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인물

제목16세기의 주요인물2021-09-1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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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  1501∼1570(연산군7-선조4)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나, 후실이었지만 자모(慈母)요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우(#우13)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경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뒤로부터 다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다.

28세(152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하여 임명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의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관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하여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수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여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한다.

 

그뒤 친정(親政)의 기회를 얻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하였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

그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 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 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 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히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책06: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고, 장사는 제일등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었다.

 

죽은지 4년 만에 고향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그의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으며,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지만, 그가 《주자대전》을 미독(味讀)하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에 의하여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자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활동 가운데서 주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 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고, 또한 《연평답문 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 夙興夜寐箴註〉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 답하여 《백록동규집해 白鹿洞規集解》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 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 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 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연방(李蓮坊)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하였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하였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 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만년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의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하여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하여 그것을 가지고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하여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하여 군주의 이목을 가리게 하지 않을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하여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이96)의 저작이며, 제2도에서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임은(程林隱)의 작품이다. 제3도에서 제사는 주자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4도에서 본문은 주자의 《대학경 大學經》 일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5도에서 규약은 주자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에서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임은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자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임은의 저작, 제9도에서 잠은 주자의 말이고 도는 왕노재(王魯齋)의 작품이며, 제10도에서 잠은 진남당(陳南塘)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처만이 이황의 작품이고, 나머지 17개처는 상기한 선현들의 저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들 유학사상의 정수들의 집약은 이황에 의하여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왔고, 도쿠가와(德川家康)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만 한 풍모가 있다.”고 하였을 때 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 言行通述》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하여,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하였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며,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분뿐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운월당(金雲月堂)·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자중·구경서(具景瑞)·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강이(李剛而) 등등을 위시한 260여인에 이르렀고, 나아가서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유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국유학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 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 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 하고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하여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默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 하여 존신(尊信)하였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오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하여 속학(俗學)이 되어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고,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명시대를 통하여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하였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말 메이지(明治)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와 명말 청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라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 日鮮史話》에 의하면, 여코이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메이지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田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하여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하여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을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贊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 님이시여”라고 그를 거리낌 없이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일본유학에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 “주자가 작고한 뒤……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버렸다. 퇴계는……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

원은 전국 40여개처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 및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400주기기념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학술지 《퇴계학보》는 1990년 3월 현재로 64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서독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기념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서독·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하여서 주제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왔다.

특히, 1989년 10월 국제퇴계학회와 중국인민대학이 공동주최한 제11차국제학술대회가 북경에서, 그리고 1990년 8월 제12차국제학술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바 있다.

 

 

   

조식(曺植) 1501-1572(연산군7-선조5)

 

1. 유년시절

1501년(연산군 7)경상도 삼가현 토골〔兎洞〕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학문연구에 열중하였으나 평생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중국의 대유학자인 주자(朱子)·정자(程子) 등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수시로 펴놓고 자신을 독려하였다.

1527년(중종 22)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531년 생계가 어려워 어머니를 모시고 살림이 넉넉한 처가를 찾아가 김해의 탄동(炭洞)에다 산해정(山海亭)을 지어 제자교육에 힘썼다.

 

2. 학문연마와 강학활동

1539년 38세에 유일(遺逸)로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4년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하였다.

1549년(명종 4)에는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에 특진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 근처에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그뒤 1552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54년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황(李滉)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그뒤 1556년 단성현감, 1560년 조지서사지 등으로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이와같이, 벼슬을 거절하고 은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만 갔다. 이에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1551년 오건(吳健), 1556년 하항(河沆), 1563년 김우옹(金宇#옹19), 1565년 최영경(崔永慶), 그 이듬해 정구(鄭逑) 등이 찾아와 사사하였다.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德川洞)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강학에 더욱 힘썼다.

1567년 5월 왕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같은해 8월에 상서원판관에 임명하여 두번씩이나 부르자 입조하였으나 왕을 만나 치란(治亂)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표하고 낙향하였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3. 학문적 견해

그는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경의(敬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한 것이다. 그는 특히 실천궁행을 가장 강조하였는데,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不義)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독서할 때마다 몸에 긴요한 것이 있으면 이를 기술, 편찬하였다. 이것이 《학기유편 學記類編》인데, 그는 이 《학기유편》을 통하여 도(道)의 체통(體統)을 말하고 학문하는 방법과 논심(論心)의 요경 및 수신(修身)의 방법과 치국의 도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삼재태극도(三才太極圖)·성위태극도(誠爲太極圖)·천인일리도(天人一理圖) 등 10여종의 도해(圖解)를 붙여 난해(難解)한 이학(理學)을 설명하였다.

그는 또 초심자(初心者)에게 《심경 心經》·《서명 西銘》·《태극도설 太極圖說》 등 심성(心性)에 관한 문장을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방법을 반대하고, 《소학》·《대학》·《논어》와 같은 실천적인 경전을 먼저 가르쳐야 하고 교수방법도 자해자득(自解自得)의 길을 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이황과의 관계

한편, 그는 경상좌도의 거유(巨儒)이황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대유학자로 쌍벽을 이루었다. 두 거유는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으나 서신으로 서로 안부를 물어 우의를 돈독히 하였지만, 학문적으로는 약간의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상도의 학자들은 두 사람을 모두 존경하여 두 문하를 번갈아 출입하는 자가 많았다.

특히, 정구·김우옹·정탁(鄭琢)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수제자격인 정인홍(鄭仁弘)만은 이황에게 출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 거유의 견해차이를 들어 상당한 마찰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물론, 자기의 스승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뒤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황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황과 이언적의 출향(黜享)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두 학자의 문하생들 사이에는 한때 상당히 서먹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진다.

이와같이, 두 계열의 문하생들이 친밀한 관계로 지내다가 때로는 소원해진 사이가 되기는 하였으나, 후기에 오면 경상도의 두 학자를 서로 추장(推奬)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5. 문인풍과 학풍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들을 살펴보면 정구·곽재우(郭再祐)·정인홍·김우옹·이제신(李濟臣)·김효원(金孝元)·오건·강익(姜翼)·문익성(文益成)·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곽일(郭$율01)·하항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한국유학사에서 크게 세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이들은 대부분 은둔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가 벼슬길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경상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경상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文風)을 일으킨 지역문화의 기수들이라 하겠다.

셋째, 국가의 위기 앞에 문인으로 몸소 앞장서 싸움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에 참여,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 그들은 국가의 위란 앞에 학자의 몸으로 수수방관하지 않고 직접 몸을 던진 참여정신이 투철한 자들이었다. 이러한 정신과 모습은 조선 말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6. 사후의 상황

선조 때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영의정이 더하여졌다.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남명집》·《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파한잡기 破閑雜記》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남명가〉·〈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연산군10-명종6)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19세에 덕수이씨 (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 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지금의 壽松洞과 淸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 (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태임으로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 (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을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기59)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로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정렴(鄭염) 1505-1549(연산군11-명종4)

 조선시대 중종 때의 유의(儒醫).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 순붕(順鵬)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 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천문·지리·의서·복서(卜筮) 등에 두루 능통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약의 이치에 밝았는데, 1544년 왕의 병환에 약을 짓기 위하여 내의원제조들의 추천을 받아 입진(入診)하기도 하였다.

포천현감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가 일상경험한 처방을 모아 편찬한 것이라는 《정북창방 鄭北窓方》이 있었으나 유실되었다.

이 책은 양예수(楊禮壽)가 지은 《의림촬요 醫林撮要》에 인용되어 있다.

 

 

 

이탁(李鐸) 1509(중종 4)∼1576(선조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선명(善鳴), 호는 약봉(藥峰). 현감 맹희(孟禧)의 손자이며, 군수 창형(昌亨)의 아들이다.

1531년(중종 26)진사시에 합격하고 153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544년 정언을 거쳐 지평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이조정랑을 거쳐 사인(舍人)·집의가 되어 1548년 권신 이기(李#기59)를 탄핵하였으며,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교리·전한을 역임하였다.

1550년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52년 동부승지·좌부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어 진헌사(進獻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5년 도승지·이조와 공조의 참의·부제학을 역임하고, 1558년 용양위호군(龍#양45衛護軍)·한성부우윤을 거쳐 1559년에는 임꺽정(林巨正)의 무리들이 들끓자 황해도관찰사로 나가 치안유지에 노력하였다.

1564년 대사헌이 되었으며 공조·호조·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567년 대사헌이 되었으며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68년(선조 1)우찬성을 거쳐 1571년 우의정, 1572년 영의정에 올라 병으로 사직하고 행판중추부사로 죽었다.

덕이 많고 지극히 청렴한 학자·문장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정숙(定肅)이다.

 

 

 

 

 

노수신(盧守愼)1515(중종 10)∼1590(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숭(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홍(鴻)이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1541년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로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인종 즉위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기59)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고, 이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에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였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하여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대학장구 大學章句》와 《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한편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 학문이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하였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 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하여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하여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여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때와 같이 하였는데, 그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하여 담제(#담24祭)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허엽(許曄) 1517∼1580(중종12-선조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 군자감부봉사 한(瀚)의 아들이며, 봉(#봉20)·균(筠)의 아버지이다.

진사시를 거쳐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551년 부교리를 거쳐 1553년 사가독서한 뒤, 장령으로 있을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필선으로 서용되고, 이듬해 대사성에 이르렀다.

1562년 지제교를 겸하였을 때 박계현(朴啓賢)과 함께 왕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玉翠亭)에 들어가 율시(律詩)로 화답하였다. 이해 동부승지로 참찬관이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청하고 허자(許磁)·구수담(具壽聃)의 무죄를 논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563년 삼척부사로 서용되었으나 과격한 언론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1568년(선조 1)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향약의 설치·시행을 건의하였다.

1575년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동지중추부사의 한직에 전임되었다가 상주의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 나식(羅湜)에게 《소학》·《근사록》 등을 배웠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노수성(盧守成)과 벗하였다. 동·서인(東西人)의 대립시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어 당시 사류의 지도급 인물이 되었다. 벼슬을 30년간이나 지냈으면서 생활이 검소하였다.

《율곡집》에 보면 이론이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文義)에 잘 통달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이황(李滉)은 학문 토론에 접하여 차라리 학식이 없었다면 착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개탄하였다.

박순(朴淳)과는 동문이었으나 당파가 서로 달라 사이가 벌어졌고, 말년에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김정국(金正國)이 찬수한 《경민편 警民編》을 보충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 三綱二倫行實》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고,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초당집》·《전언왕행록 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양사언(楊士彦) 1517-1584(중종12-선조17)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주부인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문명을 떨쳐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에 견주어졌고, 아들 만고(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1546년(명종 1)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완상하였으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 새겨진 그의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官階)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예지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그는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서가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한시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가사(歌辭)에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 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남정군(南征軍)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 南征歌〉가 있으며,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 蓬萊集》이 있고, 유묵으로 그가 지은 〈미인별곡〉과 허강(許#강18)이 지은 〈서호별곡 西湖別曲〉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지함(李之함) 1517-1578(중종12-선조11)

 조선 중기의 학자·기인(奇人), 《토정비결 土亭#비58訣》의 저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 색(穡)의 후손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밑에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다. 후일에 그가 수리(數理)·의학·복서(卜筮)·천문·지리·음양·술서(術書)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서경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1573년(선조 6)주민의 추천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지금의 포천)현감이 되었고, 재직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부임한 즉시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일정한 정착지가 없는 걸인들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飢人)을 구호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으며, 그 때문에 ‘토정’이라는 호가 붙게 되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퍼지게 되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지고 일년의 신수를 보아달라는 요구가 심하여짐에 따라 책을 지었는데, 그것이 《토정비결》이라고 알려져 있다.

전국의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과 길지를 점지하였으며, 《농아집 聾啞集》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하여 난을 구제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당대 성리학의 대가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죽은 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어서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1713년(숙종 39)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안명세(安名世) 1518(중종 13)∼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부호군 담(#첨15)의 아들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이기(李#기59)·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들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으며, 사관(史官)으로서의 노고를 인정받아 가자(加資)되기도 하였고, 이듬해에는 승정원주서에 올랐다.

그러나 1548년(명종 3)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 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그는 국문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사형에 임해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신원(伸寃)되어 직첩(職牒)을 다시 돌려받았다.

 

 

 

 

휴정(休靜) 1520∼1694(중종15-선조37)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에 그를 낳았다.

3세 되던 해 사월 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할 것을 지시하였다.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 傳燈》·《염송 拈頌》·《화엄경》·《원각경 圓覺經》·《능엄경 楞嚴經》·《유마경 維摩經》·《반야경》·《법화경》 등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雲水) 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감록 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 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한수를 지었는데 《청허당집 淸虛堂集》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가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휴정에게 선조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휴정은 문도 1,500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다가,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의 직을 물러나 묘향산으로 돌아와 열반(涅槃)을 준비하였다. 이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그뒤에도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묘향산의 안심사(安心寺),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屠)를 세웠고, 해남의 표충사(表忠祠),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하였다.

 

 

 

박순(朴淳) 1523(중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충주.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 우윤(右尹) 우(祐)의 아들이며, 목사 상(祥)의 조카이다.

1553년(명종 8)정시문과에 장원한 뒤 성균관전적·홍문관수찬·교리·의정부사인(舍人) 등을 거쳐, 1561년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 임백령(林百齡)의 시호제정문제에 관련,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로 돌아왔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선정을 베풀었고, 홍문관직제학·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565년 대사간이 되어 대사헌 이탁(李鐸)과 함께 윤원형을 탄핵함으로써 포악한 척신 일당의 횡포를 제거한 주역이 되었다.

그뒤 대사헌·대제학·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 등을 두루 거친 다음 1572년(선조 5)영의정에 올라 약 15년간 재직하였다. 이이(李珥)가 탄핵되었을 때 그를 옹호하다가 도리어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에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일찍이 서경덕(徐敬德)에게 학문을 배워 성리학에 박통하고, 특히 《주역》에 연구가 깊었고,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시에 더욱 능하여 당시(唐詩) 원화(元和)의 정통을 이었다.

중년에 이황(李滉)을 사사(師事)하였고, 만년에 이이·성혼(成渾)과 깊이 사귀어 ‘이 세 사람은 용모는 달라도 마음은 하나이다. ’라고 할 정도였으며, 동향의 기대승(奇大升)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 개성 화곡서원(花谷書院), 영평(永平) 옥병서원(玉屛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사암집》 7권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기대승(奇大升) 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아버지는 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은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 검토관으로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같은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관로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였고,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 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으로 분류된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 있어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진주(進奏)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고경명(高敬命)·최경회(崔慶會)·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문집으로 원집 3책, 속집 2책, 별집부록 1책, 《논사록》 1책, 《왕복서 往復書》 3책, 《이기왕복서》 1책, 《주자문록 朱子文錄》 4책 등이 포함된 모두 15책의 《고봉집》이 있다.

 

 

 

최영경(崔永慶) 1529-1590(중종24-선조2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 서울출생.

전라도관찰사 중홍(重洪)의 증손으로, 교하현감 훈(壎)의 손자이고, 병조좌랑 세준(世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손준(孫濬)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였으며, 여러 번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서 실패하였다. 학행으로 1572년(선조 5) 경주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고, 연이어 수령·도사·장원(掌苑)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당시 안민학(安敏學)이 자주 찾아와 정철(鄭澈)을 칭찬하고 만나볼 것을 권하였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

1575년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는 진주의 도동(道洞)으로 은거하였다. 마침 나라에서 사축(司畜)에 제수하고 그를 부르자, 잠시 나가 취임하였다가 곧 그만두었다. 정구(鄭逑)·김우옹(金宇#옹19)·오건(吳健)·하항(河沆)·박제인(朴齊仁)·조종도(趙宗道) 등과 교유하며,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다.

1576년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창건하여 스승 조식을 배향하였으며, 이듬해 외아들 홍렴(弘濂)이 죽는 불행을 겪었다.

1581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이 상소에서 붕당의 폐단을 논하였다.

1585년 《소학》·사서(四書)의 언해를 위한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90년 정여립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이 일어나자 그는 유령의 인물 삼봉(三峯)으로 무고되어 옥사(獄死)하였다. 당시 정적 정철과의 사이가 특히 좋지 않아 그의 사주로 죽은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1591년 신원(伸寃)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사제(賜祭)의 특전이 베풀어졌다. 1611년(광해군 3) 산청의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

 

 

 

김효원(金孝元)1532(중종 27)∼1590(선조 23).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현감 홍우(弘遇)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74년 다시 지평을 맡았다. 명종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은 뒤에 척신계(戚臣系)의 몰락과 더불어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1572년 오건(吳健)이 이조전랑(吏曹銓郎)에 추천하였으나, 사림으로 척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반대하여 거부당하였다.

그러나 1574년 조정기(趙廷機)의 추천으로 결국 이조전랑이 되었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충겸(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전랑의 관직은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추천하였다. 이러한 일을 계기로 심의겸과의 반목이 심해지면서, 사림계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 훈신(勳臣)·척신들에 의한 정치체제의 개혁을 둘러싸고 선조 즉위 직후부터 전배(前輩)와 후배(後輩)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척신정권 때 정계에 진출하여 심의겸의 도움을 받은 사림이 전배이고, 소윤의 몰락 이후 심의겸과 무관하게 정계에 진출한 부류가 후배로, 이들 후배 사림은 심의겸의 척신적 처지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이조전랑 추천과 임명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점차 심화되어,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전배는 대부분 서인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는 동인이 되었다. 김효원의 집이 동부의 건천동(乾川洞)에 있다고 해서, 그 일파를 동인이라 불렀다.

두 사람의 대립이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부제학 이이(李珥) 등이 분규의 완화를 조정하고자 두 사람 모두 외직으로 내보낼 것을 건의하여,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나갔다.

그러나 김효원을 지지하는 후배들이 그를 축출한 것이라 반발하여 다시 부령부사로 옮기게 하였으나, 이 역시 부령이 변방이라 하여 반발하므로 다시 삼척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결국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은 실패하였고, 선조는 당쟁의 완화를 위한 조처로 이조전랑의 추천·교대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뒤에 사간의 물망에 올랐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아 내직에 복귀하지 못하였고, 당쟁이 더욱 심해지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 나갔다.

그뒤 10여년간 한직(閑職)에 머물며 당쟁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중에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로 승진하여 재직중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의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성암집》이 있다.

 

 

    

최경회(崔慶會) 1532∼1593(중종27-선조26)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일휴당(日休堂). 전라남도 능주(陵州)출신. 충(#충01)의 후손으로, 천부(天符)의 아들이다.

양응정(梁應鼎)·기대승(奇大升)에게 수학하였으며, 1561년(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영해군수 등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는 상중(喪中)이라서 전라남도 화순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경운(慶雲)·경장(慶長)과 함께 고을사람들을 효유(曉諭)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는 고경명(高敬命)이 이미 전사한 뒤여서 그의 휘하였던 문홍헌(文弘獻) 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이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 금산·무주에서 전주·남원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장수에서 막아 싸웠고,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싸움은 진주승첩(제1차진주전투)을 보다 쉽게 하였다. 이 공로로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

1593년 6월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여오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을 사수하였으나 9일 만에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자살하였다. 화순현읍지에 그의 〈투강시 投江詩〉가 실려 있다.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능주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논개(? ∼1593)  (∼선조26)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그녀의 순국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사회의 멸시를 받던 기녀의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친 충성심에 감동한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 於于野談》에 채록함으로써 문자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진주 사람들이 그녀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고 전하기 위하여,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겨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러나 그녀를 추모하는 지역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그녀의 순국사실이 누락되었다. 이는 유교윤리에 젖어 있던 일부 편집자들이 관기를 정렬(貞烈)로 표창함이 불가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집권사대부들의 편견 때문에 그녀의 애국충정은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부 사대부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민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녀의 의혼(義魂)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진주성민들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경종 이후의 일이었다. 진주성민들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그녀의 의로운 행위는 마땅히 정부가 표창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진주성민들의 요청을 받은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1721년(경종 1)에 기녀의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녀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이때 거론된 구체적인 포상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하여주는 것이었다. 최진한의 건의를 받은 비변사는 보다 확실한 인증자료의 제시를 요구하였다. 이에 최진한은 관민합동으로 〈의암사적비 義巖事蹟碑〉를 건립하고 난 다음 그 인본을 제출하여 자손의 급복(給復)에 대한 특전을 허락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는 비록 진주지역민들의 숙원이었던 논개에 대한 봉작과 건사사액(建祠賜額)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순국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 되었으며, 의기가 논개를 지칭하는 공식호칭이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자손에 대한 급복의 특전이 베풀어진 20여년 뒤에 의혼을 봉안하는 사당이 건립되었다.

1739년(영조 16)경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의기사(義妓祠)가 의암부근에 세워지고, 논개에 대한 추모제가 매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성대히 치루어짐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포상절차가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의기사는 그뒤 홍화보(洪和輔)·홍백순(洪百淳)·이지연(李止淵) 등이 여러 차례 보수하여 지금까지 촉석루(矗石樓)옆에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1868년(고종 5)에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에 300여명의 여기가 가무를 곁들여 3일간 치제하는 대규모 추모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의암별제는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의식절차만이 《교방가요 敎坊歌謠》에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제시되었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출신이며, 양반가문출신이고, 성은 주씨(朱氏)이며, 최경회(崔慶會) 혹은 황진(黃進)의 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헌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논개의 출신성분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다.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중종28-선조25)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을 모았다.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仁厚)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왜적과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 정윤우(丁允佑)에게 인계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과 의논하여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 000여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하였다.

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된 그는 종사관에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양대박(楊大樸), 모량유사(募糧有司)에 최상중(崔尙重)·양사형(楊士衡)·양희적(楊希迪)을 각각 임명하는 한편,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과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양산숙(梁山璹)·곽현(郭玄)으로 하여금 서해를 경유하여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고, 6월 1일 담양을 출발하여 북상을 개시하였다.

의병군이 태인에 이르렀을 때, 정윤우에게 관군을 인계하고 돌아온 종후를 만나 그에게 다시 격문을 휴대하고 금구(金溝)·임피(臨陂) 등지에서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도록 하였고, 또 제주목사 양대수(楊大樹)에게 전마(戰馬)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하여 인후에게 수백명을 인솔하고 무주·진안 등의 요로에 복병을 배치하여,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도록 하였다.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겨 이곳에서 종후·인후와 합류하고, 다시 호서·경기·해서 지방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발송하였다.

27일 은진에 도달하여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황간·영동 등지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경유,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곡창인 호남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당초의 북상계획을 변경, 7월 1일 연산(連山)으로 회군하였다.

이곳에서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어 10일 형강(荊江)을 건너 합세하여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한 뒤, 9일 진산을 경유하여 금산에 도착,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하였다. 이날 의병 중에서 정예 수백명을 거느리고 적의 본진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굳센 저항과 관군의 소극적 태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10일 곽영과 합세하여 왜적과 대회전을 시도하기로 하고 800여명의 정예로 선제공격을 하였는데, 왜적은 먼저 약한 관군을 일제히 공격하자,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패주하였으며,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그는 후퇴하여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종용을 뿌리치고 “패전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하였다. 왜적이 퇴각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체를 수렴하여 금산 산중에 매장하였으며, 10월 화순의 흑토평(黑土坪)에 장사지냈고, 그뒤 장성의 오동촌(梧桐村)에 이장하였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리 어른스러워, 백인걸(白仁傑)이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 그를 보고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뒤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글씨·그림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속집(續集)·유집(遺集), 무등산기행문인 《서석록 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 正氣錄》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윤두수(尹斗壽) 1533(중종 28)∼1601(선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군자감정 변(#변03)의 아들이며, 근수(根壽)의 형이다. 이중호(李仲虎)·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간 다음, 예문관검열·홍문관정자·저작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중 권신(權臣) 이량(李樑)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朴素立)·기대승(奇大升)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으나, 그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상계(上啓)로 무죄임이 밝혀진 뒤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뒤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인·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쳐, 1576년(선조 9)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연좌, 아우 근수와 함께 파직되었으며, 대사간 김계휘(金繼輝)의 주청으로 복직되어 연안부사로 나갔다.

1581년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에 의하여 재령군수 최립(崔#입01) 등과 함께 구황(救荒)을 잘하였다 하여 옷 한벌을 하사받았다.

이후 한성좌윤·오위부총관·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587년 왜구가 전라도지방을 침범하여 지역 인심이 흉흉해지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수사·수령의 기강쇄신,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으며, 1589년 평안감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이 되어 해원군(海原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대사헌·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591년 5월 석강(夕講)에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답서를 명나라에 구주(具奏)하여 그 진상을 보고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하여, 병조판서 황정욱(黃廷彧)과 함께 보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양사의 합계(合啓)로 정철(鄭澈)에게 당부(黨附)하였다 하여 파면되고, 이미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같은 서인으로 연루되어 회령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뒤 그의 견해가 올바른 것임을 안 선조는 그의 공을 인정하는 뜻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재기용되어, 어영대장·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해 평양 행재소(行在所)에 임진강의 패보(敗報)가 전해지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는 주장이 있자 그는 이를 반대하고 우리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해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다. 그 이듬해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를 겸하였다.

1595년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1605년 호성공신(扈聖功臣)2등에 봉하여졌다. 그는 평소 온화하고 화평하였으나, 큰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극복에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오음유고》·《기자지 箕子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송익필(宋翼弼) 1534-1599(중종29-선조3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판관 사련(祀連)의 아들이다.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아버지 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初試)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충동으로 안씨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갈고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1586년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고양의 귀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김장생·김집(金集)·정엽(鄭曄)·서성(徐#성06)·정홍명(鄭弘溟)·강찬(姜燦)·김반(金槃)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는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최립(崔#입01)·이순신(李純臣)·윤탁연(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대의 8문가로 불렸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하였고, 문장은 좌구명 (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로 하였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하게 행세하였고, 아무리 고관·귀족이라도 한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그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심의겸(沈義謙) 1535-1587(중종30-선조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간암(艮菴)·황재(黃齋). 할아버지는 영의정 연원(連源)이고, 아버지는 강(綱)이며, 홍(泓)에게 입양되었다.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요직에 임명되었다.

1563년 사림들이 이량(李樑)으로부터 화를 입게 되자 외숙인 그를 탄핵하며 권세와 간계를 배척하는 등 사림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힘썼으나 도리어 왕의 외척으로 일을 꾸민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1564년 지평·검상·사인을 거쳐 이듬해 사간·부응교 등을 역임하고, 1566년 집의·군기시정·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69년(선조 2) 좌부승지·대사간을 지내고, 1572년 이조참의 등을 지내는 동안 척신출신이지만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아 선배사류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이때 김종직(金宗直)계통의 신진세력으로서 김효원(金孝元)이 등장하여 김계휘(金繼輝)에 의하여 이조정랑으로 천거되자,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 때 권신이던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기거한 사실을 들어 권신에게 아부했다 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발탁되고 1575년 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銓郎)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구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西人), 신진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東人)이라 하여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다.

, 김효원이 한성부의 동부에 산다 하여 그 무리들을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였다. 당시 정승 노수신(盧守愼)과 이이(李珥)가 사림간의 분규가 격화될 것을 우려하여 올린 상소에 의해 개성유수로 나갔다가 전라감사를 거쳐,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뒤 한때 낙향하여 은퇴하였으나, 1580년 예조참판으로 함경감사를 역임하였다. 이때 장령 정인홍(鄭仁弘)이 그를 질투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이이의 상소로 무사하여 전주부윤이 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이발(李潑)·백유양(白惟讓) 등이 일을 꾸며 동인과 합세하여 공박함으로써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靑陽君)에 피봉되었다. 인물됨은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며, 외척으로 있으면서도 권세를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 나주의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정인홍(鄭仁弘) 1535-1623(중종30-인조1)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정치가.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菴). 합천(陜川)출신.

(健)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오건(吳健)·김우옹(金宇#옹19)·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를 대표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1575년 황간현감에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지평을 거쳐 1581년 장령에 승진하였다. 당파가 동서로 양분되자 다른 남명학파와 함께 동인편에 서서 서인 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을 탄핵하려다가 도리어 해직당하고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립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領首)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성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고,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아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를 방어하였으며, 의병활동을 통하여 강력한 재지적 기반(在地的基盤)을 구축하였다.

1602년 대사헌에 승진, 동지중추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여 파직하게 한 다음 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 등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으며, 이어 유성룡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였던 성혼(成渾) 등 서인을 탄핵하였다.

북인이 선조 말년에 소북·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영도하였으며,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이 출생하자 적통(嫡統)을 주장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하여 그는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1607년 선조가 광해군에 양위하고자 할 때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이를 반대하자 탄핵하였다가 이듬해 소북 이효원(李效元)의 탄핵으로 영변에 유배되었다.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배도중 풀려나와 대사헌에 기용되어 소북일당을 추방하고 대북정권을 수립하였다.

대북정권의 고문 내지 산림(山林)의 위치에 있던 그는 유성룡계의 남인과 서인세력을 추방하고 스승 조식의 추존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문묘종사 문제를 둘러싸고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비방하는 상소를 하여 두 학자의 문묘종사를 저지시키려 하다가 8도유생들로부터 탄핵을 받았고,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청금록(靑襟錄:儒籍)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612년(광해군 4) 우의정이 되고, 1613년 이이첨과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같은해 좌의정에 올라 궤장(#궤02杖)을 하사받고 1618년 인목대비유폐사건에 가담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광해군 때 대북의 영수로서 1품(品)의 관직을 지닌 채 고향 합천에 기거하면서 요집조권(遙執朝權: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함.)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이 적몰(籍沒)당하였으며, 끝내 신원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일찍이 그를 평하여 “강직하나 식견이 밝지 못하니, 용병에 비유한다면 돌격장이 적격이다. ”라고 하였다. 강경한 지조, 강려(剛戾)한 성품, 그리고 지나치게 경의(敬義)를 내세우는 행동으로 좌충우돌하는 대인관계를 맺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저서로는 《내암집》이 있다.

 

 

 

성혼(成渾) 1535-1598(중종30-선조31)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로 서울 순화방(順和坊:지금의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진사의 양장(兩場)초시에는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해 겨울에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 《상서 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1568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그는 〈서실의 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하였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일찍이 이황을 사숙하였으나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중용》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그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다가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駐#필20)하면서 불러 전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으며,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그가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그를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그는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편의시무9조 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永柔)·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하였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유호(留扈)하였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그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을 건의한 이정암(李廷#암26)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그길로 사직하고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에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하였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견(嚴譴)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는 《우계집》 6권 6책과 《주문지결 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 爲學之方》 1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무11)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16세기의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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