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인물

제목15세기의 주요인물2021-09-16 14:40
작성자 Level 10
조광조(趙光祖) 1482-1519(성종13-중종14)
 
개국공신 온()의 5대손으로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하였으며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이때는 사화 직후라 사람들은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거나 혹은 ‘화태(禍胎)’라 하였다친구들과도 자주 교류가 끊겼으나 그는 전혀 개의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한다한편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1510(중종 5)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의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중종 10)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해 가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이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이와 함께 정언이 되어 언관으로서 그의 의도를 펴기 시작하였다이해 장경왕후(章敬王后중종의 제1계비)가 죽자 조정에서는 계비 책봉문제가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등은 중종의 정비(正妃폐위된 愼氏)를 복위시킬 것과 신씨의 폐위를 주장하였던 박원종(朴元宗)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는데이 때문에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를 막는 결과가 되므로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는 일이라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하여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받았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원로파(元老派), 즉 반정공신과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대립으로 발전이후 기묘사화의 발생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뒤 수찬을 역임한 뒤 곧이어 정랑이 되고, 1517년에는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였으며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고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詞章)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하였고 도학(道學)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하여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갔으며뒤에 이황(李滉)·이이(李珥)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놓는 데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일반서민들까지도 주자의 《가례 家禮》를 지키게 되어 상례(喪禮)를 다하고 젊은 과부의 재가도 허락되지 않게 되었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사문(斯文)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자부하였고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주(人主)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그리하여 그는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혁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그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되어 부빈객을 겸하게 되었다그는 한편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안처겸(安處謙)·박훈(朴薰등 28인이 뽑혔으며이어 김정(金淨)·박상(朴尙)·이자(#39)·김구(金絿)·기준(奇遵)·한충(韓忠등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안배하였다.
그는 이와같이 현량과 실시를 통하여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실마리로 삼았다이들 신진사류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들은 1519(중종 14)에 이르러 훈구세력인 반정공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우선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음을 강력히 비판하였다그리고 성희안(成希顔)같은 인물은 반정을 하지 않았는데도 뽑혔고유자광(柳子光)은 그의 척족들의 권귀(權貴)를 위하여 반정하였는데이러한 유의 반정정신은 소인들이나 꾀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 데 이()를 먼저 하고 있다는 것이다따라서이를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함을 극력 주창하였다이의 실천 대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가장 심한 것은 이를 개정해야 하고, 4등 50여인은 모두 공이 없이 녹을 함부로 먹고 있으므로 삭제함이 좋을 것이라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청하고 나섰다.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이미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李繼孟등은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류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그것은 이미 반정공신들은 기성 귀족이 되어 있었고현실적으로 원로가 된 훈구세력을 소인배로 몰아 배척하려는 급격한 개혁주장은 중종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2·3등공신의 일부, 4등공신 전원즉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이 삭탈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마침내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훈구파 중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은 경빈박씨(敬嬪朴氏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기도 하였다.
한편홍경주와 공조판서 김전(金詮), 예조판서 남곤우찬성 이장곤(李長坤),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심정 등이 밀의하여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비밀리에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조정을 문란하게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이에 평소부터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과격한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훈구대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이를 시행하였다그 결과 조광조는 김정·김구·김식·윤자임(尹自任)·박세희(朴世熹)·박훈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처음 김정·김식·김구와 함께 그도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곡한 비호로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뒤 정적인 훈구파의 김전·남곤·이유청(李惟淸)이 각각 영의정·좌의정·우의정에 임명되자 이들에 의하여 그해 12월 바로 사사되었다.
이때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한다.
 
결국 신진사류들이 기성세력인 훈구파를 축출새로운 정치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이들의 실패원인은 그들이 대부분 젊고 또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가 개혁을 급진적이고 너무 과격하게 이루려 하다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이를 후대의 명석한 학자인 이이(李珥)가 잘 말해주고 있다그는 《석담일기 石潭日記》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하였는데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를 못하고 말았다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하였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비방의 입이 한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고 하였다.
 
그뒤 선조 초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뒤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사당이 세워지고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竹樹書院),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司)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또한이이는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등과 함께 그를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불렀다.
저서로는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책()·계(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그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유관(柳灌) 1484-1545(성종15-명종즉위년)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관지(灌之), 호는 송암(松庵). 사헌부장령 정수(廷秀)의 아들이다.
1507(중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같은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2년 뒤에는 정언이 되었고, 1513년에 지평으로 일시 경기도도사에 임명되어 진상(進上)의 전결분정(田結分定)에 따른 폐단의 개선을 건의하였다.
그뒤 장령을 거쳐 1519년 7월에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이때 조광조(趙光祖)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대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같은해 11월에 기묘사화가 발생하였을 때그는 사헌부집의로서 조광조 일파가 득세시에 심히 교만하고 방종하였다고 비난하고현량과(賢良科)의 파과(罷科)와 그 급제자의 파방(罷榜)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조광조 일파를 공격하였다.
그뒤 동부승지·참찬관·강원도관찰사·대사간·이조참의 등을 거쳐 1525년 12월에는 특별히 통정대부에 승진하면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
이어서 우부승지·병조참판 및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하고예조판서·우참찬·대사헌·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이조판서 재직시에는 간신인 병조판서 이기(#59)의 비행을 공격하였는데이것이 후일 이기의 모함을 받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우찬성·좌찬성에 승진되었고 1541년 11월에는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이 임명은 중원(中原)에서의 오랑캐〔#11子〕의 침입과 같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자 중신을 파견하여 축성(築城)·입거(入居)문제의 처리와 사신왕래에 따른 폐단제거 등을 해결하고자 하는 왕의 배려에 의한 것이었다.
그뒤 인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하였다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尹元衡)·이기 등의 모함으로 일어난 을사사화에서 윤임(尹任)·유인숙(柳仁淑등과 함께 삼흉(三兇)으로 몰려 종사(宗社)를 모위(謀危)하였다는 죄목으로 처벌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절도유배형(絶島流配刑)에 처해져 서천으로 귀양갔지만온양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김정(金淨) 1486-1521(성종17-중종16)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본관은 경주자는 원충(#01), 호는 충암(#01)·고봉(孤峯). 보은출신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다.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보임되고홍문관수찬·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에 전임되었다이어서 병조정랑·홍문관부교리·헌납·홍문관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왕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일찍이 중종이 왕후 신씨(愼氏)를 폐출한 처사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신씨의 복위를 주장함과 아울러 신씨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등은 이들을 엄중 치죄할 것을 주장한 반면영의정 유순(柳洵등은 치죄를 반대했고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고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된 바 있었다얼마 뒤 그는 박상과 함께 재등용되고권민수와 이행이 파직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그것은 곧 중앙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뒤 응교·전한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서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뒤 기묘사화로 인해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영의정 정광필(鄭光弼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명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인종 1)에 복관되었고, 1646(인조 24)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하였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05)·구수복(具壽福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으며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시문에도 능하였을 뿐 아니라 그림에도 능하여 새·짐승 등을 잘 그렸다일찍이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하였고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그들의 세력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정치를 폈는데그 일환으로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등을 추진하였다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외에 조카인 천부(天富)·천우(天宇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으며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윤임(尹任) 1487-1545(성종8-명종즉위년)
 
 조선 전기의 문신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임지(任之). 중종의 장인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윤여필(尹汝弼)의 아들이며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이다무과에 급제여러 벼슬을 거쳐 경주부윤이 되었다.
1523(중종 18)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왜선과 싸우다가 패하여 충군(充軍)되었다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경원대군(慶源大君:뒤에 명종)을 낳자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43년부터 대윤·소윤으로 나누어 싸움이 노골화되면서 그는 대윤의 거두가 되었다.
1544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를 거쳐 찬성에 올랐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인종이 죽자 1545년 명종이 11세로 즉위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때 소윤 윤원형(尹元衡일파는 소위 을사사화를 일으켜 평소 반목하던 대윤 일파를 모두 숙청하였으며마침내 윤임은 남해로 귀양가다가 충주에 이르러 사사(賜死)되었다후일 대의를 보면 그에 대한 평가는 이이(李珥)는 죄가 없다 하였고이황(李滉)은 사직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고 하여 엇갈리고 있다.
1577(선조 10)에 신원(伸寃)되었다시호는 충의(忠義)이다.
 
 
 
 
임꺽정(林──)  ?-1562(명종17)
 
1.행적
당시 척족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등이 발호하고여러 해 연이어 흉년이 계속된 데다가 관리들의 수탈이 횡행하는 틈을 타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날쌔고 용맹스러웠는데 자기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어지러운 사회를 틈타 처음에는 도당 몇 명을 모아 민가를 횡행하며 도둑질을 일삼았다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하여 구월산 등지를 소굴로 하여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였다.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의적의 행각을 벌이자이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결탁하여 내통하였다그리하여 관에서 잡으려 하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났다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들 무리는 미투리를 눈 위에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행방을 감추었다선전관이 구월산에 들어가 그들의 행방을 찾다가 돌아올 적에 도둑들은 선전관을 잡아 죽였다.
1559(명종 14) 집을 개성에 두고 개성근방에서 출몰하자 개성부 포도관(捕盜官이억근(李億根)이 군인 20여명을 데리고 그들의 소굴을 습격하였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였다이에 조정에서는 개성부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한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임금은 이에 수령들이 도둑잡기를 게을리하면 엄벌을 가하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라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작은 도둑무리만 잡았을 뿐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60년 8월에 들어서는 서울에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였다장통방(長通坊)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아 부장(部將)을 맞히고 달아났다.
이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을 잡았다그리고 임꺽정의 아내를 형조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이해 10월에 들어서는 금교역(金郊驛)을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봉산에 중심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양덕·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더욱 극성을 떨었다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겁탈을 일삼았다이리하여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혔다.
이들은 이때 벼슬아치의 이름을 사칭하고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정보를 알아내기도 하였다이해 12월에는 엄가이(嚴加伊)라는 도둑두목이 숭례문 밖에서 잡혔는데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徐林)이었다서림의 입을 통하여임꺽정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典獄署)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났다.
이들은 평산 남면에 모여 그들의 도당을 여러 차례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서림의 입을 통하여 알아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였다그때 도둑무리는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관군을 무찔러 부장 연천령(延千齡)을 죽이고 많은 말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이에 임금은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경기도 등 각 도에 대장 한명씩을 정하여 책임지고 도둑을 잡게 하였다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辛商輔)가 도둑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어두었는데백주에 도둑무리 1대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한 사건도 있었다이해 12월에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李思曾)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나 의금부에서 추고(推考)를 해보니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였다그리하여 그 책임을 물어 순경사 이사증은 파직추관(推官강려(姜侶)를 하옥하게 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와같이,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하였고또 관군의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고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임을 당하였다.
1561년 9월에 평안도관찰사 이량은의주목사 이수철(李壽鐵)이 임꺽정과 한온(韓溫)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이들을 의금부에 데려와 조사를 하니 해주출신의 군사인 윤희정과 윤세공이었다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하였는데 서림이 이들을 보고 가짜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이에 이수철에게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이해 10월에 임꺽정 일당이 해주에서 평산으로 들어와 대낮에 민가 30여호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이에 조정에서는 서림을 통하여 임꺽정을 꾀어낸다는 방침을 바꾸고 새로운 조처를 모색하였다이에 황해도 토포사(討捕使)로 남치근(南致勤), 강원도 토포사로 김세한(金世澣)을 임명하여 정병을 딸려 보냈다.
이어 개성과 평양의 성내를 샅샅이 뒤지게 하였고 서울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등에 수문장의 수를 늘리고 날짜를 정하여 새벽부터 일시에 수색하게 하였다그리하여 백성들 중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는 자는 달아났다이에 포졸들은 달아나는 자들을 잡아들였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으면 감옥에 넣어 온종일 서울은 호곡소리로 들끓었다.
한편정시(停市)하게 하기도 하고 모든 관청일을 중단하게 하였는데대신이 죽는 일 외에는 이런 조처가 없었던 일이었다.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도둑으로 끼어드는 일을 막기 위하여 수색을 금하게 하였고황해도에는 전세 전부를평안도에는 전세 절반을 탕감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의정부에서는 “토포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래 유둔하고 있어서 군민(軍民)이 곤궁피로하고 일도가 탕연하여 원망의 소리를 귀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고 일단 많은 도둑의 졸개가 잡혔으니 임꺽정을 잡는 일은 평안도·황해도의 감사·병사에게 맡기고 토포사를 올라오게 하였다.
 
2. 체포
이러한 속에 1562년 정월남치근은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郭舜壽)와 홍언성(洪彦誠)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올렸다《기재잡기 寄齋雜記》에는 임꺽정이 잡힐 적의 정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남치근이 재령땅에서 진을 설치하니 임꺽정은 날쌔고 건장한 자만을 데리고 구월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그 나머지 무리는 요소요소를 지키게 하였다산을 올라가며 계속 수색하며 남은 무리를 죽이자 임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도망하였는데계속 민가를 수색하자 임꺽정이 민가에 뛰어 들어왔다임꺽정이 주인 노파를 위협하여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며 나가게 하였다이에 임꺽정이 칼을 빼고 뛰어나오며 도둑놈은 달아났다고 소리쳤다.
군졸들이 혼란한 틈을 타 술렁거리자군졸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다가 서림이 “저 놈이 임꺽정이다.”라고 소리쳐 끝내 상한 몸으로 잡혔다는 것이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고잡힌 지 약 15일 만에 죽임을 당하였다.
 
3. 평가
실록의 사신(史臣)은 이렇게 평하였다“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여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서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은 이러한 정상을 이용하여 자기의 신분차별에 대한 한을 풀어보려고 하였고그와같은 처지에 놓인 두령을 끌어모았다그리고 5도를 횡행하며 관군을 괴롭혔고 온 나라를 소란에 빠뜨렸다.
그가 죽고난 뒤 명화적(明火賊)은 그를 의적으로 떠받들었으며 무수한 설화를 낳게 하였고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하였다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그의 앞시대의 홍길동(洪吉童), 그의 뒷시대의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도둑으로 들었다그리하여 일부는 살육을 자행하는 포악한 도둑으로 기록하기도 하고일부는 백성을 위하여 관곡을 털어 나누어주는 의적으로 평하기도 하였다.
 
 
 
서경덕(徐敬德)  1489-1546(성종20-명종1)
 
부위(副尉호번(好蕃)의 아들이며 모계는 실전(失傳)이다어머니가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 한다나이 78세에 이르자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른의 말을 공경히 받들었다.
1502(연산군 8) 14세 때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월()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18세 때 《대학》의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 날마다 궁구(窮究)하기를 힘썼다.
19세에 태안이씨(泰安李氏선교랑(宣敎郎계종(繼從)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31세 때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더욱 힘썼다.
1531(중종 26)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더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1544년 김안국(金安國등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특히예학에 밝았으며 중종과 인종이 죽자 “임금의 상()에 어찌 복()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자최삼월(齊衰三月)의 복을 입었다황진이(黃眞伊)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가 전하며박연폭포(朴淵瀑布)·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린다.
 
송대의 주돈이(周敦#96)·소옹(邵雍및 장재(張載)의 철학사상을 조화시켜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의 학설을 제창하였다.
〈태허설 太虛說〉에서 우주공간에 충만하여 있는 원기(原氣)를 형이상학적인 대상으로 삼고그 기()의 본질을 태허라 하였다기의 본질인 태허는 맑고 형체가 없는 것으로 선천(先天)이라 한다그 크기는 한정이 없고 그에 앞서서 아무런 시초도 없으며그 유래는 추궁할 수도 없다맑게 비어 있고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이 기의 근원이다널리 가득 차 한계의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꽉 차 있어 비거나 빠진 데가 없으니 한 호리(毫釐)의 용납될 틈이 없다그렇지만 오히려 실재(實在)하니이것을 ‘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변화하는 기의 율동(律動)이다바람처럼 파도처럼 또 소나기처럼 밀리고 맥박치는 생()과 구름처럼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멸()의 본체가 무엇이냐부침하고 율동(律動)하는 태허기(太虛氣)의 고탕(#03)이다.
따라서서경덕의 기는 우주를 포함하고도 남는 무한량(無限量)한 것이며가득 차 있어 빈틈이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이며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만물을 생성할 수 있으므로그것 이외에 어떤 원인(原因)이나 그 무엇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기()는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은 하지만 기 그 자체를 소멸하지 않는다기가 한데로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흩어지면 물건이 소멸한다이를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얼음이 녹으면 다시 물로 환원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경덕은 “일편향촉(一片香燭)의 기라도 그것이 눈앞에 흩어지는 것을 보지만그 남은 기운은 마침내 흩어지지 않는다.”고 한다이는 물리학에서 밝히고 있는 에너지 항존율(恒存律)과 같은 서경덕의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인 것이다.
이기설의 입장을 밝힘에 있어서 그는 “기 밖에 이가 없다이란 기의 주재(主宰)이다주재란 것은 밖에서 기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요기의 움직임이 그러한 까닭에 정당성을 가리켜 이것을 주재라 한다이는 기보다 선행할 수 없다기는 본래 무시(無始)한 것이니이도 본래 무시한 것이다만일이가 기보다 선행한다고 하면 이것은 기가 유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이는 서경덕이 이를 기 속에 포함시켜 둘로 보지 않는 견해로서 기일원론인 것이다.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함으로써 “만물은 모두가 잠시 기탁한 것같으니떴다 가라앉았다 함도 일기(一氣)가운데요구름 생길 때 그 자취를 보거니얼음 풀린 뒤 그 자취 찾아도 없더라낮과 밤은 밝았다 어두웠다 하지만()과 정()도 시작했다 또 끝났다 한다진실로 이러한 이를 밝게 안다면 장구치면서 우리 님을 보내오리다.”라고 주장하여 불교의 인간생명이 적멸(寂滅)한다는 주장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서경덕의 학문과 사상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독창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며한국 기철학(氣哲學)의 학맥(學脈)을 형성하게 되었다.
1575(선조 8) 우의정에 추증, 1585년 신도비가 세워졌다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으며그의 사상적인 면모를 밝혀 주는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의 대표적인 글을 수록하고 있다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유자광(柳子光)  ?-1512(?-중종7)
 
갑사(甲士)로서 건춘문(建春門)을 지키다가, 1467(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종군하고 돌아와서 세조의 사랑을 받아 병조정랑이 되었다.
1468년에 병조정랑으로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하였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남이(南怡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1무령군(武寧君)에 봉하여졌다.
천성이 음험하면서 재능이 있어 자기보다 임금의 사랑을 더 받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모함하였다.
1476(성종 7) 한명회(韓明澮)를 모함한 것이 드러났으나 임금이 죄를 묻지 않았다뒤에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등과 함께 현석규(玄錫圭)를 배제하려다 실패하여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풀려나 공신의 봉작만 회복받았다.
이극돈(李克墩형제가 조정에서 권력을 잡자 몸을 굽혀 결탁하였다정조사(正朝使)·등극사(登極使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91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일찍이 함양군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 군수에게 현판하게 한 일이 있었다뒤에 김종직(金宗直)이 이 고을의 군수로 와서 그것을 떼어 불태워버리면서 “자광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럴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그가 이를 듣고 몹시 분해하였으나김종직이 임금의 신임을 크게 받던 때였으므로 도리어 교분을 맺고김종직이 죽었을 때에는 제문을 지어 울면서 그를 왕통(王通)과 한유(韓愈)에 비하기까지 하였다.
이극돈이 일찍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성종의 상을 당하였는데궁중에 향을 바치지도 않고 기생과 놀아난 일이 있었다김일손(金馹孫)이 그 사실과 또 뇌물 먹은 일을 사초(史草)에 써서 이극돈이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김일손이 들어주지 않으므로 감정을 품고 있었다.
1498(연산군 4)《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이극돈이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이 되어 김일손이 쓴 사초에 자기의 나쁜 일을 쓴 것과 또 세조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이것으로써 보복할 기회를 삼고자 하였다.
이극돈이 총재관 어세겸(魚世謙)에게 “김일손이 선왕(世祖)을 무망(誣妄), 훼방(毁謗)하였으니 신하로서 이같은 일을 보고서 임금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까나의 생각에는 사초를 봉하여 위에 아뢰어서 처분을 기다리면 우리들은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어세겸은 깜짝 놀라면서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얼마 뒤에 이극돈이 유자광에게 의논하니유자광은 “이것이 어찌 의심하고 주저할 일입니까?” 하고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에게 가서먼저 자기들이 세조에게 은혜를 입었으므로 그것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을 말하여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놓은 뒤에야 그 일을 말하였다.
노사신과 윤필상은 세조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고한치형은 그 족당이 궁중에 관련되었으므로 반드시 자기의 말에 따를 것으로 알고 말하였던 것이다세 사람의 동의를 받고 함께 차비문(差備門)밖에 나가서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을 불러내어 이야기하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수근이 승지로 될 때에 대간과 시종신(侍從臣)들은 외척이 권력잡을 발단이라고 하여 옳지 않다고 힘써 간하였으므로신수근은 이들에게 감정을 품고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조정은 문신들의 수중에 있는 물건이니 우리들은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때에 와서 김일손 등에 대한 여러 사람의 원한이 쌓여 한데 뭉치게 되었다연산군 또한 포학하고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 글하는 선비를 미워하였으나 감히 손을 대지 못하던 차에 유자광 등이 아뢰는 말을 듣고“이 나라에 충성한다.”는 말로써 특별히 칭찬한 뒤 남쪽 빈청에서 죄인을 국문하도록 명하고내시 김자원(金子猿)을 시켜 왕명의 출납을 맡게 하고 나머지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유자광은 옥사를 직접 맡고김자원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할 때에는 반드시 앞에 나아가서 자상하고 공손하게 조심하는 태도를 보이면서그 명이 엄하고 혹독한듯하면 스스로 임금의 마음을 안 것처럼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면서 감사하다는 뜻을 나타내는듯이 하고명을 다 듣고는 물러나와 매우 기뻐하면서 스스로 일을 처리하여 나가면서여러 사람 앞에서 “지금이 조정을 고쳐 배치할 때이니 마땅히 이러한 큰 처치가 있어야만 할 것이고보통으로 다스려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유자광은 옥사가 완화될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만들기를 계획하였다하루는 소매 속에서 김종직의 문집을 내놓으면서 〈조의제문 吊義帝文〉을 들추어 여러 추관(推官)에게 보이고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것인데김일손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만든 것이다.”라고 말하고스스로 주석을 달아 글귀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어 “김종직이 우리 세조를 비방하고 헐뜯었으니마땅히 대역부도로서 논죄하고 그가 지은 글은 세상에 전파되어서는 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 하고 건의하였다.
연산군은 그 말에 따라 김종직의 시문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이틀 안으로 자진해서 바치게 하고그것을 빈청의 앞뜰에서 불사르게 하였다일찍이 성종이 김종직에게 명하여 환취정(環翠亭)의 기문(記文)을 지어 문 위에 달아둔 것을 아울러 떼어버리도록 청하였는데이것은 함양의 원한을 보복함이었다.
무오년 7월 17일에 교지를 내려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사초사건과 관련지어 크게 제거하였다.
이때 유자광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노사신이 반대하자 불쾌한 기색으로 힐난하였다이후 유자광의 권세가 조정과 민간에 군림하였으며조정에서는 그를 독사처럼 대하여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성희안(成希顔)과 인연이 있어 다시 훈열(勳列)에 참여하게 되어 정국공신 1무령부원군(武寧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이듬해 대간과 홍문관·예문관의 잇따른 탄핵으로 훈작을 삭탈당하고 관동으로 유배되었으며이어서 경상도의 변군에 옮겨졌다가 눈이 먼 뒤 두어해 만에 죽었다.
유자광이 죽은 뒤에 조정에서 그의 자손에게 장사지내기를 허락하였으나아들 진()은 슬픔을 잊고 여색에 빠져서 끝내 가보지도 않았고아들 방(또한 병을 칭탁하고 손님들과 함께 술마시면서 장사를 외면하였다.
 
 
 
 
 
 황진이(黃眞伊/?~?)
 
조선시대의 명기(名妓). 본명은 진(),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출신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나중종 때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으며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기생이 된 동기에 대하여도 15세경 이웃 총각이 혼자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당시(唐詩)를 정공(精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만큼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고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 朴淵〉·〈영반월 詠半月〉·〈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여소양곡 與蘇陽谷〉 등이 전하고 있으며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이 중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이없어〉·〈산은 옛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珍本)《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청산은 내뜻이요〉는 황진이의 작품이라 하고 있으나 《근화악부 槿花樂府》와 《대동풍아 大東風雅》의 두 가집에만 전하며작가도 《근화악부》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고《대동풍아》에서만 황진이로 되어 있다그리고 두 가집에 전하는 내용이 완전 일치하지도 않으니특히 초장은 《근화악부》에서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라 되어 있는데《대동풍아》에서는 “청산은 내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고 바뀌어 그 맛이 훨씬 달라졌다《대동풍아》는 1908년에 편집된 책이요 작가의 표기도 정확성이 별로 없는 가집이라는 점에서 그 기록이 의문시되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세련된 언어구사로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성종22-명종8)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중종 25)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명종 즉위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죽었다.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그것은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뚜렷하게 계승받은 것이 아니요 독자적으로 학문을 수립하였다다만 그의 호를 ‘회재’라 한 것은 회암(晦菴: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물론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그가 여기에서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그 자신이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여 절개를 지키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그러나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만년에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럿 남겼다《구인록 求仁錄》(1550)·《대학장구보유 大學章句補遺》(1549)·《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1553)·《봉선잡의 奉先雜儀》(1550) 등이다《구인록》(4)은 유교경전의 핵심개념으로서 인()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대학장구보유》(1)와 《속대학혹문》(1)은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이 점에서 그는 뒤따르는 도학자들보다 훨씬 자율적인 학문태도를 가졌다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하였다.
특히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대학장구》의 경1장에 들어 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기는 계획을 하였으며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의 학문태도에 비하여 매우 창의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29)는 그의 미완성 절필이다.
이 저술도 주희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계를 훨씬 벗어나서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의 9(九經:修身·尊賢·親親·敬大臣·體群臣·子庶民·來百工·柔遠人·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정신을 밝히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다.
이 저술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체계를 통치원리의 구체적 실현방법에 응용하였던 것에 상응한 저술이요뒷날 이현일(李玄逸)이 《홍범연의 洪範衍義》를 저술한 것에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주희가 《대학》과 《중용》을 표출시킨 의도를 계승하면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양면으로 파악함으로써 도학의 통치원리를 선명하게 제시하는 창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하겠다.
《봉선잡의》(2)는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가 되고 있다.
주희의 《가례 家禮》가 조선조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한다면이언적의 예학저술은 그의 학문적 관심이 얼마나 광범하였던가를 보게 한다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상소문으로서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 進修八規〉는 군주사회의 통치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하늘의 도리곧 천도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곧 인심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하여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기본이념을 추구하였으며도학적 경세론의 압축된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일강십목소〉에서 근본의 일강령은 ‘임금의 마음씀(人主之心術)’으로 규정하고, 10조목으로는 가정법도의 엄숙국가근본의 배양조정기강의 정대인재취사의 신중하늘도리에 순응언로를 넓힘사치욕심의 경계군자의 길을 닦음일의 기미를 살핌을 도모하도록 요구하고, 27세에 지은 〈오잠 五箴〉에서도 하늘을 두려워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는 마음(敬心), 허물을 고침(改過), 의지를 독실하게 함(篤志)을 들고 있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였다.
1610(광해군 2)문묘에 종사되었고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등에 배향되고 있다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성수침(成守琛) 1493(성종 24)1564(명종 19).
 
 조선 중종·명종 때의 성리학자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이다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다.
이때부터 과업(科業)을 폐하고 《대학》과 《논어》 등 경서공부에 전념하였다.
1541년 유일(遺逸)로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우계(牛溪)에 은거하였다.
1552(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예산현감(禮山縣監)·토산현감(#01山縣監)·적성현감(積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564년 사지(司紙)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하였으며죽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수가 없었다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棺槨)과 미두(米豆)와 역부(役夫)를 지급하여주고 사헌부집의에 추증하였다.
조선 초기에 성리학의 토착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도학사상으로 나타났거니와 이들은 대의명분과 요순(堯舜)의 지치(至治)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자은일(隱逸)을 일삼고 산간에 묻혀 자기수양에 힘써 이러한 학풍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혼()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청송집》이 있으며글씨를 잘 썼는데 〈방참판유령묘갈 方參判有寧墓碣〉 등이 있다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백인걸(白仁傑) 1497-1579(연산군3-선조12)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본관은 수원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 서울에 거주하였다.
왕자사부(王子師傅익견(益堅)의 아들이다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김안국(金安國)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송인수(宋麟壽)·유희춘(柳希春)·이이(李珥)·성혼(成渾등 당대의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김식(金湜)이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求道)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으며특히 조광조를 존경하여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1519(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지내다가 돌아와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이때 예문관의 관리가 이조(吏曹)의 인사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하는 옛 관습을 복구하여 실행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는데 이때 근무를 성실히 하였으며특히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쓴 공로로 품계가 높아졌다.
1541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545(인종 1) 지평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같은해 명종 즉위 후 윤원형(尹元衡등이 대비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고 권력을 오로지할 목적으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등을 제거할 때헌납으로 있으면서 대비 밀지(密旨)의 부당함을 들어 극력 반대하다가 대비의 명으로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鄭順朋)·최보한(崔輔漢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그뒤 1547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59) 등의 농권을 비난하는 양재(良才)의 벽서를 기화로 소윤(小尹)세력이 대윤(大尹)의 잔존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당하였다.
1551년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간 뒤 《태극도설 太極圖說》과 정주학(程朱學)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1565(명종 20)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교리로 등용되어 이듬해 사도시첨정(#42寺僉正)·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는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등의 치적을 쌓아 고을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선조가 즉위한 뒤 1568(선조 1) 기대승(奇大升)의 건의로 특별히 뽑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같은해 공조참의·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병조참판이 되었다이밖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568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소를 올림으로써 오래지 않아 철렴(撤廉)하도록 하였다.
또한이해 이후 죽을 때까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초 선조가 그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는 작업을 추진할 때에는 일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와는 달리 임금의 처지를 두둔하여 한때 사림들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돌아갔다.
조정에 분당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준경(李浚慶)의 의견을 좇아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로 인하여 선비들을 해하려 한다는 당시 사림들의 의심을 사서 1571년 파주로 퇴거하였다.
그뒤 우참찬으로 징소되었으나 치도(治道)를 논하는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함께 다시 동서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인(西人)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밖에도 국경의 상황을 논하여 군비를 닦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정에 대하여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선조초에는 많은 정치적 문제에 연관되었고 매우 연만하여 많은 시간을 파주에 퇴거하여 있었는데선조는 대사헌·우참찬 등의 관직을 내려 부르거나 식량을 내리기도 하고, 1569년의 경우와 같이 직접 편지를 보내 부르는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기도 하였다.
나이가 든 뒤에도 성리학에 대한 탐구를 열심히 하였으며 이이·성혼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였다기묘사화 후 명종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특히 1545년 을사사화 때에는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선조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인조 때 충숙(忠肅)의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고쳐졌다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남평(南平)의 봉산서원(蓬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휴암집》이 전한다.
 
 
 
 
 
이준경(李浚慶) 1499-1572(연산군5-선조5)
 조선 중기의 문신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홍문관수찬 수정(守貞)의 아들로한성부 동부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1504(연산군 10)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 세좌(世佐)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이연경(李延慶)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31(중종 26)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 부수찬이 되고 그해 말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아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들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일파의 미움을 사서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537년에 김안로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뒤 한성부우윤·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인종 1)을사사화 때는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있어서 화를 면하였다.
1548(명종 3)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을 역임하였으나 1550년 정적이었던 영의정 이기(#59)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에 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에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하였다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으며,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 균(河城君鈞: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수십년간 유배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등을 석방하여 등용하는 동시에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모든 사람을 신원하였다.
그러나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등 신진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선조 4)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하여야 한다는 유차(遺箚)를 올려 이이·유성룡(柳成龍등 신진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조선풍속 朝鮮風俗》 등이 있다선조 묘정에 배향되고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등에 제향되었다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임사홍(任士洪) ?-1506(연산군12)
 
  
 조선 전기의 문신본관은 풍천(豊川). 초명은 사의(士毅). 자는 이의(而毅).
좌찬성 원준(元濬)의 아들이며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그 자신뿐만 아니라세 아들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광재(光載)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의 남편으로 풍천위(豊川尉)가 되고숭재(崇載)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 들어 풍원위(豊原尉)가 되었다.
1466(세조 12)에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홍문관교리·승지·도승지·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중국말에 능통하여 관압사(管押使)·선위사(宣慰使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승문원에서 중국말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477(성종 8)에 서얼출신인 유자광(柳子光)과 손을 잡고 지평 김언신(金彦辛)을 사주하여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도승지 현석규(玄錫圭)를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소인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다김언신에 이어 유자광이 다시 현석규를 공척(攻斥)하는 상소를 올렸는데성종은 이를 붕비(朋比)로 보고 김언신을 하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구해(救解)상소가 계속되었으며그 이듬해 4월에 홍문관부제학 유진(兪鎭), 예문관봉교 표연말(表沿沫), 종실 주계부정(朱溪副正심원(深源등의 잇따른 상소에서 임사홍이 사주한 것으로 밝혀져 그는 의주로유자광은 동래로 각각 유배되었다따라서 그는 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성종조에는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재기하여 사화를 주도하였다.
유자광은 1498(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등 사림계열에 보복을 가하였으며그는 1504년에 갑자사화를 주도하여 훈신계열을 축출하는 데 앞장을 섰다.
그는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愼守勤)과 제휴하여 연산군의 생모가 죽은 내막을 밀고함으로써 폐비사사(廢妃賜死당시의 중신들을 타도하고사림계 인사들에게도 다시 화를 입혔다그의 아들 희재(熙載)는 김종직의 문하가 되어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으며그는 1506년 중종반정 때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15세기의 주요인물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