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영일 정씨(迎日鄭氏)2021-09-16 13:29
작성자 Level 10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인 사로(斯盧)의 육부촌(六部村) 중 취산진지촌장 지백호(智伯虎)가
서기32년(신라 유리왕 9) 봄 유리왕(儒理王)으로부터 다른 다섯 촌장들과 함께 사성(賜姓)받을 때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정씨(鄭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은 것이 시초가 되며,
그의 원손(遠孫) 종은(宗殷)이 신라조(新羅朝)에서 간관(諫官)으로 직언(直言)을 하다가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에
유배된 후 후손 의경(宜卿)이 영일(迎日)로 이거(移居)하여 호장(戶長)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에 봉해졌으므로
영일 정씨(迎日鄭氏)로 시적(始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고 소목(昭穆)을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고려(高麗) 예종(睿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인종조(仁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始祖)로 받드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와
감무(監務)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받드는 감무공파(監務公派),
고려 현종 때 동비원부사를 지낸 자피(子皮)를 1세조로 하는 양숙공파(良肅公派)로 갈라져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지주사공파 습명(襲明)의 11세손 몽주(夢周)가 뛰어났다.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이며 반만년 한국사를 대표하는 충신(忠臣)으로 일컬어지는 포은(圃隱) 몽주(夢周)는
1337년(충숙왕 6)에 경북 영천(慶北永川)에서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운관(云瓘)의 아들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아름다운 난초 화분을 안고 화단으로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화분을 깨뜨리는 꿈을
꾸고 사흘 후에 낳았다고 하여 처음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가, 몽란이 아홉 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가 대낮에
물레질을 하다가 고단하여 깜빡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금빛나는 한 마리의 용(龍)이 뜰에 있는 배나무 위에서 배를
따먹으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 나무를 쳐다보니 몽란이 배나무 위에서 용처럼 웃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그의 어머니는 몽(夢)자에다 용(龍)자를 붙여 몽룡(夢龍)이라고 고쳐 불렀다.
몽룡이 18세 되던 어느 날 새벽 그의 아버지 운관(云瓘)의 꿈에 중국(中國)의 옛 현인(賢人) 주공(周公)이 나타나 이르기를
"몽룡은 후세에까지 가문과 명성을 길이 빛내게 할 것이니 소중히 키워라" 하고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주공(周公)의 주(周)자를 따서 이름을 몽주(夢周)로 고쳤다.
몽주는 자라면서 충(忠)과 효(孝)와 의(義)가 남달리 뛰어났다. 그가 20세가 되던 해 아버지를 여위고 3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통곡하였으며 당시의 풍습이 부모의 상복을 겨우 백일밖에 입지 않았는데도 묘소 옆에다 여막(廬幕)을
짓고 산중에서 혼자 3년 동안이나 상식(上食)을 올리며 효(孝)를 다하자 세상 사람들은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했다.

1360년(공민왕 9)에 연달아 삼장(三場 : 초장·중장·종장)에 장원으로 급제했던 몽주는 이듬해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순충윤도동덕좌명공신(純忠倫道同德佐命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라 익양군(益陽君) 충의백(忠義伯)에 이르렀고, 일찍이 신진사류의 한
사람으로 고려의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진충갈력(盡忠竭力)하면서 보수주의자들과 결별하여 배원친명(排元親明 : 원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와 친함)의 노선을 따름으로써 이성계(李成桂) 등과 손을 잡고 국제 정세에 순응하여 고려의 나아갈 길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이성계(李成桂)가 개국위왕(開國爲王)의 뜻을 품게 되자 이에 단연히 결별하여 그의 마지막 일편단충(一片丹忠)까지도
고려를 위해 바치었다. 정도전(鄭道傳)·남 은(南 誾)·조 준(趙 浚) 등을 중심으로 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혁명 모의(革命謀議)가 한창 무르익던 어느 날 밤 몽주는 이성계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문병을 구실로 그를 방문하였는데 이방원(李芳遠 : 이성계의 아들, 후에 태종이 됨)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몽주의 심중을 떠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시(詩) 한 수(首)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如此赤何如 如彼赤何如)
서낭당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城隍堂後垣 頹 赤何如 : 혹은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안 죽으면 어떠리(我輩苦此爲 不死赤何如)
하니, 몽주는 이 시(詩)가 자기의 마음을 떠보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술잔을 보내며 화답하였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야 있고 없고(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것이 유명한〈단심가(丹心歌)〉이다. 몽주의 굳은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안 방원(芳遠)은 그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고 심복 부하인 조영규(趙英珪)를 시켜 군기고(軍器庫)에서 쇠뭉치를 꺼내어 선지교(選地橋) 밑에 숨어 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치라고 하였다. 정몽주는 이 모의 사실을 변중량(卞中良)을 통하여 미리 알고 있었지만 피하지 않고
각오한지 오래된 죽음을 조용히 기다렸다.
살해되던 날 아침 조상들의 신위에 절하고 부인과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충효를 숭상하는 가문이니 조금도 낙심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한사코 말려도 뒤를 따르는 녹사(錄事) 김경조(金慶祚)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친구 성여완(成汝完)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다시 말을 타면서 수행하는 녹사 김경조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고 하자, 녹사는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하였다.
몽주는 말을 거꾸로 타고 김경조에게 말을 끌라 하면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하며 선지교로 향하였다.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조영규를 비롯한 4∼5명의 괴한이 나타나 쇠뭉치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앞에서 가던 김경조가
먼저 쓰러지고 이어 몽주가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이때 몽주의 나이는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선지교 돌 틈에서 대나무가 솟아나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고 하여 선지교를
<선죽교(善竹橋)〉라 부르게 되었다. 몽주의 시체는 죄과(罪過)로 몰았기 때문에 내버려두었으나 송악산(松嶽山) 중들이
염습(殮襲)하여 풍덕(豊德) 땅에 묻었다.
통일 신라(統一新羅)에 이어 34대왕(大王)을 거치면서 475년간 지속되었던 고려 왕조(高麗王朝)는 정몽주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지만 기울어져가는 고려왕조와 새 왕조 창업을 꿈꾸던 이성계의 신흥 세력이 불붙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의(義)를 살렸던 몽주의 충정과 일편단심은 우리 민족과 더불어 역사의 터전에서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조선(朝鮮)이 개국되고 고려의 역사와 인물들이 터무니없이 왜곡되었어도 태종(太宗)은 권 근(權 近)의 상소를 받아들여
몽주의 묘(墓)를 고향인 영천(永川)으로 이장할 것을 허락하였고, 몽주의 관작을 복구시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회유책으로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려 주었다.
몽주의 묘(墓)를 이장할 때 면례(緬禮) 행렬이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水枝面)에 이르자 앞세웠던 명정(命旌)이 바람에 날려
지금의 묘자리에 떨어졌으므로 이곳에다 안장하였다고 한다.
몽주의 아들 종성(宗誠)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손자 보(保)가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루된 <8현(八賢)〉가운데 한 사람으로 영일 정씨의 절맥(節脈)을 이었다.
학문이 탁월하여 세종(世宗)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던 보(保)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의 무죄를 주장한 말이 한명회
(韓明澮)를 통해 세조(世祖)에게 알려져 친국(親鞫)을 받을 때 "나는 항상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을 성인 군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스스로 자백했으니 처형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이에 세조는 수레로 찢어 죽이라고 명하고 나서 묻기를 "이는 어떤 사람인가?"하니, 좌우에서 "이는 정몽주의 손자입니다."
하자 급히 명하여 형벌을 그치게 하고는 "충신의 후손이니 특히 사형을 감하여 귀양보내라."고 하였다.
일찍이 보(保)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다. 차남 윤화(允和)가 장가들기 전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창방(唱榜)할 때 잘못해서
좌판(坐板)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에 평생을 애석하게 생각해 오던 보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우리 아이가 다행히 먼저
죽었다. 살아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 난에 참여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안도했다고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전한다.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했던 종소(從韶)는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으나 병자년(丙子年)의 변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했으며, 그의 증손(曾孫) 세아(世雅 : 유량의 아들)는 임진왜란 때 아들 의번(宜藩)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영천(永川)의 적을 격퇴시킨 후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을 사직하고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 등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 양성에 진력했으며, 그의 아들 의번(宜藩)은 경주(慶州)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적에게 포위당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혈전 중 장렬하게 전사하여 영조(英祖) 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한편 용(容)의 아들 대임(大任)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伏兵)으로 적을 대파
하고 돌격대장이 되어 울산 태화진(太和津)에서 역전의 무공을 세웠으나 전장에서 순절했으며, 몽주의 9세손 근(謹)의 아들
유성(維城)이 1627년(인조 5)에 등과(登科)하여 현종(顯宗) 즉위 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올랐고, 청빈(淸貧)하기로 명망이
높았다.
1668년(현종 9)에 별시문과에 급제했던 제두(齊斗 : 유성의 손자)는 당시 혼란했던 정국을 통탄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진력,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을 떨쳤고, 이론에만 치우친 주자학(朱子學)에 반기를 들고 우리 나라 최초로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陽明學)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했다.

 

고려 때 감무(監務)를 역임한 정극유(鄭克儒)를 시조로 받드는 감무공파의 인맥(人脈)으로는 극유의 6세손 사도(思道 : 자한의 아들)가 1336년(충숙왕 복위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고, 우왕(禑王)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후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孫子) 진(鎭)이 조선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한 후 오천부원군(烏川府院君)에 추봉되어 세종(世宗) 때의 명신(名臣) 연(淵)과 함께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태종(太宗)의 딸 숙정옹주(淑貞翁主)를 아내로 맞아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졌던 효전(孝全 : 오천부원군 진의 막내아들)은 단종(端宗)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난(靖難)을 일으켜 중신들을 살해하자 병을 핑계하여 두문(杜門)하고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피를 토하고 죽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연(淵)의 증손이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완(浣)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던 남효온(南孝溫)·김 식(金 湜) 등과 함께 교유하였고, 장자풍(長者風)이 있어 항상 사림(士林)의 존망을 받아〈시귀(蓍龜)〉로 불리웠다. 그의 아들 숙(潚)이 절효(節孝)로 명망을 떨쳤는데, 특히 친구 성수종(成守琮)이 죽자 과부가 된 그의 처를 평생 동안 먹여 살려 우애의 본보기로 선비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던 순(洵)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후사(後嗣)가 없어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던 운명론자였다. 그의 임종에 딸들이 둘러앉으니 "내 딸들은 모두 단정하다."고만 말할 뿐 후사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않음으로 부인이 당황하자 "운명인 것을……" 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돈령부 판관(敦寧府判官)을 역임했던 유침(維침)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자(滋)는 명종(明宗) 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있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대윤(大尹)인 윤 임(尹 任)의 처남이라 하여 화를 입었고, 둘째 소(沼)는 형인 자가 죄없이 화를 당하자 이를 애통하게 여기고 순천(順天)에 은거하며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났었다.
유침의 셋째 아들 황(滉)은 명종(明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거쳐 김제(金堤)·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내섬시 부정(內贍寺副正)에 올라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大家)로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한국시가(韓國詩歌)의 쌍벽으로 일컬어졌던 송강(松江) 철(澈)은 유침의 막내아들이다.
1536년(중종 31)에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던 송강은, 그의 맏누이가 인종(仁宗)의 숙의(淑儀)로 있었기 때문에 어릴 때 동궁(東宮)에 자주 드나들면서 나이가 비슷한 명종(明宗)과 정답게 지냈으며, 그의 둘째 누이는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되었으나 을사사화에 매부인 계림군이 연루되어 화를 당했고, 송강의 아버지 유침도 관북(關北) 정평(定平)으로 유배되었다가 송강이 16세 때 풀려났다.
석방된 송강의 아버지 유침은 가족을 데리고 송강의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전남 담양부 창평(昌平)으로 내려갔다. 창평에 내려온 송강은 을사사화의 화를 피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순천(順天)으로 내려가 우거하고 있던 둘째 형인 소(沼)를 찾아가던 도중, 부호인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에게 그의 재질을 인정받아 지곡(芝谷 : 지실) 성산(星山 : 별뫼)에 정주하면서 김윤제의 사위인 류강항(柳强項)의 딸과 혼인하고 윤제의 조카인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과 동문수학(同門修學)했으며,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송강은 그로부터 10년 동안 성산에서 글공부를 하였고, 송강(松江)이라는 호(號)도 성산 앞을 남북으로 흐르는 시내 죽계천(竹溪川)의 다른 이름인 송강에서 딴 것이다.
1561년(명종 16) 26세 때 진사시(進士試)에 1등이 되었던 송강은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명종(明宗)이 방목(榜目)을 보고 어린 시절의 우정을 생각하여 기뻐하면서 "정 철이 급제하였구나."하고 따로 주찬(酒饌)을 내리어 축하 연을 베풀어주었다.
일찍부터 청백하고 곧은 성품으로〈총마어사( 馬御史 : 한나라 때 어사 환전이 매우 엄정하였고 항상 총마를 타고 다니므로 사람들이 총마어사라 불렀다)〉라 불려졌던 송강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을 때, 명종(明宗)의 사촌형인 경양군(景陽君)이 그의 처가의 재산을 약탈하고자 그의 처조카를 죽인 죄로 옥에 갇혀 있었다. 이에 명종은 송강에게 관대하게 처리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성격이 결백하고 강직한 송강이 법을 고집하여 경양군 부자(父子)를 처형하고 말았다.
이 옥사의 판결로 명종의 뜻을 거슬린 송강은 오랫동안 청선(淸選)이 막히었다가 31세 때 정랑(正郞)·직강(直講)을 거쳐 부승지(副承旨)에 올라 당시 격렬했던 당쟁 속에서 서인(西人)의 영수로 동인(東人)과 대결하며 예조(禮曹)와 형조(刑曹)의 판서(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는 동안 파란만장한 벼슬길을 걸었다.
송강이 45세 때인 1580년(선조 13)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가 금강산(金剛山)과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답사하며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훈민가(訓民歌)」를 지어 도민의 교화에 힘썼다. 1585년(선조 18) 치열한 당쟁으로 양사(兩司)로부터 논척을 받았던 송강은 조정을 물러 나와 한 때 고향에 머물러 있다가 이어 창평(昌平)으로 내려가 4년 동안 유유자적하는 전원생활을 하면서 시상을 가다듬어「전후미인곡(前後美人曲)」과「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한 수많은 가사(歌辭)와 단가(短歌)를 지어 우리 나라 국문학사에 금자탑을 세웠다.
1593년(선조 26)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동인(東人)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빈곤과 울분으로 신음하다가 둘째아들 종명(宗溟)의 단지(斷指)의 효성(孝誠)도 헛되이 12월 18일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이듬해 2월 고양(高陽) 신원(新院)에 장사지냈다가 현종(顯宗) 때 진천(鎭川) 지장산(地藏山)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생전에 당쟁으로 반대당인 동인(東人)의 탄핵을 입어 관작의 추탈이 빈번하였던 송강은 죽은 후에도 포폄(褒貶)이 번거로워, 1594년(선조 27) 6월에 권 유(權 愉)·김우옹(金宇옹) 등이 상소하여 삭탈관직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되었고, 숙종(肅宗) 때 문청(文淸)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송강(松江)의 아들 4형제 중 차남 종명(宗溟)은 인조(仁祖) 때 강릉 부사(江陵府使)를 지냈으며, 막내 홍명(弘溟)은 부제학(副提學)과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종명의 아들 양(瀁)은「어록해(語錄解)」를 간행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로 영조(英祖)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며 시문(詩文)과 글씨로 명망을 떨쳤던 호(澔)는 노론(老論)의 선봉이 되어 격심한 당쟁 속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청빈한 성품으로 의식주가 서민과 같아서 정치에서 물러나 낙향해 사는데도 마을 사람들이 재상을 지낸 사람인줄 몰랐다고 한다.
영조(英祖) 때 〈형제정승(兄弟政丞)〉으로 유명했던 우량(羽良 : 판돈령부사 수기의 아들)과 휘량(絮良)이 명문의 전통을 이었고,「속대전(續大典)」편찬에 참여했던 하언(夏彦 : 목사 무의 아들)은 좌부승지(左副承旨)와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어제(御製)의 편제(篇題)와 홍화문(弘化門)의 편액을 썼다.
그밖의 인물로는 석달(錫達)의 아들로 일성위(日城尉) 치달(致達)에게 입양(入養)했던 후겸(厚謙)이 영조(英祖)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으며, 태락(台樂)의 아들 기원(岐源)은 철종(哲宗) 때 어영대장(御營大將)과 훈련대장(訓鍊大將)을 거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올라, 순조(純祖) 때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지낸 유(유), 고종(高宗) 때 법무협판(法務協辦)과 평양부 관찰사(平壤府觀察使)를 역임한 경원(敬源) 등과 함께 충절(忠節)과 학문(學問)의 전통 가문인 영일 정씨(迎日鄭氏)를 더욱 빛냈다.

#영일정씨#迎日鄭氏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