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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피휘 유래2021-08-24 14:21
작성자 Level 10

피휘(避諱)란 말과 글에서 군주나 선대의 이름에 사용된 글자를 피하는 관습이다. 피휘는 경우에 따라서 글자뿐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습은 고대 중국에서 비롯하여 한국, 일본 등 주변의 한자 문화권에 전파되었고 오랫동안 행해졌다. 피휘의 관습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으로, 자나 호와 같이 별명을 붙여 부르던 풍습과도 연관이 있었다.

피휘는 중국에서 시작된 특유한 금기성의 습속이었다. "휘(諱)"라는 것은 직접 부르거나 쓸 수 없는 이름을 의미하고, 예전엔 군주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신하나 아들이 군주나 아버지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다른 글자나 음으로 대체하는데서 시작하였다. 그 후에 피휘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예전 왕조시대에 여러 방면에서 적용되었다.

피휘가 점차 확대되어 사용되면서, 피휘의 종류에는 국휘(國諱), 가휘(家諱), 성인휘(聖人諱), 원휘(怨諱) 까지 등장하였다. 국휘는 군주의 이름을 피하는 것으로, 보통 황제는 7대 위, 왕은 5대 위의 통치자까지 그 이름을 피했다. 가휘는 집안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고, 성인휘는 성인의 이름을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휘(怨諱)는 원수지간인 사람의 이름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홍루몽 극중의 임대옥

<홍루몽(紅樓夢)>에 나오는 임대옥(林黛玉)은 가정교사인 가우촌(賈雨村)을 따라 글을 읽을 때, "민(敏)"자만 나오면 모두 "밀(密)"로 읽고, 글을 쓸 때도 민(敏)자는 반드시 한 두획을 줄여서 쓰곤 하여,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다 가우촌이 골동상인 냉자흥으로부터 임대옥의 모친의 이름이 "가민(賈敏)"이었다는 것을 알고는 왜 그런지 깨닫게 된다. 원래 그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피휘한 것이었다.

피휘의 습속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몇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진(秦)나라때부터 시작하였다는 설이다. 진원(陳垣)의 <사휘거례(史諱擧例)> 권팔 <역조휘례>에는 가장 최초의 피휘 사례로, 진시황의 이름이 정(政)이므로 달력의 "정월(正月)"을 "단월(端月)"로 고쳐 불렀고, 진시황의 부친의 이름이 자초(子楚)이므로, 지명중에서 "초(楚)"는 전부 "형(荊)"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는 춘추(春秋)시대부터 시작하였다는 설이 있다. <좌전, 환공6년>의 기재에 따르면, 진희후의 이름이 사도(司徒)이고, 송무공의 이름이 사공(司空)이고, 노헌공의 이름이 구(具)이고, 노무공의 이름이 오(敖)였다. 피휘의 습속으로, 진나라는 사도라는 관직을 없애서 중군으로 부르고, 송나라는 사공이라는 관직을 없애고 사성이라고 하였으며, 노나라에서는 구, 오라는 이름을 가진 두개의 산 이름도 바꾸었다.

시사 창아(원래는 항아)

셋째는 서주(西周)때부터 시작하였다라고 한다. 주나라 사람들은 신을 섬기는데 피휘하였고, 이름은 죽고나면 피휘하였다. <예기, 단궁하>에는 "卒哭而諱, 生事畢而鬼事始也"(죽고나서 곡을 하고 나면 피휘하였다. 산 사람의 일이 끝나면 귀신의 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은 직접 불렀지만, 사람이 죽은 후에는 그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원래는 죽은 사람에게만 피휘하던 습속이 점점 발전하여 살아있는 사람까지 피휘하는 것으로 변모하였다. 단, 이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주 여왕의 이름이 호(胡)인데, 주 희왕의 이름이 호제(胡齊)이고, 주 목왕의 이름이 만(滿)인데, 주 양왕때 종실의 이름이 "왕손만(王孫滿)"이 있다는 것을 들어, 서주시대에는 피휘가 사실상 완벽하게 존재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24절기중의 하나인 경칩(원래는 계칩)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피휘의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한 고조의 이름은 유방(劉邦)이었다. 방(邦)은 당시에 국(國)으로 바꿔 기재하였다. <논어>에 "何必去父母之邦"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한나라의 석경에서는 "何必去父母之國"으로 바꿔서 썼다.

2. 한 문제의 이름은 유항(劉恒)이었다. 이로 인하여 한나라 때 항산(恒山)은 상산(常山)으로, 달에 산다는 항아(姮娥)는 상아(嫦娥)로 바꿔 불렀다.

3. 동한의 개국황제 광무제의 이름은 유수(劉秀)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수재(秀才)를 무재(茂才)로 불렀다.

4. 한 명제의 이름은 유장(劉庄)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장자(庄子)는 엄자(嚴子)로 바꿔 불렀다. 뿐만아니라 당시 장(庄)씨는 전부 엄(嚴)씨로 성을 바꾸었다.

당 태종때는 절세가인을 절대가인으로 불렀다

5. 한 경제의 이름은 유계(劉啓)였다. 이로 인하여 24절기중 원래 계칩(啓蟄)으로 불리던 절기는 경칩(驚蟄)으로 바뀌게 되었다.

6.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민"자를 피하기 위하여, 육부(六部)중 삼국시대부터 수나라때까지 탁지부(度支部), 민부(民部)라고 불리던 부서를 호부(戶部)로 개칭하였다. 또한 이세민(李世民)의 "세"자를 피하기 위해 절세가인(絶世佳人)을 절대가인(絶代佳人)으로 고쳐 불렀다.

7.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자신의 성씨인 이(李)와 소리가 같은 이(鯉: 잉어)는 먹지도 못하게 하고 글로 쓰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잉어를 이(鯉) 대신에 적선공(赤鮮公: 붉은 물고기공)이라고 고쳐 썼다.

8.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 세(世)를 피하려다 보니, 사서 수서(隋書)를 편찬할 때 왕세충(王世充)을 왕 충(王 充)이라고 하여 "세"자를 공백으로 남겨 놓았고, 이 때문에 전한의 왕충(王充)과 혼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한 이세적(李世勣)은 "세"자를 뺀 이적(李勣)으로 개명하였다.

당 태종때는 잉어를 적선공이라 불렀다

9. 송나라때 재상 문언박(文彦博)의 원래 조상의 성씨는 경(敬)이었다. 그런데 후진(後晋) 고조의 이름이 석경당(石敬塘)이므로 피휘하여 "文"으로 성을 바꾸었다. 이후 후한이 들어서면서 다시 성을 "경"으로 회복하였다. 그러다 송나라가 들어선 후 송 태조 조광윤의 조부인 조경(趙敬)의 이름을 피휘하여 다시 문(文)으로 성을 바꾸었다.

10. 송 휘종은 용(龍), 천(天), 군(君), 옥(玉), 제(帝), 상(上), 성(聖), 황(皇)의 여덟 자로 이름이나 자호를 짓지 못하게 하였고, 이미 지은 이름과 자호도 고치게 하였다.

11. 청조 강희제의 이름은 현엽(玄燁)이었다. 이로 인하여 현이나 엽이라는 글자를 쓸 때는 반드시 마지막 한 획을 덜 써야 했다. 그리하여 천자문에서 처음 시작하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이 청나라때에는 천지원황(天地元黃)으로, 또한 자금성의 북문은 원래 현무문(玄武門)이었는데, 강희제 이래로 이름이 신무문(神武門)으로 바뀌었다.

강희제의 이름을 피휘하여, 신무문으로 바꿔 개명한 자금성 북문

12. 청조 옹정제(雍正帝)때 예부시랑인 사사정(査嗣廷: 무협 소설가 김용의 선조)은 강서성에서 과거 시험문제를 내면서, <대학, 우전지2장, 석신민>에 나오는 "유민소지(維民所止)"를 시험문제로 제출하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유민소지의 유(維)와 지(止)가 옹정(雍正)의 머리를 자른 글자라고 옹정제에게 고변하였다. 옹정제는 이를 듣고는, 사사정의 직위를 박탈하고 죄를 물었으며, 결국 사사정은 옥사한 후 육시시중의 벌을 받게 된다.

13. 옹정제는 성인인 공자의 이름인 구(丘)를 피휘하기 위하여 새로 글자를 만들어 구(邱)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구(丘)로 쓰던 성씨는 모두 구(邱)로 바꾸게 하였다.

14. 1777년 청나라에서 왕석후(王錫侯)라는 학자가 건륭제의 이름을 책에 쓴 죄로 본인을 포함하여 관련된 자 수십 명이 처형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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