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인물

제목16세기의 주요인물2021-09-1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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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李舜臣) 15451598(인종1-선조31)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그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변()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냈고증조부 거(#21)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할아버지 백록(百祿)이 조광조(趙光祖등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후로는 아버지 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러하였음에도 그가 뒤에 명장으로 나라에 큰 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에 어머니 변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었다변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순()·우()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불행히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그는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는데이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중앙에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부득이 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장(主將)의 판결에 불복하면서 첨병(添兵)을 들어주지 않고 정죄(定罪)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서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첫번째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로 승진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만포첨사(滿浦僉使)·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이날은 국기일(國忌日)이었으므로 그는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해질 무렵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그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예하장졸을 이끌고 동래방면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적이 이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잃고 접전을 회피함으로써 일본군은 조선수군과 한번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이러한 소식에 접한 그는 즉시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었지만적을 공략하기에 앞서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그의 휘하 전함대는 4월 29일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여 매일 작전회의가 열리고 기동연습도 강행하여 완전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고그는 총지휘관으로 5월 2일 기함에 승선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그뒤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적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뒤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그는 다음에 다시 있을 대전에 대비하여 군사훈련군비확충피난민 생업의 보장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간의 강화회담이 깨어지자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죽음 직전에서 그는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그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양(漆川洋)에서 전멸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원균의 패배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기용하게 되었다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은 고작 12척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전투를 벌여 적선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사기가 꺽인 조선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하였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장악한 그는 보화도(寶花島: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군영을 옮긴 다음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시켰다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 수만가를 이루게 되었다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 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정도로 성세를 이루었다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 11월 19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지 않은 줄로 알고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亂中日記》·시조(時調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특히 진중(陣中)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좌의정에 추증, 1793(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충무의 충렬사(忠烈祠), 순천의 충민사(忠愍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등에 제향하였는데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숙종 33)에 사액(賜額), 현충사가 입사(立祠)되었다.
그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최가 되어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성역화하고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그리고 그의 일대와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十景圖)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申采浩)의 《이순신전 李舜臣傳》 등이 있으며〈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렸다.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인종1-인조14)
 
 조선 중기의 시인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아버지는 종7품인 계공랑(啓功郎)이었다는 것만 전할 뿐 자세한 가계는 알 수 없다.
허균(許筠)의 《성수시화 惺#04詩話》에서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던 남언경(南彦經)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았으므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다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그가 계책을 일러주었으므로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받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모후를 폐하려고 그에게 소()를 올리라고 협박하였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인조가 반정한 뒤에 그 절의를 칭송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주었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다.
그는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하였는데자기 집 뒤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枕流臺)라 하고 그곳에서 이름있는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하였다그 화답한 시를 모아 《침류대시첩》을 만들었다그는 당시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였는데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정치(鄭致)·최기남(崔奇男등 중인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뒤에 아들 일민(逸民)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인하여 자헌대부 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촌은집》 3권과 《상례초 喪禮抄》가 전한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명종1-선조22)
  
15세 때 익산군수인 아버지를 따라가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는 아전들이 군수보다도 더 어려워하였다 한다.
자라면서 체격도 늠름한 장부가 되었으며통솔력이 있고 두뇌가 명석하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였다.
1567(명종 22) 진사가 되었고, 1570(선조 2) 식년문과 을과에 두번째로 급제한 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일세의 이목을 끌었다.
 
1583년 예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수찬이 되었다본래 서인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편에 반부(反附)하여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朴淳)·성혼을 비판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는 편에 앞장서게 된 사정은 확실하지 않으나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라는 설도 있으나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 잘 어울린 탓이 아닌가 한다.
그는 이이와의 문제로 서인의 미움이 집중되었고선조의 눈밖에 나서 동인의 역천(力薦)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인 사이에는 여전히 인망과 영향력이 있어 감사나 수령이 다투어 그의 집을 찾았고특히 전라도 일대에 그의 명망이 높았다.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사회(射會)를 여는 등 세력을 확장하여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하였을 때에는 당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에 응하여 대동계를 동원이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그뒤 대동계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박연령(朴延齡),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雲峰)의 승려 의연(義衍등 기인(奇人)·모사(謀士)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1589년 이들이 포함되는 동정이 퍼져 기밀이 누설되자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하여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고변이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등의 연명으로 급보되어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혔다.
한편그는 금구의 별장을 떠나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가 좁혀들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정철(鄭澈)이 위관(委官)이 되어 사건을 조사처리하면서 동인의 정예인사는 거의 제거되었으니비명에 숙청된 인사는 이발을 비롯하여 1, 0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런데 그의 모반사건에 관하여서는 무옥이라는 설과 모역이라는 양설로 나누어져 있다조작설의 이유로는 네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그의 도피는 안악의 교생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지는데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수신(受信)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다.
둘째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150년 뒤에 나온 《동소만록 桐巢漫錄》 같은 야사에서는 그가 죽도에 가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 등이 달려와서 박살하고 자결하였다고 보고하였다는 것이다기축옥사는 후유증이 컸던 만큼 이설(異說)의 채택에 신중하였을 것으로 보아동인 사이에 구전되어오는 설을 직서하였다고 보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넷째김장생(金長生)이 엮은 〈송강행록 松江行錄〉에 의하면 고변이 있자 일반인은 그의 상경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정철은 그의 도망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진하여 옥사처리를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도망을 미리 안 이유는 정철이 정여립의 유인과 암살을 지령한 음모의 최고지휘자라는 것이다그리고 정철의 배후에서 실질적으로 기축옥사를 조작한 이는 송익필(宋翼弼)이었다.
그는 노비출신으로 서인의 참모격으로 활약하였는데자신과 그의 가족 70여인을 환천(還賤)시키고자 한 동인의 이발·백유양(白惟讓등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한편그의 모반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첫째그가 남긴 문자 중에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던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들고 있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왕촉(#14)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고성인의 통론은 아니라는 것이다그리고 맹자가 성지화자(聖之和者)라고 칭찬한 유하혜(柳下惠)의 말을 인용한 하사비군이라는 말은 참으로 혁명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신채호(申采浩)가 일찍이 지적한대로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것이니 그가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그는 전부터 있었던 목자()는 망하고 전읍()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하여 전읍은 자기를 가리킨다는 낭설을 퍼뜨리고 그것을 믿게 하였다 한다왕조의 운수가 다하여 천명이 타성에게 내려 새 왕조의 출현이 필연적임을 믿는 것이 도참신앙이고이것을 고의로 조작하였다는 것은 곧 반역·모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또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祭天文)’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하여 조선왕조의 운수가 다하였음을 논하고천명의 조속한 이행을 기도한 흉참한 문구가 있었다고 한다아마 그는 선조 밑에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혁명을 은밀히 생각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옥사에서 쓰러진 동인 명사들은 선조에게 등을 돌리는 자세에 있어서 어느 정도 공통성은 있으나역모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그는 기축옥사의 장본인이 되어 동인의 정치권에 큰 타격을 주었고전라도 전체가 반역향이라는 낙인을 찍히게 하여 호남출신 인사의 관계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허준(許浚) 15461615(명종1-광해군7)
 
조선 중기의 의인(醫人).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김포출신할아버지 곤()은 무과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냈고아버지 윤()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는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29세인 1574(선조 7)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봉직하면서 내의·태의·어의로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의 실력을 청나라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安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入診)하여 많은 효과를 보게 하였으며, 1578년 9월에는 내의원첨정으로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글穴鍼灸圖經》을 하사받았다.
1581년에 고양생(高陽生)의 원저인 《찬도맥결 글圖글訣》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 글圖方論글訣集成》 4권을 편성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1587년 10월에 어의로서 태의 양예수(楊禮壽)·이공석(李公글)·남응명(南應命등과 함께 입진하여 상체(上體)가 평복함으로써 호피(虎皮)일영을 받았으며, 1590년 12월에 왕자의 두창(痘瘡)이 쾌차하였으므로 당상(堂上)의 가자(加資)를 받았다.
이때에 정원(政院)·사헌부·사간원에서 허준의 의료에 관한 공로는 인정하나 의관으로서 당상가자를 받는 것은 지나친 상사라 하여 여러 차례 그 가자를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그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허준은 선조의 피난지인 의주까지 호종하여 왕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셔 호종공신(扈從功臣)이 되었으며그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儒醫정작(鄭글), 태의 양예수·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다음해에 다시 정유재란을 만나 의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편집의 일은 중단되었다.
그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內藏方書)500권을 내어 고증하게 하였는데허준은 어의로서 내의원에서 의무에 종사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편집의 일에 전심하여 10여년 만인 1610(광해군 2)에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25권 25책이다.
《동의보감》은 그 당시의 의학지식을 거의 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의학실력을 동양 여러 나라에 드러나게 한 동양의학의 보감으로서출판된 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출판되어 귀중한 한방임상의학서가 되었다허준은 《동의보감》 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또는 알기 쉽게 한글로써 해석출판하였다.
1601년 세조 때에 편찬한 《구급방 救急方》을 《언해구급방 諺解救急方》으로 주해하였으며임원준(任元글)의 《창진집 瘡疹集》을 《두창집요 痘瘡集要》로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간행하였으며, 1608년에는 노중례(盧重禮)의 《태산요록 胎産要錄》을 《언해태산집요 諺解胎産集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그리고 1612년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구료하기 위하여 《신찬벽온방 新글글글方》 1권과 《벽역신방 글疫神方》 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반포하게 하였다.
전자인 《신찬벽온방》은 그 전해 12월에 함경도와 강원도 양도에서 온역(글疫)이 유행하여 남으로 내려와서 각 도에 전파되므로 이미 전해오던 《간이벽온방 簡易글글方》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 것이며후자인 《벽역신방》은 그해 12월에 각 지방에서 발진성(發疹性)의 열병인 당독역(唐毒疫)의 유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편집하였다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 《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명의로서의 관록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하였다그리고 허준은 내의·태의·어의로서 선조의 총애를 계속 받아왔다.
1601년에는 내의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서임하였고, 1604년 6월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3등에 복명하면서 숙마(熟馬)한필을 하사받았으며, 1606년 정월에 양평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陽平君正一品輔國崇祿大夫)를 가자받았다.
그런데 종래 우리나라의 계급으로는 의업은 중서급(中庶級)에 속하였는데허준이 대신들과 계급을 같이하는 동반(東班)의 부군(府君)과 보국(輔國)의 지위를 가지게 됨으로써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고집하였으나 선조도 끈질긴 계속적인 계청에 할수없이 그 가자를 한때 보류하도록 하였다.
1607년 11월에 선조의 환후가 점차로 위독하게 되어 그 다음해 2월에 죽을 때까지 허준은 입진의 수의(首醫)로서 다른 어의들을 독려하여 어약을 논하는 모든 일을 전담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아왔다선조가 죽은 뒤 종래의 예에 따라 주치의 수의에게 책임을 물어 형식적으로 대죄(待罪)를 하게 되었으나 광해군의 만류로 사면되었다.
1613년 11월에 70세를 일기로 죽게 되자호성(扈聖)공로의 어의로서 선조가 일찍이 보류하였던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하였다허준은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위를 가졌다.
 
 
 
 
이원익(李元翼) 1547-1634(명종2-인조12)
 
15세에 동학(東學:4학 중의 하나)에 들어가 수학하여 1564(명종 19)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승문원권지부정자로 활동하였다.
사람과 번잡하게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고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다유성룡(柳成龍)이 일찍부터 그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자·저작 겸봉상직장을 거쳐 1573년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그해 2월 성절사 권덕여(權德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그 이듬해 가을 황해도도사에 임명되었다이 시기에 병적(兵籍)을 정비하면서 실력을 발휘하였는데특히이이(李珥)에게 인정되어 여러 차례 중앙관으로 천거되었다.
1575년 가을 정언이 되어 중앙관으로 올라온 뒤지평·헌납·장령·수찬·교리·경연강독관·응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사이가 좋지 않아 왕자사부 하락(河洛)으로부터 승정원이 탄핵을 받은 바 있었는데다른 승지들은 도승지 박근원과 영의정 박순의 불화문제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화를 면하려 하였으나그는 다른 승지와는 달리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상주하여 파면되어 5년간 야인으로 있었다.
그뒤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그는 양곡 1만여석을 청하여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병졸들의 훈련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 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입번제도는 그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지게 되었다그리고 이 안주지방에는 뽕을 심어 누에 칠 줄을 몰랐는데그가 권장하여 백성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이원익에 의하여 계발된 蠶桑이라는 뜻)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뒤 임진왜란 전까지 형조참판·대사헌·호조와 예조판서·이조판서 겸 도총관·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도순찰사의 직무를 띠고 먼저 평안도로 향하였고선조도 평양으로 파천하였으나 평양이 위태롭게 되자 영변으로 옮겼다.
이때 겨우 3, 000여명으로 평양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총사령관 김명원(金命元)의 군통솔이 잘 안되고 군기가 문란함을 보고먼저 당하에 내려가 김명원을 원수(元帥)의 예로 대함으로써 군의 질서를 확립하였다.
평양이 실함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정월에 이여송(李如松)과 합세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에 가자되었으며선조가 환도한 뒤에도 평양에 남아서 군병을 관리하였다.
1595년에 우의정 겸 4도체찰사로 임명되었으나주로 영남체찰사영에서 일하였다.
이때 명나라의 정응태(丁應泰가 경략(經略양호(楊鎬)를 중상모략한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보낼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를 인선하고 있었는데당시 영의정 유성룡에게 “내 비록 노쇠하였으나 아직도 갈 수는 있지만다만 학식이나 언변은 기대하지 말라.” 하고 자원하였다.
그러나 정응태의 방해로 소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조로부터 많은 위로와 칭찬을 받았고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이첨(李爾瞻일당이 유성룡을 공격하여 정도(正道)를 지켜온 인물들이 모두 내몰림을 당하자 이를 상소하고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나오지 않았다.
그뒤 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9월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이때 정영국(鄭榮國)과 채겸길(蔡謙吉)이 홍여순(洪汝諄)·임국로(任國老)를 두둔하면서 조정대신을 공격하였는데 그는 당파의 폐해로 여기고 이의 근절을 요구하였고또 선조가 세자에게 양위하려는 것을 극력 반대하고 영상직을 물러났다.
1600년에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영남지방과 서북지방을 순무하고 돌아왔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그는 전쟁복구와 민생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김육(金堉)이 건의한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지방에 한하여 실시하여 토지 1()당 16()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형제간의 우애여색에 대한 근신국가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하였고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다가 실현되지 못하자 병을 이유로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조(鄭造)·윤인(#13) 등에 의하여 대비폐위론이 나오자그는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극렬한 어구로 상소문을 초하여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여주로 이배되었다.
1623(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고 인조가 즉위하자 제일 먼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으며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인조에게 자신이 광해군 밑에서 영의정을 지냈으므로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면 자신도 떠나야 한다는 말로 설복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하였으며서울로 환도하여 훈련도감제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쇠하여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으며그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02)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허성(許筬) 15481612(명종3-광해군4)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산전(山前). ()의 아들이며(#20)·균()의 형이고난설헌(蘭雪軒)의 오빠이다.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다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다.
1568(선조 1) 생원이 되고,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0년 전적(典籍)으로서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이어 정언·헌납·이조좌랑·응교·사인·집의를 거쳐, 1594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이듬해 대사성·대사간·부제학을 역임하였다이어 이조참판을 지내고 전라도안찰사로 나갔다가 예조와 병조의 판서에 제수되었으며그뒤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1607년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게 되어 세인들이 고명칠신(顧命七臣)이라 칭하게 되었다선조대에 학문과 덕망으로 사림의 촉망을 받았으며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악록집 岳麓集》이 있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명종3-인조9)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선조 11)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등의 별제(別提)와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의 직을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명나라 군사의 군량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고, 1596년에 한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함으로써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에 조정에서 《주역구결 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청백리로 올려졌으나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광해군 2)에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그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나자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고집의의 직을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중요한 정사(政事) 13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하여 행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하여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고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그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하여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을 뿐더러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는 않았지만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그의 영향력은 같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그의 문인은 많은데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05)·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가 즐비하게 배출되었다.
아들 집도 문하이지만문인들 사이에는 그를 ‘노선생’그리고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고 있었지만예학(禮學)분야는 송익필로부터의 영향이 컸으며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집에게 계승시켜 조선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출신이었던 송익필이 그의 아버지 사련(祀連)의 일로 환천(還賤)된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06)·정엽(鄭曄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이이와 성혼을 위하여 서원을 세웠을 뿐더러 18천여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했다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喪禮備要》 4권을 비롯《가례집람 家禮輯覽》·《전례문답 典禮問答》·《의례문해 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경서변의 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임제(林悌)  1549-1587(명종4-선조20)
 
 조선 중기의 시인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풍강(楓江)·소치(嘯癡)·벽산(碧山)·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절도사 진()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을 사사하였다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이에 창루와 주사를 그만두고 한때 글공부에 뜻을 두어 몇 번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창루와 주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찼다.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는데 그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생원·진사에 합격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서도병마사·북도병마사·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 속에 사무쳤다.
그러기에 10년간의 관직생활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기인이라 하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여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이나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 지기(知己)가 끊어지고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운명하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며 술과 여인과 친구를 사귀었다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을 고집하는 사람으로《수성지 愁城誌》·《화사 花史》·《원생몽유록 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는데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이밖에 시조 3수와 《임백호집》 4권이 있다.
 
 
 
 
 
황진(黃進) 15501593(명종5-선조26)
 
조선 중기의 무신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명보(明甫). ()의 5대손이며증좌의정 윤공(允恭)의 아들이다.
1572(선조 5)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그뒤 거산도찰방에 서임되고 안원권관을 역임하였다이어 다시 선전관이 되어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일행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를 거쳐동복현감에 임명되자 장차 있을 왜란에 대비하여 무예의 단련에 열중하였다.
특히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황윤길의 예상과 뜻을 함께 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에 대한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光)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용인에 이르렀으나 왜군에게 패전하여 남하하던 중진안에 침입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하고 이어 안덕원(安德院)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였으며훈련원판관으로 이치전투(梨峙戰鬪)에 참가왜적을 격퇴하였다이 공으로 익산군수로 충청도조방장을 겸하였다.
이어 1593년 2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다.
3월에는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을 안성에 옮긴 다음 군대를 훈련시키고 대오를 정비하여 죽산성에 있는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적장 후쿠시마(福島正則)가 안산성을 탈취하고자 죽산부성(竹山府城)을 나와 안성에 진군하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이들과 맞서 죽산성을 점령한 뒤 퇴각하는 왜군을 상주까지 추격하여 대파시켰다.
그뒤 6월 적의 대군이 진주를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 성을 굳게 지키며 9일간이나 용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남원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유영경(柳永慶)1550(명종 5)1608(광해군 즉위년).
 
조선 중기의 상신(相臣).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참봉 의()의 아들이며예조참판 영길(永吉)의 동생이다.
1572(선조 5)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으로서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많은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보였고, 1593년에 황해도순찰사가 되어 해주에서 왜적을 맞아 60여급을 베는 공을 세웠다그 공로로 행재소(行在所)에서 호조참의에 올랐다.
1594년에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가족을 먼저 피란시켰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병조참판에 서용되었다당론이 일어날 때에는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동인에 속하여 있었는데동인이 다시 남인·북인으로 갈라지자 이발(李潑)과 함께 북인에 가담하였다.
1599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등이 같은 북인인 홍여순(洪汝諄)을 탄핵하면서 대북·소북으로 갈리자그는 유희분(柳希奮등과 함께 남이공의 당이 되어 영수가 되었다.
이때 그는 대북파에 밀려 파직되었다가 1602년 이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는데대북파의 기자헌(奇自獻)·정인홍(鄭仁弘등과 심한 마찰을 빚었고 뒤이어 세자문제로 더욱 분란을 일으켰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전양부원군(全陽府院君)에 봉하여진 뒤 선조에게 존호를 올리고 윤승훈(尹承勳)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1606년 선조 즉위 40주년 행사를 앞당겨 하례(賀禮)하고 증광시(增廣試)까지 실시하여 즉위 때와 같이 경축하게 하는 등 왕의 총애를 굳히려 하였다오랫동안 집권하여 그의 권력이 증대되고그에게 뇌물공여도 횡행하였다.
그뒤 같은 소북파인 남이공과 불화하여 그는 탁소북(濁小北)으로 분파하였으며선조 말년에 왕의 뜻을 따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광해군에 대신하여 옹립하려 하였다.
1608년 선조는 죽기 전에 영창대군을 부탁하였는데그는 그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었다광해군이 즉위하자 그는 대북 이이첨(李爾瞻)·정인홍의 탄핵을 받고 경흥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유생의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곽재우(郭再祐) 15521617(명종7-광해군9)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경상남도 의령출신.
황해도관찰사 월()의 아들이고조식(曺植)의 외손서이며김우옹(金宇#19)과는 동서 사이이다.
1585(선조 18)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2등으로 뽑혔으나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려서 발표한 지 수일 만에 전방(全榜)을 파하여 무효가 되었다.
그뒤과거에 나아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기강(岐江)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관군이 대패하자같은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서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을 시작으로 바로 형조정랑에 제수되었고,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고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등 성지(城池)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하였으나그 역()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그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아가지 아니하였고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이듬해 봄에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자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영산현(靈山縣)남쪽 창암진(滄巖津:솥바위나루)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었고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하였다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45衛副護軍)에 제수되고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45衛上護軍)에 승진하였다.
그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하였다.
1612(광해군 4)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하였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고이듬해 죽었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그의 작전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하였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을 구사하여 위장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하거나유인하여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수십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천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그 병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경상우도를 보존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그들의 진로를 차단하여 왜군이 계획한 호남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기강을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척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여 물리치고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진주성싸움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하여 적의 접근을 막기도 하였다.
그는 또 필체가 웅건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신당동에 있다죽은 뒤에 그의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숙종 35)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김시민(金時敏) 15541592(명종9-선조25)
 
1554(명종 9)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본관은 안동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출신방경(方慶)의 후손이며아버지는 지평 충갑(忠甲)이다.
1578(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뒤 훈련원판관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招諭使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성민을 안무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요청을 받고 정병 1천여명을 이끌고 이에 호응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방식을 모방하여 염초(焰硝)5백여근을 만들고 총통(銃筒) 70여병()을 만들어 정병을 뽑아 이의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이때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그리하여 10월 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하였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중에 영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적과의 싸움에 대처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 800여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았다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 며칠 뒤에 진몰(陣歿)하였다.
죽은 뒤 성중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하였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2등에 추록되었으며영의정이 추증되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명종11-광해군10)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었기 때문에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고특히 죽마고우인 이덕형(李德馨)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허다한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에 영향을 받고 학업에 열중하였다.
1571(선조 4)에 어머니를 여의고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權慄)의 사위가 되었다.
 
1575년에 진사초시에 오르고 1580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 綱目》 강연(講筵)이 있었는데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李珥)에 의하여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내장고(內藏庫)의 《강목》 한질씩을 하사받고 옥당에 들어갔으며, 1583년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뒤 옥당의 정자·저작·박사예문관봉교·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수찬·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에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역모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친국에 참여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신료 사이에 비난이나 분쟁이 있을 때 삼사에 출입하여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무마하였기 때문에 그의 덕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대사간 이발(李潑)이 파당을 만들려 함을 공박하였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뒤 응교·검상·사인·전한·직제학·우승지를 거쳐 1590년에 호조참의가 되었고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그 이듬해 정철(鄭澈)의 논죄가 있었는데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으나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담화를 계속하여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또 왕자를 평양으로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그동안 그는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으며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지경연사·지춘추관사·동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동안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고 남도지방에 사신을 보내 근왕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하여 윤승훈(尹承勳)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어 근왕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황응양(黃應暘)을 조사차 보냈는데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의 파견을 보았다그리하여 만주 주둔군 조승훈(祖承訓)·사유(史儒)의 3천병력이 파견되어왔으나 패전하자 그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대병력으로 구원해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여송(李如松)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이어 서울을 탈환환도하게 되었다다음해에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分朝)를 설치하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그는 대사마(大司馬)로서 세자를 받들어 보필하였다.
1594년 봄에 전라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하여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시켰다.
 
그는 병조판서·이조판서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양호(楊鎬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았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에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올랐는데이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같은 사신인 경략(經略)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뒤 문홍도(文弘道)가 휴전을 주장했다고 하여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자 그도 함께 휴전에 동조하였다 하여 자진하여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를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수습하고 안민방해책(安民防海策)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문경호(文景虎등이 최영경(崔永慶)을 모함살해하려 했다는 장본인이 성혼(成渾)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는 성혼을 공격하였는데그는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에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해에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여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살해음모를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뒤 정인홍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바 있어 성균관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유생들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져 권당(捲堂:동맹휴학)이 일어났는데 그의 주장으로 겨우 광해군을 설득무마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으며곧이어 북인세력에 의하여 자행된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일가의 멸문지환선조의 적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살해 등 북인파당의 흉계가 속출하였고그의 항쟁 또한 극렬하여 북인파당의 원망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리하여 1613(광해군 5)에 인재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와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는데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에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이어 왕비에서 폐위하여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해 8월에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그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을 뿐만 아니라 1659(효종 10)에는 화산서원(花山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며, 1746(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李宗#07)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에 등용하게 하는 은전이 있었으며, 1832(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의 요청으로 봉사손(奉祀孫)의 관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이정구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여 완전에 가까운 그의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 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 奏疏啓議》 각 2《노사영언 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이순신(李舜臣)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귀(李貴) 1557-1633(명종12-인조11)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세조조의 문신 석형(石亨)의 5대손으로영의정에 추증된 정화(廷華)의 아들이며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1582(선조 15)에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모함하여 두 유현(儒賢)의 처지가 위태롭게 되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글을 올려 논변하여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에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하고 물러나와 의병을 모집하여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청죄(請罪)하고 방어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이듬해에는 숙천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대책을 진언하자왕이 후하게 상사(賞賜)하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명나라 군중에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616(광해군 8)에 숙천부사로서해주목사로부터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나본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에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김류(#15)·신경진(申景#26)·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및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등과 함께 반정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듬해 3월에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추대인조반정에 성공하여 김류·이서(李曙)·심기원(沈器遠)·김자점·신경진·최명길·이흥립(李興立)·심명세(沈命世)·구굉(具宏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뒤 호위대장(扈衛大將)·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우참찬·대사헌·좌찬성 등을 역임하고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그동안 남한산성의 수축호패법의 실시무사의 양성국방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하여 국력강화에 힘썼다.
1626(인조 4) 병조·이조의 판서를 지내고이해에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元宗妃)의 상기를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여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당쟁이 치열하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일신의 안위를 잊고 나라를 위하여 공헌한 바가 컸다.
저서로는 《묵재일기》 3권이 있다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유몽인(柳夢寅)1 559(명종 14)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설화문학가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간재(艮齋)·묵호자(默好子).
사간 충관(忠寬)의 손자진사 탱(#02)의 아들로서울 명례방(明禮坊)에서 태어났다.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하였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났기에 성혼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582(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왜란중 그는 문안사(問安使등 대명외교를 맡았으며 세자의 분조(分朝)에도 따라가 활약하였다.
그뒤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세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그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는데 왕은 그를 불러 남원부사로 삼았다.
그뒤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성중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이리하여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하였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생활을 하였다그해 7월 현령 유응형(柳應#07)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하여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 아들 약(#04)과 함께 사형되었다서인들은 중북파(中北派)라 불렀으며 끝내 그를 반대세력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그는 이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의 공으로 봉하여진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篆書)·예서·해서·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그의 청명(淸名)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향하였는데신원된 뒤에 나라에서도 다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
 
 
 
 
 
이이첨(李爾瞻)1560(명종 15)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또는 쌍리(雙里). 좌찬성 극돈(克墩)의 후손이며우선(友善)의 아들이다.
1582(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3년 광릉참봉(光陵參奉)을 지냈으며이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그 거상(居喪)을 극진히 함으로써 효자의 정문이 세워졌다.
이듬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전적(典籍)에 승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99년 이조정랑이 되고, 1608년 문과중시에 장원하였다.
이때 선조의 후사문제(後嗣問題)로 대북·소북이 대립하자대북의 영수로 정인홍(鄭仁弘)과 짜고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면서 당시 선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등 소북을 논박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갑산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는데이해 2월에 선조가 갑자기 죽고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일약 예조판서에 올랐다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권세를 장악한 그는 정인홍과 함께 자기 심복을 끌어들여 대북의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임해군 진(臨海君#17)과 유영경을 사사하게 하는 등 소북일파를 숙청하였다.
1612(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을 일으켜 선조의 손자 진릉군 태경(晋陵君泰慶등을 죽이고이듬해 강도죄로 잡힌 박응서(朴應犀등을 사주그로 하여금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여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떨어뜨려 강화에 안치하게 하고 김제남(金悌男등을 사사하게 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을 발의하여 이듬해 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등 생살치폐(生殺置廢)를 마음대로 자행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당하였다아들 원엽(元燁)·홍엽(弘燁)·대엽(大燁)삼형제도 처형되었다.
 
 
 
강홍립(姜弘立) 1560-1627(명종15-인조5)
 
 조선 중기의 무신본관은 진주자는 군신(君臣), 호는 내촌(耐村). 참판 신()의 아들이다.
1589(선조 22)진사가 되고, 159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설서(說書)·검열(檢閱등을 거쳐, 1605년 도원수 한준겸(韓浚謙)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이해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8(광해군 즉위년보덕(輔德)이 되고이듬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서 1614년 순검사(巡檢使)를 역임한 뒤 1618년에는 진녕군(晉寧君)에 봉해졌다.
이때 후금(後金)이 명나라 변경을 침입하는 등 세력이 확장되자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하여왔다조선 조정은 이때 새로 일어나는 후금을 의식하면서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출병을 결정하였다.
강홍립은 오도원수(五道元帥)가 되어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군사를 이끌고 출병하였다.
1619년 명나라 제독(提督유정(劉綎)의 군과 관전(寬甸)방면에서 합류하여 동가강(#01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하였다.
이들 조·명 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여 앞뒤에서 적을 협격하기로 하였으나작전에 차질이 생겨 부차(富車)에서 대패한 뒤 강홍립은 적진에 통하여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군에 투항하였다이는 출정전에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 하나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조선 조정에서는 강홍립의 관직을 박탈하였다.
투항한 이듬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그는 김경서 등 10여명과 계속 억류당하다가 1627(인조 5)정묘호란 때에 후금군의 선도로서 입국하여 강화(江華)에서의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죽은뒤에 복관되었다.
 
 
   
 
이덕형(李德馨) 15611613(명종16-광해군5)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 지중추부사 민성(敏聖)의 아들이며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하였으며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1580(선조 1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관원이 되었으며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선조로부터 서적을 하사받았다.
1582년 명나라에서 조사(詔使)로 온 왕경민(王敬民)이 그를 만나려 하였으나 사사로이 면대함은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이 출중함을 칭찬하는 글귀를 전하였다이어 정자를 거쳐 1583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이듬해 서총대(#18)의 응제(應製)에서 수석에 선발되었고이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수석을 차지하였다.
그뒤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등을 접대하여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 동부승지·우부승지·부제학·대사간·대사성 등을 차례로 역임하고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북상중인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충주에서 그와 만날 것을 요청하자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왕이 평양에 당도하였을 때 왜적이 벌써 대동강에 이르러 화의를 요청하자그는 단독으로 겐소와 회담하고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하였다.
그뒤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였고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명군의 파병을 성취시켰다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하였으며이어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는데전란중 줄곧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이듬해에는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을 겸하였다.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으며,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시켜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스스로 명군과 울산까지 동행그들을 위무(慰撫)하였다.
그해에 우의정에 승진되고 이어 좌의정에 올라 훈련도감도제조를 겸하였다이어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 이르러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적장 고니시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과 군대의 정비에 노력하였으며대마도정벌을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이항복(李恒福)이 그의 공을 들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본인의 사양과 그를 시기하는 자의 반대로 책록되지 못하였다.
1606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이에 삼사가 모두 그를 모함하며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으나광해군은 관직을 삭탈함으로써 이를 수습하였다.
그뒤 용진(龍津)으로 물러가 국사를 걱정하다 병으로 죽었다남인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하여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글씨에 뛰어났고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 漢陰文稿》가 있다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명종18-선조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강릉출생()의 딸이고(#20)의 동생이며 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강릉김씨(江陵金氏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으나〈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이수광(李수光)  1563-1628(명종18-인조6)
 
아버지는 병조판서였던 희검(希儉)이며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이다.
16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0세에 진사가 되었고, 1585(선조 18)23세에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27세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그 이듬해에는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고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北道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지방의 선무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 35세에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는데그해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또 명나라 서울에서 중극전(中極殿)과 건극전(建極殿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그는 진위사(陳慰使)로서 두번째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 서울에서 안남(安南: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화답하면서 교유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39세에 부제학으로 《고경주역 古經周易》을 교정하였고 그 이듬해 《주역언해》를 교정하였으며, 41세에는 《사기》를 교정하였다.
1605년 43세에 조정 관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안변부사로 나갔다가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와 1607년 겨울 다시 홍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1609(광해군 1)돌아왔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세번째 명나라을 다녀왔다.
이때에 유구(琉球)사신과 섬라(暹羅:타이)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하였다정국이 혼란하여지자 1616년 순천부사가 되어 지방관으로 나가 지방행정에 전념하였다.
57세에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수원에 살면서 모든 관직을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되자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이조참판·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25년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12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 條陳懋實箚子〉를 올려 시무를 논하여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을 받았다.
1628년 7월 66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세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일만으로 보아도 관료로서의 구실을 충분히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그의 활동 시기에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웠던 정국에 살면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지켜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요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면모는사회적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적 전개 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학자로서의 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사회변화와 더불어 발생하게 될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사상사 내지 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수광이 두드러지게 활동하던 반세기 초기는 이미 16세기후반에 있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로 정점을 이루는 성리학의 이론이 성숙되었던 다음 시대로서 김장생(金長生)·정구(鄭逑등에 의하여 예학(禮學)이 융성하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와같이도학(道學)의 정통성은 확립되었지만 임진왜란의 충격 속에 사회질서의 변화가 진행되었을 때는사상적으로도 정통적 도학의 성리학적 관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곧 한백겸(韓百謙)의 《기전유제설 箕田遺制說》에서 보여준 실증적 고증에 의하여 고대의 전제(田制)에 있어서 주자의 견해도 추측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음을 밝혔던 사실이나남언경(南彦經)·이요(李瑤등 양명학의 이론에 호의를 가지는 태도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이때의 이수광의 사상적 성격을 분석하여 보면주자학을 존중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당시 주자학의 기본문제인 태극·이기·사단·칠정 등 성리학의 이론에 뛰어들지 않고심성(心性)의 존양(存養)에 치중하는 수양론적 문제를 학문적 중추문제로 삼고 있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비록 성리학의 이론적 분석이나 논변은 조선 후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이수광은 이러한 전통적 성리학파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새로운 방향을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그의 철학적 기본문제가 심성의 이기론적 개념분석이 아니라 수양론적 실천방법의 탐색이라는 것은그만큼 그의 철학이 관념철학을 벗어나 실천철학적 성격을 지니는 것임을 말하여준다.
그의 저술 《지봉유설》 가운데 유도부(儒道部)에서학문·심학(心學)·과욕(寡慾)·초학(初學)·격언의 5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는 사실도 주자학에서 존중되는 도체(道體)의 문제나 성리학적 과제를 젖혀두고심성의 수양론적 관심 속에서 유학을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조진무실차자〉에서 정치의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모두 부실한 병 때문이라 지적하였고모든 일을 처리하는 관건은 성()에 있으며 성이 곧 실()임을 밝히고실심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공(實功)으로 실효를 거둘 것을 주장하면서생각마다 모두 실하고 일마다 실할 것을 요구하는 무실(懋實)을 강조하였다.
그의 무실론은 구체적 현실의 성이면서 동시에 도덕적 성실성의 요구이다성을 모든 것에 일관하는 원리로 삼고이 성의 현실적 실현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정신의 근원적 사유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학()은 활쏘기와 같아서 과녁을 지향하는 것이라 밝히면서학문은 입지(立志)와 지향하는 바(所向)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도 진리의 기준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그의 학문적 개방정신과 더불어 학문의 수양론적 기능에 대한 요구에서학문은 습()을 귀하게 여기며 습을 통하여 숙()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학습론(學習論)을 엿볼 수 있다.
함양성찰(涵養省察)하는 수양의 과정이 곧 학습이요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배양즉 성숙인 것이다.
이수광의 이러한 사상적 성격을 통하여 그의 철학적 특성이 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에로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따라서이수광은 한 선구적 위치와 구실을 감당하고 있는 비중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수광은 66세로 세상을 떠난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지봉집》 31부록 3권이 있으며 《찬록군서 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김응서(金應瑞) 1564(명종 19)1624(인조 2).
 
임진왜란 때 무장본관은 김해초명은 응서(應瑞), 자는 성보(聖甫). 용강에서 살았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 1588(선조 21) 감찰(監察)이 되었으나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다.
그해 8월 조방장(助防將)으로 평양공략에 나섰으며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방어사에 승진되고다음해 1월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운 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으며,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동래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 하자그 집 사람을 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고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하여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1597년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南山城)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고 불복하여 강등되었으며,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祿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捕盜大將兼都正)이 되었다.
1609(광해군 1)정주목사를 지내고이어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와 북로방어사(北路防禦使)를 역임하고, 1615년 길주목사, 1616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2년 뒤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임진왜란 이후 세력이 강성해진 건주위(建州衛)의 후금 정벌을 위해 명나라의 원병 요청이 있자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가 되어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하였다.
이듬해 심하(深河)지방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살이호(薩爾滸)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고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등이 전사하자 강홍립과 함께 적진에 통하여 출병의 부득이함을 말하고 잔여병과 함께 후금에 투항하였다.
포로가 된 뒤 비밀리에 적정을 탐지한 기록을 고국에 보내려 했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탄로나서 처형되었다우의정에 추증되고 향리에 정문이 세워졌다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이정구(李廷龜) 1564(명종 19)1635(인조 13)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또는 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세조 때의 명신인 석형(石亨)의 현손이며문장으로 이름이 있던 현령 계()의 아들로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문장가문에서 출생가학을 통하여 성장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이기 시작하여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 南山詩〉를 차운함에 놀라운 표현이 있었고, 14세 때에는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가 되었는데, 1593년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이것이 《대학강어 大學講語》로 간행되었다.
한편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의 접대에 정부를 대표하여 활약이 컸다.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에 가고다음해인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키자〈무술변무주 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그뒤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였고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장()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아그뒤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관인 문학을 성실히 전개해갔다.
이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의 전범(典範)을 보인 셈이다이 때문에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표일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미적인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였으며장유도 그의 재기(才氣)를 격찬함과 아울러 고문대책(高文大冊)의 신속한 창작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이러한 평가들은 그가 집권층의 순정문학(醇正文學)을 대변하면서 변무주를 계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나온 것들이다.
그의 문학은 한편으로 선린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공용성을 십분 발휘한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지만문학 자체의 독자적 영역을 넓히고 진실된 감정과 사상을 처리한다는 면에서는 다소간 미흡한 점이 있을 것이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 68권 22책이 전한다.
 
 
 
 
   
송유진(宋儒眞) ?1594(∼선조27).
 
조선 중기의 민란지도자본관은 홍산(鴻山). 서울출신.
임진왜란중의 혼란과 1593(선조 26)의 대기근으로 굶주리는 백성 및 병졸을 모아 천안·직산 등지를 근거지로 하여 지리산·계룡산일대에까지 세력을 폈으며 무리는 2, 000여명에 달하였다.
당시 서울의 수비가 허술함을 보고 이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의병대장이라 칭하며오원종(吳元宗)·홍근(洪瑾등과 함께 아산·평택의 병기를 약탈하여 1594년 정월보름날 서울에 진군할 것을 약속하였으나이해 정월 직산에서 충청병사 변양준(邊良俊)에 의하여 체포되어 왕의 친국을 받고 사형당하였다.
 
 
 
이몽학(李夢鶴) ?1596(∼선조29)
 
 임진왜란 때의 반란자본관은 전주(全州).
왕족의 서얼출신으로 서울에 살았으나성품이 불량하고 행실이 좋지 않으므로 그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충청도·전라도 사이를 전전하였다.
임진왜란중에 장교(將校)가 되었다가국사가 어지러움을 보고 모속관(募粟官한현(韓絢등과 함께 홍산(鴻山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를 하고 의병을 가장하여 조련을 실시하였으며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친목회를 가장반란군규합에 열중하였다.
한현은 어사 이시발(李時發)휘하에서 호서(湖西)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시발의 명을 받았으나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없음을 알아채고 이몽학과 함께 거사할 것을 꾀하였다.
김경창(金慶昌)·이구(李龜)·장후재(張後載), 사노(私奴팽종(彭從), 승려 능운(凌雲등과 함께 승속군(僧俗軍)600700명을 거느리고 홍산 쌍방축(雙防築)에 모였다.
1596(선조 29)7월 일당이 야음을 틈타 홍산현을 습격하여 이를 함락하고이어 임천군(林川郡)·정산(定山)·청양(靑陽)·대흥(大興)을 함락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홍주성(洪州城)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목사 홍가신(洪可臣),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등의 선방(善防)과 반란군 가운데 이탈하여 관군과 내응하는 자가 속출반란군의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그의 부하 김경창·임억명(林億命)·태근(太斤)3인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16세기의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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