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1월 30일 새벽. 남한산성 서문이 열렸다. 45일 만이었다. 인조가 곤룡포를 벗었다. 왕복 대신 남색 옷을 입었다. 항복하는 자의 옷이었다. "전하..." 최명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인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타지도 않았다. 걸어서 나갔다. 뒤를 따라 백관들이 나왔다. 모두 남색 옷. 죄인의 옷. 김상헌은 나오지 않았다. 방에 틀어박혀 통곡했다. "차라리 죽겠다!" 성문을 나서는 순간, 인조는 뒤를 돌아봤다. 남한산성. 45일을 버틴 그곳. 미완성의 성벽. 낮은 여장. 벌봉에 올라간 청군의 홍이포. '우리는... 준비되지 않았었다...' 행렬이 움직였다. 삼전도를 향해. 한양에서 남쪽으로 10리. 한강가. 삼전도. 그곳에 청 태종 홍타이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길은 멀었다. 눈이 쌓여 있었다. 차가웠다. 인조는 걸었다. 왕이, 맨발로, 눈길을. 신하들도 걸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백성들이 길가에서 보고 있었다. "저분이... 우리 임금님이신가..." "남색 옷을... 죄인처럼..." "오랑캐에게 항복하신다..."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한 노인이 땅에 엎드려 통곡했다. "전하! 전하!" 인조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삼전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단이 만들어져 있었다. 수항단(受降壇). 항복을 받는 단. 3층으로 쌓아올린 단. 맨 위에 청 태종의 자리가 있었다. 단 앞에는 비석이 세워질 자리가 있었다. 대청황제공덕비. 청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 '저 비석에... 우리의 치욕이 새겨질 것이다...' 청군들이 도열해 있었다. 수만 명. 그들의 눈빛은 승리자의 것이었다. 홍타이지가 단 위에 앉아 있었다. 황금빛 용포. 황제의 복장. 인조는 단 아래에 섰다. 남색 죄인복. 예부상서가 나와 외쳤다. "조선 국왕, 무릎 꿇어라!" 인조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무릎 꿇으라!" 최명길이 속삭였다. "전하... 이미 결정하신 일입니다..." 인조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린 것 같았다. 조선의 자존심이 부서지는 소리. 뒤에 있던 신하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백 명이 넘는 관리들. 다들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흘렸다. 홍타이지가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선 국왕이여, 너의 죄를 아는가?" 통역이 전달했다. 인조는 대답해야 했다. "...알고 있나이다." "무슨 죄인가?" "대청을 거역한 죄입니다." "그래, 너는 우리 대청을 거역했다. 형제의 맹약을 저버렸다. 명나라 편을 들었다." 인조는 고개를 더 숙였다. "이제 너는 어찌하겠는가?" "용서를 구하나이다." "용서?" 홍타이지가 웃었다. "용서를 받으려면 예를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예부상서가 다시 외쳤다.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라!" 삼배구고두례. 세 번 절하고, 매번 세 번씩 머리를 조아려, 총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 청 황제에게만 하는 최고의 예. 인조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것이... 내 운명인가...' "첫 번째 절!" 인조는 허리를 굽혔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온 세상이 보고 있었다. 청군들, 조선 신하들, 멀리 서 있는 백성들. 인조은 이마를 땅에 댔다. "하나!" 땅이 차갑고 딱딱했다. "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셋!" 첫 번째 절이 끝났다. 뒤에서 신하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 절!" 인조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는 눈물이 났다. 참을 수 없었다. "하나!" '소현아... 미안하구나... 아비가 이 지경을...' "둘!" '봉림아... 너희를 지키지 못했다...' "셋!" '백성들아... 용서하라...' 두 번째 절이 끝났다. 홍타이지는 만족스럽게 보고 있었다. "세 번째 절!" 인조는 마지막 절을 했다. "하나!" 이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텅 비었다. "둘!" 왕으로서의 자존심, 남자로서의 체면, 인간으로서의 존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셋!" 끝났다. 인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냥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홍타이지가 말했다. "좋다. 너의 충성을 받아들이겠다." 인조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신하들은 모두 통곡했다. "오호통재라!" "이 무슨 치욕이냐!" 최명길도 울었다. 김류도 울었다. 이시백도 울었다. 적을 향해 칼을 휘두르던 무신들이, 명분을 외치던 유신들이, 모두가 무릎 꿇고 울었다. 멀리서 보던 백성들도 울었다. "우리 임금께서... 저렇게..." "오랑캐에게... 저런 수모를..." 한 젊은이가 주먹을 쥐었다. "우리가... 우리가 이렇게 약했단 말인가..." 조선은 그날, 무릎을 꿇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