碑石에 대하여... <性理大全書卷之二十 家禮三 喪禮條>
墳高四尺. 立小石碑於其前, 亦高四尺. 趺高尺許
[司馬溫公曰. 按令式墳碑石獸大小多寡雖各有品數. 然葬者當爲無窮之規. 後世見此等物, 安知其中不多藏金玉邪. 是皆無益於亡者, 而反有害. 故令式又有貴得同賤, 賤不得同貴之文. 然則不若不用之爲愈也].
[今按孔子防墓之封, 其崇四尺, 故取以爲法. 用司馬公說別立小碑, 但石須闊尺以上, 其厚居三之二, 圭首而刻其面, 如誌之蓋, 乃略述其世系名字, 行實而刻於其左, 轉及後右而周焉. 婦人則俟夫葬乃立, 面如夫亡誌蓋之刻云].
[司馬溫公曰. 古人有大勳德, 勒銘鍾鼎, 藏之宗廟. 其葬則有豊碑以下棺耳. 秦漢以來, 始命文士褒贊功德, 刻之於石, 亦謂之碑. 降及南朝, 復有銘誌, 埋之墓中. 使其人果大賢邪, 則名聞昭顯, 衆所稱頌, 流播終古, 不可掩蔽, 豈待碑誌始爲人知. 若其不賢也, 雖以巧言麗詞, 强加采飾, 功侔呂望, 德比仲尼, 徒取譏笑, 其誰肯信. 碑猶立於墓道, 人得見之. 誌乃藏於壙中, 自非開發莫之睹也. 隋文帝子秦王俊薨, 府僚請立碑. 帝曰, 欲求名, 一卷史書足矣, 何用碑爲, 徒與人作鎭石耳. 此實語也. 今旣不能免, 依其誌文, 但可直敍鄕里世家官簿始終而已. 季札墓前有石, 世稱孔子所篆, 云嗚呼有吳延陵季子之墓. 豈在多言, 然後인知其賢也. 今但刻姓名於墓前, 人自知之耳].
봉분의 높이는 4자이다. 그 (묘)앞에 작은 비석을... 세우는데 역시 높이는 4자이다. 받침대의 높이는 1자 정도로 한다.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살펴보니 법식에 봉분과 비석과 석수의 크고 작음과 많고 적음에 각각 품수가 있으나 장사를 지내는 자는 마땅히 무궁한 법규를 삼고 있다. 후세에 이런 물건을 어찌 그 속에 금과 옥이 많이 간직되지 않았음을 알겠는가. 이것은 모두 죽은 사람에게 이롭지 못하고 도리어 해가 된다. 그러므로 법식에도 신분이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과 같게 하여도,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과 같이 할 수 없다는 문장이 있다. 그렇다면 쓰지 않아서 좋은 것만 못하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니 공자가 방묘에 봉분을 할 때에 높이가 4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취하여 법으로 삼고 사마공의 말대로 작은 비석을 별도로 세우게 하였는데 다만 돌의 너비가 1자 이상이며 그 두께는 3분의 2가 되게 하였다. 머리는 약간 뾰족하게 하고 그 앞면은 지석의 덮개와 같이 새긴다. 이에 그 세계와 이름과 자와 실행을 간략히 기술하여 그 왼쪽에 새기되 돌아 가면서 뒷면과 오른쪽까지 두루 새긴다. 부인이면 남편의 장사를 기다렸다가 이에 비석을 세우되 앞면은 남편의 지석 덮개처럼 새긴다. <註; 釋文中 청색부분은 주자가례의 번역을 따랐으나, 天圓地方의 原理와 다르고 또 [圭]는 [上圓下方의 瑞玉]이다.>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큰 공훈과 덕행이 있으면 종과 정에 명을 새겨 종묘에 보관하였다. 그들을 장사지낼 때는 풍비를 가지고 하관하였다. 진한이래에 비로소 문사에게 명하여 공덕을 기려 돌에 새기니 이것을 비라고 하였다. 이후 남조에 이르러 다시 명과 지석을 묘속에 묻었다. 그 사람이 과연 크게 어질었다면 명성과 소문이 밝게 드러나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고 널리 알려져 영원히 퍼져서 덮어 가리지 못할 것이다. 어찌 비석과 지석을 기다리어 비로소 사람들에게 알려지겠는가. 만약 그가 어질지 못하였다면 비록 교묘한 말과 아름다운 글로 억지로 더하고 꾸며서 공은 태공망과 비길만 하고 덕은 공자와 견줄만 하다고 해도 다만 기롱하고 비웃을 것이니 그 누가 믿으려 할 것인가. 비석은 오히려 묘도에 세워 사람들이 볼 수 있으나 지석은 묘속에 묻어서 스스로 파내지 않으면 아무도 보지 못한다.
수나라 문제의 아들인 진왕 준이 죽자 관료들이 비석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문제가 말하기를 “명성을 구하고자 한다면 한 권의 사서면 족하다. 비석을 무엇에 쓰겠는가. 한갓 사람들에게 받침돌을 만들어 줄 뿐이다.” 하였다. 이것은 실질적인 말이다. 지금 이미 그렇게 하는 것을 면할 수 없다면 거기에 새기는 글은 다만 향리와 세가와 관직을 써넣으면 된다. 계찰의 묘앞에는 비석이 있는데 세상에서 공자가 “아아, 오나라 연릉 계자의 묘”라 썼다고 하였다. 어찌 많은 말을 적은 후에야 사람들이 그가 훌륭하였다고 하겠는가. 지금은 다만 묘앞에 성명만을 새겨 놓아도 사람들이 절로 알 것이다.” 하였다. [終].
출처: 난석재예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