조에게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기까지 하였으나, 질병으로 1793년에 죽었다.
정조는 생시의 업적을 기념하여 장례비와 《아정유고 雅亭遺稿》의 간행비를 내어주고, 1795년 그의 아들 광규(光葵)를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글씨도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는데, 특히 지주(蜘蛛)와 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한다.
저서로는 《관독일기 觀讀日記》·《이목구심서 耳目口心書》·《영처시고 #영05處詩稿》·《영처문고 #영05處文稿》·《예기고 禮記考》·《편찬잡고 編纂雜稿》·《기년아람 紀年兒覽》·《사소절 士小節》·《청비록 淸脾錄》·《뇌뢰낙락서 磊磊落落書》·《앙엽기 #앙11葉記》·《입연기 入燕記》·《한죽당수필 寒竹堂隨筆》·《천애지기서 天涯知己書》·《열상방언 洌上方言》·《협주기 峽舟記》 등 16종이 있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영조18-순조1)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정헌(貞軒). 익(瀷)의 종손으로 용휴(用休)의 아들이며, 천주교인 이승훈(李承薰)의 외숙이다.
학문적 교우로는 정약용(丁若鏞)·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 등 초기 천주교 신자가 많았다. 1771년(영조 47)에 진사가 되고,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780년에 비인현감이 되었다.
1784년에 생질인 이승훈이 북경에서 돌아오고, 동료학자들이 서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그는 천주교에 대한 학문상의 관심과 우려를 가지고 이벽과 논쟁을 벌이다가 도리어 설득되어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벽으로부터 서학입문서와 《성년광익 聖年廣益》 등을 빌려 탐독하고, 제자들에게도 전교하는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 때에는 교리연구를 중단하고,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서 천주교를 탄압하였고, 그뒤 대사성·개성유수·형조판서를 지냈고,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입국사건에 연루, 충주목사로 좌천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천주교인을 탄압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다시 천주교를 연구하여 1801년(순조 1) 이승훈·권철신 등과 함께 옥사로 순교하였다. 정조로부터 ‘정학사(貞學士)’라 호칭될 만큼 대학자였으며,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하여 그 자신이 “내가 죽으면 이 나라에 수학의 맥이 끊어지겠다.”라고 할 만큼 수학의 대가였다.
저서로는 《금대유고》가 있다.
 
 
 
이기양(李基讓) 1744-1802(영조20-순조2)
 
 조선 후기의 실학자·천주교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덕형(德馨)의 7대손으로 이가환(李家煥)·권철신(權哲身)·홍낙민(洪樂敏)과는 사돈간이 되며 교우가 두터웠다.
1774년(영조 50)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그뒤 현감까지 지내다가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이 되었고, 이어 검상·승지를 역임하고 1798년 의주부윤으로 나갔다.
1800년 진하부사(進賀副使)로서 청나라에 가는 기회에 천주교 교리와 직접 접하게 되었고, 귀국하여 이가환·이벽(李檗) 등과 함께 사귀었다. 이벽과는 세계와 우주의 기원과 그 질서, 인간영혼과 후세상벌에 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서학의 교리를 토론하였는데, 결국 이 토론에서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인정하였고 은밀히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겉으로는 남인공서파(南人攻西派)와 친분을 가짐으로써 서학 반대자로서 자처하였다. 이후 병조참판·우승지·한성부우윤을 거쳐 1801년(순조 1)에는 대사간·예조참판·좌승지를 역임하였다.
특히, 안정복(安鼎福)은 그가 천주학에 빠져 들어가자 장문의 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아들 총억(寵億)이 신자였던 관계로 반대파들은 그를 이른바 사학(邪學)의 교주라고 비난하였고, 그 자신도 친국소에서 무답으로 응하였기 때문에 단천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신원, 복관되었다.
저서로는 《복암유고》가 있으며, 편서로는 《한음문고부록 漢陰文稿附錄》 등이 있다.
 
 
김홍도(金弘道) 1745(영조21)∼?
 
만호를 지낸 진창(震昌)의 종손이자 석무(錫武)의 아들이다. 당대의 감식자이며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천거로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이 된 그는 강세황의 지도 아래 화격(畵格)을 높이는 동시에,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왕세자(뒤의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監牧官)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익선관본(翼善冠本)을 그릴 때 한종유(韓宗裕)·신한평(申漢枰) 등과 함께 동참화사(同參畵師)로 활약하였으며, 찰방(察訪)을 제수받았다. 이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이라 자호하였다.
1788년에는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왕명으로 금강산 등 영동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그리고 1791년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현감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고와 가난이 겹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 壺山外記》와 홍백화(洪白華)의 발문(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금강전도〉의 시화첩에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해서 마치 신선과 같았다 한다.
그는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부터 이름을 크게 떨쳤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으며,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인데, 대체로 50세를 중심으로 전후 2기로 나누어지는 화풍상의 변화를 보인다.
산수화의 경우 50세 이전인 1778년작인 〈서원아집육곡병 西園雅集六曲屛〉(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말해주듯이, 주로 화보(畵譜)에 의존한 중국적인 정형산수(定型山水)에 세필로 다루어지는 북종원체화적 경향(北宗院體畵的傾向)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연풍현감에서 해임된 50세 이후로 한국적 정서가 어려 있는 실경을 소재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보다 세련되고 개성이 강한 독창적 화풍을 이룩하였다.
물론 석법(石法)·수파묘(水波描) 등에서 정선(鄭#선19)·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김응환의 영향이 다소 감지되지만, 변형된 하엽준(荷葉#준14)이라든지 녹각 모습의 수지법(樹枝法), 탁월한 공간구성, 그리고 수묵의 능숙한 처리, 강한 묵선(墨線)의 강조와 부드럽고도 조용한 담채(淡彩)의 밝고 투명한 화면효과는 한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김홍도 특유의 화풍이다.
또한, 만년에 이르러 명승의 실경에서 농촌이나 전원 등 생활주변의 풍경을 사생하는 데로 관심이 바뀌었으며, 이러한 사경산수 속에 풍속과 인물·영모 등을 가미하여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일상사의 점경으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산수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에서도 자신만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전기에는 도석인물 중 주로 신선도를 많이 다루었는데, 굵고 힘차면서도 거친 느낌을 주는 의문(衣紋),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그리고 티없이 천진한 얼굴 모습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기의 신선묘사법은 1776년에 그린 〈군선도병 群仙圖屛〉(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제139호)에서 그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후기가 되면 화폭의 규모도 작아지고, 단아하면서도 분방하며 생략된 필치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도석인물화와 더불어 그를 회화사적으로 보다 돋보이게 한 것은 그가 후기에 많이 그렸던 풍속화이다.
조선 후기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점경이 간략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원형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다. 그의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그가 이룩한 한국적 감각의 이러한 화풍과 경향들은 그의 아들인 양기(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김석신(金碩臣)·이명기(李命基)·이재관(李在寬)·이수민(李壽民)·유운홍(劉運弘)·엄치욱(嚴致郁)·이한철(李漢喆)·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등 한국화 발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앞서 설명한 작품 외에 그의 대표작으로는 〈단원풍속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27호)을 비롯해서 〈금강사군첩 金剛四君帖〉(개인 소장)·〈무이귀도도 武夷歸棹圖〉(간송미술관 소장)·〈선인기려도 仙人騎驢圖〉·〈단원도 檀園圖〉(개인 소장)와 〈섭우도 涉牛圖〉·〈기로세련계도 耆老世聯#계29圖〉·〈단원화첩〉(호암미술관 소장)·〈마상청앵도 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홍국영(洪國榮) 1748∼1781(영조24-정조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덕로(德老).
관찰사 창한(昌漢)의 손자이며, 판돈녕부사 낙춘(樂春)의 아들이다. 큰아버지는 낙순(樂純)이며, 정조의 외조부인 우의정 홍봉한(洪鳳漢)과 이조판서 홍인한(洪麟漢)은 가까운 집안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771년(영조 48)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설서가 되었다. 이때 마침 영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그 소생인 손자(뒤의 정조)를 후계로 정하였다. 영조 말년 벽파의 횡포 속에서 세손을 보호한 공로로 세손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어 사서에 승진하였고,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홍인한·김구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1776년 홍상간(洪相簡)·홍인한·윤양로(尹養老) 등이 세손을 반대, 모해하려는 모역을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그해 정조가 즉위하자 곧 동부승지로 특진 임명되었고, 날랜 군사를 뽑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숙위대장을 겸직하여 왕궁호위를 전담하고 도승지에 올랐다. 실권을 잡게 되자 삼사(三司)의 소계(疏啓), 팔로(八路)의 장첩(狀牒), 묘염(廟剡), 전랑(銓郎)의 차제(差除) 등을 모두 총람(總覽)하였고, 또 당시의 삼공육경(三公六卿)까지도 그에게 맹종하게 되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자연히 조정의 백관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말이라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을 얻어야 행동하게 되므로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바쳐 원빈(元嬪)으로 삼았으나 20세도 못 되어 1년 만에 병들어 죽자,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 인(恩彦君$인03)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에 봉하고, 다시 상계군(常溪君)으로 개봉하여 왕의 후계자로 삼도록 함으로써 세도정권 유지에 급급하였다.
왕비 순정왕후(純貞王后)가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왕비를 독살하기 위하여 1780년에 독약을 탄 음식을 왕비전에 넣었다가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田里)로 방축되었다. 고향에 내려와 울화를 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중 병을 얻어 죽었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로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일설에는 자진해서 물러가라는 정조의 권고로 일시 은퇴하였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형벌을 받았다고도 한다.
 
 
 
유득공(柳得恭) 1749-?(영조2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영13齋)·영암(#영13庵)·고운당(古芸堂).
진사 관(#곤17)의 아들이다. 영조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컸으며, 그뒤 제천·포천·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는 풍천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경도잡지 京都雜志》·《영재집 #영13齋集》·《고운당필기 古芸堂筆記》·《앙엽기 #앙11葉記》·《사군지 四郡志》·《발해고 渤海考》·《이십일도회고시 二十一都懷古詩》 등이 있다.
특히 《경도잡지》는 조선시대 시민생활과 풍속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서적이며, 《발해고》는 그의 학문의 깊이와 사상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저서이다.
규장각검서로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 비장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일본의 사료까지도 읽을 기회를 많이 가졌으며,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나온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오늘날의 학문수준으로 보아 높이 평가할 수는 없으나, 서문에서 “고려시대의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되었다. “고 주장하여 민족주체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주체의식의 확립에 노력한 모습은 《이십일도회고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4, 000년에 걸쳐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의 21개 도읍지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에는 거듭되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민족의 주체의식을 되새겨보려는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시는 청나라의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均)으로부터 재기종횡(才氣縱橫), 재정부유(才情富有)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정후겸(鄭厚謙) 1749-1776(영조25-정조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백익(伯益). 석달(錫達)의 아들로 일성위(日城尉) 치달(致達)에게 입양되었다.
본래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출신(庶人出身)이었으나 영조의 서녀(庶女) 화완옹주(和緩翁主:치달의 처)의 양자가 되면서부터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16세로 장원봉사(掌苑奉事)가 되고, 1767년(영조 43)수찬에 올랐다. 이어 부교리·지평을 역임하고 1768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호조참판·공조참판을 지냈다.
성격이 매우 교활하고 간사하였으며, 영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당시 세도가였던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세손(世孫:정조)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자 화완옹주·홍인한 등과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며, 동궁에 사인을 비밀리에 보내어 세자의 언동을 살피게 하는 한편,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洪國榮)을 탄핵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는 데 광분하였다.
이듬해 정조가 즉위하자 군신들이 그를 주살할 것을 요청, 드디어 경원에 유배되어 천극(조선시대 유배된 중죄인을 가둔 가옥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쳐서 외출하지 못하게 하였음)되었다가 곧 이어 사사되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영조26-순조5)
 
(栗)의 6대손이며 승지 평(坪)의 서자이다.
소년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쳐 19세를 전후하여 박지원(朴趾源)을 비롯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이덕무·유득공·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 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1778년에는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하여 《북학의 北學議》 내·외편을 저술하였는데,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제도의 모순점과 그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한편, 정조는 서얼들의 누적된 불만을 무마시키려는 정책의 하나로 1777년 3월에 서얼허통절목(庶#얼02許通節目)을 발표하는가 하면, 1779년 3월에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하여 그를 비롯한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의 서얼출신 학자들을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13년간 규장각 내·외직에 근무하면서 여기에 비장된 서적들을 마음껏 읽고,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786년에는 왕명으로 당시의 관리들이 시폐(時弊)를 시정할 수 있는 〈구폐책 救弊策〉을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그가 진언한 소는 주로 신분적인 차별을 타파하고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그뒤 1790년 5월 건륭제(乾隆帝)의 팔순절에 정사(正使) 황인점(黃仁點)을 따라 두번째 연행(燕行)길에 오르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압록강에서 다시 왕명을 받아 연경에 파견되었다.
원자(元子: 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하여 정조는 한낱 검서관이었던 그를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하여 별자(別咨)사절로서 보낸 것이다.
1793년 정원에서 내각관문(內閣關文)을 받고 〈비옥희음송 比屋希音頌〉이라는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한 자송문(自訟文)을 왕에게 지어바쳤다.
1794년 2월에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를 보아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또한, 1798년에는 영조가 적전(籍田)에 친경한 지 회갑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널리 농서를 구하였다.
이때 그도 《북학의》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응지농정소 應旨農政疏〉를 올렸는데, 《소진본북학의 疏進本北學議》는 이때 작성된 것이다.
그리고 1801년(순조 1)에는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네번째 연행길에 올랐으나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사건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에 혐의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죽었다.
 
그가 죽은 연대는 1805년과 1815년 설이 있는데, 그의 스승이며 동지인 박지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하여 곧 죽었다는 기록과, 1805년 이후에 쓴 그의 글이 보이지 않는 점 등으로 보아 1805년에 죽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아들은 장임(長稔)·장름(長#늠01)·장엄(長#암26) 등 셋인데 막내아들 장엄은 유득공의 아들 본예(本藝)·본학(本學)형제와 함께 순조 때 검서관이 되었다.
시·그림·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였는데, 청대(淸代)《사고전서 四庫全書》 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대련형식(對聯形式)을 수용해왔을 뿐 아니라, 글씨는 예서풍을 띠고 있으며 조선 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구양순(歐陽詢)과 동기창(董其昌)풍의 행서도 잘 썼으며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꿩그림과 고기그림을 잘 그렸다.
유작으로 〈대련글씨〉·〈시고 詩稿〉·〈목우도 牧牛圖〉·〈의암관수도 倚巖觀水圖〉·〈어락도 魚樂圖〉·〈야치도 野雉圖〉 등이 있다.
저서로는 《북학의》·《정유집 貞#유78集》·《정유시고 貞#유78詩稿》·《명농초고 明農草藁》 등이 있다.
 
 
 
권일신(權日身) 1751-1791(영조27-정조15)
 
 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인. 본관은 안동. 자는 성오(省吾), 호는 직암(稷庵), 세례명은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 Xavier). 갈산출신. 근(近)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흠(歆)이며, 형은 철신(哲身)이다.
남인계의 학자로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1782년(정조 6) 이벽(李蘗)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 청나라에서 영세를 받고 온 이승훈(李承薰)에게 최초로 프란시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뒤 이벽·이승훈과 함께 포교에 전력하여 충청도 내포(內浦)의 이존창(李存倉, 혹은 李端源)을 입교시키고, 또 전주의 유항검(柳恒儉)을 개종시켰다.
1785년에는 서울 명례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정식으로 교회집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지만 학행(學行)과 가문으로 인하여 무사하였다.
그뒤 1786년에 이벽이 사망하자 조선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조동섬(趙東暹)과 함께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가 8일간 피정(避靜)하면서 신앙을 더욱 두텁게 하였다. 그리고 추조적발사건으로 흩어졌던 초대교회의 주역들인 이승훈·정약용(丁若鏞)형제 등과 함께 더욱 견고한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세웠다.
이것을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교(主敎)가 되었고 다른 동료교우들인 이승훈·정약종·최창현·이단원·유항검 등은 각기 신부로 지명되어 본격적으로 천주교 사목(司牧)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789년에 이들 가성직자의 유효성에 대한 의혹이 일어나 북경 주교 구베아(Gouvea, A.)에게 문의, 그들의 사제성직(司祭聖職)의 집행이 부당한 것임을 알게 되자, 1790년 즉시 평신도로 되돌아갔다.
최창현(崔昌顯)의 도움을 받으면서 더욱 열심히 천주교 포교에 전력하다가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홍낙안(洪樂安)·목만중(睦萬中)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자질과 덕망을 높이 평가받던 터라 제주도로 유배하는 데 그쳤으나, 제주목사로 하여금 한달에 세번씩 신문하라는 하교를 첨가시켰다.
당시 유배지로 출발하기 위하여 서울에 있는 매부 이윤하(李潤夏)의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행장을 준비하고 있을 때, 정조의 명령을 받은 별감 몇명이 와서 당시 80세가 된 어머니와 천리나 되는 배소지 제주의 거리를 다시금 환기시키며 천주교와 유교에 대한 애매한 글귀를 내놓고 수결(手決)하기를 권하자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맡기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예산으로 유배지가 바뀌게는 되었지만, 한편으로 달레(Dallet, C. C.)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부모에 대한 지나친 인성적(人性的)사랑으로 말미암아 배교하고 말았다고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그뒤 예산으로 유배가던 중 혹심하였던 장독으로 인하여 주막에서 사망하였다. 명문의 집안에서 태어난 학자로서 서학에 일생을 종사하다가 순교한 것이다.
 
 
 
이벽(李檗) 1754-1786(영조30-정조1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庵). 세례명은 요한세자.
세거지인 경기도 광주출신. 무반으로 이름 높은 가문의 후손으로, 부만(溥萬)의 아들이다. 정약용(丁若鏞)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하는 남인학자의 일원이었으며,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李承薰)·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무반으로 출세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소원을 뿌리쳤으며, 문신으로도 진출하지 않고 포의서생(布衣書生)으로 생애를 마쳤다.
이른 시기부터 조선 후기 주자학의 모순과 당시의 유교적 지도이념이 흔들리고 있음을 깨달아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던 중, 사신들을 통하여 청나라로부터 유입된 서학서(西學書)를 열독하였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서양선교사들과 중국의 실학자 서광계(徐光啓)·이지조(李之藻) 등이 저술한 한문으로 된 천주교서적들은 천주교의 교리·신심·철학·전례와 아울러 서구의 과학·천문·지리 등의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러한 서적들을 치밀히 연구함으로써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1779년(정조 3)권철신·정약전(丁若銓) 등 기호지방의 남인학자들이 광주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에서 실학적인 인식을 깊이 하고 새로운 윤리관을 모색하려는 목적의 강학회(講學會)를 열었는데, 이때 그가 천주교에 대한 지식을 동료학자들에게 전하고, 후일 우리나라에서 자생적으로 천주교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1784년 이승훈이 중국에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을 때 영세를 받아올 것을 부탁하고, 그 절차를 잘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많은 천주교서적들을 가지고 오자, 다시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천주교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서울 수표교(水標橋)에 집을 마련하여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한편, 교분이 두터운 양반학자와 인척들 및 중인계층의 인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천주교를 전교하였다.
이때 세례받은 사람들은 권철신·권일신·정약전·정약용·이윤하(李潤夏) 등 남인 양반학자들과 중인 김범우(金範禹) 등이었다.
그뒤 천주교의 의식이나 전교를 위하여 교단조직과 교직자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른 신자들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교단조직인 이른바 ‘가성직자계급(假聖職者階級)’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교단조직은 자발적으로 수용된 한국천주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벽은 이 교단조직의 지도자로서 그의 집에서 포교(布敎)·강학(講學)·독서·사법(師法) 등의 천주교 전례의식(典禮儀式)을 주도하였으며, 새로 입교한 남인학자들은 모두 그의 제자로 칭하였다.
1785년 봄에는 장례원 앞에 있는 김범우의 집에서 사대부·중인 수십명이 모인 가운데 ‘설법교회(說法敎誨)’하는 모임을 매우 엄격하게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교모임은 그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으로 세상에 드러나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며, 성균관유생들의 척사운동으로 인하여 일단 해산되었다.
그뒤 천주교신앙에 대한 아버지의 결사적인 반대를 받아, 당시 사회에서 포기할 수 없었던 효정신(孝精神)의 윤리관과 새로운 진리로 체득한 천주교사상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여야 하는 심각한 갈등 속에서 고뇌하다가 페스트에 걸려 죽었다.
그의 말년의 신앙에 대하여 달레(Dallet, C. H.)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배교로 단정하고 있으나, 효를 절대적인 이념으로 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렇게 단순히 처리할 수는 없다는 견해도 있다.
《성교요지 聖敎要旨》가 유일한 저작으로 전한다. 이것의 전반부는 신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한 한시로 기독교성서의 이해와 복음정신의 사회화인 구세관(救世觀)을 표현하고, 후반부는 로마서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정의론(社會正義論)이라 할 수 있는 정도관(正道觀)을 서술한 것으로서, 저자의 성서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의 자발적인 천주교수용이 성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기독교사상과 동양유학사상이 결합된 윤리와 규범을 제시하였으며, 그것은 후일 한국천주교가 유례없는 대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영조34-순조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 또는 연경재(硏經齋).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출신. 진주목사 재원(載遠)의 아들이며, 약용(若鏞)의 형이다.
어릴 때부터 매우 재주가 있고 총명하였으며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거리낌이 없었다.
이미 소년시절에 서울에서 이윤하(李潤夏)·이승훈(李承薰)·김원성(金源星) 등과 깊이 사귀면서 이익(李瀷)의 학문에 접하여 여기에 심취하였으며, 이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더 깊이있게 배웠다.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자,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여 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리하여 전적·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 이미 서양의 학문과 사상에 접한 바 있는 이벽(李檗)·이승훈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특별히 친밀하게 지냈으므로, 이들을 통하여 서양의 역수학(曆數學)을 접하고 나아가 천주교의 교리를 듣고는 여기에 마음이 끌려 이를 신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1801년(순조 1)에 신유사옥이 일어나 많은 천주교신도들이 박해를 입게 되자, 아우 약용과 함께 화를 입어 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에 유배되고, 그는 신지도(薪智島)를 거쳐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었다.
여기에서 복성재(復性齋)를 지어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저술로 울적한 심정을 달래다가 끝내 풀려 돌아가지 못하고 16년 만에 죽었다.
저서로는 《자산어보 玆山魚譜》를 비롯하여 《논어난 論語難》·《동역 東易》·《송정사의 松政私議》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자산어보》만이 전해오고 있다.
《자산어보》는 그가 유배되었던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는 동시에, 이를 어류(魚類)·패류(貝類)·조류(藻類) 및 해금(海禽)·충수류(蟲獸類) 등으로 분류하여,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에 관한 것까지를 자세히 기록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의 서적이라 할 수 있는 명저로 손꼽히고 있다.
 
 
 
 
신윤복(申潤福) 1758-?(영조34-?)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 화원(畵員)이었던 한평(漢枰)의 아들이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는 사실 이외에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산수화에서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을 토대로 참신한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에서 특히 이름을 날렸다.
그의 풍속화 등은 소재의 선정이나 포착, 구성방법, 인물들의 표현방법과 설채법(設彩法) 등에서 김홍도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는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하여준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짤막한 찬문(贊文)과 함께 자신의 관지(款識)와 도인(圖印)이 곁들여 있지만, 한결같이 연기(年記)를 밝히고 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과정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하였던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작가미상의 풍속화와 민화 등에는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풍속화첩》이 있는데, 《풍속화첩》에 수록된 주요작품으로 〈단오도 端午圖〉·〈연당(蓮塘)의 여인(女人)〉·〈무무도 巫舞圖〉·〈산궁수진 山窮水盡〉·〈선유도 船遊圖〉 등이 있다.
 
 
 
윤지충(尹持忠) 1759-1791(영조35-정조15)
 
 초기 천주교회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전라도 진산출신. 정약용(丁若鏞)의 외사촌이다.
25세 때 진사가 되었다.
1784년(정조 8) 겨울 서울에 올라가 김범우(金範禹)로부터 처음으로 천주교서적을 빌려보았고, 3년 후 정약용 형제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도 비밀리에 신앙을 지켜나가던 중 1791년 여름 어머니 권씨(權氏)의 상을 당하자,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고 신주를 불살랐다.
이러한 사실은 곧 친척과 유림에게 알려져 불효자라는 지탄을 받게 되었고, 끝내는 관가에 고발, 곧 체포되었다.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은 여러가지 말로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의 타당함을 주장하여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으므로, 그를 따르던 외사촌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도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굽히지 아니하므로, 그해 12월 8일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 불리는 것이다.
 
 
 
 
서영보(徐榮輔) 1759-1816(영조35-순조1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세(景世), 호는 죽석(竹石). 대제학 유신(有臣)의 아들로, 고조 종태(宗泰)가 영의정, 증조 명균(命均)이 좌의정, 할아버지 지수(志修)가 영의정으로 직계가문에서 3대에 걸쳐 정승이 나온 명문태생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장원, 1790년 성절 겸 사은사(聖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갔다. 이어 규장각직각에 제수되었다가 1792년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고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794년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로 나갔으며, 그뒤 승지를 거쳐 황해도관찰사·경기도관찰사가 되어 나갔다.
1804년(순조 4)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그 이듬해 예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805년 대사헌이 되고, 이어 대호군(大護軍)·홍문관제학·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80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을 겸직, 심상규(沈象奎)와 더불어 《만기요람 萬機要覽》을 편찬하였다.
그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평안도관찰사·규장각제학·이조판서·대제학·통제사·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 기순(箕淳)도 뒤에 대제학에 올라 아버지로부터 부자손 3대가 대제학을 지내는 가통을 세웠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수원의 지지대비(遲遲臺碑)비문을 짓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죽석문집》·《풍악기 楓嶽記》·《교초고 交抄考》·《어사고풍첩 御射古風帖》 등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정약종(丁若鍾) 1760-1801(영조36-순조1)
 
 조선 후기의 학자·천주교순교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나주(羅州).
경기도 광주(지금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출신. 진주목사 재원(載遠)의 아들이며, 약현(若鉉)·약전(若銓)·약용(若鏞)의 4형제 중 셋째이다.
일찍이 이익(李瀷)을 사사하여,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 하는 성품을 지녀, 서학서(西學書)를 접하게 되자 이에 심취하여 가톨릭교리를 연구함으로써 당대에서 가장 교리지식이 뛰어났다.
1791년(정조 15) 천주교박해로 형제와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멀리 하여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입국한 뒤로는 명도회장(明道會長)으로 임명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교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는데, 특히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한문본교리책에서 중요한 것만을 뽑아 누구나 알기 쉽도록 우리말로 《주교요지》라는 책을 써서 전교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뒤 교리서를 종합, 정리하여 《성교전서 聖敎全書》라는 책을 쓰던 중 박해를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01년 주문모의 입국사건에 연루되어 2월에 체포되고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져, 2월 26일 이승훈(李承薰)·최창현(崔昌顯)·홍낙민(洪樂民)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영조38-헌종2)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4남 2녀 중 4남으로, 1836년 2월 22일 향리에서 죽었다.
15세 때 풍천홍씨(豊川洪氏)를 취하여 6남3녀를 두었으나 4남2녀는 요절하고 학연(學淵)·학유(學遊)와 서랑 윤창모(尹昌謨)가 있을 뿐이다.
그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벼슬살이하던 득의의 시절이요, 제2기는 귀양살이 하던 환난시절이요, 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던 시절이다.
1기는 22세 때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줄곧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시절로서 암행어사·참의·좌우부승지 등을 거쳤으나, 한때 금정찰방·곡산부사 등 외직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는 도리어 화를 자초하기도 하였는데 정조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야기된 신유교옥에 연좌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신유교옥사건은 표면적인 이유와는 달리 벽파가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것은 없으나 16세 때 이미 서울에서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李瀷)의 학에 접하였고, 23세 때에는 마재와 서울을 잇는 두미협(斗尾峽)뱃길에서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였다.
유학경전에 관한 연구로는 《내강중용강의 內降中庸講義》·《내강모시강의 內降毛詩講義》·《희정당대학강의 熙政堂大學講義》 등이 있으며, 기술적 업적으로는 1789년 배다리〔舟橋〕의 준공과 1793년 수원성의 설계를 손꼽는다.
1791년 진산(珍山)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옥 이후 천주교로 인하여 세정이 소연하던 중 1795년 주문모(周文謨)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수세에 몰린 다산을 일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강등 좌천시켰다.
불과 반년도 채 못 되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허물 때문에 후일 배교자로 낙인을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연한 세정이 가라앉지 않고 더욱 거세지자 정조는 다시금 그를 1797년에 황해도 곡산부사로 내보내 1799년까지 약 2년간 봉직하게 하였다. 이 시절에 《마과회통 麻科會通》·《사기찬주 史記纂註》와 같은 잡저를 남겼다.
내직으로 다시 돌아온 지 채 1년도 못 되어 1800년 6월에 정조가 죽자, 그를 둘러싼 화기(禍機)가 무르익어 1801년 2월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체포, 투옥되니, 이로써 그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기96)로 유배되니 이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11월에 전라남도 강진으로 이배될 때까지 9개월간 머무르면서 《고삼창고훈 考三倉#고72訓》·《이아술 爾雅述》·《기해방례변 己亥邦禮辨》 등의 잡저를 저술하였으나 서울로 옮기던 중 일실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강진에 도착하자 첫발을 디딘 곳이 동문 밖 주가이다.
이곳에서는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거처하였고, 자기가 묵던 협실을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이 시절은 유배 초기가 되어서 파문괴장 불허안접(破門壞墻 不許安接)할 정도로 고적하던 시절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기에 주가의 한 늙은 주모의 도움이 있었고, 1803년 봄에 때마침 만덕사(萬德寺) 소풍길에 혜장선사(惠藏禪師)를 만나 유불상교의 기연을 맺기도 하였다.
1805년 겨울에는 주역연구자료가 담긴 경함을 고성사(高聲寺)로 옮겼으니, 여기에는 그를 위한 혜장선사의 깊은 배려가 스며 있었고 이로부터 두 사람의 인연은 날로 깊어갔다.
한편, 9개월 만에 다시금 목리(牧里) 이학래(李鶴來)집으로 옮겨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으니, 이때에 이학래로 하여금 다산역의 준공을 맞게 한 것을 보면 경함을 다시금 목리로 옮긴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서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주역사전 周易四箋》은 1808년에 탈고하였고 《상례사전 喪禮四箋》은 읍거시절에 기고하였으나 초당으로 옮긴 직후 1811년에 완성하였다.
《시경》(1810)·《춘추》(1812)·《논어》(1813)·《맹자》(1814)·《대학》(1814)·《중용》(1814)·《악경》(1816)·《경세유포》(1817)·《목민심서》(1818) 등을 차례로 저술하였고, 1818년 귀양이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흠흠신서》와 《상서고훈》 등을 저술하여 그의 6경4서와 1표2서를 완결지었다.
귀양에서 풀린 그의 제3기에는 회갑 때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저술하여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는 대체로 6경4서·1표2서·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6경4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시에는 《모시강의》 12권 외에 《시경강의보 詩經講義補》 3권이 있다. 시는 풍림(諷林)이라 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악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연주하게 하여 왕자가 그 선함을 듣고 감동하며, 그 악함을 듣고 깨우치게 하니 그 엄함이 춘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둘째, 서(書)에는 《매씨상서평 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 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 尙書知遠錄》 7권이 있다. 《매씨상서》는 위서(僞書)로서 《사기》 양한서(兩漢書) 등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선기옥형 璿璣玉衡》은 상천(上天)의 의기(儀器)가 아니요 《홍범구주 洪範九疇》도 정전형(井田形)을 본뜬 정치이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셋째, 예(禮)에는 《상례사전》 50권, 《상례외편》 12권, 《사례가식 四禮家式》 9권이 있다.
관혼상제 등 사례 중에서도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천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태로(太牢)·소로(少牢)·특생(特牲)·특돈(特豚)의 예에서 그의 변두(#변13豆)나 궤형(#궤19#형18)의 수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군왕·대부(大夫)·사(士)의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으므로 멋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넷째, 악(樂)에는 《악서고존 樂書孤存》 3권이 있다.
5성(聲) 6률(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률로써 제악(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분조(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추연(鄒衍)·여불위(呂不韋)·유안(劉安) 등의 취률정성(吹律定聲)의 그릇된 학설을 따지는 한편 삼분손익(三分損益)·취처생자(娶妻生子)의 설이나 괘기월기(卦氣月氣)·정반변반(正半變半) 등의 설은 모두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섯째, 역(易)에는 《주역사전 周易四箋》 24권, 《역학서언 易學緖言》 12권이 있다.
역에는 4법이 있는데 추이(推移)·물상(物象)·효변(爻變)·호체(互體)로서 십이벽괘(十二#벽20卦)는 4시를 상징하고 중부(中孚)·소과(小過)두 괘는 오세재윤(五歲再閏)을 상징한다.
역에는 역수만 있고 순수는 없으므로 선천괘위(先天卦位)의 설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섯째, 《춘추》에는 《춘추고징 春秋考徵》 12권이 있다. 좌씨(左氏)의 책서(策書)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經義)의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체(#체24)는 오제(五帝)의 제사이다.
그런데 주례에서 체제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오제를 제사지낸다고 한 것이 바로 체제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도 상기(喪期)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두예(杜預)의 설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일곱째, 《논어》에는 《논어고금주 論語古今註》 40권이 있다. 《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異義)가 너무나도 많다. 총 520여장 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서 《원의총괄 原義總括》이라 하였다.
그 중의 한 예를 들자면, 효제가 곧 인(仁)이니 인이란 총체적으로 붙인 이름이요 효제란 분목(分目)으로서 주자의 심덕(心德)·애리(愛理)의 설은 받아드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덟째, 《맹자》에는 《맹자요의 孟子要義》 9권이 있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形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가 있다고 한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본래 불가의 책에서 나왔으며 우리 유가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는 서로 빙탄(氷炭)과도 같아서 상호간에 비교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아홉째, 《중용》에는 《중용자잠 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 中庸講義補》 6권이 있다. 용(庸)이란 항상 끊임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는 것은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열째, 《대학》에는 《대학공의 大學公議》 3권, 《희정답대학강의》 1권, 《소학보전 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 心經密驗》 1권이 있다. 명덕이란 효·제·자(孝弟慈)삼덕으로서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格物)의 물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이요 치지(致知)의 지는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다.
다음으로 1표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경세유표 經世遺表》 48권이 있으나 미완본이다. 관제·군현제도·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제·해세(海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 牧民心書》 48권이 있다.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봉공·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호·예·병·형·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셋째 《흠흠신서 欽欽新書》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써 6경4서로써 수기하고 1표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김조순(金祖淳)  1765-1832(영조41-순조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순조의 장인으로,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손이며 아버지는 부사 이중(履中)이다.
1785년(정조 9) 약관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강원도·황해도·함경도지방의 수령·찰방 중에 겸사(兼史)1명을 두어 그 지방 요속(謠俗)을 채록하여 시정기(時政記)에 수록하도록 할 것을 건의, 실시했다.
1788년 규장각의 대교(待敎)때 당시 시·벽파(時僻派)싸움에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이조참의·검교·직각을 거쳐 1800년 보덕에 제수되었다. 순조 즉위 후 부제학·행호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 여러 요직이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1802년에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딸이 순조의 비(純元王后)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훈련대장·호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선혜청제조로 친위병의 수효가 적다고 하여, 철폐된 장용영(壯勇營)의 군사로 충당하도록 주청하여 시행했다.
1814년 금위대장, 1826년 양관 대제학이 되고, 1827년 왕의 관서지방 목욕행을 호종하였다가 서하(西下)지방의 은밀한 민간실정을 보고하여서, 경외(京外)각 아문의 절미(折米)·형정(刑政)·인사(人事)·대동미 등 어려운 실정을 정리하게 하였다.
그뒤 실권있는 직책은 맡지 않고, 제조직과 영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고 왕세자의 보도(輔導)를 맡았고, 국구(國舅)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당파에 몰리지 않으려는 노력과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세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이 되었고, 비명·지문·시책문·옥책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고 죽화(竹畵)도 잘 그렸다.
저서로 《풍고집 楓皐集》이 있다.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趙寅永/1782~185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풍양(豊壤). 자 희경(羲卿). 호 운석(雲石). 시호 문충(文忠). 1819년(순조 1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한 뒤 응교(應敎)가 되고, 22년 대사헌, 26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대사성을 지냈다. 29년 세손부(世孫傅)가 되고, 35년(헌종 1) 이조판서 때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가 수렴청정(垂簾廳政)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풍양조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 해 형 만영(萬永)이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자 조씨 세도의 독무대를 이루었다. 39년 기해교난(己亥敎難)을 일으켜 가톨릭교를 탄압하고, 우의정에 올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찬진하여 계속 가톨릭교도를 박해하였다. 41년(헌종 7)부터 50년(철종 1)까지 4차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다. 1816년(순조 16)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가서 금석학(金石學)의 대가인 유연정(劉燕庭)에게 조선의 금석학 자료를 주어 연구케 하고 돌아온 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의 탁본(拓本)과 《해동금석존고(海東金石存攷)》 등을 보내 주었다. 문장·글씨·그림에 능하였고, 47년(헌종 13) 《국조보감(國朝寶鑑)》의 찬술에 관여하였다. 헌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문집 《운석유고(雲石遺稿)》가  있다.

#18세기의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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