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의 서막 - 총융사 이서와 김석현 1624년 4월, 인조는 한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한산성을 찾았다. 이괄의 난으로 겨우 1년 만에 두 번이나 도성을 버려야 했던 그는, 이제 수도를 지킬 강력한 보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인조의 눈에 들어온 인물은 당대 최고의 무장이자 덕망 높은 관료였던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였다. "이 대감, 이 큰일을 그대에게 맡기니 황공하옵니다." 인조의 표정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이서는 겸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신에게 과분한 명이옵니다." 인조는 그의 어깨를 잡고 간곡히 당부했다. "경은 무신들 중 가장 믿을 만한 인재요. 이 남한산성을 튼튼히 쌓아주시오. 3년 전 정묘호란과 같은 치욕적인 일이 다시 생기거든, 이곳이 우리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것이오." "명에 따르겠나이다, 전하. 소신의 목숨을 바쳐 반드시 완성하겠습니다!" 이서는 비장하게 다짐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남한산성 축성이라는 대규모 국책 사업의 총책임자로 이서가 임명되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수백 명의 인부들이 산을 에워쌌다. 돌을 깨고 흙을 나르는 석공, 목수, 잡역부들의 땀방울이 마를 새가 없었다. 그중에는 마흔 줄에 접어든 김석현이라는 석공이 있었다. 그는 평생 돌을 다뤄 온 베테랑이었다. 궁궐 공사는 물론이고, 여러 고을의 성벽을 쌓는 일에 참여하며 누구보다 지형과 석축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왔다. 첫날, 이서는 김석현을 불러 현장 곳곳을 함께 둘러봤다. "김석공, 그대의 눈으로 보기에 이곳이 과연 성을 쌓기에 적합한 터인가?" 김석현은 말이 없었다. 그는 한동안 깊은 눈으로 산세를 훑어보더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대감, 우선 함께 산을 둘러보시지요. 이 산에는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중요한 봉우리가 둘 있습니다." "봉우리 둘이라?" 이서가 되물었다. "예. 저기 가장 높은 벌봉과, 그 건너편의 한봉입니다." 김석현은 능숙한 손길로 각각의 봉우리를 가리켰다. 벌봉은 멀리서도 웅장하게 솟아 있었다. "저곳이 해발 515척, 산성 내 최고봉인 벌봉입니다." 그리고는 조금 낮지만 위치상 중요해 보이는 다른 봉우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저쪽이 바로 한봉입니다.“ 김석현의 경고 - 벌봉과 한봉의 비밀 김석현은 이서에게 먼저 벌봉으로 오르자고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가파른 길을 한참 오르자, 마침내 탁 트인 정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가 바로 벌봉입니다, 대감. 이곳에서 계획된 성터 전체를 보십시오." 김석현이 발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가리켰다. 이서는 김석현의 말에 따라 눈을 크게 떴다. 발아래로는 축성이 예정된 드넓은 분지형 평지와 그곳에 들어설 행궁, 그리고 군사들이 진을 칠 병영의 장대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정말 그렇구나... 이곳에 적이 올라서면 성 안의 모든 움직임이 노출되겠군." 이서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예. 그래서 반드시 이곳까지 성벽을 쌓아 본성(本城)과 연결해야 합니다. 소위 봉암성(鳳巖城)이라 불리는 외성을 두르지 않으면, 벌봉은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입니다." "알겠소."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봉에서 내려온 그들은 이번에는 한봉으로 향했다. 한봉은 벌봉보다는 낮았지만, 김석현은 이곳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대감, 한봉은 벌봉보다 높지는 않으나, 그 위치가 더 중요합니다." 한봉 정상에 오르자, 김석현은 동쪽 방향을 가리켰다. "대감, 저곳을 보십시오." 동쪽은 완만한 경사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저곳이 바로 동문이 설치될 자리입니다. 다른 곳보다 지형이 완만하여 적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란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공격받을 곳으로 손꼽힙니다." 이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김석현의 설명대로 동문 예정지는 확연히 다른 곳보다 방어가 취약해 보였다. 김석현은 이서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대감, 이곳 한봉에서 저 동문과 주변 성벽을 내려다보면 어떻습니까?" 그는 손으로 동문 방향을 훑었다. "우리 군사들이 동문에서 방어를 해도, 이곳 한봉에서 그 움직임이 훤히 다 보입니다. 어디에 몇 명이 있는지, 어디가 비어있는지, 심지어 진영 배치까지도..." 이서는 섬뜩함을 느꼈다. "적이 이곳을 차지한다면..." "예. 동문 방어는 불가능해집니다. 적에게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노출시킨 채 싸워야 할 것입니다." 김석현은 이번에는 남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곳을 보십시오. 장경사(長慶寺)가 있는 방향입니다." 장경사는 남한산성 남쪽에 위치한 작은 사찰이었다. 그 방향의 성벽은 복잡한 계곡을 따라 굽이쳐 있었다. "장경사 쪽은 계곡이 깊고 바위가 많아 지형이 매우 복잡합니다. 적이 이 계곡을 따라 은밀히 기어오를 수 있는 곳이 많습니다." 이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성벽이 있으니 방어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김석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감, 이곳 한봉에서 보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저 성벽 뒤, 우리 군사들이 어디에 대기하고 어떻게 대응하는지 모두 보입니다. 저 계곡 어디로 적이 올라오든, 우리 군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다 노출되는 것입니다!" 이서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다면... 한봉 또한 반드시 우리가 차지하고 방어해야 하는 곳이라는 말이로군." "예, 대감. 벌봉은 성 안 전체를 감시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고, 한봉은 동문과 장경사 방향이라는 핵심적인 약점을 모두 볼 수 있는 요충지입니다. 이 두 곳을 적에게 내어주면, 남한산성은 아무런 방어력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서의 결단 - 봉암성의 꿈 김석현은 즉시 땅바닥에 돌멩이로 산성의 형세를 그려 보이며 설명했다. "지금 본성(本城)만 쌓으면 벌봉과 한봉이 모두 성 밖에 남게 됩니다. 그러면 적은 아무 저항 없이 저 두 곳을 차지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이 저 두 곳을 점령하는 순간, 남한산성은 아무런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로군!" 이서의 얼굴에 초조함이 번졌다. "예. 따라서 반드시 봉암성을 쌓아야 합니다. 벌봉과 한봉을 모두 아우르며 본성과 연결하는 외성을 둘러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 산성은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서는 김석현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단호한 결의가 떠올랐다. "좋소, 김석공! 그대의 의견을 받아들이겠소! 계획에 벌봉과 한봉을 잇는 봉암성 축성을 반드시 넣겠소!" 이서의 결단에 따라 남한산성 축성의 설계도가 최종 확정되었다. 본성: 둘레 11.7리(약 4.7km), 높이 10척(약 3m). 4대문(동문, 서문, 남문, 북문) 설치. 봉암성(외성): 벌봉과 한봉을 모두 포함. 둘레 약 2.5리(약 1km) 추가. 벌봉-한봉-본성을 잇는 연결 성벽 건설. 취약 지점 보강: 동문 지역은 적에게 노출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장(성가퀴) 높이를 7척(약 2.1m)으로 증축. 장경사 방향은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해 이중 성벽 구조로 계획. 계곡 진입로는 암문(暗門)으로 철저히 통제. 기타: 여장은 최소 6척(약 1.8m) 높이로 건설. 군량창고는 6개월분 이상의 식량을 비축할 수 있도록 설계. 성 내 우물 45개소 확보. "이 정도면 1만 명의 군사가 6개월은 넉넉히 버틸 수 있소!" 이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설계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희망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예산의 벽 - 좌절된 꿈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624년 봄부터 시작된 축성 공사는 이듬해 1625년 여름까지, 1년 반 동안 본성의 대부분을 완성하며 순항하는 듯했다. 김석현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현장을 지켰다. 특히 동문 쪽 성벽은 그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감독했다. "여기는 한봉에서 적에게 노출되는 곳이다! 적이 한봉을 차지하는 순간 여기가 가장 먼저 위험해진다! 여장을 더 높게 쌓고, 성벽을 더 두텁게 하라!" 그의 열정과 노력이 성벽 하나하나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그러나 1625년 가을, 공사에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회계 담당 관리가 이서에게 다급히 보고했다. "대감, 큰일 났습니다! 예산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뭐라고? 벌써 바닥이 났다고?" 이서는 당황했다. "예. 원래 계획보다 돌을 채취하고 운반하는 데 품이 더 들었고, 인건비 또한 예상보다 많이 올랐습니다. 지금까지 소모된 예산이 벌써 은 5만 냥에 달합니다!" 원래 책정된 예산은 고작 3만 냥이었다. 이미 2만 냥이 초과된 상태였다. 이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조정에 추가 예산을 요청해야겠소." 한양으로 긴급 보고서가 올라갔다. '추가 예산 2만 냥 필요'. 비변사 회의는 또다시 격론에 휩싸였다. 영의정 김류가 혀를 찼다. "2만 냥이라니!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 아시오? 지금 궁궐 보수에도 돈이 들고, 공신들의 녹봉에도 돈이 들고, 전쟁 후 수습에도 돈이 들어가는데!" 호조판서가 냉랭하게 보고했다. "지금 나라 재정이 매우 빠듯합니다. 정묘호란 후 복구 비용도 감당하기 힘들고,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 또한 엄청납니다. 국고는 그야말로 바닥났습니다." 김류가 이서를 비난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성 공사를 줄일 수는 없는 것이오?" "공사를 축소하면 산성의 방어력이 크게 약화됩니다!" 이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래도... 2만 냥은 너무 많소! 더구나 이 남한산성 공사는 광해군 시절부터 시작된 것 아니오? 우리가 왜 폐주의 빚까지 떠안아야 한다는 말이오!" 합리적인 논의 대신, 과거의 정치적 논리까지 끼어들며 본질은 흐려졌다. 결국 비변사에서는 싸늘한 결정이 내려졌다. "추가 예산은 1만 냥만 지급한다! 나머지는... 공사 규모를 축소하도록 하라!" 이서에게 전달된 명령은 망치처럼 그의 머리를 때렸다. "축소라니! 대체 어디를 축소해야 한단 말인가!" 관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봉암성 공사는 일단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성만 완성하시고, 동문 증축과 장경사 이중 성벽 공사도 보류하라는 명입니다." 이서는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그러면 한봉과 벌봉이 모두 성 밖에 남게 되는 것인데..." "당장 전쟁이 날 것도 아니고, 나중에 돈이 생기면 그때 가서 추가로 쌓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관리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눈에도 회의감이 역력했다. 이서는 고뇌했지만, 조정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미완성의 보루 - 김석현의 절규 이서는 차마 김석현에게 그 사실을 바로 전하지 못했다. 며칠을 망설이다 마침내 현장에서 땀 흘리는 김석현을 찾아갔다. "김석공..." "예, 대감. 공사는 순조롭습니다. 곧 본성 마무리와 함께 봉암성 공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석현은 눈빛에 희망을 담고 말했다. 이서는 고개를 떨군 채 겨우 말을 이었다. "봉암성 공사는... 중단이오. 동문 증축도 중단, 장경사 이중 성벽 공사도 중단이다." 김석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서를 올려다봤다. "예? 대감! 그러면... 저희가 그토록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벌봉과 한봉이 모두 노출됩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도 알고 있소..." 이서의 눈도 흔들렸다. "특히 한봉은 동문과 장경사를 직접 내려다봅니다! 한봉을 포기하면 그 두 곳은 방어가 불가능합니다! 가장 중요한 곳을 이렇게 내버려둔단 말씀이십니까!" 김석현은 격앙된 목소리로 절규했다. "예산이 없다고 하지 않느냐!" 이서는 답답함에 소리쳤다. "조정에서 돈을 안 주는데 내가 대체 무슨 수로 공사를 한단 말인가!"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서도, 김석현도, 이 막막한 현실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이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오, 김석공. 나도... 나도 어쩔 수 없었소. 이것이 조정의 명이오." 김석현은 끝내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결국 남한산성 공사는 축소된 계획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완성된 남한산성의 모습: 본성: 둘레 11.7리는 완성되었으나, 봉암성은 끝내 미건설되었다. 따라서 벌봉과 한봉은 모두 성 밖에 노출된 채 남았다. 여장: 높이 6척으로 계획되었으나, 4척으로 축소되었다. 동문 증축: 계획이 미시행되어, 적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동문의 여장은 다른 곳과 같은 4척 높이로 낮게 유지되었다. 장경사 이중 성벽: 계획이 미시행되어, 계곡의 복잡한 지형에 단일 성벽으로만 방어해야 했다. 군량창고: 6개월분(180일분) 비축이 계획되었으나, 겨우 50일분만 저장 가능하게 축소되었다. 암문: 6개소에서 4개소로 축소되었다. 그렇게 남한산성은 본성은 완성되었으되, 치명적인 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미완의 보루로 남았다. 조선의 유일한 보루는,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예산과 정치적 이유로 인해 스스로의 눈과 귀, 그리고 가장 튼튼해야 할 갑옷을 잃은 채 다가올 비극을 기다리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