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문화 게시판

제목조선시대 여성의 지위와 족보 2021-08-24 20:16
작성자 Level 10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이언직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신사임당(1504-1551)은 결혼 후 친정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친정 강릉에서 4남 3녀를 낳고 20년 살다가 시집 파주에서 10년 살고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안견 다음 간다고 할 정도로’(어숙권, <페관잡기>) 큰 화가가 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언직 보다 70년 늦게 강릉에서 태어난 여자가 허초희(1563-1589)입니다. 신사임당이 죽고 12년 뒤 태어난 허난설헌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호가 난설헌이기 때문에 허난설헌으로 더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녀는 중국에까지 알려진 조선의 시인이었지만 시집에서 구박을 받고 스트레스에 병을 얻어 일찍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바뀐 배경에는 임진왜란이 있습니다. 왜란이 끝나고 황폐화된 상황에서 유산을 장남위주로 분배하고 딸의 몫이 없어지자 딸들은 결혼하면 시집으로 가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가부장제는 더욱 강화되고 여성의 삶은 각박해졌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의 지위

세종이 전격 실시한 친영례가 임진왜란 즈음에 사대부에 퍼져나갔습니다. 16세기 후반에는 어지간한 양반집은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며느리를 데려오는 시집살이로 풍속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모계사회가 공식 종언됐던 것입니다. 혈통(血統)보다 종통(宗統)이 우선하게 된 것입니다. 종통이 끊기면 양자를 들여서 잇게 했습니다. 형제자매, 사위가 돌아가며 치르던 제사는 맏형이 단독으로 치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재혼한 여자가 낳은 자식은 과거 응시가 금지됐습니다. 그래서 상처한 사대부는 자식들 미래를 위해 과부 대신 미혼 처녀와 결혼하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종가, 종부, 족보는 모두 이 무렵에 탄생한 개념들이다.

참고로 <동의보감>에서 여성의 결혼적령기를 14세 남자는 16세로 정했으며, 남자가 20세가 넘어도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부모가 벌을 받았어요. 나라에서는 가난하여 늦게까지 결혼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폐백할 돈을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인구를 늘려 생산에 힘쓰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그만큼 결혼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세보를 강조한 조선형 족보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씨성별 족보가 15세기 조선 왕조개창 이후에 등장했고, 17세기가 되면 부계 친족으로 구성된 한국형 족보로 정착된답니다. 족보 하나가 일반적인 시스템으로 정착되는 데 생각보다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 거예요. 통상 족보라고 부르긴 하지만 당시에는 ‘세보(世譜)’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풍양조씨세보’ 식으로 불렸는데 우리나라의 족보가 ‘본관-성씨-세보’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중국에서는 ‘종보(宗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지역을 매개로 한 종족 구성원 사이의 결속을 강조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일본이나 베트남, 류큐 등은 가게 계승자 정도만을 정리하기 때문에 ‘가보(家譜)’라는 말을 많이 썼답니다.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정에 따라 외가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모습은 조선으로 들어오면서는 찾아보기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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