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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re]원주변씨 중랑장공파 인터넷 족보2024-04-1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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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변씨시조 변안열장군 불굴가

고려가 나라 부마국이던 시기 변안열(邉安烈)의 할아버지 변순(邊順)1247년 고종 34년에 고려에서 태어나, 1268년 원종 9년에 사신 탈티아를 수행하여 원나라로 건너가 심양의 천호후(千戶候)라는 제후에 봉해진 명문 집안이다. 변안열(邉安烈) 1334년 중국 요동 심양(瀋陽)에서 태어나 134815세의 나이로 원나라 순제 때 어사대부를 지낸 대장군 탈탈(脫脫) 밑에서 무예를 사사 받아 1351년 봄, 邉安烈18세 되던 해에 무과인 호방(虎榜)에 수위 합격하여 當年에 형부상서에 올랐다. 邉安烈은 원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어린 시절부터 자기 집안에서는 고려말을 사용했기에 원나라 말은 물론 고려 말에도 두루 능통했다. 무예가 출중했고 문예까지 갖추어 호위군 배행수장(護衛軍陪行首長)의 직책을 맡기에 손색없는 적임자였다.

고려가 나라 부마국이던 시기 1352년 강릉대군(江陵大君: 후에 공민왕)이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와 혼인하여 고려에 환국하게 되자, 변안열장군은 원조(元朝)의 삼장육학사(三將六學士)호위군 배행수장(陪行首將)으로 고려에 입국하였다. 邉安烈 장군이 고려에 체류한 것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간곡한 만류도 있었지만, 할아버지 변순(邉順)이 꿈속에서도 그리워했던 고국,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자라난 아버지 변양(邉諒)은 말할 것도 없고, 심양으로 이주한 황주변씨(黃州邉氏)일가의 바람이었기 때문에 先祖의 나라에서 살겠다는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공민왕(恭愍王)은 변안렬(邉安烈) 장군을 지극히 신애(信愛)하여 西紀 1352(공민왕1) 나이 19세 때 공민왕의 중매로 공민왕(恭愍王)의 외척(外戚)인 당시의 명문(名門) 원주원씨(原州元氏) 추밀(樞密) 원의(元顗)의 딸과 열아홉 살에 혼인하였고, 공민왕의 명을 받들어서 처향(妻鄕)인 원주(原州)를 본관(本貫)으로 사적(賜籍)을 받았다. 따라서 황주(黃州)와 본()을 나누어 원주(原州)로 본관(本貫)을 삼는 원주변씨시조(原州邉氏始祖)가 되었다. 그리고 1355(공민왕 4)에 왕이 명하여 사저를 짓게 하고 추원재(追遠齋)라는 친필 휘호를 내려 걸게 하고 변안열(邉安烈)장군 내외를 거주하게 하였다.

原州邉氏始祖 大隱 변안열 장군의 생애는 주로 고려(왕실)에 대한 충성과 호국용장으로서의 격전지 임무 수행으로 점철되었다. 변안열 장군은 일생 수많은 전장의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은 용장이었으며 변안열 장군은 외세의 침입에 맞서 생애(生涯) 38년 동안 전장에 수없이 나가 홍건적을 격파하고 수많은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서기 1362上將軍(상장군)으로써 공민왕(11)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격퇴(擊退)하고 경도(京都)에 돌아와서 공훈일등(功勳一等)의 직첩(職帖)을 받고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제수(除授)됨과 동시에 추성보조공신호(推誠補祚功臣號)綠田(녹전)을 사여(賜與) 받았다.

13748월에는 최영장군과 더불어 제주의 목호의 난을 진압 평정하였으며, 1376년에는 전북 부안 인근 부령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대파했다. 변안열장군은 1380(우왕 6)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慶尙) 삼도를 관장하는 도체찰사(1품직)에 임명돼 삼도순찰사(2품직) 이성계(李成桂)장군과 함께 고려에 침입해 큰 피해 입힌 왜적을 황산대첩(荒山大捷)에서 토벌하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우왕(禑王)은 변안열장군과 이성계장군에게 상으로 황금을 내렸지만 변안열장군은 "적을 막는 것이 장수의 당연한 일이지 상을 받을 일이 아니다"라며 상을 받지 않았다. 이는 무인(武人)으로서의 변안열장군 기질(氣質)과 심지(心志)를 보여 주는 일화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수없이 회자 됐다.

1382년 변안열장군 나이 49세에 都元帥(도원수)가 되어 왜적이 단양에 쳐들어오자 韓邦彦(한방언)과 함께 출전하여 격파하였는데. ()한 것이 팔천여급(八千餘級)이요, 노획한 말이 604필이었다. 이후 고려왕조(高麗王朝) 훈록(勳錄)으로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오르고 삼사의 최고위직이자 수장(首將) 영삼사사(嶺三司事, 1품 벼슬)에 승진(陞進)하였다. 그 후에도 남북으로 외적의 침입이 많아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던 고려 말, 변안열장군과 이성계장군은 나라를 지키는 장수로 활약했다. 개혁적 성향도 같아 두 장군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고려를 구하고 전우이자 동지로 서로를 의지하며 많은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웠다.

서기 1388(우왕14) 5월 이성계(李成桂) 장군은 우군 도총사가 되어 여러 장수들과 함께 북진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장마로 인한 홍수피해를 핑계로 좌군 도총사 조민수와 함께 개경으로 회군한다. 13886월 정변(政變)을 일으켜 개경을 함락시키고 정치적 반대파인 최영 장군을 제거하였으며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유배시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장군은 9월 공양왕을 추대하여 스스로 수문하시중이 되어 신진사대부 세력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서로 믿던 두 장군은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다른 길을 가게 되고 이성계 장군은 회군 이후 혁명 신진세력과 함께 신왕조 창건 의도를 분명히 나타냈다. 변안열 장군도 정치적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 하였지만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역성혁명(易姓革命)에는 끝까지 반대(反對)하여 변안열 장군과는 당연히 멀어졌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는 변안열장군을 역성혁명(易姓革命) 일파들은 늘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관료들의 신망(信望)이 높았고 정예병(精銳兵) 200명과 사병(私兵)2만에 이르러 이성계에 대적할 유일한 군벌(軍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13891011일 자신의 생일 주연(酒宴)에 그 당시 반대당인 文臣 정몽주(鄭夢周)武臣 변안열(邊安烈) 장군을 초대하여 술을 권하면서 진심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하여 아들 방원(芳遠)을 시켜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城隍堂) 뒷담이 무너진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 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죽지 않음이 어떠하리를 읊었다. 이어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로 대응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니, 이어 무장(武將) 변안열 장군이 화답했는데,

穴吾之胸洞如斗(혈오지흉동여두)

내 가슴 구멍 뚫어

貫以藁索長又長(관이고색장우장)

동아줄로 길게 꿰어

前牽後引磨且戛(전견후인마차알)

앞 뒤로 끌고 당겨

任汝之爲吾不辭 (임여지위오불사)

갈겨져 찢겨짐은 네 마음에 맡기련만

有慾奪吾主(유욕탈오주)

우리 님 빼앗는 데

此事吾屈(오불굴)

내 어찌굽힐소냐.

이 시조창을 통해 고려왕조(高麗王朝)에 대한 충절심(忠節心)을 어떤 힘으로도 굽힐 수 없음을 밝혔다. 고려에 대한 굳은 절개와 충성에 흔들림이 없음을 확인한 이성계 일파는 혁명에 정적(政敵)으로 판단, 제거 명분을 찾기 위하여 138912월 영삼사사 변안열장군을 집요하게 탄핵을 다섯 차례에 걸쳐 上疏하자 공양왕은 이성계를 회유하여 영삼사사 변안열장군을 파직(罷職)시키기로 허()하였으나, 윤소종, 이첨 등이 변안열장군의 죄()를 논하고 전형(典刑)을 바르게 하자고 거듭 상소를 올렸으나 공양왕이 허락하지 않고 한양(漢陽)에 유형(流刑) 시켰다. 그렇지만 혁명일파들은 어떤 식으로든 죄를 만들어 제거하려고 1390(공양왕 2) 1월 우왕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역신(逆臣)을 씌워 대사헌 성석린이 대역죄(大逆罪)라고 논하고 즉시 처형할 것을 상소(上疏)하므로 실권 없는 공양왕은 결국 상소를 사헌부(司憲府)에 보내 유배(流配)지에서 국문(鞫問) 없이 처형하도록 명()을 내려 도승지 李行이 교서를 작성하는 동안,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역성혁명일파 한양부윤(漢陽府尹) 김백흥(金伯興)에게 첩문(牒文)을 보내어 죽이게 하여 어명을 전하기도 전에 참형(斬刑)을 받아 1390116일 향년 57에 순절(殉節)하셨다.

13904월에 회군 공훈(功勳)에 등재되어 양주 주엽산(注葉山)에 묘지를 사급 받아 의관을 갖추어 장례를 치렀으나, 광릉(세종대왕의 능)과 가깝다는 이유로 1468(예종원년) 풍양현 건천면 지사동(芝沙洞) 인좌 현 위치에 이장하였고, 시조 배위 진한국 부인 원주원씨 묘소는 이곳에서 5리 떨어진 풍향현 동건천면 사능리 오리동에 있었으나 1985616일 시조 묘소를 단장하면서 용정리 산197번지 이곳에 천장 하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원주변씨시조 불굴당변안열 장군은 고려말에 이성계, 최영 장군과 어깨를 겨루며 전공(戰功)을 날린 용맹한 장군이다. 다만 이성계의 권력 찬탈에 반발하여, 역성혁명 일파들에 의해 억울하게 역모죄로 사형당했다. 폐위된 우왕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뵈었을 뿐인데 역신(逆臣) 죄를 억지로 만들어 국문(鞫問) 없이 참형(斬刑)하여 간신열전에 넣었으니 어찌 후세의 역사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으며 사실을 바른대로 쓴 믿을 만한 고려 사초(史草)라고 할 수 있겠는가?

13891011일 이성계장군 생일 酒宴에 하여가로 회유가 시작되었지만 변안열장군은 불굴가로 당당히 화답하여 스스로 아끼고 은혜를 입은 고려왕조를 결코 저버리지 않고 고려를 지키기 위한 변안열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명장(名將)으로서 마땅히 추앙받아야 했으나 뜻하지 않게 역성혁명의 무리들에 의해 논핵 되고 탄핵 되어 그들에 의해 피화(被禍)되셨고, 사후(死後) 터무니없게 왜곡된 고려사 간신열전에 기록하는 등 변안열 장군의 38년간 수없이 왜구(倭寇)를 물리친 위대한 전공(戰功)을 간신사초(奸臣史草)에 묻어버렸다.

역성혁명의 승자인 조선조의 손에 의해 여섯 차례나 수정 기록된 고려사는 왜곡하고 곡필(曲筆)하여 변안열(邊安烈) 장군을 간신열전(奸臣列傳)에 편입하였다. 그로 인해 변안열장군이 행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호국충절(護國忠節)과 대중에 널리 불려 지고 구전된 우리말 원사 노래 불굴가는 작자 미상으로 묻혀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불굴가는 구전되다가 삼백삼십구년이 지난 때이기는 하지만, 변안열장군의 불굴가金天澤原本 靑丘永言(1728)에 등재되어 전하고 있는데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해오는 불굴가는 고려왕조에 대한 굳은 절개와 충성심을 엿볼 수가 있어 불굴가는 일명 충의가라고도 한다.

변안열장군 불굴가에 대한 연구는 그 연구 성과물이 적고 연구역사도 짧은 편이다. 변안열 장군의 진정한 애국정신을 깨우치는 일은 1968년과 1970년에 패강(浿江) 황일영 교수께서 우연히 경북 봉화의 변우룡씨로 부터 대은선생실기(大隱先生實記)를 구득(求得)하여 불굴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밝힘으로써 변문 내에서만 피 끊이며 전해지던 불굴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어두운 역사의 그늘에서 최근에야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고, 그 후 여러 학자들에 의해 깊이 연구되어 왔고 마침내 사설시조의 효시작이자 최초의 저항시로 논증되면서 국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고려말 이성계장군이 역성혁명을 꾀할 무렵 진심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하여 이성계는 아들 방원(芳遠)을 시켜 하여가(何如歌)로써 大臣의 속내를 떠본데 대한 답가로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는 조선의 사관(史官)으로부터 충절의 상징으로 미화시켜 후세에 알려지게 하였지만, 변안열장군 불굴가(不屈歌)는 이성계 역성혁명 권력 찬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조선(朝鮮) 사관(史館)은 간신(奸臣)의 누명을 씌워 사초(史草)를 왜곡되게 편찬(編纂)하여 전해지다 역사학자들에 의해 최근에야 신원(伸冤) 되어 불굴가(不屈歌)는 알려지고 있다.

이 같은 원주변씨 시조 변안열장군 38년간 호국(護國)의 전공(戰功)불굴가의 충절(忠節)623년 만에 진실이 되살아나 2013416일 대한민국 보훈처에 의해 호국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대한민국 전쟁기념사업회는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를 크게 물리친 변안열 장군을 2014'5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로 선정하여 58일 전쟁기념관 호국 추모실에서 유관 단체와 종중과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변안열장군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장군이 행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호국정신을 현양(顯陽)하여 마침내 굴욕의 역사에서 벗어나 진실로 신원(伸冤)되어 광명(光名)을 찾게 되었다.

원천부원군 대은변안렬장군은 고려 나라를 지킨 호국용장(護國勇將)이며 고려왕조 충신(忠臣)으로 장상(將相)의 벼슬을 모두 지낸 문무겸전(文武兼全) 장군이다. 정작 간신(奸臣)으로 내걸고 있는 고려사(高麗史)를 통해서 보아도 변안열장군은 외적(外敵)과 싸워 전공(戰功)을 세운 용장(勇將)이 틀림없다. 그리고 왜곡된 사초(史草) 그늘 속에 가려졌던 대은변안열 장군의 불굴가는 아집이 아니고 고집도 아닌 목숨을 초개와 같이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숭고한 절의(節義) 정신이다. 忠節은 육백 삼십여 년을 지나면서 원주 변문의 후손들에게 깊이 뿌리 내려 숭고한 DNA가 되었음을 자부한다. 전국의 거주하시는 원주변씨 종현들께서는 시조님의 불굴가호국정신을 이어받아 안보 의식을 함양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적 가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켜 평범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이 살기 좋은 나라로 번영할 수 있도록 정의 사회 구현에 밑거름이 되어 주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甲辰年 春分 원주변씨중앙화수회 홍보이사 변종 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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