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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남한산성2021-09-19 12:45
작성자 Level 10

【 남한산성의 유래】

오늘날 남한산성의 유래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한산성 일대는 일찍이 백제의 옛터였으며 신라의 주장성(晝長城, 또는 日長城)에서 비롯되었다.

즉 홍경모(洪敬謨)의 <중정남한지, 重訂南漢志)에는 "신라 문무왕 12년 성을 한주(漢州) 동쪽 봉우리에 쌓고 주장성 또는 일장성이라고 불렀다.

석축으로 둘레는 4,360보이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주 동쪽에 석축으로 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주장성으로 불리던 것이 어떻게 남한산성으로 불리워지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역시 <중정남한지>에서

"남한산성은 백제의 옛터이며 신라의 주장성이다. 우리 조선에서 그대로 수리하여 광주부치를 성안으로 옮기고 부윤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유수로 승격하여 수어사를 겸하여 지키도록 하였다.

상고해 보면 남한산은 금일의 일장산이다. 백제의 온조왕이 도읍을 한산 아래로 옮겼다 하였으니

광주의 옛 읍치가 바로 그곳인데 산하라고 말하였으니 성을 쌓고 도읍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개 한산은 그 도읍에서 5리쯤에 있는데, 뒤에 신라가 그 땅을 빼앗아 비로소 성을 고쳐 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땅이 한수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남한이라 한 것이요, 그 뒤 한산군 또는 남한산주라고 부른 것은 모두 한수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라고 한데서 그 연혁을 알 수 있다.

 

그후 이곳은 고구려, 신라에 영토를 빼앗기면서 한산에서 신흥주, 신주정, 남천정, 한사주, 남한산주, 한주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결국 신라 문무왕 때에 주장성을 축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한주는 고려 태조23년(940)에 광주로 고치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의해

태조 4년(1395)에 경기좌도에 속하게 되었고 세조 때에는 전후좌우보 제도에 의거하여 좌보에 편성되어

경사 즉 수도를 방어하는 진보의 역할을 맡는 광주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에 남한산성으로 표기 되었으며, 조선시대 중엽에는 한산 및 일장산은 남한산

또는 청량산으로 불리워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 남한산성 수축 - 임진왜란 이후의 수축론】

  남한산성의 수축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 난 직후의 일이다.

선초에 있어서 관방정책의 기본 방향은 압록강, 두만강의 연변에 4군 6진 등 새로운 영토를 개척함에 따라 진보를 설치하여 북방방어에 큰 비중을 두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고려말에 왜구창궐을 경험한 정부 당국자의 입장에서는 해안지방의 방수를 계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반면에 내륙지방의 경우 소수 입성이나 산성의 개축에 의존하였을 뿐 북방 및 연해진보의 방비보다는 훨씬 소홀히 했다.

그렇기 때문에 산성에 대한 방비의 필요성은 절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쉽게 함락되자 산성축조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경기지방의 행주산성이나 독성산성에서 일본과의 싸움에 승리한 정부는

산성의 효능에 대해 크게 고무되면서 고성이나 옛 성지를 증,개축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이대 사도도체찰사 유성룡은 도성방어책으로서 경기지방의 산성을 수축하도록 주장하면서 광주 이천등의 군사를 취합하여 남한산성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한산성에 승장 유정이 거느린 승군 60여 명을 보내어 산성을 수비케 하고

앞으로의 축성에 대비토록 하였다.

그 후로도 수축문제는 간혹 논의되었으나 왜란후 국가부흥과 민생안정을 도모해야 할 당시의 형편상

남한산성을 수축하는데 있어서 많은 인력을 동원해야 하며 수축후에도 많은 군사가 없으면 지키기 어렵다는 현실론에 떠밀려 논의만 분분한채 남한산성의 수축은 실시되지 못하고 일단락 되었다.

 

【 남한산성 수축 - 인조반정 직후의 수축】

남한산성의 수축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은 인조 때부터이다.

인조반정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서인들이었다.

서인들은 중앙군사력의 강화와 친명배금의 외교노선을 표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총융청, 어영청, 수어청의 설치는 서인정권의 군사력을

장악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외교정책의 변화는 후금을 자극하여 변방의 방어를 소홀히 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남한산성의 수축문제는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세력의 대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남한산성을 적극적으로 수축하고자 주장하게 된 배경은 안으로는 국왕과 도성을 방어하고 밖으로는 유사시 왕실의 피난처로 적합한 보장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조정에서는 서쪽 변방의 방어에 세심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그들이 외교정책이 광해군 시대의 중립외교 노선을

포기하고 숭명배청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이것은 후금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다.

 

첫 번째의 축성계획은 산성의 책임을 맡았던 임회가 이괄의 난으로 피살되어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은 비록 짧은 시간에 진압되었지만 도성의 함락과 왕의 공주파천(1624, 인조 2년 2월 9일)을 초래하여 도성방어 대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었다.

 

남한산성의 수축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 수축을 결정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수축에 대한 정확한 날짜가 기록마다 달라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홍경모의 <중정 남한지>에 의하면,추 7월에 산성을 쌓도록 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청을 두고 광주 등 진(鎭)의 군무를 절제하도록 하니 처음에는 총융사라 칭하고 이서가 임명되어 그 일을 주관하고 남양부사 유림으로 목사를 삼았다.

이서에게 명하여 축성을 감독하게 하니 이서는 널리 명승인 각성과 응성등을 불러 지역을 나누어 맡도록 하였다.

인조 4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장유의 <남한산성기>에 따르면 갑자(인조 2년) 9월에 시작하여 병인(인조 4년) 7월에 완공하니 여장이 1700첩, 대문이 4개 암문이 8개다. 안에는 관청, 창고 등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축성군의 동원

남한산성 수축에 동원된 인력으로써 우선 들수 있는 것이 승군(僧軍)이다. 기록을 통해서 각성 등

전국의 유명한 승려들이 승도들을 모아 지역을 나누어 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각 지방의 군병을 징발하였다. 경기도의 5읍인 양주, 광주, 여주 등의 군병을 남한산성의 입방군(入防軍)으로 편성하였다. 인조 14년(1636) 7월 남한산성의 입방군은 12,7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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