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제목강릉김씨2021-09-1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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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명주군왕은 신라김씨의 시조 알지(閼智) 대보공의 21세손으로 신라 37대 선덕왕이 후사없이 서기785년에 승하하여 당시 시중겸 병부령(지금의 국무총리겸 국방장관)인 주원(周元)공을 왕위에 오르도록 군신회의에서 결의하였으나 주원공의 저택이 경도의 북쪽 20리에 있었는데 때마침 큰비가 내려 냇물이 넘쳐 건너지 못하자 인군(人君)자리는 잠시도 비울 수 없다하고 당시 상대등인 김경신(金敬信)공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신라38대 원성왕이시다
  주원(周元)공이 비가 개인후 임상(臨喪)차 단기(單騎)로 입궁(入宮)하니 왕위에 오른 김경신(金敬信)이 주원(周元)공에 왕위(王位)에 오르기를 권(勸)하니 주원공은 인군대위(人君大位)는 천명(天命)이라 하며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명주로 퇴거하였다. 그로부터 2년후 원성왕은 왕위를 양보한 덕을 생각하여 명주(강릉)를 중심으로 강릉.울진.평해.삼척등 동해안 일대를 분할하여 다스리게하고 명주군왕으로 봉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이때부터 명주도성을 중심으로 세습통치 하면서 자손이 번성하여 강릉김씨로 득관하고 명문거족의 발상지가 되었다.


14세손하림(夏林)공이 증 판서로 후손이 판서공 청풍파
12세손장록(長祿)공이 영사(令史)를 역임하여 후손이 영사공 영월파
14세손경생(慶生)공이 부정을 역임하여 후손이 부정공파
14세손용수(龍壽)공이 지통주사(知通州事)를 역임하여 지사공(전적공)모안파
17세손윤신(潤身)공이 목사를 지내고 호가 괴당으로 후손이 괴당공옥가파
15세손예(예)공이 군사로 후손이 군사공 옥계파  
15세손지(지)공이 평의공으로 평의공파 (일명 왕김파)

평의공파를세분하면
군사공옥계파
평의공파
참의공부사공파
평의공우후공파
평의공회정공파
평의공첨사공파
평의공감찰공파
효자공우계파
 5세원걸(元傑) 후손을 상서공 신리파
15세보안(寶安)공의 후손을 상서공 횡성파
19세경인(敬仁)공의 후손을 만호공 김포파
19세경의(敬義)공의 후손을 지산군 김포파
19세경예(敬禮)공의 후손이 첨사공파
15세원구(元龜)공의 후손이 판사공 평창파 .만우파
19세시습(時習)매월당 공의 후손이 청간공파
18세일신(日新)충순공의 후손이 충순공 동래파
15세한경(漢卿)부정공의 후손이 부정공 상주파
16세승로(承露)송오공 후손이 송오공파
17세덕숭(德崇)모암공 후손이 모암공파
15세종혁(從革)판윤공 후손이 문의파
15세원혁(元革)총랑공의 후손이 복구정파
16세이남(以南)사윤공 후손이 사윤공 북청파
16세윤남(允南)감무공의  파주파,   
21세행(行) 장포공 후손이 파주파
16세양남(楊南)일노공 제천파, 숙간공 백동파, 부사공파, 좌랑공파, 제주공능동파, 판윤공동두천파, 진사공포천파, 부승공파   
16세종남(從南)감무공의 후손이 감무공 여주파
16세자남(自南)직장공의 후손이 영해군파,동원군파,월봉공파.삼괴당공파
22세광춘(光春)주부공의 후손이 안동파
16세효생(孝生)판관공의 후손이 판관공 인제.양구파
17세득인(得仁)설파공의 후손이 설파공 당진파
17세득지(得智)판사의 후손이  익산파


김주원은 김종기(金宗基), 김헌창(金憲昌), 김신(金身) 등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 김헌창은 헌덕왕 때 공주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전라, 충청도 지방을 점령했으나 실패로 끝나 자결했다.
첫째 아들 김종기의 손자 김양(金陽)은 838년(민애왕 1년)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죽게하고 왕위에오른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으로 추대하고 각간시중 겸 병부령을 지냈다.
김순식(金順式)은 고려 건국초 명주(溟州)장군으로 끝까지 항거하다 왕건에게 설득을 받고 왕건에게 협력하여 후백제 정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대광(大匡)에 오르고 왕씨 성을 하사 받았으나 조선개국 후 왕씨가 탄압을 받자 원래 성인 김씨로 환원하였다.
9세손 김상기(金上琦)가 고려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 내사 문하성의 정2품 벼슬)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김인존(金仁存)은 문하평장사 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고려 인종 때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고,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왕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대표적이다.
1435년(세종 17년) 성균관 부근에서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신동(神童), 신재(神才)로 불리워진 그는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은 시(詩)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無雨雷聲何處動)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黃雲片片四方分)"

그가 5세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이 소식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총애했다고 하며, 40여 년간 대사성을 지낸 김반(金泮: 후손을 강서김씨라 함)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상(尹詳)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21세 때인 1455년(단종 3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특히 그는 세조의 패륜에 통분하고 저항하며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으며, 서기 1463년(세조 9년) 책을 구하러 한양(漢陽)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태종의 2남)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금오산실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1468년(세조 13년)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서기 1481년(성종 12년)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2년 뒤 다시 한양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애를 마쳤다.
사예(司藝) 김충정(金忠貞)의 아들 김첨경(김添慶)은 1549년(명종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어사(御史), 부수찬(副修撰), 지평(持平) 등을 거쳐 1561년(명종 1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정(僉正)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史)로 나갔다가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그외 감찰(監察) 김종윤(金宗胤)의 아들 김충렬(金忠烈)이 중종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성부 판관, 경기도사를 거쳐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館: 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김국평(金國坪)의 아들 김행(金行)은 선조 때 무장현감(茂長縣監)이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셋째 아들)의 증도가(證道歌)를 간행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예조 판서 김첨경(添慶)의 현손(玄孫)인 김시혁은 공조판서(工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고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올랐으며, 김시환(김始煥)과 김시형(金始炯)도 예조(禮曹) 및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우참찬(右參贊),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계락(啓洛)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618년(광해군 1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한 김기종(金起宗)은 김철명(金哲命)의 아들로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 만(張晩)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무훈을 세워 진무2등공신(振武二等功臣)으로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대사간(大司諫),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 예조, 호조(吏禮戶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김상성(金尙星)과 영조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 조선 때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가서 봉조하(奉朝賀)가 된 김상익(尙翼), 예조(禮曹) 및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한 김상적(金尙迪)이 유명했다.
김시현(金始炫)의 아들 김상중(金尙重)은 영조 때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 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김상집(金尙集)과 학자로 유명한 김홍운(金鴻運), 형조판서(刑曹判書) 김화진(金華鎭)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김상철은 1775년(영조 51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학덕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고, 일찍이 우의정(右議政) 때 편집청을 두어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많은 편의를 가져오게 하였다.


-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326명
(문과 97명, 무과 19명, 사마시 205명, 역과 1명, 의과 1명, 음양과 2명, 율과 1명)

김충렬(金忠烈, 1503 癸亥生) : 문과(文科) 중종26년(1531)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기종(金起宗, 1585 乙酉生) : 문과(文科) 광해군10년(1618)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상성(金尙星, 1703 癸未生) : 문과(文科) 경종3년(1723)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상구(金尙耉, 1704 甲申生) : 문과(文科) 영조10년(1734)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중형(金仲衡, 1704 甲申生) : 문과(文科) 세조3년(1457) 별시 정과(丁科)
김윤신(金潤身, 1704 甲申生) : 문과(文科) 성종7년(1476) 별시 병과(丙科)
김광진(金光軫, 1704 甲申生) : 문과(文科) 중종21년(1526) 별시 을과(乙科)
김충정(金忠貞, 1704 甲申生) : 문과(文科) 중종30년(1535) 별시3 병과(丙科)
김팔원(金八元, 1524 甲申生) : 문과(文科) 명종10년(1555) 식년시 을과(乙科)
김순명(金順命, 1561 辛酉生) : 문과(文科) 선조21년(1588) 알성시 을과(乙科)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김(金) 씨는  10689959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1 위이며  강릉 김(金) 씨는  179593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52 위이고 성씨내 본관별 순위는  8 위이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강릉 김(金) 씨는 전체 가구수가 52,050 가구로 본관의 인구는 165,963 명으로 본관별 전체 순위는 47 위이며, 본관별 성씨 내의 순위는 8 위로 나타났다.
 

#강릉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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