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인물

제목14세기의 주요인물2021-09-1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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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규(趙英珪) ?-1395(태조4)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신창조씨(新昌趙氏)의 시조초명은 평().
조상의 가계가 불분명하고 자나 호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반 평민출신으로 추측된다고려말의 명족의 하나인 연안차씨(延安車氏견질(堅質)의 첩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견질의 형 원부(#80)는 명유로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었으나, 1398(태조 7)에 하륜(河崙)이 보낸 자객에게 타살되었다정몽주(鄭夢周)가 차원부의 대고모의 외손자로서 그와 인척관계에 있다.
일찍이 이성계(李成桂)의 사병(私兵)으로서 천거로 벼슬에 올라, 1385(우왕 11)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가 되어 함주일대에 창궐하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의 휘하에 종군전공을 세웠다.
그뒤 여러 차례 왜구토벌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392(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과 모의하여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격살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이해 정도전(鄭道傳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예조전서에 올랐다가 1395년 병으로 죽었으며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추증되었다.
그와 함께 개국공신대열에 오른 정도전·함부림(咸傅霖), 그리고 차씨일족을 타살한 하륜 역시 연안차씨의 외척 서얼족속인데그들의 혈통이 차씨와 유씨의 족보인 《차류보 車柳譜》에 실려 있는 것에 분한을 품고 해주 신광사(神光寺)에 보관중인 보판(譜板)을 하륜이 불살라버렸다고 전해진다.
 
 
 
 
조영무(趙英茂) ?-1414(태종14)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본관은 한양(漢陽). 중국에서 귀화한 지수(之壽)의 고손으로순후(珣厚)의 손자이며세진(世珍)의 아들이다개국공신 1등 조인옥(趙仁沃), 개국공신 2등 조온(趙溫)이 그의 당내이다.
1392(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등과 함께 정몽주(鄭夢周)를 격살한 뒤 그해 이성계를 추대조선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한산백(漢山伯)에 봉하여졌다.
1394(태조 3)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강계등처도병마사(江界等處都兵馬使)를 겸임하고,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이듬해 제1차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봉하여졌다.
태조는 그의 배은망덕을 크게 개탄하였으며, 1402(태종 2)에 일어난 조사의난(趙思義亂)은 조영무·이무(李茂등을 죽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이방원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판중추원사·의흥삼군부중군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를 거쳐 참찬문하부사에 승진하였다.
1400(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하여 제2차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1등에 봉하여졌다사병혁파가 실시될 때 이를 거부하고 무기를 수납하는 군관을 구타하였다가 황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으로 나갔다.
그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권행의정부사(權行議政府事)·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를 거쳐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로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다.
1405년 우정승에 올랐으며이듬해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를 겸직한 뒤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409년 훈련관도제조(訓鍊觀都提調)를 지내고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가 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1412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박영우(朴英祐)의 위임거부로 물의가 일어나자 추천한 장본인으로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이듬해 우정승에 복직되었으며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민개(閔開)  1360(공민왕 9)1396(태조 5).
고려말·조선초의 문신본관은 여흥(驪興). 전리판서(典理判書(#04)의 아들이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1390(공양왕 2)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지신사(知申事)·밀직부사를 거쳐이듬해 하정사(賀正使)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대사헌을 겸임하면서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등이 이성계(李成桂)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혼자 동의하지 않았다남은(南誾)이 조준 등에 이르기를 그를 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조준이 제지하여 살아났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대사헌으로서 왕씨(王氏)들의 외방분거(外方分居)를 주장하고이듬해 경상도관찰출척사로 나가 이지현(梨旨縣등 일부지역에 대한 행정구역의 재조정을 건의하였다.
총명하고 강개한 뜻을 지녔고관찰사로 있을 때는 자신의 몸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무관심하여 병을 얻었다이로 인하여 태조는 관찰사에게 하루에 사시진찬(四時進饌)하도록 하명하고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도록 하였다.
 
 
 
 
 
이종무(李從茂) 1360~1425 (공민왕9-세종7)
 
조선 초기의 무신본관은 장수(長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고, 1381(우왕 7)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7(태조 6)옹진만호로 재직중 왜구가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싸워 이를 격퇴하였다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정종 2)상장군으로 제2차왕자의 난 때 방간(芳幹)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의주의 병마절제사를 거쳐, 1406(태종 6)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고 이어서 우군총제를 겸하였으며이해에 장천군(長川君)에 개봉(改封)되었다.
1408년 남양·수원 등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이듬해 안주도병마사가 되었다.
1411년 안주절제사를 역임하고이듬해 별시위좌이번절제사(別侍衛左二番節制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었다.
1417년 좌참찬을 거쳐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를 지내고, 1419(세종 1)에는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이해에 왜선 50여척이 비인현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으며절제사 이사검(李思儉)을 해주·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는 등 침입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의 허점을 틈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그로 하여금 전함 227군량 65일분군졸 17285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정벌군을 지휘하여 대마도를 공략하여 대소 선박 129척을 소각하고가호(家戶)1, 940여호를 소각하였으며적 114()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귀국한 뒤 찬성사에 승진하였으나불충한 김훈(金訓)·노이(盧異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상원(祥原)에 유배되었다.
이듬해에 복관되고, 1421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다음해 사은사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동행하였던 정희원(鄭希遠)의 불경한 행동을 직계하지 않아 1423년 과천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복관되었다시호는 양후(良厚)이다.
 
 
 
   
 
맹사성(孟思誠) 13601438(공민왕9-세종20)
 
 고려말·조선초의 문신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희도(希道)의 아들이며최영(崔瑩)의 손서(孫胥)이다온양 출신.
1386(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된 데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기거랑(起居郎)·사인(舍人)·우헌납(右獻納등을 역임하고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초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동부대언(同副代言)·이조참의를 거쳐 1407(태종 7)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을 때마침 세자가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길에 시종관(侍從官)으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한성부윤과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거쳐 사헌부대사헌이 되었을 때지평(持平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平壤君조대림(趙大臨:太宗의 딸 慶貞公主의 夫君,조준의 아들)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으므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처형될 뻔하였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자예조는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를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한 바 있고그 이듬해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고이듬해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등 100인을 뽑았으며왕이 친림한 문과복시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그해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노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하였으나 왕은 그를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었는데그는 또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419(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에는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가 되고 1427년 우의정이 되었다그는 우의정 재임시에 《태종실록 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하였다《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는데그는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으나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그는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아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고매양 출입할 때에는 소〔牛〕 타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매양 그의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그는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변계량(卞季良) 1369-1430(공민왕18-세종12)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옥란(玉蘭)의 아들이며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조석(曺碩)의 딸이다이색(李穡)·권근(權近)의 문인이다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네살에 고시의 대구를 외우고 여섯살에 글을 지었다.
1382(우왕 8) 진사시에 급제하고이듬해 생원시에도 급제하였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郎將)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1392년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랑장(千牛衛中郎將)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으며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을 거쳐 1396(태조 4)에는 교서감승(校書監丞)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태종초에는 성균관악정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407(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그뒤 예문관제학·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경연동지사 등을 거쳐, 1415년 세자우부빈객이 되었다.
이때 가뭄이 심하여 상왕이 크게 근심하므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圓壇)에 빌기를 청하여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리었다.
그뒤 태종말까지 수문전제학·좌부빈객·예문관대제학 겸 성균관대사성·우빈객·예조판서·경연지사·춘추관지사·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420(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그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문서를 작성하였으며과거의 시관으로 선비를 뽑는 일에 지극히 공정을 기하여 고려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주위로부터 ‘살기를 탐내고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정도전(鄭道傳)·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화산별곡 華山別曲〉·〈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왕조의 건국을 찬양하였다.
저서로는 《춘정집》 3권 5책이 있다《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하였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찬하였다《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고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강상인(姜尙仁) ?-1418(세종0)
 
 조선 초기의 무신본관은 진주정안군(靖安君:태종)의 가신이었고태종의 즉위와 함께 사재(私財)의 출납을 감독하였다.
1402(태종 2)강계지방에 파견되어 임팔랄실리(林八刺失里등의 여진을 위무하였고이후 태종대를 통하여 시위에 공헌하였다.
1418년 병조참판이 되었는데태종이 선위(禪位)하기는 하나 세종이 아직 나이가 어리다 하여 국가의 중대사와 병권만은 양여하지 않고 친히 관장하기로 한 방침에 따라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상왕(上王:태종)의 병권행사를 위한 핵심인물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세종이 즉위하자 상왕의 의도와는 달리 군사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하고 상왕에게는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옥된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과 직첩을 몰수당하고 단주(端州)관노로 충속되었다가 원종공신임이 참작되어 용서받았다.
그뒤 다시 전일에 박습·심증($01) 등과 함께 병권이 양분됨은 옳지 않다고 한 말로 인하여 하옥되었고태종 부자간의 정을 끊으려 했다는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옹진진(甕津鎭)에 충군(充軍)되었다가 의금부의 장계에 따라 모반대역죄로 참수되었다.
 
 
 
 
박석명(朴錫命) 13701406(공민왕19-태종6)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순천호는 이헌(#96). 밀직부사를 지낸 가흥(可興)의 아들이다.
1385(우왕 11)문과에 급제하여 1390(공양왕 2) 우부대언(右副代言)·병조판서를 지냈다.
1392(태조 즉위년)조선이 건국되자귀의군(歸義君왕우(王瑀:공양왕의 아우)의 사위였던 관계로 7년간 은거하였다.
1399(정종 1)고려의 구신들이 등용되자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기용되고 안주목사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정종이 태종에게 선위하자 그 교서를 가져가서 태종을 옹립하였다.
1401(태종 1)좌명공신 3등이 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진 뒤지신사(知申事)를 거쳐 1405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듬해 함경도선위사·전라도도체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젊었을 때 정종과 같이 이불을 덮고 자는데 꿈에 누런 용이 옆에 있으므로 돌아다보니 태종이었다그때부터 기이하게 여겨 서로 친구로 더욱 두텁게 지냈다.
태종이 임금이 되면서 태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지의정부사·판육조사(判六曹事)에 올랐다평소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깊었는데특히 태종에게 황희(黃喜)를 승지로 천거한 것이 유명하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숙번(李叔蕃) 13731440(공민왕22-세종22)
 
조선 초기의 문신본관은 안성(安城). ()의 아들이다.
1393(태조 2)문과에 급제한 뒤 1398년에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있으면서 방원(芳遠:뒤의 태종)을 도와 사병을 출동시켜 세자 방석(芳碩)과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으며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그뒤 방원의 측근이 되어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방원에게 “공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을 뿐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
1399(정종 1)에 좌부승지가 되고이듬해초에 박포(朴苞)가 방원과 반목중이던 방간(芳幹)을 충동하여 거병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제거하였다이어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고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1등이 되었다.
1402(태종 2) 새로 설치한 내갑사(內甲士)의 좌번(左番)책임자가 되고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가 되었다같은해말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진무(都鎭撫)가 되어 좌도도통사와 함께 출정하여 진압하였다이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고, 1405년 지공거(知貢擧)에 선임되었다.
1406년에 겸중군총제(兼中軍摠制)·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고이듬해 겸충좌시위사상호군(兼忠佐侍衛司上護軍)·겸의흥시위사상호군(兼義興侍衛司上護軍등을 역임하였다.
1408년 십사상호군(十司上護軍)이 폐지되면서 겸중군도총제(兼中軍都摠制)가 되고이듬해에 동북면절제사가 되었다이어 참찬의정부사·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거쳐, 1412년말에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13년에 병조판서가 되고이듬해 의정부찬성사가 되었는데뒤에 의정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좌참찬·찬성이 되었다.
한편, 1414년에는 지춘추관사로서 영춘추관사 하륜(河崙등과 함께 《고려사》 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고쳐서 바로잡도록 명을 받았다.
이듬해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원래 성품이 미친듯이 망령된데다 자신의 공과 태종의 총애를 믿고 거만방자하여 국왕에게 불충하고 동료들에게 무례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아 결국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1417년 경상도 함양에 유배되었다.
세종 때 《용비어천가》를 짓게 되자 선왕 때의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 하여 서울에 불려와서 편찬을 도왔으나 편찬이 끝난 뒤 다시 유배지에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다.
 
 
 
민무구(閔無咎 ?1410).
 
 조선 초기의 문신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의 맏아들이며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동생 무질(無疾등과 함께 태종의 외척이며정사(定社)·좌명(佐命)의 두 공신을 겸하여 권세와 부귀가 극성하였다.
권모술수에 능하여 끝내는 협유집권(挾幼執權)의 혐의를 받아 많은 관련자와 함께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이들이 권모술수에 능한 것은 1400(정종 2) 7월 조준(趙浚)의 제거를 획책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1407(태종 7) 7월 민무구 형제의 옥이 발생하였는데이 옥은 1406년 8월 태종이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에게 선위(禪位)할 뜻을 표명하면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네 차례의 선위파동을 일으켰는데1차선위파동이 민무구 형제의 옥을 일으키는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태종이 선위를 표명하자 민무구 형제가 협유집권을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민무구 형제가 정사·좌명 공신의 영예를 누리고도 태종과 틈이 생기게 된 것은 태종과 정비(靜妃:원경왕후)와의 불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무구 형제의 옥은 이보다 앞서 일어난 세자의 정혼문제와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세자 정혼문제를 계기로 1407년 7월 정부·대간이 개편되고개편 6일 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이화(李和등이 선위파동 때에 있었던 민무구 형제의 불충스러운 행동을 정식으로 탄핵함으로써 옥이 벌어지게 되었다.
옥이 발발한 지 2일 후 민무구를 연안(延安)에 방치하고, 19일 후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빼앗고, 4개월 후 직첩을 수취하여 서인으로 삼고이어 여흥에 유배시켰다.
태종은 옥이 일어난 지 2개여월 후 민무구 형제의 죄과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였으나정비와 장인 민제장모 송씨(宋氏)의 면목을 생각하여 가급적 생명만을 보존해줄 생각이었는데유배중에도 대간 등의 논핵(論劾)을 가중시킬 행동을 자주 하여 더욱 불리한 지경으로 몰고 가게 되었다.
민제가 죽고 한달이 지난 1408년 10월 민무구 형제의 죄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교서가 반포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그들의 옥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교서가 내린 지 15일 후 그들이 유배지에서 부랑배들과 작당한다고 하여 다시 민무구를 옹진진(甕津鎭)에 안치하였다교서반포 후 민무구 형제의 옥을 최대로 악화시킨 사건이 발생하였으니이무(李茂)의 옥과 조호(趙瑚)의 난언사건(亂言事件)이 그것이다.
민무구 형제는 이무의 옥으로 다시 제주도에 안치되고조호의 난언사건 직후 제주유배지에서 자진하였다.
요컨대기록에는 민무구 형제가 권모술수에 능하고 협유집권을 도모한 때문에 숙청당한 것같이 되어 있지만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하여 외척을 제거하려는 정치파동에 말려들어 억울하게 희생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무질(閔無疾 ?1410).
 
 조선 초기의 문신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의 둘째아들이며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1398(태조 7) 1차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으로 책록되고, 1400(정종 2) 2차 왕자의 난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으며좌군총제(左軍摠制)·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등을 역임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7월 형 무구(無咎)와 함께 연루된 옥에 대한 죄목을 이듬해 10월의 교서에 10가지로 열거하고 있는데가장 중요한 것은 협유집권(挾幼執權)을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 1402년 왕이 창종(瘡腫)을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몰래 병세를 엿보며 어린 세자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이들이 왕의 외척이며정사·좌명 공신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는데도 이러한 의심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의 성격과 정비(靜妃원경왕후)의 태종과의 불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태종의 제1차 선위파동으로 민무질 형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세자 정혼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세자 정혼문제는 정부와 대간의 시비로 발전하여, 1407년 7월 정부와 대간이 개편되어 하륜(河崙)이 좌의정에서 물러나고, 6일 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이화(李和등이 민무질 등 민씨들을 죄줄 것을 청하여 옥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화 등이 열거한 민무질 형제의 죄는 선위파동 때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기를 은근히 기대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한 점과이무(李茂)의 집에 가서 왕에 대한 불평을 토로한 것 등이었다.
옥이 발생한 지 2일 후 민무질을 장단(長湍)에 송치하고 19일 후 공신녹권(功臣錄券)을 환수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다시 대구에 유배시켰다민제가 죽고 한달이 지난 1408년 10월 그들의 죄를 비난하는 교서를 반포하고 곧 삼척진(三陟鎭)에 옮겨졌다.
그뒤 이무의 옥으로 제주도에 옮겨지고 다시 조호(趙瑚)의 난언이 드러난 지 2일 만에 성석린(成石璘등의 강경한 처단 건의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명하였다.
민씨 형제의 옥을 만들어내고 확대시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한 사람은 이숙번(李叔蕃)으로개국공신인 이숙번 일파가 고려의 구가세족(舊家世族)인 하륜을 중심으로 한 일파를 제거하려는 정치파동 속에서 민씨 형제의 옥이 일어났고이 옥은 또한 외척제거라는 점에서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최윤덕(崔潤德) 1376-1445(우왕2-세종27)
 
 조선 초기의 무신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伯修), 호는 임곡(霖谷). 지중추부사 운해(雲海)의 아들이다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楊水尺)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어느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죽였다.
그뒤 음관(蔭官)으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부사직이 되었다.
1402(태종 2)에 낭장이 되고곧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가 되었다가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고동북면조전병마사(東北面助戰兵馬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올랐다.
1413년 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가 되어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켜서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으며영길도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우군총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19(세종 1)에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1421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인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하였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이만주를 대파하였고이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또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이를 진압하였으며돌아와서는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소를 올려 무관직에 전임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35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고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된 뒤 1445년에 궤장(#02)을 하사받았다.
그는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하여서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고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아서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준 일도 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시호는 정렬(貞烈)이다.
 
 
 
 
박연(朴堧)  13781458(우왕4-세조4)
 
조선 전기의 문신·음률가(音律家). 본관 밀양(密陽). 자 탄부(坦夫). 호 난계(蘭溪). 시호 문헌(文獻). 초명 연(). 영동(永同출생. 1405(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校理)를 거쳐 지평(持平)·문학(文學)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악사(樂事)를 맡아보았다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27(세종 9)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또한 조정의 조회 때 사용하던 향악(鄕樂)을 폐하고 아악(雅樂)으로 대체하게 하여 궁중음악을 전반적으로 개혁하였다. 33년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파직되었다가 용서받고 아악에 종사공조참의·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를 거쳐 중추원동지사를 지냈다. 4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를 역임한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다. 53(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아들 계우(季愚)가 처형되었으나 그는 삼조(三朝)에 걸친 원로라 하여 파직에 그쳐 낙향하였다특히 저[x]를 잘 불었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다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에 제향되고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시문집 《난계유고(蘭溪遺稿)》 《가훈(家訓)》이 있다.
 
 
 
최해산(崔海山) 1380-1443(우왕6-세종25)
 
 조선 초기 화포(火砲)분야에 공이 큰 무신본관은 영주(永州).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使무선(茂宣)의 아들이다.
15세 때에야 글자를 해독하게 되었으나아버지의 유고(遺稿)인 《화약수련법 火藥修鍊法》의 비법을 전수받았다.
1401(태종 1) 군기시(軍器寺)에 등용주부(主簿)를 거쳐 경기우도병선군기점고별감(京畿右道兵船軍器點考別監)이 되었다.
1409년 군기감승(軍器監丞)에 오르고그해 10월에는 화차를 만들어 왕이 임석한 가운데 해온정(#03)에서 발사시험을 하였다.
, 1424(세종 6) 12월에도 군기판사로서 왕을 모시고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가 화포발사 연습을 주관하였다.
1425년 군기감사를 지내고 1431년 6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그해 10월 그가 오랜 군기감 근무로 옳지 못한 일이 많았다 하여 조정신하들이 그의 체직을 품신하였지만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허락되지 않았고오히려 이듬해 공조우참판으로 승임되었다.
1개월 후 판경성군사(判鏡城郡事)로 전보되었을 때에도 세종은 그가 외직으로 나갈 경우 군기감의 업무가 부실하여진다 하여 중추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433년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과 함께 파저강(婆猪江)토벌작전에 참전하였을 때에도 군기(軍機)를 이행하지 않은 관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세종은 “그가 20여년 동안 오로지 화포를 맡았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벼슬만 거두도록 하라.”고 하여 용서하였다.
그뒤에도 제주안무사·중추원부사·강계절제사 등을 지냈다그는 전수받은 화약수련비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성과 열을 다하여 화약병기를 비롯한 군장비 보강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김종서(金宗瑞)  13901453(공양왕2-단종1)
 
조선 전기의 문신본관 순천(順天). 자 국경(國卿). 호 절재(節齋). 시호 충익(忠翼). 1405(태종 5) 문과에 급제, 19(세종 1)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으로 등용되고이어서 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을 지냈다. 33년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야인(野人)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35년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야인들의 정세를 탐지·보고하고그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40년 형조판서로 승진하고예조판서·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다가, 49년 권제(등이 고친 《고려사(高麗史)》가 잘못되었다 하여 왕명으로 개찬(改撰)하게 되자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총책임을 맡아 51년 간행하였다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를 거쳐 50년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를 겸하였다다음해 우의정에 오르고, 52년 《세종실록》의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하였다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우의정 정분()과 함께 좌의정으로유명(遺命)을 받아 12세의 단종(端宗)을 보필하였다대호(大虎)라는 별호까지 붙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名臣)이었으나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후의 世祖)에 의하여 53(단종 1)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격살(擊殺)되고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라는 누명까지 쓰고 효시(梟示)됨으로써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746(영조 22) 복관(復官)되었으며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다저서에 《제승방략(制勝方略)》이 있다.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태조3∼세조 8).
 
 태종의 장남전주이씨(全州李氏). 이름은 제(#48), 자는 후백(厚伯).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제()의 딸이며부인은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한로(漢老)의 딸이다.
1404(태종 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라든가혹은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그리고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대하여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오히려 그는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서 사냥을 한다든가 하는 자유분방한 풍류생활을 더 즐겼다.
이와같은 그의 품행은 부왕인 태종의 눈에도 걱정스럽게 비쳤음은 물론엄격한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태종은 수차에 걸쳐 그에게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도록 타이르기도 하고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하였으나그는 끝내 그런 부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418년에 유정현(柳廷顯등의 청원으로 폐위되고왕세자의 지위에는 그의 동생이며뒷날 세종이 된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책봉되었다.
그런데 그가 왜 그러한 파격적인 행동을 하였으며또한 왜 세자의 지위를 잃게 되었는지 아직까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그는 그의 동생인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종과 극히 우애가 깊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과거의 왕세자였다는 것현왕이 그의 동생이라는 것 때문에 그의 일거일동은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탄핵된 바 있었지만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러한 그의 특이한 생애는 많은 후세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듯하며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지는 것이 적지 않다.
특히 시와 서에 능하였다.
 
 
 
이징옥(李澄玉) ?-1453(단종1)
 
 조선 초기의 무장·반란자본관은 양산(梁山). 지중추원사 전생(全生)의 아들이며징석(澄石)의 아우이다.
어려서부터 무용이 뛰어나어머니를 위하여 멧돼지를 산 채로 끌고 오고호랑이를 호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갑사(甲士)로서 중앙에서 벼슬을 하다가, 1416(태종 16)부사직으로 별시에 응하여 무과친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복소윤(司僕少尹)으로 임명되었다.
1423(세종 5) 황상(黃象)의 천거로 경원첨절제사로 발탁되어 아산(阿山)에 침입한 야인을 격퇴하고, 1425년 절제사로 승진하였다.
이때부터 1430년까지 여진이 침구(侵寇)할 때마다 변방의 방비에 큰 공을 세우자세종이 9년 만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를 만나보게 하여 그를 위로하였다얼마 동안 고향인 양산에서 한가로운 날을 보내다가 143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영북진절제사(寧北鎭節制使)를 거쳐, 1436년 회령절제사가 되었다같은해 판경흥도호부사로 전직하면서 함길도도절제사인 김종서(金宗瑞)와 같이 4진의 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2년 만에 그 방위와 경영의 포치(布置)를 완성하였다.
그는 용감하고 위엄이 있어 야인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한편으로는 청렴결백하여 우리 백성이나 야인의 물건에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한다그는 동북변경의 개척 초창기에 제일선에 배치되어 야인을 제압하고 복종시키는 데 절대적인 공로가 있었으나, 1435년을 고비로 4진의 안정을 얻게 되면서부터 대여진정책이 유화 내지 동화로 기울어졌는데마침 1438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경원부사의 직을 사임 함경도를 떠났다.
그뒤 100일 만에 다시 경상도·평안도 도절제사 등을 맡았다.
1449년 20여년간 오로지 4군의 설치와 6진의 개척 및 여진의 정복·회유·복속에 기여한 공으로 지중추원사에 승진하였고, 1450(문종 즉위년)함길도도절제사로 부임, 10년 만에 다시 북방의 방위에 임하였다.
1453(단종 1) 계유정란으로 김종서의 심복이라 하여 파직당하자후임자인 박호문(朴好問)을 죽인 뒤 병마를 이끌고 종성에 가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자칭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의 후원을 얻어 반란을 일으켰다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 머물러 밤을 새울 때 종성판관 정종(鄭種)·이행검(李行儉등의 습격을 받아 그 아들 3명과 함께 피살되었다.
이 난은 1402년 11월의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이어 두번째로 일어난 큰 반란으로서후일 이시애(李施愛)의 난의 선구가 되었다.
특히사대사상에 젖었던 당시의 조선인으로서 황제를 칭한 점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이다.
 
   
 
장영실(蔣英實)  생몰년 미상.
 
조선 세종 때의 과학기술자중국계 귀화인과 기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아산(牙山)의 명신으로만 기재되어 있다.
동래현의 관노로 있을 때 그의 재주가 세종에게 인정되어 중국에 파견천문기기연구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귀국하자 면천되고 1423(세종 5) 상의원별좌(尙衣院別坐)에 임명되어 궁중기술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등용된 그 다음해인 1424년에 물시계를 완성하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중국의 체재를 참고하여 청동으로 경점(更點)의 기()를 부어 만들었다고 씌어 있다그 공로로 정5품의 행사직(行司直)으로 승진하였다.
1432년에 경복궁과 서운관 두 곳에 설치할 많은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를 만드는 계획이 착수되었는데이때부터 이천(#46)과 함께 천문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하였다.
먼저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의 두 기본관측기계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 완성된 천문관측의기에는 대간의·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규표(圭表등이 있다.
그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自擊漏)의 제작이었다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15)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시보장치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물시계를 비교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를 만든 것이었다.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하였고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다시 천상시계와 자동물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어냈다.
1438년에 만들어져 흠경각(欽敬閣)에 설치된 이 옥루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모든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룩한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이천 등과 함께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조선시대의 활판인쇄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
 
 
 
 
정인지(鄭麟趾) 1396-1478(태조5-성종9)
 
1. 가계와 태종·문종대의 관력 및 업적
 
아버지는 석성현감(石城縣監증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흥인(興仁)이며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권우(權遇)의 문인이다.
1411(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예빈시주부(禮賓寺注簿)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예문관부교리에 개수(改授)되고이어 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418(세종 즉위년) 8월 병조좌랑을 거쳐 1421(세종 3)에는 상왕(上王:태종)의 “대임을 맡길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는 요청과 함께 병조정랑에 승직되고이후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면서 응교에 제수되고다음해 직전(直殿)에 승진되었다.
142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시 직제학에 승진곧 세자시강원좌필선을 겸대한 뒤 다음해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또다시 부제학에 승진되었다.
1430년 10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면서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다음해에는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1432년 예문관제학 겸 동지춘추관사(藝文館提學兼同知春秋館事), 1433년 2월 인수부윤(仁壽府尹), 같은해 6월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434년 4월 이조좌참판에 발탁되고같은해 10월 다시 예문관제학을 거쳐 1435년 6월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다음해 9월 부상으로 사직하였다.
1437년 세종의 문운육성에 대한 관심과 함께 기복(起復)되어 예문관제학에 서용되고, 1439년에는 집현전제학이 된 뒤 곧 형조참판으로 옮겼다가 1440년 5월 정연(鄭淵)의 천거를 받아 형조판서에 발탁되었다.
같은해 11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2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사륜요집 絲綸要集》을 편찬하고이듬해 지중추원사로 당시에 찬·반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貢法)을 극력 주장하여 그 실시를 확정하는 데 공헌하였으며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의 제조(提調및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파견되어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전품(田品)을 분정(分定)하는 등 내·외의 전제사를 주관하였다.
1445년 1월 우참찬이 되고그해 《치평요람 治平要覽》을 찬진하였다다음해 예조판서를 거쳐 1447년에는 이조판서가 된 뒤 지춘추관사가 되어 《태조실록》을 증수(增修)하는 데 참여하였으며한편 전라도에 파견되어 전품을 다시 상정하였다.
1449년 공조판서를 거쳐 1450(문종 즉위년)좌참찬이 되고, 1451년 김종서(金宗瑞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改撰)하였고이듬해 김종서 등과 함께 다시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다.
 
2. 단종·세조대의 관력 및 업적
 
1455(세조 1) 세조의 즉위와 함께 영의정부사에 승진되고세자사(世子師)를 예겸(例兼)한 뒤 세조 즉위에 끼친 공로로 다시 좌익공신(佐翼功臣)3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 공신연(功臣宴)을 베풀 때 세조의 불서간행을 반대한 일로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불경죄로 논죄되면서 고신(告身)이 몰수되었으나곧 고신을 환급받고 하동부원군에 제수되었다.
1459년 취중에 직간한 일이 국왕에게 무례를 범하였다고 논죄되면서 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종편(從便)되었으나 그해에 다시 소환되어 고신을 환급받고그 이듬해에 하동부원군에 복직되었다.
1465년 나이 70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궤장(#02)을 하사받았으며다음해 관제개혁으로 인한 부원군호의 군호로의 개칭과 함께 하동군(河東君)에 개봉(改封)되었다.
 
3. 예종·성종대의 관력
 
1468(예종 즉위년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로로 다시 익대공신(翊戴功臣)3등에 책록되었으며, 1470(성종 1) 부원군호의 복구와 함께 하동부원군에 개봉되고 경연영사(經筵領事)를 겸대하였다.
같은해 1467(세조 13)에 설치된 국왕의 측근에서 원상에 임명되어 국정의 논의와 처결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1471년 성종 즉위에 끼친 공로로 또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8년 성종의 호학 및 당시의 문운융성과 함께 연덕(年德)을 구비하고 명망이 높은 유학자를 삼로오갱(三老五更:王師)으로 봉하여 문풍을 더한층 진작시키자는 논의와 함께 삼로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 진봉식의 거행 직전에 대간의 “한미한 가문에서 기신하였으나 식화(殖貨)에 전념하여 치부하였으니 불가하다.”라는 반대가 있었다.
비록 한명회(韓明澮등의 대신이 “정인지의 식화는 장리(長利)에 불과하였으니 큰 흠이 될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실시를 주장하였지만결국은 진봉되지 못하였으며같은해에 하동부원군으로 죽었다.
 
4. 공로
 
그는 유학과 전고(典故)에 밝아 조선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고비록 큰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하였으나 세종∼문종대에는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문한(文翰)을 관장하고 역사·천문·역법·아악을 정리하였고한글창제에도 참여하는 등 문풍육성과 제도정비에 기여하였다.
단종∼성종초에는 학덕을 구비한 원로대신으로서의 풍도를 지킴으로써 빈번한 정변과 어린 국왕의 즉위로 인한 경직되고 혼란된 정치분위기와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는 《학역재집》이 있다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김문기(金文起)  1399-1456(정종1-세조2)]
 
 조선 초기의 문신본관은 김녕(金寧).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출신아버지는 관()이다.
1426(세종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에 예문관검열, 1436년 10월에 사간원좌헌납이 되었다.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으나,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음이 인정되어서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를 마치라는 유시에 따라 이를 수행하는 공을 세웠다.
그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등이 주동이 되어 단종복위를 계획하다가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그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그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들어 ‘사육신’이라 하였는데이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리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뒤, 1691(숙종 17)에는 국가에서 공인하여 육신을 복관시키고뒤따라 1731(영조 7)에는 김문기도 복관되었으며, 1757년에는 충의(忠毅)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뒤 1791(정조 15)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그는 삼중신(三重臣:閔伸·趙克寬·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이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하여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문적을 널리 고증하게 하여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 되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가 내려진 것이다그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 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경상북도 금릉군 지례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그런데 1977년 7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한 끝에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顯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이 결의에 따라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역에 그의 가묘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문제를 놓고 일부학자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져 신문지상에 그들의 논설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최만리(崔萬理) ?-1445(세종27)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고려시대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충(#01)의 12대손이며 하()의 아들이다.
1419(세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 이듬해 집현전박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집현전학사를 거쳐 그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에까지 올랐다개괄적인 관력을 보면, 1427년 3월 교리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였고그해 7월에 응교에 올랐으며, 1437년 직제학, 1438년 부제학, 1439년 강원도관찰사, 1440년 집현전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그뒤 1444년에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문제로 즉일 친국을 받고 다음날 석방복직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으로서 일관하였으며 진퇴가 뚜렷하였다그는 집현전의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그 중 불교배척 상소가 6첨사원(詹事院설치 반대상소가 3회로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진사시에서 시()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한 것과 사직상소 및 한글반대상소가 있다.
불교배척 상소의 대부분은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 중수 및 경찬회(慶讚會)의 혁파를 청하는 것이었고첨사원 설치를 반대한 상소는 세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에게 섭정시키려 하므로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이었다그는 훈민정음이 완성될 때까지 세종의 뜻을 잘 받들어 반대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비밀리에 궁중의 의사청(議事廳)에 최항(崔恒이하 집현전 소장학사와 동궁·진평대군(晋平大君등을 참가시켜 원나라의 웅충(熊忠)이 엮은 《고금운회거요 古今韻會擧要》의 자음을 한글로 달아 일대 자음의 개변운동을 하려 하였다세종은 당시 우리나라의 한자음이 체계없이 사용되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중국체계에 맞도록 새 운서를 편찬하여 당시 한자음을 개혁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집현전의 중진학자들과 함께 상소문을 올렸는데이것이 유명한 한글 반대 상소문이었다이 상소문은 여러 학사의 합작으로 보이며조목에 따라서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의는 세종의 한자음 개혁에 반대한 것이 된다세종의 최만리에 대한 친국내용을 보면“내가 만일 이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한 것을 보면 최만리 등의 상소는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사업은 뒤에 《동국정운》의 사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홍무정운 洪武正韻》이 실패작임과 같이 우리의 《동국정운》도 그 한자음이 실시될 수 없어 실패작이라 한다면그의 《고금운회거요》 번역사업의 반대상소 견해는 그러한 의미에서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소문의 내용이 사대주의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당시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4세기의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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