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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6세기의 주요인물2021-09-1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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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고(南師古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학자·도사(道士). 본관은 영양(英陽). 호는 격암(格庵). 역학(易學)·참위(讖緯)·감여(堪輿)·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또한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58)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임진년(1592)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자신의 생사문제까지 예언하였던 그는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인 《남사고비결 南師古#58訣》과 《남격암십승지론 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 鄭鑑錄》에 전한다.
전자에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가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을 말하는 등각종 재난을 예언하였다후자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이른바 재난이 일어날 때 피신처인 열군데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예언기술하였다.
죽은 뒤 1709(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편저에 《선택기요 選擇紀要》가 있다.
 
 
 
 
 
유희분(柳希奮)  1564-1623(명종19-인조1)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백(亨佰), 호는 화남(華南).
아버지는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자신(自新)이며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남행(南行)으로 진출,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익찬으로 세자를 호종하였다.
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고, 1599년 수찬 재임 때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였다가 민몽룡(閔夢龍)의 논척으로 파직당하였다.
1601년 세자시강원문학에 등용되었고이듬해 응교 겸 교서관교리로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역대실록의 재간에 참여하였다정언·이조좌랑·사서·직강 등을 거쳐 1603년 사옹원정(司饔院正), 다음해 응교·사섬시부정(司贍寺副正)·전한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사성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를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왕의 처남으로 일문이 요직에 나아갔다예조참판 때 이이첨(李爾瞻등과 함께 소북의 유영경(柳永慶)일파를 탄핵하여 숙청한 뒤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대북에 가담하여 정권을 좌우하며대사간·도승지 및 이조·병조·형조의 참판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612(광해군 4) 시인 권필(#25)을 무고하여 유배당하게 하였고앞서 임해군(臨海君)·영창대군(永昌大君)·능창대군(綾昌大君등을 무고하여 몰아 죽이는 데 가담한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 1등에 책봉되어 문창부원군(文昌府院君)에 봉해졌다이어 병조판서로서 이이첨·박승종(朴承宗등과 삼자동맹을 맺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위하여 대북에 속한 언관·유생들을 동원폐모론을 일으켰다.
이해 11월 다시 반대파를 물리치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이에 반대하는 관료·유생들을 모두 투옥유배당하게 하는 등 횡포를 자행하다가 1623(인조 1) 인조반정으로 참형을 당하였다.
이이첨·정인홍 등과 대북을 영도할 때는 외척세력을 대표하여 정권을 농단하였고한때는 이이첨·한찬남(韓纘男등과 권력을 다투어 서로 반목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조반정 후 이이첨·정인홍과는 한 등급 낮추어 치죄되었다.
 
 
 
이정구(李廷龜) 1564-1635(명종19-인조13)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또는 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세조 때의 명신인 석형(石亨)의 현손이며문장으로 이름이 있던 현령 계()의 아들로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문장가문에서 출생가학을 통하여 성장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이기 시작하여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 南山詩〉를 차운함에 놀라운 표현이 있었고, 14세 때에는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가 되었는데, 1593년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이것이 《대학강어 大學講語》로 간행되었다.
한편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의 접대에 정부를 대표하여 활약이 컸다.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에 가고다음해인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키자〈무술변무주 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그뒤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였고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장()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아그뒤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관인 문학을 성실히 전개해갔다.
이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의 전범(典範)을 보인 셈이다이 때문에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표일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미적인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였으며장유도 그의 재기(才氣)를 격찬함과 아울러 고문대책(高文大冊)의 신속한 창작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이러한 평가들은 그가 집권층의 순정문학(醇正文學)을 대변하면서 변무주를 계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나온 것들이다.
그의 문학은 한편으로 선린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공용성을 십분 발휘한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지만문학 자체의 독자적 영역을 넓히고 진실된 감정과 사상을 처리한다는 면에서는 다소간 미흡한 점이 있을 것이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 68권 22책이 전한다.
 
 
남언경(南彦經)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양명학자(陽明學者). 본관은 의령자는 시보(時甫), 호는 동강(東岡).
개국공신 재()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영흥부사 치욱(#01)이다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학행으로 천거되어 헌릉참봉이 되고, 1566(명종 21) 조식(曺植)·이항(李恒등과 함께 발탁되어 지평현감(砥平縣監)이 되었다.
1573(선조 6) 양주목사가 되고이듬해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그대로 머물 것을 진정하여 허락을 받았다.
1575년 지평을 거쳐 장령이 되고 이어서 집의를 거쳐 전주부윤이 되었으나,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사헌부의 탄핵 받고 파직되었다.
1592년에 다시 여주목사로 기용되었고이듬해 공조참의가 되어 이요(李瑤)와 함께 이황(李滉)을 비판하다가 양명학을 숭상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양근(楊根)의 영천동(靈川洞)에 물러나 한거하다 67세로 죽었다.
《퇴계전서》에 이황이 1556(명종 11) 이후 그에게 보낸 답서(答書) 9통이 있고별지 〈정재기 靜齋記〉에는 그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어 그의 학문과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우주의 본질과 현상작용을 모두 기()로써 설명기의 영원성을 주장하면서 그 선천성과 후천성을 구별하면서도 그 저변에 일기(一氣)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따라서 이()란 기()의 동정취산(動靜聚散)에 따른 법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이는 기를 초월할 수도 없고 초월적 실재성(實在性)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여기는 유한하고 이는 무한하다는 이황의 주장을 반박하고 스승 서경덕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또한 “맑고 유일(唯一)하며 밝은 본체는 위·아래하늘·땅과 함께 흐른다.”고 한 주장은 곧 “양지(良知)의 묘용(妙容)이 발생할 때 인심(人心)·하늘·땅이 모두 일체임을 알 것이다.”고 한 왕양명(王陽明)의 설과 일치하며서경덕의 기불멸설(氣不滅說)과도 상통한다.
인간의 심성(心性)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황은 이(), 즉 본연의 성()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이라 하여 이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데 반하여그는 우주는 기이며 마음도 기이므로 도덕적으로 선과 악이 함께 있음을 주장하였다.
진백사(陳白沙)와 왕양명의 《전습록 傳習錄》을 탐독그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 최초의 양명학자가 되었으며후에 이를 전승한 정제두(鄭齊斗)는 “선과 악을 논하지 않고서 고요할 때는 모두 이가 되고움직일 때는 모두 기가 된다고 한다면 기를 어찌 동()과 정()으로써 한정할 것이며 움직일 때는 인욕(人欲), 고요할 때는 천리(天理)라고 할 것인가.”라 하여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반박하고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시켰다.
문하에는 이요와 같은 인물을 배출했으며양근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제향되었다.
 
 
 
 
 
남이공(南以恭)1565(명종 20)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의령초명은 이경(以敬), 자는 자안(子安), 호는 설사(雪蓑). ()의 아들이며참판 이신(以信)의 아우이다.
1590(선조 23)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1593년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고이듬해 평안도암행어사를 거쳐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체찰사(體察使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이어서 이조좌랑·정랑을 거쳤다.
1598년 이발(李潑)·정인홍(鄭仁弘등과 북인(北人)의 우두머리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왜와 화의를 주장하였다 하여 탄핵파직시켰다.
뒤에 북인이 집권하자 북인은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분열되었는데유영경(柳永慶)과 함께 소북을 영도하였으나 다시 남당(南黨:淸小北)과 유당(柳黨:濁小北)으로 나뉘었다선조 말년에 소북과 대북 사이에 왕위계승문제로 치열한 싸움 끝에 대북이 지지하던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유영경과 함께 파직당했다가 다시 기용되어 1609(광해군 1)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홍문관부제학, 1613년 호조참판·도승지·예조참판이 되었고이듬해에는 병조참판이 되었다.
1615년 이원익과 더불어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평산(平山)·해주(海州)·송화(松禾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621년 풀려나와 전감군접반사(田監軍接伴使)에 이어 체찰사 이경전(李慶全)의 부사(副使)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파직당하였다.
1624년 관향사(管餉使)로 기용되었으며이어서 대사간·대사헌·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27년 가도(#15)에 주둔한 명장(明將모문룡(毛文龍)의 접반사가 되었는데이때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깨닫고 주전(鑄錢)을 건의하였다.
1637년 절친한 사이인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이조판서에 올랐고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하였다.
1639년 다시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으나앞서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왕제(王弟)와 대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1640년 죽음과 함께 복직되었다권모술수에 능하고 담론을 좋아하였다.
저서로는 《설사집》이 있다.
 
  
 
 
기자헌(奇自獻)1567(명종 17)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행주초명은 자정(自靖), 자는 사정(士靖), 호는 만전(晩全).
증조부는 응교(應敎(), 할아버지는 한성부윤 대항(大恒), 아버지는 응세(應世)이다.
1582(선조 15)성균관에 입학,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검열(檢閱)이 되었다.
1592년 예문관봉교겸설서(藝文館奉敎兼說書), 병조·이조좌랑을 거쳐정언·집의·성균관직강·홍문관부교리·보덕(輔德)·사간·사인(舍人)·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가 되었다.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관찰사이듬해에 부제학·대사헌이 되었으며, 1601년 정여립(鄭汝立모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崔永慶)을 신원하게 하고당시 옥사를 다스린 서인을 탄핵하여 실각시켰다.
1602년 왕세자(王世子:광해군)의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서 《맹자》를 강의했으며병조·예조판서대사헌을 거쳐 1604년 우의정이 되어 사임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고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 선조가 세자를 폐하고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606년 좌의정을 12번이나 사임한 끝에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608(광해군 즉위년유영경(柳永慶등의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했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던 정온(鄭蘊)이 극형을 받게 되자강력히 반대하여 감형케 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 불가함을 간하다 문외출송(門外黜送)되고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길주(吉州)로 이배되었으며강릉에 방귀(放歸)되어 은거하였다.
1620년 광해군의 특지로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끝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15)·이귀(李貴등이 모의에 가담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으며또한 반정 후에 인조가 신하를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해 7월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중도부처되었다가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하여 옥에 갇힌 사람 모두와 함께 처형되고그 일족도 몰살당했다.
1627년 이원익(李元翼)·이귀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선조0-선조2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본관은 광산자는 경수(景樹). 광주출신.
아버지는 붕섭(鵬燮)이며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로 직장(直長계종(繼宗)의 딸이다.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라도 경내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 지략과 용맹이 알려져 세자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뒤 최담년(崔聃年)을 별장으로 하여 남원에 머물다가 다시 진주로 옮겼는데이때 조정에서는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조달의 문제로 각처의 의병을 통합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였으며이로써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영남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하여 진해·고성 사이에 주둔하며 적과 대치하였으나 이때 강화회담이 진행중이어서 별다른 전투상황도 없고또 군량의 부족으로 그 예하 3천여명 가운데 호남출신 5백여명만 남기고 모두 귀농시켰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왜적을 수륙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여 이를 크게 무찌르고 이어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적을 기습격퇴하였다.
그뒤 진주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장기전에 대비하여 출전의 차비를 갖추었지만강화의 추진으로 출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울화가 생겨 과음을 하고 군법을 엄하게 함에 막료·군졸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고조정에서도 실망한 나머지 그에 대한 논의가 빈번히 제기되었다.
1596년에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복을 장살하여 투옥되었으나 영남유생들의 상소와 정탁(鄭琢)의 변호로 곧 석방되었다그해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하였다가난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해 진주로 돌아왔다.
이때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한현(韓絢)의 무고로 최담년·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에 정탁·김응남(金應南등이 그의 무관함을 힘써 변명하였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었다고 하여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현종 2)에 신원(伸寃)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숙종 7)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10년에 봉사손(奉祀孫)인 수신(守信)도 녹용되었다.
1788(정조 12)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47特命)이 내려졌다죽기 전에 지었다는 〈춘산곡 春山曲〉 시조 한 수가 전한다.
1678(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허균(許筠) 1569-1618(선조2-광해군10)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며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이 이복형이며(#20)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 공부에 전념하였다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으며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는데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뒤 26세 때인 1594(선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는데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달 만에 파직되었다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으며이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뒤 공주목사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으며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하였다.
1609(광해군 1)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뒤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는데,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 《태평광기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으며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당시의 허균에 대한 평가는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그의 생애를 통해볼 때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뒷받침해 준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한때 그가 지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 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특히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 豪民論〉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볼 때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의 문집에 실린 〈관론 官論〉·〈정론 政論〉·〈병론 兵論〉·〈유재론 遺才論〉 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특히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 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다고 하였으니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허균은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惺所覆#41藁》는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하며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스물다섯살 때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 鶴山樵談》이 《성소부부고》 가운데 실려 있는 〈성수시화 惺#04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 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 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 古詩選》·《당시선 唐詩選》·《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사체성당 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 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 西邊備虜考〉·〈한년참기 旱年讖記〉 등이 있다.
 
 
권필(#25) 1569-1612(선조2-광해군4)
 
 조선 중기의 문인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의 다섯째아들이다정철(鄭澈)의 문인으로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술로 낙을 삼아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 〈관금독작 觀禁獨酌〉을 지었다젊었을 때에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동료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고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다광해군초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교제를 청했으나 거절했다.
유희분(柳希奮등의 방종을 임숙영(任叔英)이 〈책문 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 宮柳詩〉를 지어서 풍자비방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는 데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광주(光州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묘는 경기도 고양군 위양리에 있고묘갈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였다.
《석주집 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 周生傳〉이 현전한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선조3-효종3)
 
   조선 인조·효종 때의 상신(相臣). 본관은 안동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중년 이후 楊州 石室에 退歸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西磵老人:만년에 安東에 은거하면서 사용). 서울출생.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극효(克孝)의 아들이며우의정 상용(尙容)의 동생이다.
3세 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다.
1590(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전쟁중에 보인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며이후 부수찬·좌랑·부교리를 거쳐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安撫御史)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복명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1608(광해군 즉위년문과중시에 급제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교리·응교·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七庶之獄)이 발생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김상헌의 아들 光燦이 김제남의 아들 $01의 사위가 됨.)로 인해 파직되자 집권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하여 안동군 풍산으로 이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시비(是非)와 숙특(淑慝:善惡)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6(인조 4) 성절 겸 사은진주사(聖節兼謝恩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이후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1632년 왕의 생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려는 데 반대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기로사에 들어갔다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업하고성혼(成渾)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으며이정구(李廷龜)·김유(#34)·신익성(申翊聖)·이경여(李敬輿)·이경석(李景奭)·김집 등과 교유하였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61(현종 2) 효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 봉명서원(鳳鳴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제주 귤림서원(橘林書院), 정평 망덕서원(望德書院), 함흥 창덕서원(彰德書院), 경성 경산서원(鏡山書院), 의주 기충사(紀忠祠), 광주 현절사(顯節祠), 상주 서산서원(西山書院), 종성 화곡서원(華谷書院), 안동 서간사(西磵祠), 예안 운계사(雲溪祠), 정평 모현사(慕賢祠)에 제향되었다.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34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39)·남한기략(南漢紀略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권이 전한다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류(金유) 1571-1648(선조4-인조26)
  
음사(蔭仕)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1596(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임진왜란 때는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영남지방에서 활약했으나그의 아버지가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여 놀아났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1598년에 파면되었다.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고 대교(待敎)·주서(注書)·봉교(奉敎등을 역임하였으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전의 일로 파직되었다그해 봉교로 복직되어 형조좌랑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후 외직으로 밀려나 충청도도사·전주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610(광해군 2)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부교리를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1614년 대북정권 아래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어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1620년 이귀(李貴등과 반정을 꾀하였으나 미수에 그치자 다시 1623년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신경진(愼景#26)·이괄(李适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다이 반정의 공로로 병조참판에 제수되고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대제학을 겸하는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반정의 주류들간의 갈등으로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로서 남행(南幸)하는 인조를 호가하였다난이 평정된 뒤 우찬성을 거쳐 1624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가도에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 그의 횡포를 막고 명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그들의 불만을 시문으로써 회유하여 존경을 받는 등 외교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인 장만(張晩)밑에서 부체찰사로서 먼저 강도(江都)로 인조를 호종하였다환도 후 장만·김자점(金自點등과 청천강 남쪽의 안주(安州)를 중심으로 하는 도체찰사 중심의 적극적인 방어체제 구축을 주장하였다그해 우의정에 승진되고 이듬해에는 유효립사건(柳孝立事件)을 처리했으며 진휼상사(賑恤上使)로서 기민구제에 노력하였다.
한편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령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총융사 이서(李曙), 찬획사(贊劃使이경직(李景稷)을 대동하여 여러 산성을 순시하고 그 도형(圖形)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1629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 정원군(定遠君)의 추숭문제에서 반대의 주장을 펴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1633년 다시 좌의정으로 올라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령권까지 겸하였으며뒤에 우의정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시 정원군 추숭문제가 제기되자 역시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여 인조의 노여움을 사 1634년 다시 면직되었다.
1635년 전국에 교서를 내려 ‘화친을 끊고 방어를 갖출 것’을 선언하였다이해 다시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관계악화 방지에 대비하였다.
그뒤 영의정이 되어 국정권도 아울러 장악하였다.
한편도체찰사로서 전국 각도의 속오군(束伍軍) 2만을 정선하여 사전에 대비할 것을 청하고 종래 구상해왔던 안주 중심의 방어체제를 강화하였다그리고 안주가 무너지는 경우를 대비하여 평양·황주·평산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그곳의 산성에 주된 병력을 배치하였다.
1636년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켜 아군의 편제된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를 미리 알고 도성을 직접 공격해오자 강도로 인조를 피하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의론이 엇갈린 가운데 적은 이미 서울 교외에까지 진출하여 인조를 비롯한 군신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듬해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주화파의 뜻에 좇아 삼전도에서 성하의 맹약을 맺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을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국공신(寧國功臣)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책봉되었다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왕세자의 환국을 주장하는 한편영춘추관사로서 실록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홍무적(洪茂績등에 의하여 탄핵을 받자 병을 칭하고 사직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영의정으로 복위되었다이해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세제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1646년 소현세자의 빈인 강씨(姜氏)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직한 뒤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학문은 서인계열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계열을 이었으며특히 송익필(宋翼弼)을 사사했다반정에 성공한 뒤 노서(老西)·소서(少西)로 갈리자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등과 더불어 노서를 주도하였으나 될 수 있는 한 서인과 남인을 같이 쓰려고 노력하였다문장은 기력(氣力)을 숭상하고 법도가 엄격하였으며 시·율도 역시 정련청건(精鍊淸健)하고 글이 또한 기묘하여공경(公卿)의 비문도 많이 썼다.
저서로는 《북저집》이 전한다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매창(梅窓)  1573-1610(선조6-광해군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계랑(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등과 교유가 깊었다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인데, 1513(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가곡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흣날닐제 울며 $01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惺所覆#41稿》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 秋思〉·〈춘원 春怨〉·〈견회 遣懷〉·〈증취객 贈醉客〉·〈부안회고 扶安懷古〉·〈자한 自恨〉 등이 유명하며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김집(金集) 1574-1656(선조7-효종7)
  
1574(선조 7)1656(효종 7). 조선 중기의 유학자본관은 광산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세거지는 충청도 연산(連山)이며서울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는 장생(長生)이며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대건(大乾)의 딸이다여덟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
18세 때 진사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문장학을 좋아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전심하였다.
1610(광해군 2)에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하였다인조반정 후 부여현감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내고그뒤 전라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나가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한편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으며윤선거(尹宣擧등과 상례를 논하고또 아버지가 찬한 《의례문해 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등활발한 학술활동을 폈다.
그뒤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태학의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안팎으로 그 덕망을 흠모하는 자들이 많았다.
76세 때는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의 특청을 임금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80세에 좌참찬을 거쳐 81세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임금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늘 초야에 묻혀 도()를 즐기고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으려고 노력하였다위로 이이(李珥)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김장생(金長生)을 이어받아그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이황(李滉)을 이어받은 영남학파와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루었다.
1883(고종 20)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등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의례문해속 疑禮問解續》 등이 있다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육(金堉)  1580-1658(선조13-효종9)
 
1605(선조 38)에 사마회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1609(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李滉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자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하였다.
청덕동에 머물며 회정당을 짓고 홀로 학문을 닦으니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623년에 서인의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이듬해 2월에는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하는 한편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해 10월에 정언에 임명되었으며, 1633년 9월에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로 나가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는 중요한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이어 동지성절천추진하사(冬至聖節千秋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온 후 예조참의·우부승지·장례원판결사를 거쳐 1638년 6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도정(道政)에 임하여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수차(水車: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구황촬요 救荒撮要》와 《벽온방 #20瘟方》 등을 편찬간행하다가 승정원좌부승지가 되었으며이후 형조참의 겸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대사간·병조참의·한성부우윤·도승지 겸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병조참판·이조참판 겸 비변사유사제조(備邊司有司提調)·형조판서 겸 선혜청제조·우참찬·대사헌·예조판서·도총부도총관·개성부유수 등의 현직(顯職)을 지내면서 중국에 두 차례(1643년과 1645)나 더 다녀왔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화폐의 주조·유통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유원총보 類苑叢寶》·《황명기략 皇明紀略》·《종덕신편 種德新編》·《송도지 松都誌》 등을 저술간행하기도 하였다.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대동법의 확장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인하여 이듬해 1월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되고겸하여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맡았다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원임(原任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에 복귀함에 따라 좌의정으로 물러앉아 지내면서도 대동법 시행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한편《해동명신록 海東名臣錄》을 저술하고 《인조실록》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 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그가 죽어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하여 뒷날 성취되었다.
 
저술로는 그의 시·문을 모은 《잠곡유고 潛谷遺稿》(11권 10)·《잠곡별고 潛谷別稿》·《잠곡유고보유 潛谷遺稿補遺》·《잠곡속고 潛谷續稿》가 전하고앞에서 소개한 것 이외에 《천성일록 天聖日錄》·《청풍세고 淸風世稿》·《조천일기 朝天日記》·《기묘록 己卯錄》·《잠곡필담 潛谷筆談》·《당삼대가시집 唐三大家詩集》 등이 전하며〈자네집에 술닉거든〉이라는 시조 1수도 전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유원총보》는 우리나라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하여 편찬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주목되는 것이며《구황촬요》·《벽온방》·《종덕신편》 등은 목민자(牧民者)의 각성을 촉구하는 안민(安民)의 한 방책으로서그의 위민적(爲民的)생애의 편모를 보이는 저술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와같은 저술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몸소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니이러한 사업은 그의 자손들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되어 우리나라 주자(鑄字)와 인쇄사업에 크게 기여하는 바 되었다.
무덤은 경기도 양주 금촌리에 있다양근(楊根미원서원(迷源書院)과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강동(江東계몽서원(啓蒙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등에 배향되고, 1704(숙종 30)에는 가평의 선비들이 건립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독향(獨享)되었다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최명길(崔鳴吉) 1586-1647(선조19-인조25)
 
아버지는 영흥부사 기남(起南)이며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일찍이 이항복(李恒福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4(광해군 6)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국내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간 복상(服喪)한 뒤 환로(宦路)에 나가지 않았는데이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뒤 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함으로써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이로 인하여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 많은 지탄을 받았으며또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인조의 생부뒤에 元宗으로 추존합부(#44)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부제학·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대제학을 겸임하였다이 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등을 요구하였고이에 조선에서는 절화(絶和)의 의논이 높아진 바그는 당장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여 몇 년간은 무사할 수 있으나 종막(終幕)은 심히 우려된다고 하면서 또한 원망을 불러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1635년초 이조판서직을 면하고 몇 달 뒤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하여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싸워 지키거나 병화를 완화하는 어느 쪽도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江都)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면서 강력하게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12월에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는데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해 정월에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진행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 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이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청군이 물러간 뒤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아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가을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해 영의정에 올랐는데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하였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 임경업(林慶業등의 명나라와의 내통과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고, 1645년에야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특히한때 양명학(陽明學)을 독수(獨修)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교우 장유나계자(系子후량(後亮및 손자 석정(錫鼎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는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 遲川奏箚》 2책 등이 있다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괄(李适) 1587-1624(선조20-인조2)
  
 조선 중기의 무신·반란자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 병조참판 육()의 후손이다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태안군수를 역임하였다.
1622(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고 1623년 3월에 일어난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정 과정에서 주도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김류(#15)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여 불화하게 되어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의 벼슬을 받게 되어 불만이 많았다.
1623(인조 1) 포도대장을 지낸 뒤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었다평안도 영변에 출진하여 군사훈련에 힘쓰는 한편 그 지방의 성책(城柵)을 보수하여 진의 방비를 엄히 하였는데이는 당시 후금과의 국제관계가 긴박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이해 윤10월 반정에 참가한 공신들의 공훈을 책정할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의 첫째가 되었다.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전(#29)·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이어 그의 군중(軍中)에 머물고 있던 아들 전을 붙잡아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에서 선전관과 의금부도사 등이 영변에 내려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속한 행군으로 한때 서울을 점령기세를 떨쳤으나 곧 관군에 대패피신중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무과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
 
 
 
장유(張維)  1587-1638(선조20-인조16)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
아버지는 판서 운익(雲翼)이며어머니는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로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5(선조 38) 사마시를 거쳐 1609(광해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호당(湖堂)에 들어갔고 이듬해 겸설서를 거쳐 검열·주서 등을 지냈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2등에 녹훈되고 봉교를 거쳐 전적과 예조·이조의 낭관을 지내고그뒤 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이듬해 신풍군(新豊君)에 수봉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왕을 호종하였다.
그뒤 대제학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고, 1629년 나만갑(羅萬甲)을 신구(伸救)하다가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다음해 대사헌·좌부빈객(左副賓客)·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1년 원종추숭론(元宗追崇論)이 대두되자 불가함을 주장하고 전례문답(典禮問答) 8조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조판서로 최명길(崔鳴吉)과 더불어 강화론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장례 후 과로로 병사하였다.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한 그는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풍토에 대하여학문에 실심(實心)이 없이 명분에만 빠지게 되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또한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마음을 바로 알고 행동을 통하여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였던 양명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고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하였으나송시열(宋時烈)은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程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하였다.
천문·지리·의술·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하였고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이식 등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계곡집》·《음부경주해 陰符經注解》가 전한다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선조20-현종12)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나 8세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려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이듬해 파직되었다.
그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뒤 1651(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하여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가문에 태어나서 집권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는데그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립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 《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三大歌人)으로 불리는데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김자점(金自點) 1588-1651(선조21-효종2)
 
1. 정계활동과 관력
 
음보로 출사하여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처음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과 함께사돈관계에 있는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광해군 14) 김류(#15)·신경진(申景#26)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3월 군대를 모아 이귀·김류·이괄(李适등과 함께 홍제원(弘濟院)에서 궁궐로 진격해들어옴으로써 반정을 성공시켰다인조 즉위 후 박홍구(朴弘耉)·조정(趙挺등 광해군 때의 정승들이 인사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아 이귀가 주로 인사를 담당할 수 있게 하였다.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가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같은해 반정공신인 정사공신(靖社功臣)1등에 녹훈되었다공신녹훈을 전후하여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게 되자그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1624(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가두었던 기자헌(奇自獻등 40여인의 인사들을 죽이는 일을 주장하였다.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고순검사(巡檢事)·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으나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는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절도정배(絶島定配)당하였다.
 
2. 권력기반 구축
 
그 이후 공신세력의 권력추구와 패전에 대하여 극심한 공격을 가하는 일반사류들에 의하여 계속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그들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1642년 병조판서, 1643년 판의금부사를 거쳐같은해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44년에는 경쟁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혐의로 도태시키고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대부분의 공신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사류들은 인조에 의하여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하여 인조의 의구심을 받고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듯하며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를 시해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혼인시킴으로써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무리들과 결탁하여 청나라의 후원을 얻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3. ()사림사회 행동 및 평가
 
1646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거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인조가 죽자 새로 즉위한 효종은 즉시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시(#45)·이유태(李惟泰)·김상헌(金尙憲등을 불러들였고이들의 공격에 의하여 1650(효종 1)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새 왕이 구신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청나라에서는 즉시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였으나이경석(李景奭)·이시백(李時白)·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사건이 문제되고아들 익(#12)이 수어청군사와 수원군대를 동원하여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宋浚吉)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가 폭로됨으로써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그의 무리인 김응해(金應海)·기진흥(奇震興)·이파(李坡)·심지연(沈之演)·황헌(#07) 등도 각자의 직에서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문과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추구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관계청나라에 대한 매국행위 등 당시 사림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하여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심지원(沈之源) 1593(선조 26)1662(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 아버지는 감찰 설(#03)이다.
1620(광해군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그의 족조(族祖)인 종도(宗道가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었던 관계로 대북에 가까웠으나 대북의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에 등용된 뒤 저작·겸설서(兼說書)·정언·부교리·교리·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1630(인조 8)에는 함경도안찰어사(咸鏡道按察御史)로 파견되어 호인(胡人)에게 매마매인(賣馬賣人)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六鎭)방어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함경도에서 돌아온 뒤에도 응교·집의·교리·부수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조익(趙翼)·윤계(尹啓등과 의병을 모집하려 하였으나 윤계가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하였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되었다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뒤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효종초에는 대사간으로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으나 대사헌으로 돌아와 병조·이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652(효종 3)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그의 아들 익현(益顯)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사돈이 됨으로써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인 1653년에는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시 급함을 때때로 경계하였으며, 11월에는 정조사(正朝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옮겼으며,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맡고 총호사(摠護使)로서 효종상례의 책임을 졌다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좇으면서도 남인 조경(趙絅)을 적극 신구(伸救)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즉 김홍욱(金弘郁)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하였다든가 강화설진(江華設鎭)을 반대하였다든가혹은 양역(良役)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士族)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겠다.
저서로는 《만사고 晩沙稿》가 있다글씨에 능하여 과천의 정창연비(鄭昌衍碑)가 남아 있다영천의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임경업(林慶業)  1594-1646(선조27-인조24)
 
1618(광해군 10) 아우 사업(嗣業)과 함께 무과에 합격하고 함경도 갑산으로 추방(秋防:새로이 무과에 합격한 자에게 관직을 제수하기 전에 의무적으로 부과하였던 일정기간의 赴防)을 위하여 나갔다가 1620년 삼수의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으로 부임하여 군량과 군기를 구비하는 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승서되었다.
그뒤 첨지중추부사로서 인조반정공신인 김류(#15)의 막하에서 있다가 1624(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출정을 자원하여 정충신(鄭忠信)의 휘하로 들어가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듬해 행첨지중추부사 겸 우림위장(行僉知中樞府事兼羽林衛將)을 거쳐 방답첨사(防踏僉使)로 임명되었고, 1626년 전라도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 신경인(申景#22)이 좌영장(左營將)에 임명하고 청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서울로 향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주화파에 의하여 강화가 성립된 뒤여서 싸움 한번 하지도 못하고 군졸을 이끌고 낙안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체찰부(體察府)의 별장이 되었다.
1629년 용양위부호군(#45衛副護軍)으로 체찰부별장을 겸하고이듬해에는 평양중군에 임명되었다.
1631년 검산산성(劒山山城방어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 이후 퇴락한 용골(龍骨)·운암(雲暗)·능한(凌漢)산성 등을 수축하였으며정주목사에 승서되었다그의 이와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정에서는 청천강 북쪽인 서북로의 군사력은 정묘호란 이후 큰 타격을 입어 한때 청북포기의 의논이 일어났다.
그 방어선을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시켜 안주중심의 방어를 펴는 동시에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하여 수도권 방어에 전념하려 하였다이에 대하여 청천강 북쪽의 백성들은 맹렬한 반대를 하였는데이와같은 청북인의 반대운동을 임경업이 뒤에서 조종하였다 하여 탄핵을 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2월 기복(起復상중에 벼슬에 나아감.)하여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에 임명되고 곧 안변부사를 겸하였다.
이때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웅거하면서 이를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그해 4월 명나라의 반장(叛將)인 공유덕(孔有德)·경중명(耿仲明)이 우가장(牛家莊앞바다를 경유하여 구련성(九連城)으로 들어가 후금군과 통하려고 하였다이에 의주부윤 윤진경(尹進卿)과 함께 이 사실을 명나라 대도독 주문욱(朱文郁)에게 연락하여 이를 협격섬멸하였으나 명나라 장군간의 싸움으로 이들 반장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하였다이 공로로 명나라 왕으로부터 금화(金花)와 많은 상을 받았고명나라의 총병(摠兵)벼슬을 받아 이때부터 임총병으로 명나라에도 크게 알려졌다.
그뒤 아버지의 탈상을 위하여 고향에 왔다가 1634년 부호군에 복직되고곧 의주부윤 겸 청북방어사에 임명되었으며 의주진병마첨절제사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근거지인 백마산성을 방어하기에는 인적·물적 어려움이 많았다그는 조정으로부터 백금(白金:은을 말함.) 1, 000냥과 비단 100필을 받아 중국상인과 무역을 하여 이()를 축적하는 동시에 유민(流民)을 모아 12곳에 둔전을 개설하여 안집해 살도록 하였다이 공로로 1635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이와같은 무역거래는 지나치게 이익을 추구하였다는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
이에 당시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강력하게 그의 복직을 주장하여, 1636년 다시 가선대부로 자급을 내린 채 의주부윤에 복직되어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16)·봉황산(鳳凰山)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방태세를 강화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송골·봉황의 봉화대에서 연락을 받고 산성을 굳게 지켜 적의 진로를 둔화시키는 데 진력하였다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포기하고 직접 서울로 진격하였으며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결국이듬해 정월에 주화론자인 최명길(崔鳴吉등의 주장으로 굴욕적인 화의를 성립시켰다.
그뒤 청나라 태종은 조카인 요퇴(#14)로 하여금 300기의 정예기병을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그는 이 요퇴군을 맞아 압록강에서 쳐 무찌르고 잡혀가던 우리 백성 남녀 120여명과 말 60여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이후 청나라는 명나라를 칠 전초전으로서 눈의 가시였던 가도(#15)에 주둔한 명군을 치기 위하여 1637년 2월 조선에 병력동원을 청해왔다.
이때 그는 수군장(水軍將)에 발탁되었으나 철저한 친명배금파(親明排金派)였으므로 선봉에 서는 것을 주저하였으며 명나라의 도독 심세괴(沈世魁)에게 내통그들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게 하였다.
한편피폐한 의주의 물적·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시 상인들을 심양에 보내 물화교역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였으나이것이 청인에게 발각되어 인조의 노여움을 사평안도의 철산으로 유배되었다.
 
한편청나라에서는 여러 차례 명나라를 치기 위한 병력의 동원을 요청해왔으나 조정에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청나라는 이것이 조약에 명시된 사항이라 하여 질책이 대단하였다.
비변사에서는 임경업의 죄를 용서하고 마침내 조방장(助防將)으로 기용하여 그로 하여금 명나라를 치도록 하였다그는 군사 300명을 이끌고 구련성으로 나아가 진격하는척하면서 군사동원과 군량조달의 어려움을 들어 심양으로 나아가 이 사명을 완수하였다이 공로로 인조로부터 숙마(熟馬한필을 하사받고 의주부윤으로 복귀하였다가 9월 평안병사·수군절제사 겸 안주목사로 승서되었다.
1639년말부터 청나라는 명나라의 근거지인 금주위(錦州衛:지금의 盛京지방)를 공격하기 위하여 다시 병력동원과 군량미의 원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요청에 의하여 임경업을 주사상장(舟師上將), 황해병사 이완(李浣)을 부장(副將)으로 삼았다.
이듬해 4월 그는 전선(戰船) 120격군(格軍:조선시대 水夫의 하나로 沙工의 일을 돕던 사람) 1,323사수(射手) 1,000포수(砲手) 4,000화약 1만근철환(鐵丸) 42000조총(鳥銃) 4,170군량미 17160그리고 세공청국미(歲貢淸國米) 1만석을 싣고 안주를 출발하여 금주위로 향하였다.
한편재상이었던 최명길과 밀의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보내어 이 사실을 등주의 명군문 홍승주(洪承疇)에게 통고하게 하고 애써 싸우게 하지 않았다.
그해 7월 청나라는 범문정(范文程)을 통하여 심양에 있는 세자에게 항의하였다그들은 임경업의 함대를 전진시키려 하나 전진하지 않고세폐미를 요하 입구까지 운반하라고 하였으나 거절하고또한 명나라 배를 만났으나 싸우지 않았으며배가 표류하였다고 속여 두 사람을 몰래 명나라로 보내어 내통하였으므로 우리 조정과 서로 짜고 명나라와 내통한 것이라고 힐책하였다소현세자(昭顯世子)는 모르는 사실이라고 극부 부인하였다.
이에 따라 범문정은 그들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재삼 임경업을 달래었으나 듣지 않았다.
7월 14일 부장 이완은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임경업은 나머지 50척의 배와 1, 500명의 선군 및 격군을 이끌고 개주위(蓋州衛)에 이르러 배에 있던 세폐와 군량미를 모두 버리고다시 해주위(海州衛)·이주위(伊州衛)·금주위·대승보(大勝堡등지로 진주하였으나 다만 청나라 장수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같이 하였을 뿐그 동안 한번도 명군과 싸우지 않았다.
 
1641년 정월 임경업은 배를 버리고 육로로 요양·심양·압록강까지 청나라의 허와 실을 일일이 정탐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청나라에서는 그가 명나라와 내통하고 있는 사실을 눈치는 채고 있었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여 고민하였으며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압력으로 삭탈 관직하였으나그해 12월에는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로 임명하였다.
1642년에 임경업의 청나라에 대한 비협조의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청나라의 금주위 공격으로 명장 홍승주가 청나라에 투항하자 그의 부하인 예갑(倪甲)과 선천부사 이계(#21)의 실토로 임경업이 승려 독보를 명나라로 파견한 전말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해 10월에는 정주의 고충원(高忠元)이 심양 감옥에서 이 사실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함으로써 그가 청나라에 협력하지 않은 죄상이 드러났다이러한 확증에 의한 청나라의 압력으로 조정에서는 형조판서 원두표(元斗杓)로 하여금 임경업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압송도중 11월 6일 그 일행이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임경업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는데그는 붙잡히기 전에 심기원(沈器遠)을 만나 그에게서 은 700냥과 승복(僧服및 체도(剃刀)를 얻어 기회를 노리다가 붙잡혀 압송되던 도중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것이다그는 명나라로 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하여 처음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맡겨두었던 승복을 찾아 포천과 가평의 경계지대에서 승복으로 갈아입고 중이 되어 양구현의 어느 골짜기에서 초막을 치고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 정월 양양으로 갔으나 복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양구로 돌아왔다가 사잇길로 상원(祥原)으로 갔다가 다시 회암사로 숨어들어 탈출의 기회를 노렸다그 동안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독촉에 못이겨 그의 처를 비롯하여 형제 등 가족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였으며그의 처 이씨는 그 이듬해 9월 심양옥에서 자살하였다.
 
한편임경업은 1643년 5월 26일 김자점의 종이었던 상인 무금(無金일명 孝元)의 주선으로 배 한척과 사공 10그리고 그의 군관이었던 이형남(李亨男)·박수원(朴守元:일명 車自龍)과 일찍이 사귀어온 임성기(林成己)·최수명(崔守明)의 두 승려(일설에는 知明·小明이라고도 함.)를 대동하고 상선을 가장하여 서울의 마포(麻浦일설에는 泰安이라고도 함.)를 출발하여 황해로 나아갔다그해 가을 중국 제남부(濟南府)의 해풍도(海豊島)에 표착하였다그곳에서 명나라의 수비대 군관인 곽이직(郭以直)의 조사를 받고 등주도독(登州都督황종예(黃宗裔)군문의 총병인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들어가니 명나라에서는 그에게 평로장군(平虜將軍일설에는 부총병)을 내리고 4만의 병사를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는 마침내 북경(北京)을 함락하였고 청 태종은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가니 도독 황종예는 남경으로 도망쳤다임경업은 마등고와 함께 석성(石城)으로 들어가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명나라 조정은 남경으로 갔으나 그곳도 곧 함락되자 마등고도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한편본국에서는 그의 후원자인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나 임경업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으니 그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임경업은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독보에게 배의 주선을 부탁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마침내 그의 부하였던 장련포수(長連砲手한사립(韓士立)의 밀고로 1645년 정월 명나라의 항장(降將마홍주(馬弘周)에게 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청나라는 당시 섭정자 예친왕(睿親王)이 집권하면서 대사령을 내리고 임경업에 대하여도 그 재략(才略)을 아껴 과거의 일을 불문에 붙이려 하였다.
그러나 역관 정명수(鄭命壽)·이형장(李馨長), 그리고 조신 김자점 등 반역 부청배(附淸輩)가 결탁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646년 6월 임경업은 죄인이 되어 사은사 이경석(李景奭)에 의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8일에 서울에 이르러 인조의 친국을 받게 되었다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심기원의 옥사에 관련시키려 하였다그는 심기원으로부터 은 700냥과 승복 및 체도를 받은 것은 시인하였으나 역모가담은 극력 부인하였다.
그러나 임경업이 달아날 당시 형조판서로 있다가 그 사건으로 파직되었던 원두표와임경업과 지난날 가장 가까웠던 김자점이 이를 반대하고 죽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김자점은 임경업이 평안병사 겸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도원수로서 서북면의 방어에 전책임을 지고 있었고 임경업은 그의 막하로서 그를 따랐으며임경업이 상인 잠송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도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여 형벌을 면하게 해준 장본인이었는데임경업을 죽여야 된다고 주장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임경업에게 배를 알선하였던 무금은 그의 첩인 매환(梅環)의 오라비였고이들은 모두 김자점의 종이었으며임경업이 마포에서 탈출할 때 무금의 처에게 탈출사실을 김자점이나 그의 아들 식(#11)에게 알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임경업이 살아서 문초를 받게 되면 무금의 처도 문초해야 되고 무금의 처가 김자점에게 알렸다고 하면 김자점도 임경업의 탈출을 도운 결과가 되며그러면 심기원의 당으로 몰려 자기도 죽어야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해 6월 20일 임경업은 심기원사건의 연루 및 자기 나라를 배반하고 남의 나라에 들어가서 국법을 어겼다는 죄를 뒤집어쓴 채 형리(刑吏)의 모진 매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숨지고 말았다그의 나이 53세였으며 고향인 충주의 달천에 장사지냈다.
임경업은 당시 친명반청의 사회분위기와 함께 우국충정에 뛰어난 충신이요 무장이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장수였다그가 명성을 떨치면서도 한번도 청나라와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 못한 불운의 명장이었다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분위기대로 의리와 명분에 투철하고 고집 센 무장이었지만당시 실제적인 국제정세즉 역사의 흐름에 어두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이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그의 조국이 무능하였던 것이다그는 이미 망해가는 명나라와 힘을 합쳐 청나라에 저항하여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였지만 그의 조국이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당시의 국민이나 조정의 감정과 함께 충의·지조그리고 용기 등으로 점철되어 민족의 마음속에 자리하였으니 뒤에 그의 무용담을 소재로 한 고대소설 〈임경업전〉이 널리 읽혀졌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697(숙종 23)12월 숙종의 특명으로 복관되었다충주의 충렬사(忠烈祠), 선천의 충민사(忠愍祠), 백마산성의 현충사(顯忠祠겸천(兼川)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이해(李해)  ?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공신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聾翁). 대사간 효원(效元)의 아들이다.
광해군 때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등에 의하여 아버지가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형인 한림 정()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자그는 벼슬을 단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릉군(咸陵君)에 봉하여졌다반정하던 날 심기원(沈器遠)이 궁중에 쌓여 있는 물건을 나누어 가지자고 하였으나 분연히 거절하였다공신에게 지급되는 전답을 모두 반환하여 청백한 사람으로 칭송이 높았다.
이듬해인 1624년 개성부유수가 되고그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49(인조 27) 인조가 죽자 장릉(長陵:인조릉)의 수릉관(守陵官)이 되고이어서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1652(효종 3)에 병으로 사임하였다그해 한직인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인 1653년에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669(현종 10)에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처음에 충정(忠靖)으로 시호를 받았다가숙종 때 충민(忠敏)으로 개시되었다.
 
 
 
허목(許穆) 1595-1682(선조28-숙종8)
 
찬성 자()의 증손으로별제 강(#18)의 손자이고현감 교()의 아들이며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15(광해군 7) 정언옹(鄭彦$01)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아버지가 거창현감에 임명되자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으며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하여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하여 유신(儒臣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그는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를 명하였는데뒤에 벌이 풀렸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영동(嶺東)으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으며, 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게 되었다.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으며그뒤 창원·칠원(漆原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다음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 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하여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이에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1659년 장령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또한 당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02)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이해 효종이 죽자 상소로써 상례를 논하였고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60(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하였고다시 장령이 되어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하여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는데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당시 송시열 등 서인(西人)은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맏아들과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朞年服: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儀禮주소(註疏)에 의거하여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에 해당된다고 해석하여 기년복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하여 사실상 맏아들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하여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척주지 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정체전중설 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674년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조정에서는 대공(大功)으로 9개월복을 정하였으나 대구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해복제가 거론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맏아들·중자의 구별이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하였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하여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따라서 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었으며 이에 대한 근거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례(古禮)의 체이부정설이었다.
이는 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이 즉위한 왕즉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기해복제가 잘못이라 판정되어 송시열 등 서인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옳았다고 인정되어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그는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고병이 나자 숙종은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1675(숙종 1) 이조참판·비국당상(備局堂上)·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고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되었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이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이로 인하여 남인은 양파로 갈라져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대립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체부(體府)·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지패법(紙牌法)·축성(築城등을 반대하였으며이해 왕으로부터 궤장(#02)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조병거(造兵車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이해 사임을 아무리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아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예궐하였다.
특명으로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로서 기로소에 든 것은 특례였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하여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실시를 주장하는 윤휴(#17)에 맞서 그 폐()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하여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는 이()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 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 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그의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였으며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하였으며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 東事》·《방국왕조례 邦國王朝禮》·《경설 經說》·《경례유찬 經禮類纂》·《미수기언 眉#04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세기의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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