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인물

제목1300년대의 주요인물2021-09-1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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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화(權仲和) 1322-1408(충숙왕9-태종8)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의료인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용부(容夫), 호는 동고(東皐). 아버지는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한공(漢功)이다.
1353(공민왕 2)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우·좌부대언(右左副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담당하였다.
1377(우왕 3)에는 정당문학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했는데문하에서 이름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뒤 삼사좌사(三司左使)·문하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1390(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삼사좌사로 다시 등용되고이어 문하찬성사·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고려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은사로 갔다가 왕조가 바뀐 직후 돌아왔다.
1393(태조 2)에 삼사좌복야로서 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를 겸임하면서새 도읍지 한양의 종묘·사직·궁전·조시(朝市)의 형세도(形勢圖)를 올렸다.
그뒤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며, 1396년에는 사은진표사(謝恩進表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8년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졌다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는데평생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한편의약에 정통하여 조선초에 고려말경에 전해온 《삼화자향약방 三和子鄕藥方》이 너무 간요하다 하여 서찬(徐贊등과 함께 다시 《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을 편집하였으며, 1399(정종 1)에 조준(趙浚)·김사형(金士衡)의 명령에 따라 한상경(韓尙敬)과 함께 《신편집성마우의방 新編集成馬牛醫方》을 새로 편집하기도 하였다.
또한고사(故事)를 비롯하여 의약·지리·복서(卜筮)에 통달하고전서(篆書)에도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와 개성에 있는 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師碑)의 전액(篆額)의 글씨를 남겼다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이지란(李之蘭) 13311402(충혜왕1-태종2)
 
고려말 조선초의 장군·공신본관은 청해(靑海). 초성은 퉁(#01),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남송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아라부카(阿羅不花)의 아들이며화영(和英)의 아버지이다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맺었고출신지는 북청(北靑:靑海)이다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조카딸인 혜안택주 윤씨(惠安宅主尹氏)이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었으며, 1371(공민왕 20)에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하여 북청에서 거주하며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1380(우왕 6)이성계의 편장으로서 황산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무찔렀으며(황산대첩), 1385년 이성계의 휘하로 왜구를 함주에서 격파하여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1388년 위화도(威化島)의 회군에 참가하여 1390(공양왕 2)밀직사가 되었다같은해 서해도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임명되었다.
1392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여진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 의하여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
조선에 와서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 공훈으로 1392(태조 1)에는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보조좌명개국일등공신(補祚佐命開國一等功臣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1393년 경상도절제사로 왜구방어를 담당하였고이어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갑주·공주(孔州)의 성을 축조하였다.
위화도의 회군에 참가한 공훈으로 회군일등공신(回軍一等功臣)에 봉해졌다.
1393년 동북면도안무사, 1397년 동북면도병마사,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판형조사의흥삼군부사중군절제사(判刑曹事義興三軍府事中軍節制使)가 되었다.
은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2등에 봉해지고, 1400(정종 2)2차 왕자의 난 때에도 공을 세워 1401(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3등에 봉해졌다태조가 영흥으로 은퇴하자 그도 풍양(豊壤)에 은거하면서 남정·북벌에서 많은 살상을 한 것을 크게 뉘우쳐 불교에 귀의하였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묘소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읍 안곡리에 있다시호는 양렬(襄烈)이다.
 
 
 
 
김사형(金士衡) 1333-1407(충혜왕2-태종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안동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46)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공양왕 2)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이 되고 이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승진하였다.
1390년 윤이(#23)·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贊成事)정몽주와 대결하고 서로 탄핵하였다삼사좌사(三司左使)·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여러 장상들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문하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응양상장군(門下侍郎贊成事兼判尙瑞司事兼兵曹典書鷹揚上將軍)에 올랐다.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그뒤 좌정승을 지냈고 1398(태조 7) 1차왕자난 때백관을 거느리고 대궐에 나아가 적장(嫡長)을 후사로 세울 것을 요청하여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책봉되었다.
1399(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 다시 좌정승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를 지낸 다음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적을 가지지 않았다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성석린(成石璘) 13381423(충숙왕복7-세종5)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아버지는 부원군 여완(汝完)이다.
1357(공민왕 6)에 과거에 급제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았으며승진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로 하여금 항상 글을 짓게 하였으며예문관(藝文館)의 공봉(供奉), 삼사(三司)의 도사(都事), 전의시(典儀寺)의 주부(注簿등을 지냈다.
공민왕도 그를 중용하여차자방(箚子房:뒤의 尙瑞院)의 필도치(#62)로 등용하였으며다시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지인상서(知印尙書)·예부총랑(禮部摠郎등을 역임하였는데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목사가 되었으나이내 내직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삼사좌윤(三司左尹)·밀직사 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지신사(知申事)·제학(提學등을 지냈다.
1380(우왕 6) 여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수(元帥)가 되고 양백연(楊伯淵)이 그의 부장(副將)이 되어 이를 맞아 싸웠다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여러 장수가 이에 따라 적을 무찔렀다.
그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그도 함안에 유배되었다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바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외직으로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가 되어 주·군에 의창(義倉)의 설치를 건의하자조정에서 이를 채택하여 모든 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다시 내직으로 문하부평리(門下府評理)와 대사헌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錄券)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하여졌다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가 되었고, 1392(태조 1)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를 거쳐 한성부판사를 지냈으며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3토지 30결을 하사받았다.
정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도절제사(都節制使)·평양부윤을 지내고내직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고익대공신(翊戴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태종이 즉위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03(태종 3) 우의정,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1415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쉬니 궤장(#02)이 하사되었다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에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무니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는데성석린은 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쉬는 곳에는 항상 한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하였다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조반(#21) 1341-1401(충혜왕복2-태종1)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본관은 배천(白川).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은천군 하()의 손자로호군 세경(世卿)의 아들이며어머니는 찬성사 양백연(楊伯淵)의 딸이다.
12세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매부인 단평장(段平章)의 집에 있으면서 한문과 몽고어를 배워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의 인정을 받아 중서성역사(中書省譯史)가 되었다.
1368(공민왕 17)아버지가 늙어 환국하였다.
1382(우왕 8)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하정사 겸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하였고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
1385년에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서 시호와 승습을 청하고 돌아왔다.
이때 조정에서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廉興邦)의 종 이광(李光)이 자기 땅을 빼앗자 이광을 죽였다이에 염흥방에 의하여 투옥되었으나이 일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여 최영(崔瑩)과 사전협의를 한 우왕의 명으로 조반은 석방되고 당시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林堅味)·염흥방 일당이 처형되는 무진피화(戊辰被禍正月之誅라고도 함.)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뒤 동지밀직사사·개성윤이 되었다.
1389(공양왕 1) 순안군(順安君왕방(王昉)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왕의 즉위를 알렸으며이때 윤이(#23)·이초(李初등의 본국에 대한 무고 사실을 명황제에게 잘 설명하여 의심을 풀게 하였다다음해 돌아와 윤이와 이초의 사건을 보고하여 이색(李穡등 수십명이 피해를 당하는 옥사를 일으켰다.
1391년 공전(公田)을 함부로 빼앗아 성헌(省憲)의 탄핵을 받고 관직이 삭탈되어 죽림(竹林)으로 귀양갔으나 곧 풀려나, 1392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조선 개국 후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고 복흥군(復興君)에 봉하여졌으며지중추원사가 되었다.
또한백관(百官)의 장문(狀文)을 가지고 조선 개국의 사실을 알리러 명나라에 갔다가 석달 만에 돌아왔다.
1394(태조 3)6월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명나라에 표문(表文)을 올렸고, 11월에는 이방원을 수행하여 재차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5년 판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가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를 거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다.
1396년과 1397년에도 하정사로서 명나라에 갔으나 등주(登州)에서 제왕(齊王)의 방해로 다음해에 돌아왔다시호는 숙위(肅魏)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충혜왕복위3-태조7)
 
봉화호장 공미(公美)의 고손자로형부상서 운경(云敬)의 맏아들이다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이곡의 아들 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윤소종(尹紹宗등과 교유하였는데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하여 동료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공민왕 9)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동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校注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에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강론하였으며이듬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우왕 1)에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등의 친원배명정책에 반대하여 북원(北元)사신을 맞이하는 문제로 권신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會津縣관하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되었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三角山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향인(鄕人)재상이 서재를 철거하여 부평으로 이사하였고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재상이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재옥(齋屋)을 철거하여 다시 김포로 이사하였다.
 
1383년에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찾아 함주 막사에 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1384년에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서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음해 성균좨주·지제교·남양부사를 역임하고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1388년 6월에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趙浚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조민수(曺敏修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389년에 이성계·심덕부(沈德符)·지용기(池湧奇)·정몽주·설장수(#03長壽)·성석린(成石璘)·조준·박위(#32) 등과 모의하여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을 내걸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中典功臣)에 봉해지고삼사우사(三司右使)·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낸 뒤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윤이(#23)·이초(李初)의 무고사건을 해결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이 되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三軍都摠制府右軍摠制使)가 되어 병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구세력의 탄핵으로 봉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봄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중에 낙마한 사건을 계기로 고려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김진양(金震陽)·서견(徐甄등의 탄핵을 받아 보주(甫州:지금의 예천)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유는 “가풍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不明)하다.”든가“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에 몰래 앉아 무수한 죄를 지었다.”는 것으로특히 정도전의 신분적 약점이 많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일파에 의하여 격살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나와같은해 7월에 조준·남은(南誾등 50여명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왕조 개국 후 개국1등공신으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判戶曹事)·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겸의흥친군위절제사(兼義興親軍衛節制使등의 요직을 겸임하여 정권과 병권을 한몸에 안았다같은해 겨울에 사은 겸 정조사로서 두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3(태조 2)에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蒙金尺〉·〈수보록 受寶#15〉 등 3편의 악사(樂詞)를 지어 바쳐 이성계의 창업을 찬송하였으며문하시랑찬성사로서 동북면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 개척에도 힘을 기울였다.
1394년 정월에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로서 경상·전라·양광삼도도총제사(慶尙全羅楊廣三道都摠制使)가 되어 재정 및 지방병권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같은해 6월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을 찬진하고 이해에 《심기리 心氣理》 3편을 저술하였으며한양천도를 계획실천하여 수도 경영에 주동적으로 참획하였다.
1395년에 정총(鄭摠등과 더불어 《고려국사 高麗國史》 37권을 찬진하고《감사요약 監司要約》을 저술하여 전라도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었으며《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저술하여 재상·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밝혔다.
1396년에 이른바 표전문(表箋文)문제가 일어나 명나라가 이를 트집삼아 내정을 간섭하자전부터 추진해오던 요동(遼東)수복운동에 박차를 가하여 군량미확보진법훈련(陣法訓鍊), 사병혁파를 적극 추진하였다.
1397년에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여 군도(君道)를 밝히고, 12월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군현의 지계(地界)를 획정하고 성보(城堡)를 수선하며 참호(站戶)를 설치하였다.
1398년에 권근(權近)과 더불어 성균관제조가 되어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시키고여름에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9월에 진법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 수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이방원의 기습을 받아 희생되었다.
죄명은 세자 방석(芳碩)에 당부(黨附)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다는 것이었다이를 공소난(恭昭難)·무인난(戊寅難혹은 제1차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그는 문인이면서 동시에 무()를 겸비하였고성격이 호방하여 혁명가적 소질을 지녔으며천자(天資)가 총민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의론(議論)이 정연하였다 한다.
그는 개국과정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한()나라 장량(張良)에 비유하면서한고조(漢高祖:劉邦)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고 하면서 실질적인 개국의 주역은 자신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노약노비(老弱奴婢)약간명을 상속받았을 뿐이며오랫동안 유배·유랑 생활을 보내면서 곤궁에 시달렸다더욱이그의 부계혈통은 향리(鄕吏)의 후예로서 아버지 때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관료의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을 뿐이며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연안차씨(延安車氏공윤(公胤)의 외예얼속(外裔#02)이었으며특히 모계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이러한 혈통 때문에 구가세족이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성리학자들로부터 백안시당하는 경우가 많았고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3노가(奴家)의 하나로 세인의 평을 얻게 되었다그와 건국사업을 함께 한 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등 개국공신과 태종 때의 중신 하륜(河崙)역시 연안차씨의 외척 얼손(#02)으로서조선왕조 개국에는 신분적 하자가 큰 인물들이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청·장년의 시기를 맞았던 고려 말기는 밖으로 왜구·홍건적의 침구로 국내가 어수선하였고안으로는 구가세족의 횡포로 정치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곤핍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9년간의 시련에 찬 유배·유랑 생활은 그로 하여금 애국적이며 애민적인 의식을 깊게 만들었으며그의 역성혁명운동은 이러한 개혁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의 개혁운동이나 그에 수반된 왕조건국사업은 단순한 정치적 실천운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제도로서 정착시켜 사상·제도상으로 조선왕조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발견된다.
그는 《학자지남도 學者指南圖》·《심문천답 心問天答》(1375)·《심기리》(1394)·《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하여 분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공격하고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여 유교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그가 성리학을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해서 주자학의 전 체계를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주자가례 朱子家禮》라든가《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그리고 주자학에서 중요한 사회정책으로 간주되는 사창제(社倉制)·향약(鄕約등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또 주자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단시하는 한당(漢唐)의 공리적 사상(功利的思想)이나 부국강병에 유용한 제도·문물에 대하여 포용적이었다.
그것은 주자학만으로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인 부국강병 달성이나 천민·서얼의 인심 수람무인세력의 지위 안정무전농민(無田農民)의 구제 등 새 왕조개창에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층신앙(基層信仰)으로 굳어진 불교·도교·참설(讖說등을 부분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따라서그의 사상체계는 기본적으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음성적으로 이단을 포용하는 절충성을 띠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의 경세론(經世論)은 《조선경국전》(1394)·《경제문감》(1395)·《경제문감별집》 등에 제시되어 있다.
특히조선왕조의 통치규범을 종합적으로 제시한 《조선경국전》은 《주례 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권력체계와 과거제도병농일치적인 군사제도의 정신을 빌려오고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府兵制)·군현제(郡縣制守令制)·부세제(賦稅制)·서리제(胥吏制)의 장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명나라로부터는 《대명률 大明律》을 빌려왔다《경제문감》은 재상·감사·대간·수령·무관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경제문감별집》에서는 군주의 도리를 밝혔다.
그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정치제도는 재상을 최고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지배체제이며그 통치권이 백성을 위하여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을 강조하였다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교체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긍정하였으며실제로 혁명이론에 입각하여 왕조교체를 수행하였다.
그는 사·농·공·상의 직업분화를 긍정하고사를 지배층으로 생각하였으나사의 직업은 도덕가·철학자·기술학자·교육자·무인 등의 역할을 겸비해야 하고 사에서 능력위주로 관리가 충원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적서(嫡庶)나 양천(良賤)과 같이 혈통에 의한 신분차별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주목된다.
그는 여말에 나라가 가난하고 민생이 피폐하였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토지균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책으로서 민구수(民口數)에 따른 토지재분배와 공전제(公田制및 10분의 1세의 확립()·상()·염()·광()·산장(山場)·수량(水梁)의 국가경영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그의 경세론은 자작농의 광범한 창출과 산업의 공영을 통해서 부국강병을 달성하고능력에 토대를 둔 사 위주의 관료정치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그의 개혁안은 상당부분이 법제로서 제도화되었지만 그 모두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저서로는 위에 적은 것 이외에 경세(經世)에 관한 것으로 《경제의론 經濟議論》·《감사요약 監司要約》이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고려 역사를 편년체로 엮은 《고려국사》가 있다이 책은 뒤에 김종서(金宗瑞등이 찬한 《고려사절요》의 모체가 되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이밖에 병법에 관한 것으로 《팔진36변도보 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 五行陣出奇圖》·《강무도 講武圖》·《진법 陣法》 등이 있고의서(醫書)로서 《진맥도결 #33脈圖訣》역산서(曆算書)로서 《태을72국도 太乙七十二局圖》와 《상명태을제산법 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다.
그는 또 많은 악사(樂詞)를 지어 〈문덕곡〉·〈몽금척〉·〈수보록〉·〈납씨곡 納氏曲〉·〈정동방곡 靖東方曲〉 등을 남겼으며회진현의 유배시절과 삼각산·부평·김포·영주 등지에서의 방랑시절에 쓴 수많은 시문들이 지금 《삼봉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금남잡영 錦南雜詠》과 《금남잡제 錦南雜題》는 특히 유배시절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그의 시련기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는 동시에당시의 부곡(部曲)의 실상을 이해하는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삼봉집》은 1397(태조 6)에 시간(始刊)되고, 1487(성종 18)에 중간되었으며, 1791(정조 15)에 누락된 것을 수습하여 재간하였는데이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조준(趙浚) 1346-1405(충목왕2-태종5)
 
문하시중 인규(仁規)의 증손으로판도판서 덕유(德裕)의 아들이다아들 대림(大臨)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함으로써 태종과는 사돈이 된다.
원래 평양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인규의 대에 이르러 몽고어를 잘하여 역관(譯官)으로서 출세충선왕의 국구(國舅)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으나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항상 개탄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1371(공민왕 20)책을 끼고 수덕궁(壽德宮)앞을 지나가자왕이 보고 기특히 여겨 마배행수(馬陪行首)에 보하였다.
1374(우왕 즉위년)문과에 급제하고, 1376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으로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겸하고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뽑혔는데정치를 잘하여 이민(吏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어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1382년 병마도통사 최영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토벌에 소극적이던 도순문사를 징벌하고 병마사를 참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1383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뒤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이어 도검찰사(都檢察使)로서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평하여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오른 뒤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고윤소종(尹紹宗)·허금(許錦)·조인옥(趙仁沃)·유원정(柳爰廷)·정지(鄭地)·백군녕(白君寧등과 교우를 맺으면서 우왕의 폐위와 왕씨의 부흥을 꾀하였다.
그가 이성계(李成桂)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 무렵으로서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중망(重望)이 있는 조준을 불러 일을 논의하고크게 기뼈하여 지밀직사사 겸 대사헌(知密直司事兼大司憲)에 발탁하고 크고 작은 일을 일일이 자문하였다그는 크게 감격하여아는 것을 모두 이성계에게 이야기하여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해 이성계·정도전(鄭道傳등과 전제개혁을 협의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찬의를 얻고같은해 7월 처음으로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상소하였으며다음해 8월과 12월에 잇달아 전제개혁소를 올려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변안열(邊安烈)·권근(權近)·유백유(柳伯濡등 전제개혁 반대파와 대립하였다.
그는 또 관제·신분·국방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을 주장하고지문하부사 겸 대사헌(知門下府事兼大司憲)으로 추충여절좌명공신(推忠勵節佐命功臣)이 되었다이어 조민수(曺敏修)·이인임(李仁任등 권신을 탄핵하고 창왕을 폐위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참여하여 이성계·정도전 등과 더불어 중흥공신에 서훈되었다.
1389(공양왕 1)전제개혁을 단행하고평리 겸 판상서시사(評理兼判尙瑞寺事)에 올라 전선(銓選)을 주관하였고다음해 찬성사로 승진하여 1391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2년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정도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정몽주가 죽자 풀려나와 찬성사·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으며이해 7월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平壤伯)에 피봉되고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개국 후 정치적 실권이 점차 정도전에게 집중되자그와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세자책봉에 대하여 정도전은 방석(芳碩)을 지지하였으나조준은 이를 반대하여 개국에 공이 많은 방원(芳遠)을 지지하였고문하좌시중·오도도통사(五道都統使)가 되면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병권을 장악하고요동공벌을 계획하던 정도전과 대립하여 공요운동(攻遼運動)을 반대하였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자연히 이방원과 가까워져서 그와 친교가 두터웠고평소 방원에게 《대학연의 大學衍義》를 주고 읽기를 권장하였다.
1398(태조 7)1차 왕자의 난(戊寅靖社혹은 鄭道傳亂)때 백관을 이끌고 적장(嫡長)을 후사로 정할 것을 건의하여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피봉되었다.
1400(정종 2)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있으면서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에게 무고되어 한때 투옥되기도 하였으나이방원에 의하여 석방되어, 11월 이방원을 왕으로 옹립하고 좌정승·영의정부사에 승진평양부원군에 진봉되었다.
그는 사학(史學)을 잘하고 경학(經學)과 시문에도 능하였으며문집으로 《송당집》을 남겼다.
한편검상조례사(檢詳條例司)로 하여금 국조의 헌장조례(憲章條例)를 모아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간행하게 하였으니이는 뒤에 《속육전》·《육전등록》 등으로 보완되어 《경국대전》 편찬의 토대가 되었다.
그의 전제개혁안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에 목표를 둔 것으로서1차 상소에서는 녹과전(祿科田)·구분전(口分田)·군전(軍田)·투화전(投化田)·외역전(外役田)·위전(位田)·백정대전(白丁代田)·사사전(寺社田)·역전(驛田)·외록전(外祿田)·공해전(#07등의 설치를 통하여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2·3차의 전제개혁상소에서는 세신거실(世臣居室)이 경기 이외의 외방에까지 사전(私田)을 두려는 움직임을 저지하고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하였다.
1391년 5월에 정하여진 과전법은 그의 개혁안이 토대가 된 것이나구분전·투화전·백정대전에 대한 분급규정(分給規定)이 빠져 있고그 대신 중흥공신전의 세습에 대한 규정이 첨가되었다.
그가 여말에 올린 국정개혁안은 《주례 周禮》에 바탕을 두어 총재(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대간과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며양천신분제(良賤身分制)를 확립하여 국역체제를 강화하고경연과 서연제도를 실시하며학교(향교)제도를 강화하여 사장(詞章)을 폐하고 사서오경을 배우도록 할 것《주자가례 朱子家禮》를 시행할 것의창(義倉)과 상평창(常平倉)·사창(社倉)의 법을 시행할 것향리의 출사(出仕)를 억제할 것환자(宦者)의 정치참여를 막을 것과거시험에 복시제(覆試制)를 시행할 것 등 광범위한 사회개혁안을 포괄하고 있다.
그의 관제 및 사회개혁안은 정도전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많으며정도전의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및 《경제문감 經濟文鑑》 편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시호는 문충(文忠)이며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조인옥(趙仁沃) 1347-1396(총목왕3-태조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군계(君啓). 판도판서(版圖判書()의 아들이며인벽(仁璧)의 아우이다.
시조 지수(之壽)는 중국에서 귀화하여 함경도 용진(龍津)에서 살았으며그의 아들 휘()는 몽고가 쳐들어올 때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투항한 뒤 쌍성총관(雙城摠管)이 되었다그의 아들 양기(良棋)는 총관부원수를 지냈으며그 아들 돈에 이르러 고려에 완전히 귀화하여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작전을 도운 공으로 벼슬이 판서에 이르게 되었다.
형 인벽은 환조(桓祖이자춘(李子春)의 비인 의비최씨(懿妃崔氏)의 소생 정화공주(貞和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므로 이성계(李成桂)의 자부가 되며증조부 휘의 딸은 도조(度祖이춘(李椿)의 둘째부인으로서이성계와 이중으로 인척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음보로 1373(공민왕 22) 산원(散員)이 되고, 1387(우왕 13)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거쳐 이듬해 이성계 휘하에 종군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것을 건의하였다회군 후 최영(崔瑩등 구세력을 숙청하는 데 가담하고남은(南誾등과 모의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으나 이성계의 만류로 중지되고전법판서(典法判書)에 승진하여 회군공신이 되었다.
1389년 이성계·전도전(鄭道傳등과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한 뒤 신진세력의 중심인물로서 척불운동(斥佛運動)과 전제개혁운동에 앞장섰다.
1390(공양왕 2)우대언으로서 정몽주(鄭夢周)일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1392년 이성계의 천거로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이해 정도전 등과 모의하여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개국에 공을 세우고 중추원부사가 되고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1395년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지고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가 병으로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지절(志節)이 있고서사(書史)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사대부들과 교유관계가 깊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유경(柳敬)과 더불어 그에게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진강하였다.
풍채가 위려하고 장중하며 헛된 말을 하지 않고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보이지 않고응대하는 재주가 뛰어나서 명나라 사신이 올 때에는 반드시 접반(接伴)의 일을 담당하였다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시호는 충정(忠靖)이다.
 
 
 
 
박위(朴위)  ?-1398(태조7)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본관은 밀양우달치(迂達赤)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에 올라 왜적을 격퇴하였다.
1388(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최영(崔瑩)을 몰아낸 뒤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전함 100여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적선 300여척을 불태워 크게 이겼다.
뒤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공신이 되었다.
1390(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풍주(豊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고조선초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때 밀성(密城:지금의 밀양)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대간(臺諫)과 형조에서 대역죄로 논의되었으나 태조의 호의로 석방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친 정도전 계열로 1차 왕자의 난 때 당직 장수로 이방원이 궁궐 밖에서 나오라고 부르자 나갔다가 죽음
 
 
하륜(河崙)  1347-1416(충목왕3-태종16)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진주(晋州). 공진(拱辰)의 후예로순흥부사 윤린(允燐)의 아들이다.
1360(공민왕 9)에 국자감시(國子監試), 1365년에는 문과에 각각 합격하였다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제자로, 1367년에 춘추관검열·봉공(奉供)을 거쳐감찰·규정(糾正)이 되었으나 신돈(辛旽)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파직되었다.
그뒤 고공좌랑(考功佐郎)·판도좌랑(版圖佐郎)·교주찰방(交州察訪)·제릉서영(諸陵署令)·지평·전리정랑(典理正郎)·전교부령지제교(典校副令知製敎)·전의부령(典儀副令)·전법총랑(典法摠郎)·보문각직제학·판도총랑(版圖摠郎)·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전리총랑(典理摠郎)·전교영(典校令)·대사성 등의 관직을 거치고, 1380(우왕 6)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 났다.
3년상을 마친 뒤에도 우부대언·우대언·전리판서·밀직제학을 거쳐, 1385년에는 명나라 사신 주탁(周卓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았다.
1388년 최영(崔瑩)이 요동(遼東)을 공격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되었으나 위화도회군 이후로 복관되었다그리고 그해 가을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가 가짜임을 밝혔다가 오히려 광주(光州)·울주 등지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윤이(#23)·이초(李初)의 변이 일어나자 의혹이 풀려 1391(공양왕 3)에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었다가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경기좌도관찰출척사가 되어 부역제도를 개편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신도(新都)를 계룡산으로 정하는 것을 반대하여 중지시킨 바 있으며, 1394(태조 3)에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러나 곧 기복(起復)되어 예문춘추관 학사가 되었는데때마침 명나라와의 표전문(表箋文)시비가 일어나자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鄭道傳)을 보낼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명나라에 들어가 일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여 납득을 시키고 돌아왔다.
그러나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는데그때 항왜(降倭)를 도망치게 했다 하여 수원부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충청도 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이방원(李芳遠)을 적극 지지하여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서 진산군(晋山君)에 피봉되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명나라 태조가 죽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명나라에 가서 정종의 왕위계승을 승인 받아 귀국참찬문하부사·찬성사·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사사·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을 거쳐 진산백(晋山伯)에 봉하여졌다.
이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관제를 개혁하였으며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楮貨)를 유통시키게 하였다.
1402(태종 2)에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로서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명나라 성제(成帝)의 즉위를 축하하고 조선왕조의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1405년에는 좌정승 세자사(世子師)가 되고다음해에는 중시독권관(重試讀券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등 10인을 뽑았다.
그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역임하고 1416년에 70세로 치사(致仕)하여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이 되었다.
그는 태종의 우익으로 인사청탁을 많이 받고 통진 고양포(高陽浦)의 간척지 200여섬지기를 농장으로 착복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공신이라 하여 묵인되었다.
치사한 뒤에도 노구를 이끌고 함경도의 능침(陵寢)을 돌아보던 중 정평군아(定平郡衙)에서 죽었다.
인품이 중후침착대범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호정집 浩亭集》 약간권이 있다태종의 묘정(廟庭)에 봉안되었으며후대에 그를 한나라의 장자방(張子房:張良), 송나라의 치규(稚圭)라 일컫기도 하였다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조온(趙溫) 1347-117(충목왕3-태종1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한양(漢陽). 판서 돈()의 손자로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인벽(仁璧)의 아들이며어머니는 환조(桓祖:李成桂의 아버지인 子春)의 딸이다.
그의 시조 지수(之壽)는 중국에서 귀화하여 함경도 용진(龍津)에서 살았으며지수의 아들 휘()는 몽고가 침입할 때 반란을 일으켜 몽고에 투항한 뒤 쌍성총관(雙城摠管)이 되었고휘의 손자이며 그의 할아버지인 돈에 이르러 고려에 완전히 귀화하여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수복작전을 도운 공으로 벼슬이 판서에 이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외삼촌인 이성계를 유달리 섬겨왔고, 1388(우왕 14)위화도회군 때 이조판서로 회군에 참여하여 회군공신에 책록되었으며밀직부사를 거쳐 1392(공양왕 4)이성계 추대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평양윤(平壤尹)에 임명되고 한천군(漢川君)에 봉하여졌다.
1393(태조 2)서북면도순문사로 수주(隋州)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하였고연의주도(鍊義州道)의 장정들을 군적(軍籍)에 등록시켜 군사력 강화를 꾀하였다.
1398년 제1차왕자의 난에 친군위도진무(親軍衛都鎭撫)로서 이방원(李芳遠)의 집권을 도와 그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2등이 되고중추원사를 거쳐 의흥삼군부좌군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同知節制使)·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를 역임하였다.
1400(정종 2)2차왕자의 난 때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이해 상왕의 명으로 제1차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등을 죽인 죄로 완산부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와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1401년 태종이 즉위하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에 책록되어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이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02년 의정부찬성사·동북면찰리사(東北面察理使)를 지냈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청렴 검소하였다시호는 양절(良節)이다.
조광조의 4대조이다.
 
 
 
 
 
이거이(李居易) 1348(충목왕 4)1412(태종 12).
 
 조선 초기의 문신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낙천(樂天), 호는 청허자(淸虛子).
고려 평장사(平章事공승(公升)의 6대손으로고려말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역임하였다조선왕조가 건국된 뒤 1393(태조 2)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임명되고그뒤 평안도병마도절제사·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참찬문하부사·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출세는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집권한 이후부터이었다그는 왕자의 난 직후에 책봉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올랐으며또한 태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되었다사실 그는 조선왕조의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의 아들 저()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장녀 경신공주(慶愼公主)와 혼인하였으며또 다른 아들 백강(伯剛)은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혼인하였다이러한 특수한 관계가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도 그의 정치적 진출을 쉽게 하였으며나아가 태종의 집권 이후에도 그가 공신이 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종이 재위할 때 시행된 사병혁파(私兵革罷조처에 대하여 크게 불만을 토로한 것이 연유가 되어 한때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다이후 1402(태종 2) 좌명공신이 되고 또한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승진되었다.
이후에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어서는 우정승을 거쳐영의정의 지위에까지 올랐다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심효생(沈孝生) 1349-1398(충정왕1-태조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부유(富有). 전주출신지금주사(知錦州事인립(仁立)의 아들이며태조의 세자인 방석(芳碩)의 장인이다.
1380(우왕 6)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1383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고려말 이성계(李成桂)에게 귀의하면서부터 점차 현직(顯職)에 올라 1391(공양왕 3)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성계의 휘하에서 문하사인(門下舍人)이 되었고조선왕조 개창 직전인 1392년 6월에 사헌부장령이 되었다같은해 7월에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3등에 올랐으며사헌중승(司憲中丞)이 되고이어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거쳐 중추부사(中樞副使)가 되었다.
1394(태조 3)에는 대장군(大將軍)과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각각 겸하여 왕화(王和)와 왕거(#21)를 안동옥(安東獄)에 연계(連繫)하고거제도에서 왕우(王瑀)부자의 제사를 지내는 등 고려 왕족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같은해 10월에는 딸이 세자 방석의 빈()이 되면서 이조전서(吏曹典書)에 올랐고아내인 유씨(柳氏)는 정경옹주(貞慶翁主)에 봉해졌다.
이듬해에는 중추원학사가 되었으며, 1397년에는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등과 함께 군사권을 장악하여 공료정책(攻遼政策)을 추진하기도 하였다같은해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태조의 서경궁(西京宮)경영계획을 반대하여 그치게 하였다.
그뒤 예문관대제학이 되고부성군(富城君)에 봉해졌다.
1398년 8월 무인정사(1차 왕자의 난)때 정도전·남은 등과 함께 세자 방석파로 지목되어 방원(芳遠)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그는 특히 정교한 병기의 제조에 능하였다고 한다.
 
 
  
 
 
   
 
곽충보(郭忠輔) ?1403(태종 3)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관본관은 청주.
1383(우왕 9)10월에 병마사로서 도원수 이을진(李乙珍), 부원수 권현룡(權玄龍)과 함께 동산현(洞山縣)에 내침한 왜구를 쳐서 20여명을 베고 말 72필을 노획하였다이 공으로 왕으로부터 백금 50냥을 하사받았으며다음해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올랐다.
그뒤 이성계(李成桂)의 측근으로 활약, 1388년 위화도회군 때에 개성에서 최영(崔瑩)의 군대를 격파하고 궁중으로 들어가 화원(花園)의 팔각전(八角殿)을 포위하여 최영을 붙잡아 유배시.켰으며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9(창왕 1)11월에 당시 황려(黃驪:지금의 驪州)에 유배되어 있던 우왕이 최영의 생질인 김저(金佇)·정득후(鄭得厚)와 함께 이성계의 제거를 모의하여 그에게 이를 부탁하자거짓으로 이를 승낙하고곧 이성계에게 밀고하여 이들을 소탕하였다이로 인하여 우왕은 강릉으로 유배되었으며 폐서인되었다.
1390(공양왕 2) 왜구가 양광도(楊廣道)에 침입하여 음성(陰城)·안성(安城)·죽주(竹州)·괴주(槐州)에 이르자당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윤사덕(尹師德), 자윤(慈尹이방과(李芳果), 밀직부사(密直副使유용생(柳龍生)과 더불어 적을 영주(寧州)의 도고산(道高山)아래에서 격파하여 공을 세웠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개국원종공신이 되고이듬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장사길(張思吉)과 함께 문화현(文化縣)·영녕현(永寧縣)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여 공을 세웠다.
1399(정종 1)에 그의 아들 승우(承祐)와 함께 사사로운 감정으로 황문(黃文등을 처벌한 것이 계기가 되어 탄핵을 받아 청주에 유배되었으나곧 소환되어 1402년에 도총제(都摠制)가 되었다.
 
 
 
 
조사의(趙思義 ?1402). ∼ 태종2
 
조선 초기의 반신(叛臣).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친척으로 1393(태조 2)에 형조의랑이 되고그뒤 순군(巡軍)을 거쳐 1398년 첨절제사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1402(태종 2)에 신덕왕후와 왕세자 방석.(芳碩)의 원수를 갚고태조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구실로 태종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정에서는 박순(朴淳)·송류(宋琉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무마하려 하였으나이들을 죽이고평안도의 덕천·안주 방면을 거쳐 한양으로 내려오던 도중 이천우(李天佑)의 유기(遊騎)100여명을 사로잡고 파죽지세로 내려오다가 고맹주(古孟州)에서 이천우의 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의 진로를 저지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회유책을 써서 반란군을 분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사기를 잃은 부하들이 이산하자 그는 안변으로 후퇴하다가 아들 홍()과 함께 관군에게 체포주살되었다.
 
 
 
 
권근(權近) 1352-1409(공민왕1-태종9)
 
1368(공민왕 17)성균시에 합격하고이듬해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으며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지신사(知申事등을 거쳐, 1388(창왕 1)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등을 뽑았다.
이듬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서 문하평리(門下評理윤승순(尹承順)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을 때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중도에 몰래 뜯어 본 죄로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
그뒤 영해(寧海)·흥해(興海등을 전전하여 유배되던 중, 1390(공양왕 2) 윤이(#23)·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되어 한때 청주 옥에 구금되기도 하였다뒤에 다시 익주(益州)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충주에 우거(寓居)하던 중 조선왕조의 개국을 맞았다.
1393(태조 2)왕의 특별한 부름을 받고 계룡산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가 새 왕조의 창업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올리고왕명으로 정릉(定陵:태조의 아버지 桓祖의 능침)의 비문을 지어바쳤는데이 글들은 모두 후세사람들로부터 유문(#99)·곡필(曲筆)이었다는 평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뒤 새 왕조에 출사(出仕)하여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중추원사 등을 지냈고, 1396년 이른바 표전문제(表箋問題)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그는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였을 뿐 아니라유삼오(劉三吾)·허관(許觀등 명나라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응제시(應製詩)24편을 지어 중국에까지 문명을 크게 떨쳤다.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고정종 때는 정당문학(政堂文學)·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사병제도(私兵制度)의 혁파를 건의단행하게 하였다.
1401(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4등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군되고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4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신효(申曉등을 뽑았고, 1407년에는 최초의 문과 중시(重試)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卞季良등 10인을 뽑았다.
한편왕명을 받아 경서의 구결(口訣)을 저정(著定)하고하륜(河崙등과 《동국사략》을 편찬하였다.
또한유학제조(儒學提調)를 겸임하여 유생교육에 힘쓰고권학사목(勸學事目)을 올려 당시의 여러가지 문교시책을 개정보완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하여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하였고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연구에 정진하여 고려말의 학풍을 일신하고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 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되는바《입학도설》은 뒷날 이황(李滉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하였다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 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하였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 40권을 남겼다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변중량(卞仲良)?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춘당(春堂).
신의위보승산원(神義衛保勝散員()의 증손(曾孫)이며증찬성사(贈贊成事(原 또는 元)의 손자로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옥란(玉蘭)의 아들이며어머니는 전객서부령(典客署副令성공필(成公弼)의 딸이다.
대제학 계량(季良)의 형이며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이복형인 원계(元桂)의 사위이다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를 지냈다.
1392(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이 이제(李齊등과 함께 스승인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미리 눈치채고 이성계에게 문병가는 것을 말렸으나 정몽주는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이성계의 집에 다녀오다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고려(高呂등에게 살해되었다.
1395(태조 4) 전중경(殿中卿)으로 있으면서 병조정랑 이회(#26) 등과 함께정권과 병권이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등에게 다 맡겨진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가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고 전중경의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395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권될 때에 전중경이었다.
1398년 우부승지·우산기상시(右散騎常寺)에 이르렀다이해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의 일파로 몰려 참살되었다시에 능하였고고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춘당유고 春堂遺稿》가 있다.
 
 
 
 
길재(吉再) 1353-1419(공민왕2-세종1)
 
 고려말과 조선초의 학자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원진(元進)이며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11세에 처음으로 냉산(冷山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웠고, 18세에 상산사록(商山司錄박분(朴賁)의 아문(衙門)에 나아가서 《논어》와 《맹자》 등을 읽고 비로소 성리학을 들었다.
아버지를 뵈려고 개경에 이르러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등 여러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며 비로소 학문의 지론(至論)을 듣게 되었다.
1374(공민왕 23)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우왕 9)에는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제6위로 급제하여 그해 가을에 청주목사록(淸州牧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李芳遠)과 한마을에 살면서 서로 오가며 강마(講磨)하여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1387년에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고이듬해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로 승진되었다그당시 공직에 있을 때에는 태학(太學)의 생도들이집에서는 양반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1389(창왕 1)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해 봄에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1391(공양왕 3)에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등의 교수(敎授)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우왕의 부고를 듣고 채과(菜果)와 혜장(醯醬따위를 먹지 않고 3년상을 행하였다.
그가 어머니를 효성을 다하여 봉양하니 아내 신씨(申氏)도 그 뜻을 본받아 옷가지를 팔아서라도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었다군사(郡事정이오(鄭以吾)가 이러한 그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오동동(梧桐洞)의 묵은 밭을 주어서 봉양에 쓰도록 하였다.
1400(정종 2) 가을에 세자 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글을 올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펴니왕은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하여 대접하여 보내주고그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여주었다.
, 1403(태종 3)에는 군사 이양(李楊)이 그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하여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오동동의 전원(田園)으로 옮겨 풍부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되돌려보냈다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항상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고 영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항상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였다오직 도학(道學)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67세로 죽으니후일 세상사람들이 그를 기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향사하였고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었다.
저서로 《야은집》·《야은속집 冶隱續集》이 있고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 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한다시호는 충절(忠節)이다.
 
 
 
 
 남은(南誾) 1354-1398(공민왕3-태조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본관은 의령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을번(乙蕃), 형은 영의정 재(), 아우는 우상절도사(右廂節度使()이다.
1374(공민왕 23) 성균시에 급제, 1380(우왕 6) 사직단직(社稷壇直)이 되고 이어서 삼척지군사(三陟知郡事)가 되어 왜구를 격퇴사복시정에 올랐다정도전(鄭道傳등과 함께 조정의 신진사류로서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중심인물이 되어 구세력에 대립요동정벌을 반대하였다.
1388(우왕 14) 요동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종군하였으며조인옥(趙仁沃등과 이성계에게 회군할 것을 진언회군 뒤에는 이성계의 왕위추대를 계획하는 데 참여하였다.
1389(공양왕 1) 응양군상호군 겸 군부판서(鷹揚軍上護軍兼軍簿判書)가 되고이듬해 밀직부사로 승진하였다.
1391년 정몽주(鄭夢周)에 의해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조박(趙璞)·정도전 등과 함께 탄핵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다.
이듬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정도전·조준·조인옥 등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조선을 개국하게 하였다.
조선 건국 뒤 판중추원사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判中樞院事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가 되고개국공신 1등에 책록의령군(宜寧君)에 봉해졌으며()2백결과 노비 25구를 하사받았다.
1393(태조 2) 경상도에 파견되어 왜구를 방비하고 군적(軍籍)을 새로이 작성하였으며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가 되어 새로운 도읍지인 한양의 종묘와 궁궐 터 등을 정하였다.
1395년 부친상을 당하였으나형인 재와 함께 기복(起復)되어 이듬해 참찬문하부사 겸 판상서사사(參贊門下府事兼判尙瑞司事)가 되었다.
이때 정조사(正朝使)의 표문(表文)이 명나라 태조의 비위를 거슬려 사신 정총(鄭摠)이 살해되고 그 글의 초안자 정도전을 명나라에 압송하도록 압력을 가해오자정도전과 은밀히 의논군량을 비축하고 진도(陣圖)를 작성하는 등 요동정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태조를 도와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적극 간여하였다가, 1398년 제1차왕자의 난 때 정도전·심효생(沈孝生및 아우 지와 함께 살해당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1421(세종 3)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시호는 강무(剛武)이다.
 
 
 
 
정총(鄭摠) 1358-1397(공민왕7-태조6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만석(曼碩), 호는 복재(復齋).
정당문학(政堂文學(:일명 公權)의 아들이며조선개국공신 탁()의 형이다.
1376(우왕 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9세로 춘추관검열이 되고대간·응교·사예를 거쳐 대호군에 이르고, 1389(공양왕 1) 병조판서에 승진되었으며, 1391년 이조판서를 거쳐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에 보낸 표전문(表箋文)은 대부분 그가 지었다조선개국 후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1394(태조 3) 정당문학이 되고다시 예문춘추관태학사가 되어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고려사》를 편찬하고그 서문을 썼다.
1395년 태조 이성계의 고명(誥命및 인신(印信)을 줄 것을 청하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때마침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이 불손하다 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트집잡혀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도중 죽었다.
글씨를 잘 쓰고 문집으로 《복재유고》가 있다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이천우(李天祐)?1417(태종 17).
 
 조선 초기의 무신본관은 전주(全州).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서형(庶兄원계(元桂)의 둘째아들로양우(良祐)의 아우이고()와 백온(伯溫)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풍채가 아름다웠으며그릇이 컸다.
1369(공민왕 18) 동녕부(東寧府)의 수령으로 있다가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여러번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1393(태조 2)년 8월에 강천수(姜天守등 595인과 더불어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1394년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고, 1396년에 강원도조전절제사(江原道助戰節制使)가 되어 왜구방비에 노력하였다.
1398년에 동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이해 정도전난(鄭道傳亂)이 일어나자 방원(芳遠)을 도와형 양우와 더불어 정사공신(定社功臣)2등에 책봉되고 150결의 공신전을 받았으며완산후(完山侯)에 봉해졌다.
1400(정종 2)에 판중추원사를 거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으면서 소위 방간(芳幹)의 난이 일어나자 역시 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2등이 되고 100결의 공신전을 받았다.
1402(태종 2)에 안주도절제사를 지내고다음해 완산군(完山君)에 개봉되었다.
1404년에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를 지내고, 1407년에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이듬해 의정부찬성사에 오르고, 1409년에 병조판서로서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가 신설되자 도진무도총제(都鎭撫都摠制)를 겸하였다.
1410년 판의흥부사에 이어 다시 찬성사가 되고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임하였으며, 1413년 이조판서를 거쳐 서북면도체찰사로 나갔다.
1414년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으로 진봉되고의금부도제조를 지낸 뒤 다시 찬성사에 보직되었다.
사후에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고전라도 영광의 무장영당(畝長影堂)에 제향되었다시호는 양도(襄度)이다.
#1300년대의 주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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